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국지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국지성은 고창국의 군주이다. 640년 당나라의 공격으로 고창국이 멸망하자 항복하고 좌무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금성군공에 봉해졌다. 649년 이전에 사망하였고, 당 태종 사후 소릉 현궐에 석상이 놓여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국씨 왕조의 왕 - 국건고
  • 국씨 왕조의 왕 - 국백아
    국백아는 수나라에 조공하고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동행한 고창국의 왕으로, 정변으로 왕위를 찬탈당했다가 복위하여 연호를 중광으로 고쳤으며 사후 헌문왕으로 추증되었다.
국지성
기본 정보
이름국지성
출생미상
사망640년
신분고창국의 왕
재위 기간640년
이전 국왕국문태
후임 국왕없음 (고창 멸망)
생애
즉위640년 국문태 사후 즉위
최후당나라의 공격으로 고창이 멸망, 국지성은 당나라에 항복

2. 생애

640년, 아버지 국문태당나라의 침공 소식에 놀라 병사하자 고창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즉위 직후 당나라 장수 후군집이 이끄는 군대에 수도가 포위되자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창국은 멸망하였고, 국지성은 고창국의 대신, 호족들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벼슬과 금성군공(金城郡公) 작위를 받았다. 649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당 태종 사후, 그의 석상이 소릉(昭陵) 현궐(玄闕)에 세워진 여러 외번 군주들의 석상 대열에 포함되었다.

2. 1. 고창국 멸망

640년, 당나라후군집을 장수로 삼아 고창국을 공격했다. 당나라 군대가 적구(磧口)에 이르자 당시 고창국 왕이었던 국문태는 크게 놀라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인 국지성이 왕위를 계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군집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수도를 포위하자, 국지성은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고창국은 멸망하였고, 고창국의 3개 주, 5개 현, 22개 성과 주민 8천 호, 3만 명이 당나라에 편입되었다.

2. 2. 당나라에서의 삶

640년, 당나라후군집을 보내 고창을 공격하자, 부왕 국문태가 급사하고 국지성이 왕위를 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군집이 성을 포위하자 국지성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창국은 멸망하였고, 3주 5현 22성, 8천 호, 3만 명의 인구가 당나라에 편입되었다.

국지성은 고창국의 대신, 호족들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국지성에게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벼슬을 내리고 금성군공(金城郡公)에 봉했다. 그는 649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 태종 사후, 국지성의 석상이 소릉(昭陵) 현궐(玄闕)에 세워진 여러 외번(外藩) 군주들의 석상 대열에 포함되었다. 이는 당시 당나라가 주변국 군주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