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바타케 노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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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바타케 노리토모는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으로, 이세 국사였다. 1441년, 19세에 이세 국사가 되었고, 아시카가 요시노리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가키의 난이 일어나자 아카마츠 노리야스를 보호하지 않고 막부에 항복했다. 오닌의 난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마사로부터 상락을 허가받지 못하고 이세로 망명한 아시카가 요시미를 보호했다. 1471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기타바타케 마사토모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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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마사사토는 무로마치 시대 이세 기타바타케 가문의 당주로, 북이세 진출 실패 후 출가하여 무게이 잇포라 칭하고 궁도, 마술, 와카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 기타바타케씨 - 오다 노부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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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시대 공경인 니조 요시모토는 간파쿠와 셋쇼를 역임하며 조정의 안정과 권위 회복에 힘썼고, 렌가에 뛰어났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쓰와의 관계를 통해 무가 정권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기타바타케 노리토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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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기타바타케 가문(北畠家) |
이름 |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教具) |
시대 |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중기 |
출생 | 오에이(応永) 30년 (1423년) |
사망 | 분메이(文明) 3년 3월 23일 (1471년 4월 13일) |
관위 | 정2위(正二位), 권대납언(大納言) |
가문 | 기타바타케 가문(北畠家) |
아버지 | 기타바타케 미쓰마사(北畠満雅) |
자녀 | 마사토모(마사사토)(政具(政郷)) 오카와치 친사토(大河内親郷) |
가문 당주 정보 | |
직책 | 이세 기타바타케 가문 당주 |
대수 | 4 |
임기 시작 | 1429년 |
임기 종료 | 1471년 |
선임자 | 기타바타케 미쓰마사 |
후임자 | 기타바타케 마사사토 |
2. 생애
분안 5년(1448년) 나가노 씨와 영지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였다.
호토쿠 3년(1451년) 정사위, 산기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종삼위에 서임되었고, 교토쿠 2년(1453년) 정삼위에 서임되었다. 고쇼 2년(1456년) 3월 권츄나곤에 서임되었으며, 초로쿠 2년(1458년) 종이위에 서임되었다.
분메이 2년(1470년) 북상하여, 미에군・아사케군에도 진출했다.
분메이 3년(1471년) 3월 23일, 이세에서 사망했다. 향년 49세. 사인은 종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임은 적남인 마사토모가 이었다.
2.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는 7세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오코치 아키마사가 정무를 대행했다.가키 원년(1441년) 19세에 이세 국사가 되어,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로부터 한 글자를 받아 '''노리토모'''라고 이름을 지었다. 같은 해, 요시노리가 암살당하는 사건(가키의 난)이 일어나자, 그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이세국으로 도망쳐 온 아카마츠 노리야스[1]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살로 몰아, 막부에 항복을 맹세했다.
2. 2. 이세 국司 취임과 가키의 난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노리토모는 7세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오코치 아키마사가 정무를 대행했다.가키 원년(1441년) 19세에 이세 국사가 되어,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서 한 글자를 받아 '''노리토모'''로 이름을 지었다. 같은 해 요시노리가 암살당하는 사건(가키의 난)이 일어나자, 이세국으로 도망쳐 온 주모자 중 한 명인 아카마츠 노리야스[1]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살로 몰아, 막부에 항복을 맹세했다.
2. 3. 나가노 씨와의 분쟁
분안 5년(1448년)에 나가노 씨와 영지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였다.[1]2. 4. 중앙 정계 진출
1441년(가키 원년), 19세에 이세 국사가 되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서 한 글자를 받아 '''노리토모'''라 이름 지었다. 같은 해, 요시노리가 암살당하는 사건(가키의 난)이 발생하자,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이세국으로 도망쳐 온 아카마츠 노리야스[1]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살로 몰아, 막부에 항복을 맹세했다.1451년(호토쿠 3년) 정사위, 산기에 서임되었다. 이듬해(1452년) 정월에는 종삼위에 서임되었고, 1453년(교토쿠 2년)에는 정삼위에 서임되었다. 1456년(고쇼 2년) 3월에는 권츄나곤에 서임되었으며, 1458년(초로쿠 2년)에는 종이위에 서임되었다.
1467년(오닌 원년) 오닌의 난에서는 기타바타케 가문은 동군에 속했지만, 노리토모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서 상락을 허가받지 못하고 야마토국초고지에 머물면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재경 중이던 일족 키즈쿠리 노리치카를 통해 이세로 망명해 온 아시카가 요시미를 보호하기 위해 9월 6일 초고지를 떠나 이세에 어소를 지었다.[2]
1468년(오닌 2년) 2월, 당시 이세 수호는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였기 때문에, 동군의 토키 마사야스가 새롭게 이세 수호로 임명되어 이세로 쳐들어왔다. 같은 해 4월, 상락 칙서가 도착하여 아시카가 요시미는 단생을 떠났다. 요시미와 노리토모가 히라오에 도착하자 이세, 이가의 국인들이 모두 시후했지만, 토키 마사야스는 이에 반하여 하야시자키, 와카마츠, 야나기, 쿠스하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2] 1469년(분메이 원년) 8월에 권다이나곤에 서임되었다.
2. 5. 오닌의 난과 아시카가 요시미 보호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자 기타바타케 가문은 동군에 속했다. 그러나 노리토모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서 상락 허가를 받지 못하고 야마토국 초고지에 머물며 교토에서의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노리토모는 교토에 있던 일족 키즈쿠리 노리치카를 통해 이세로 망명해 온 아시카가 요시미를 보호하기 위해 9월 6일 초고지를 떠나 이세에 거처를 마련했다.[2]1468년 2월, 당시 이세 슈고는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였기에, 동군의 토키 마사야스가 새롭게 이세 슈고로 임명되어 이세로 쳐들어왔다. 같은 해 4월, 상락 칙서가 도착하여 아시카가 요시미는 단생을 떠났다. 요시미와 노리토모가 히라오에 도착하자 이세, 이가의 국인들이 모두 따랐지만, 토키 마사야스는 이에 반발하여 하야시자키, 와카마츠, 야나기, 쿠스하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2]
2. 6. 도키 마사야스와의 전투
1468년 2월, 이세 수호는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였기 때문에, 동군의 토키 마사야스가 새롭게 이세 수호로 임명되어 이세로 쳐들어왔다. 같은 해 4월, 상락의 칙서가 도착했기 때문에, 아시카가 요시미는 단생을 떠났다. 요시미와 노리토모가 히라오에 도착하자 이세, 이가의 국인들이 모두 시후했지만, 토키 마사야스는 이에 반하여 하야시자키・와카마츠・야나기・쿠스하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2]. 1469년 8월에 권다이나곤에 서임되었다.1470년에는 북상하여, 미에군・아사케군에도 진출했다.
2. 7. 북진과 죽음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노리토모는 7세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오코치 아키마사가 정무를 대행했다.가키 원년(1441년) 19세에 이세 국사가 되어,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서 한 글자를 받아 '''노리토모'''로 이름을 지었다. 같은 해, 요시노리가 암살당하는 사건(가키의 난)이 일어나자, 그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이세국으로 도망쳐 온 아카마츠 노리야스[1]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살로 몰아 막부에 항복을 맹세했다.
분안 5년(1448년) 나가노 씨와 소령을 둘러싸고 전투를 벌였다.
호토쿠 3년(1451년) 정사위, 산기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종삼위에 서임되었고, 교토쿠 2년(1453년) 정삼위에 서임되었다. 고쇼 2년(1456년) 3월 권츄나곤에 서임되었으며, 초로쿠 2년(1458년) 종이위에 서임되었다.
오닌 원년(1467년) 오닌의 난에서는 기타바타케 가는 동군에 속했지만, 노리토모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서 상락을 허가받지 못하고 야마토국초고지에 머물면서 락중의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재경 중이던 일족 키즈쿠리 노리치카를 통해 이세로 망명해 온 아시카가 요시미를 보호하기 위해, 9월 6일 초고지를 떠나 이세에 어소를 지었다[2].
오닌 2년(1468년) 2월, 이세 수호는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였기 때문에, 동군의 토키 마사야스가 새롭게 이세 수호로 임명되어 이세로 쳐들어왔다. 같은 해 4월, 상락의 칙서가 도착했기 때문에 아시카가 요시미는 단생을 떠났다. 요시미와 노리토모가 히라오에 도착하자 이세, 이가의 국인들이 모두 시후했지만, 토키 마사야스는 이에 반했기 때문에 하야시자키・와카마츠・야나기・쿠스하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2]. 분메이 원년(1469년) 8월 권다이나곤에 서임되었다.
분메이 2년(1470년) 북상하여, 미에군・아사케군에도 진출했다.
분메이 3년(1471년) 3월 23일, 이세에서 사망했다. 향년 49세. 사인은 종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임은 적남인 마사토모가 이었다.
참조
[1]
문서
大河内顕雅の娘(教具の従妹)を正室としており、縁戚関係にあった。教具は教康を3日ほど城内に滞在させたが、やがて厄介者として馬場城に身柄を移して(『赤松盛衰記』より)、匿うことを拒絶。これに絶望した教康は同年9月28日に同地にて自害。同じく応永30年(1423年)生まれの19歳であった。
[2]
서적
応仁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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