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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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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강진흔(姜晉昕, 1592년 4월 12일(음력 3월 1일) ~ 1637년 10월 25일(음력 9월 21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입니다. 본관은 진주이며, 강희맹의 6대손입니다.
생애 및 업적:


  •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재위 1608~1623) 대의 문란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하였습니다.
  •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충청수사로서 충청수영의 배와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출동하였습니다.
  • 1637년(인조 15년) 1월 22일,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 갑곶진으로 침입하자, 휘하의 병선 7척과 수군 200명을 이끌고 적선 3척을 격침시키는 등 분전하였습니다.
  • 그러나 강진흔이 탄 전선도 포탄을 맞아 피해를 입었고, 광성진에서 온 장신의 수군이 후퇴하면서 갑곶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 강진흔은 장신에게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라며 질타했지만, 장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 방어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체포되어 국문을 받은 후 참형을 당했습니다.

사후 평가:

  • 강화도 함락 당시 대군(大君) 신분으로 강화도에 있었던 효종은 강진흔에 대해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는 억울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 함께 처형될 위기에 놓였던 김경징은 강진흔에게 "울어도 면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강진흔은 "비록 울어서 면한다 해도 (울지 않겠소)"하며 태연하게 보검을 사형 집행인에게 주며 "이것은 예리한 칼이니, 이것으로 빨리 나를 베고 너는 가져가거라"라고 말하며 죽음에 임박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 충청수영의 군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치 친척을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고 합니다.

참고 자료:

  • 강진흔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A7%84%ED%9D%94](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A7%84%ED%9D%94)
  • 강진흔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http://bory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boryeong&dataType=01&contents_id=GC00101036](http://bory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boryeong&dataType=01&contents_id=GC00101036)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9999_1_0000184](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9999_1_0000184)


강진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강진흔
한자 표기姜晉昕
출생일1592년 4월 12일 (음력 3월 1일)
사망일1637년 10월 25일 (음력 9월 21일)
향년46세
사망 원인참형
직업충청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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