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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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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창준(金昌俊, 1890년 5월 23일 ~ 1959년 9월 29일)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습니다.
생애:


  • 1890년 5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에서 출생했습니다.
  •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일상리 교회가 설립한 야소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 1908년 미국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e)에게 세례를 받고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1년간 수학했습니다.
  • 1917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1919년 3.1 운동 때 기독교 측 대표 중 한 명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1921년 가출옥 후 서울 감리회 중앙예배당을 중심으로 설교 운동을 했습니다.
  •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시작했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했습니다.
  •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 제2기 대의원 및 부의장을 역임했습니다.
  • 1959년 5월 7일 (혹은 9월 29일)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습니다.

주요 활동 및 업적:

  • 3.1 운동 참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평안도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기독교 사회주의 활동: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광복 후 남쪽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창당하여 활동했습니다.
  • 월북 후 활동: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상임위원회 위원, 부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 저술 활동: 3.1 운동 당시 상황과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육필 회고록을 남겼습니다.


김창준은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남한에서는 월북 행적으로 인해 금기시되기도 했지만, 그의 독립운동 업적과 3.1 운동 당시의 회고록 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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