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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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우펜 전투는 1339년 베른과 동맹 세력이 프리부르-합스부르크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베른의 확장에 따른 주변 봉건 영주와의 갈등,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개입으로 발발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베른은 스위스 연방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후 스위스 연방의 성장에 기여했다. 라우펜 전투는 중세 후기 중무장 기병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스위스 십자가를 아군 식별 표식으로 처음 사용한 전투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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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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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라우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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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339년 6월 21일 |
장소 | 베른주 라우펜 (46) |
원인 |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고뉴 공국의 라우펜 포위 |
결과 | 베른의 승리, 베른-스위스 관계 강화로 1353년 베른의 스위스 연방 영구 가입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베른 및 동맹군 졸로투른 "[[파일:CHE Murten Flag.svg|15px]] 무르텐" "[[파일:CHE Payerne Flag.svg|15px]] 파예른" "[[파일:CHE Burgdorf Flag.svg|15px]] 부르크도르프" "[[파일:CHE Thun Flag.svg|15px]] 툰" "[[파일:CHE Oberhasli Flag.svg|15px]] 하슬리" "[[파일:CHE Wimmis Flag.svg|15px]] 바이센부르크 영주" "구스위스 연방:" |
교전국 2 | 프리부르 "[[파일:Flag of the Principality of Neuchâtel.svg|15px]] 뇌샤텔 백국" "[[파일:CHE Valangin Flag.svg|15px]] 발랑장" "[[파일:CHE Gruyères Flag.svg|15px]] 그뤼예르 백국" "[[파일:Flag of Savoie.svg|20px]] 사보이 백국" "[[파일:CHE Aarberg Flag.svg|15px]] 아르베르크 백국" "[[파일:CHE Nidau Flag.svg|15px]] 니다우 백국" "[[파일:CHE Montagny Flag.svg|15px]] 벨프-몬테나흐" "[[파일:Flag of the Roman Catholic Diocese of Basel.svg|15px]] 바젤 주교후국" "[[파일:Flag of Diocese of Sion.svg|15px]] 시옹 주교후국" "[[파일:Wappen Bistum Lausanne.png|15px]] 로잔 주교후국" "[[파일:Flag of Austria (1-1).svg|15px]] 오스트리아 공국 (참전 안 함)" "[[파일:Proposition Drapeau de Thurgovie (Septembre 1948).svg|15px]] 키부르크 백국"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루돌프 폰 에를라흐 |
지휘관 2 | 루돌프 3세 폰 니다우 제라르 드 발랑장 |
병력 1 | 삼림주에서 온 1,000명을 포함해 6,000명 |
병력 2 | 보병 16,000명, 기병 1,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1,000–1,500명 |
2. 배경
자유 제국 도시였던 베른은 이전에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지만, 이러한 확장은 인근 봉건 영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이웃 도시인 프리부르와의 경쟁을 심화시켰다. 베른은 1241년부터 프리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1277년에 프리부르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매각되었다.[7]
이후 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병대는 강력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보병은 장비가 허술하고 사기도 낮았다.[7]
이 군대는 라우펜 성을 포위하여 베른에 맞서기 시작했다. 베른은 이에 대응하여 6,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이 병력은 1323년 베른과 군사 동맹을 맺은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의 숲 지역 칸톤과 지멘탈, 바이센부르크, 오버하슬리 등 다른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7]
한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공작과 키부르크 백작은 아르가우에 군대를 집결시켜 동쪽에서 베른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라우펜으로 파견된 베른의 구원 부대는 베른 시장 요한 2세 폰 부벤베르크가 이끌지 않았고, 그는 혹시 모를 포위에 대비하여 도시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7]
2. 1. 베른과 프리부르의 경쟁
자유 제국 도시였던 베른은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다. 이러한 확장은 이 지역의 봉건 영주들에게 많은 비용을 들이게 했고, 이웃 도시인 프리부르와의 경쟁을 심화시켰다. 베른은 1241년부터 프리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프리부르는 1277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매각되었다.[7]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기병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기병은 강력한 병력이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보병의 상당수는 장비가 열악했고 사기가 저조했다.[7]
2. 2. 합스부르크 가문의 개입
자유 제국 도시였던 베른은 적대 행위 이전에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지만, 이러한 확장은 인근 봉건 영주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고, 이웃 도시인 프리부르와의 경쟁을 심화시켰다.[7] 1241년부터 프리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1277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매각되었다.[7]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기병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7] 기병은 강력한 병력이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보병의 상당수는 장비가 열악했고 사기가 저조했다.[7]
이 군대는 라우펜 성을 포위하여 베른에 맞섰다.[7] 베른은 포위를 풀기 위해 1323년에 군사 동맹을 맺은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의 숲 지역 칸톤과 기타 동맹국(지멘탈, 바이센부르크, 오버하슬리)의 지원을 받아 6,000명의 베른군을 소집했다.[7]
오스트리아 공작과 키부르크 백작은 아르가우에 병력을 집결하여 동쪽에서 베른을 위협했다.[7] 이 때문에 라우펜으로 파견된 구원 부대는 베른의 시장 요한 2세 폰 부벤베르크가 이끌지 않았고, 그는 포위 가능성에 대비하여 도시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7]
2. 3. 반(反) 베른 동맹 결성
자유 제국 도시였던 베른은 이전에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지만, 이러한 확장은 인근 봉건 영주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고, 이웃 도시인 프리부르와의 경쟁을 심화시켰다.[7] 베른은 1241년부터 프리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프리부르는 1277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매각되었다.[7]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기병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7] 기병은 강력한 병력이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보병의 상당수는 장비가 열악했고 사기가 저조했다.[7]
이 군대는 라우펜 성을 포위하여 베른에 맞서기로 했다.[7] 베른은 포위를 풀기 위해 베른 출신 6,000명의 군대를 소집했으며, 이는 1323년에 베른과 군사 동맹을 맺은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의 숲 지역 칸톤과 기타 동맹국(지멘탈, 바이센부르크, 오버하슬리)의 지원을 받았다.[7]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공작과 키부르크 백작은 아르가우에 병력을 집결하여 동쪽에서 베른을 위협했다.[7] 이것이 아마도 라우펜으로 파견된 구원 부대가 베른의 시장 요한 2세 폰 부벤베르크가 이끌지 않은 이유일 것이며, 그는 가능한 포위에 대비하여 도시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7]
2. 4. 베른의 대응
자유 제국 도시였던 베른은 적대 행위 이전에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지만, 이러한 확장은 인근 봉건 영주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고, 이웃 도시인 프리부르와의 경쟁을 심화시켰다. 베른은 1241년부터 프리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프리부르는 1277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매각되었다.[7]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기병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기병은 강력한 병력이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보병의 상당수는 장비가 열악했고 사기가 저조했다.[7]
이 군대는 라우펜 성을 포위하여 베른에 맞서기로 했다. 베른은 포위를 풀기 위해 6,000명의 군대를 소집했으며, 이는 1323년에 베른과 군사 동맹을 맺은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의 숲 지역 칸톤과 기타 동맹국(지멘탈, 바이센부르크, 오버하슬리)의 지원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공작과 키부르크 백작은 아르가우에 병력을 집결하여 동쪽에서 베른을 위협했다. 이것이 아마도 라우펜으로 파견된 구원 부대가 베른의 시장 요한 2세 폰 부벤베르크가 이끌지 않은 이유일 것이며, 그는 가능한 포위에 대비하여 도시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2. 5. 합스부르크 군대의 움직임
프리부르는 뇌샤텔 백국, 사보이 백국, 바젤의 주교를 포함한 인근 봉건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루돌프 폰 니다우와 제라르 드 발랭의 지휘 아래 중기병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7] 기병은 강력한 병력이었지만, 프리부르 병력을 제외한 보병의 상당수는 장비가 열악했고 사기가 저조했다.이 군대는 라우펜 성을 포위하여 베른에 맞섰다. 베른은 포위를 풀기 위해 6,000명의 군대를 소집했으며, 이들은 1323년에 베른과 군사 동맹을 맺은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의 숲 지역 칸톤과 기타 동맹국(지멘탈, 바이센부르크, 오버하슬리)의 지원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공작과 키부르크 백작은 아르가우에 병력을 집결하여 동쪽에서 베른을 위협했다. 이것이 아마도 라우펜으로 파견된 구원 부대가 베른의 시장 요한 2세 폰 부벤베르크가 이끌지 않은 이유일 것이며, 그는 가능한 포위에 대비하여 도시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3. 전투
1339년 6월 21일, 베른 군은 라우펜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은 프라이부르크 포위망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라우펜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브람베르크 언덕에 군대를 배치하여 전투를 유도했다.
베른 군은 여러 개의 하우펜(Haufen, 보병 부대)으로 구성되었고,[19] 아마도 왼쪽에는 삼림주의 군대가 배치되었다.[20] 프라이부르크 군은 기병대를 선두로, 보병대를 후위로 하여 공격해왔다. 프라이부르크 기병대는 삼림주 분견대를 공격하여 전방위 방진인 "고슴도치(Igel)" 대형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프라이부르크 보병대는 언덕 위로 진격했고, 베른 군은 석궁병과 투석병으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베른 군 후방에서는 공황이 발생하여 많은 병사들이 도주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두 보병 부대가 충돌했고,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 군은 빠르게 패주했다. 특히 프라이부르크 파병대는 시장과 도시 기수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베른 군의 일부는 재편성하여 프라이부르크 기병대에 포위된 삼림주 군대를 구원하러 갔다. 이 과정에서 양측 기병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프라이부르크 기병대는 궤멸되었다. 니다우, 발랭긴 및 아르부르크 백작과 보의 루이 2세의 아들을 포함하여 최소 80명의 귀족이 전사했다.[21][22]
저녁이 되면서 추격은 제한되었지만, 베른 군은 라우펜으로 진군하여 승리를 축하했다.[23]
3. 1. 전장의 지형
베르네 군은 1339년 6월 21일 오후에 라우펜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은 프라이부르크 포위망을 공격하는 대신, 라우펜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브람베르크라는 언덕에 군대를 소집하여 적군이 와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베른의 진형은 하나 이상의 하우펜, 즉 민병으로 구성되었다.[19] 한쪽 측면, 아마도 왼쪽에는 삼림주의 군대가 서 있었다.[20]3. 2. 베른군의 전술
베른군은 6월 21일 오후 라우펜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은 프라이부르크 포위망을 공격하는 대신, 라우펜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브람베르크 언덕에 군대를 배치하여 적에게 전투를 걸었다. 베른군의 진형은 하나 이상의 하우펜(Haufen, 민병대)으로 구성되었다.[19] 한쪽 측면(아마도 왼쪽)에는 삼림주의 군대가 서 있었다.[20] 베른군의 도착은 프라이부르크군에게 포착되었고, 그들은 신속하게 무장하고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오후 늦게, 프라이부르크군은 공격을 개시했다.프라이부르크군은 기병대가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보병대가 따랐다. 포위 캠프에는 장비를 보호하고 600명 베른 수비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알 수 없는 수의 군대가 남았다. 기병 전위는 베른군을 위협하며 접근했고, 새로 기사 서임을 받은 많은 이들이 칼을 휘두르며 베른 전선 가까이에서 말을 탔지만, 베른군은 자리를 지켰다. 프라이부르크 보병대가 대형을 갖추자, 기병대는 돌격을 감행하여 삼림주 분견대와 접촉했고, 삼림주 분견대는 빠르게 고슴도치(Igel)라고 알려진 전방위 방진을 형성했다. 이 측면 공격을 피한 프라이부르크 보병은 언덕 위로 진격했다. 베른군은 석궁병과 투석병을 앞으로 내보내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프라이부르크군이 접근하자 빠르게 후퇴했다. 이로 인해 베른군 후방에 공황이 발생하여 많은 수(최대 2,000명)의 병사들이 브람베르크 뒤 숲으로 도주했다. 놀랍게도 나머지 군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두 보병 전열이 충돌했고,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군은 빠르게 무너져 보의 영지병이 이끄는 편대를 따라 라우펜으로 도주했다. 프라이부르크 파병대는 부르고마이스터(시장)와 시의 기수를 잃는 등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베른 군대의 일부는 뛰어난 통제력을 보이며 재편성한 후, 프라이부르크 기병대에 포위된 삼림주 군대를 구출하기 위해 행군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아마도 그날 가장 치열했을 것이다. 기병대는 이제 양쪽에서 싸우게 되었다. 짧고 격렬한 전투 끝에 기병대는 패주했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니다우, 발랭겐 및 아르부르크 백작[21]과 보의 루이 2세의 아들을 포함하여 최소 80명의 귀족이 전사했다.[22] 저녁이 다가오면서 추격은 제한되었지만, 베른군은 라우펜으로 진군하여 승리를 축하하고 감사 의식을 거행했다.[23]
3. 3. 프리부르-합스부르크 동맹군의 공격
베른 군은 1339년 6월 21일 오후 라우펜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은 프라이부르크 포위망을 공격하는 대신 라우펜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브람베르크 언덕에 군대를 소집하여 적이 와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베른 군의 진형은 하나 이상의 하우펜(민병)으로 구성되었다.[19] 한쪽 측면, 아마도 왼쪽에는 삼림주의 군대가 서 있었다.[20] 베른 군의 도착은 프라이부르크 군에 의해 주목되었고, 그들은 전투를 위해 신속하게 무장하고 배열했다. 오후 늦게, 그들은 공격을 시작했다.프라이부르크 군은 기병이 이끌었고, 그 뒤를 더 큰 규모의 보병 부대가 뒤따랐다. 장비를 보호하고 600명의 강력한 베른 수비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포위 캠프에는 알 수 없는 수의 군대가 남겨졌다. 기병 전위가 베른 군을 위협하기 위해 이동했고, 새로 기사 작위를 받은 많은 기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베른 전선 가까이에서 말을 탔지만, 베른 군대는 자리를 지켰다. 프라이부르크 보병대가 대형을 갖추자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하여 삼림주 분견대와 접촉했고, 이들은 빠르게 고슴도치(''Igel'')로 알려진 전방위 방진을 형성했다. 이 측면 공격을 피해 프라이부르크 보병은 언덕 위로 진격했다. 베른 군은 이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석궁병과 투석병을 앞으로 내보냈으나, 프라이부르크 군이 접근하면서 빠르게 후퇴했다. 이로 인해 베른 군 후방에 공황이 발생하여 많은 수(최대 2,000명)의 병사들이 브람베르크 뒤의 숲으로 도주했다.[11] 놀랍게도 나머지 군대는 확고했다. 두 보병 부대가 충돌했고,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 군은 재빨리 무너져 보의 영지병이 이끄는 편대를 따라 라우펜으로 달아났다. 프라이부르크 파병대는 부르고마이스터(시장)와 시의 기수를 잃는 등 특히 심한 고통을 겪었다.[13] 큰 통제력을 보인 베른 군의 일부는 재편성하여 프라이부르크 기병대에 포위된 삼림주 군대를 구출하기 위해 행군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아마도 그날 가장 치열했을 것이다. 기병대는 이제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짧은 유혈 투쟁 끝에 기병대는 패주했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니다우, 발랭긴 및 아르부르크 백작[21]과 보의 루이 2세의 아들을 포함하여 최소 80명의 귀족이 전사했다.[14][15] 저녁이 다가오면서 추격은 제한되었지만, 베른 군은 라우펜으로 진군하여 승리를 축하하고 감사 의식을 열었다.[16]
3. 4. 보병 전투의 전개
베른 군은 1339년 6월 21일 오후에 라우펜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프라이부르크 포위망을 공격하는 대신, 라우펜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브람베르크라는 언덕에 군대를 소집하여 적군이 와서 싸울 것을 도발했다. 베른의 진형은 하나 이상의 하우펜, 민병으로 구성되었다.[19] 한쪽 측면, 아마도 왼쪽에는 삼림주의 군대가 서 있었다.[20] 베른의 도착은 프라이부르크군(Freiburgers)에 의해 주목되었고, 그들은 전투를 위해 신속하게 무장하고 배열했다. 오후 늦게, 그들은 공격을 시작했다.프라이부르크군은 기병이 이끌었고, 그 뒤를 보병의 더 큰 부대가 뒤따랐다. 장비를 보호하고 600명의 강력한 베른 수비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포위 캠프에 알 수 없는 수의 군대가 남겨졌다. 기병 전위가 베른을 위협하기 위해 이동했고, 새로 기사 작위를 받은 많은 기사들이 베른 전선 가까이에서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탔지만 베른 군대는 자리를 지켰다. 프라이부르크(Freiburg) 보병대가 형성되었을 때, 기병대는 돌격을 시작하여 삼림주 분견대와 접촉하게 되었고, 그들은 빠르게 고슴도치(''Igel'')로 알려진 전방위 방진을 형성했다. 이 측면 공격을 피해 프라이부르크 보병은 언덕 위로 진격했다. 베른은 이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석궁병과 투석병의 스크린을 앞으로 던졌으나 프라이부르크군(Freiburgers)이 닫히면서 빠르게 후퇴했다. 이것은 베른 군대의 후방 대열에 공황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많은 수(최대 2,000) 병사들이 브람베르크 뒤의 숲으로 도주했다. 놀랍게도 나머지 군대는 확고했다. 두 개의 보병 라인이 충돌했다.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군은 재빨리 부서져 보의 영지병이 이끄는 편대를 이끌고 라우펜으로 달아났다. 프라이부르크의 파병대는 부르고마이스터와 시의 기수를 잃어 특히 심한 고통을 겪었다. 큰 통제력을 보인 베른 군대의 일부는 재편성을 하고 프라이부르크 기병대의 포위를 받고 있던 삼림주를 구출하기 위해 행군했다. 이곳에서의 행동은 아마도 그날의 가장 치열한 전투였을 것이다. 기병들은 이제 스스로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짧은 유혈 투쟁 끝에 기병대는 패주했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니다우, 발랭긴 및 아르부르크 백작[21]과 보의 루이 2세의 아들을 포함하여 최소 80명의 귀족이 몰락했다.[22] 이제 저녁이 다가오고 있어 추격이 제한되었지만 베른 군대는 축하 행사와 승리에 대한 감사 의식이 열리는 라우펜으로 진군했다.[23]
3. 5. 기병 전투의 결과
두 보병 부대가 충돌했을 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 군대는 빠르게 무너져 라우펜으로 도망쳤고, 보에서 온 봉건 부대가 도주를 이끌었다.[12] 프라이부르크 부대는 특히 큰 피해를 입어 시장과 도시 기수를 잃었다.[13] 베른 군대는 큰 통제력을 보이며 재정비하여 프라이부르크 기병대에 포위된 숲 칸톤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아마도 그날 가장 치열했을 것이며, 기병대는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짧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기병대는 궤멸되었고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니다우, 발랭겐 및 아르부르크 백작과 보의 루이 2세의 아들을 포함하여 최소 80명의 귀족이 쓰러졌다.[14][15] 저녁이 다가오면서 추격은 제한되었지만, 베른 군대는 라우펜으로 진군하여 승리를 축하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16]
4. 여파
동쪽의 합스부르크 군대는 전투에 참가할 시간에 라우펜에 도달하지 못하고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다. 베른/스위스 연방은 기마 기사도를 포함하는 군대에 2:1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는데, 연대기 작가들은 "신 자신이 베른 시민이 되었음에 틀림없다"라는 말이 퇴각하는 합스부르크 군대 사이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16]
베른은 1353년에 스위스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여덟 개의 칸톤 중 하나가 되었다.[16]
베른과 프리부르 사이의 경쟁은 14세기 내내 계속되었지만 다시는 군사적 충돌로 발전하지 않았다. 프리부르는 베른 부근에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젬파흐 전투 (1389년 합스부르크와 스위스 연방 간의 평화 조약)의 결과로 모두 잃었다. 프리부르는 1403년 베른과의 동맹을 갱신하고 인접 지역의 영토 획득에 중점을 둔 팽창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이로써 베른은 근대 초기까지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공화국으로 부상했으며, 1454년에는 프리부르가 스위스 연방의 준회원으로, 1481년에는 정회원으로 편입되는 길을 열었다.[16]
4. 1. 베른의 승리와 스위스 연방의 성장
동쪽에 있던 합스부르크 군대는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라우펜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다. 기병대를 포함한 군대에 2대 1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른/스위스 연방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자, 연대기 작가들은 "신조차 베른 시민이 되었음에 틀림없다"와 같은 언급이 퇴각하는 합스부르크 군대 사이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16]
베른은 스위스 연방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353년에는 여덟 개의 칸톤 중 하나가 되었다.[16]
14세기 내내 베른과 프리부르 사이의 경쟁은 계속되었지만, 다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프리부르는 베른 인근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젬파흐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와 스위스 연방 간의 1389년 평화 조약으로 이 모든 영토를 다시 잃었다. 프리부르는 1403년에 베른과의 동맹을 갱신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포기했으며, 근린 지역의 영토 확보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베른은 근대 초기에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공화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1454년 프리부르가 스위스 연방의 준회원이 되고 1481년에 정회원이 되는 길을 열었다.[16]
4. 2. 프리부르의 쇠퇴와 베른의 부상
동쪽에 있던 합스부르크 군대는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라우펜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다. 기병대를 포함한 군대에 2대 1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른/스위스 연방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자, 연대기 작가들은 "신조차 베른 시민이 되었음에 틀림없다"와 같은 언급이 퇴각하는 합스부르크 군대 사이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1]베른은 스위스 연방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353년에는 여덟 개의 칸톤 중 하나가 되었다.[1]
14세기 내내 베른과 프리부르 사이의 경쟁은 계속되었지만, 다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프리부르는 베른 인근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젬파흐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와 스위스 연방 간의 1389년 평화 조약으로 이 모든 영토를 다시 잃었다.[1] 프리부르는 1403년에 베른과의 동맹을 갱신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포기했으며, 근린 지역의 영토 확보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베른은 근대 초기에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공화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1454년 프리부르가 스위스 연방의 준회원이 되고 1481년에 정회원이 되는 길을 열었다.[1]
4. 3. 군사적 의의
베른은 1353년에 스위스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8개 주 중 하나가 되었다.[17] 이 전투는 스위스 십자를 동맹군을 식별하는 배지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며, 전투원의 의복에 두 줄의 천으로 표시되었다.[17]배넉번 전투 25년 전과 마찬가지로, 라우펜 전투는 중세 후기 중기병 (12세기와 13세기의 고전적인 "기사")이 향상된 보병 전술에 직면하여 확실히 쇠퇴했음을 예고하는 일련의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스위스 군사 역사에서 스위스 연방이 합스부르크에 대해 개방된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위스는 이미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는 행군하는 군대에 대한 매복 공격이었고 개방된 야전 전투는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와의 길고 지루한 분쟁은 연방의 건설과 성장을 이끄는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 독일의 루돌프 1세의 사망 (1291년)부터 슈바벤 전쟁 이후의 1511년 평화 조약까지 두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8]
4. 4.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지속
동쪽에 있던 합스부르크 군대는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라우펜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다. 기병대를 포함한 군대에 2대 1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른/스위스 연방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자, 연대기 작가들은 "신조차 베른 시민이 되었음에 틀림없다"와 같은 언급이 퇴각하는 합스부르크 군대 사이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1]
베른은 스위스 연방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353년에는 여덟 개의 칸톤 중 하나가 되었다.
14세기 내내 베른과 프리부르 사이의 경쟁은 계속되었지만, 다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프리부르는 베른 인근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젬파흐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와 스위스 연방 간의 1389년 평화 조약으로 이 모든 영토를 다시 잃었다. 프리부르는 1403년에 베른과의 동맹을 갱신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포기했으며, 근린 지역의 영토 확보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베른은 근대 초기에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공화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1454년 프리부르가 스위스 연방의 준회원이 되고 1481년에 정회원이 되는 길을 열었다.
5. 중요성
라우펜 전투는 스위스 군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전투는 스위스 연방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 야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비록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는 야전 전투가 아닌 매복 공격이었다.[24]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오랜 갈등은 1291년 합스부르크 왕 독일의 루돌프 1세 사망부터 1511년 슈바벤 전쟁 이후 평화 조약 체결까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구스위스 연방의 설립과 성장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의 지속적인 갈등은 취리히, 글라루스, 추크, 베른이 연방에 가입하여 8개 칸톤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1375년 구글러 전쟁에서 외부 위협에 맞서 짧은 합스부르크-연방 동맹을 맺은 후, 갈등은 1380년대에 다시 나타나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패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8]
5. 1. 군사적 측면
배넉번 전투 25년 전과 마찬가지로, 라우펜 전투는 향상된 보병 전술에 직면한 중세 후기 중기병 (12세기와 13세기의 고전적인 "기사")의 쇠퇴를 예고하는 일련의 전투 중 하나였다.[24]이 전투는 또한 스위스 십자를 동맹군 식별 표지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십자 표지는 전투원의 의복에 두 줄의 천으로 표시되었다.[17] 1480년대 디볼트 실링 데어 엘더는 삼림 칸톤 부대가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 형태로 착용한 이 야전 표식을 보여주었는데, 아직 칸톤 깃발에는 부착되지 않았다. 같은 삽화에서 공격하는 사보이 백국의 기병은 깃발과 기병 방패 모두에 사보이의 흰색 십자가를 보여준다.
이 전투는 스위스 군사 역사에서 스위스 연방이 합스부르크에 대해 야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위스는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이미 합스부르크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는 행군하는 군대에 대한 매복 공격이었고 야전 전투는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와의 기나긴 분쟁은 연방의 건설과 성장을 이끄는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으며, 독일의 루돌프 1세 (합스부르크 왕) 사망 (1291년)부터 슈바벤 전쟁 이후 1511년 평화 조약까지 두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8]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의 지속적인 분쟁은 취리히, 글라루스, 추크 및 베른이 연방에 가입하여 8개 칸톤을 형성하도록 촉구했다. 1375년 소위 구글러 전쟁에서 외부 위협에 대항하여 합스부르크-연방 동맹이 잠시 결성된 후, 분쟁은 1380년대에 다시 나타나 젬파흐 전투 (1386년)에서 합스부르크의 패배로 절정에 달했다.
5. 2. 정치적 측면
이 전투는 스위스 군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스위스 연방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 야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이미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는 야전 전투가 아닌 행군하는 군대에 대한 매복 공격이었다.[24]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오랜 갈등은 1291년 합스부르크 왕 독일의 루돌프 1세가 사망한 때부터 1511년 슈바벤 전쟁의 여파로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구스위스 연방의 설립과 성장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의 지속적인 갈등은 취리히, 글라루스, 추크, 베른이 연방에 가입하여 8개 칸톤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1375년 소위 구글러 전쟁에서 외부 위협에 맞서 짧은 합스부르크-연방 동맹을 맺은 후, 갈등은 1380년대에 다시 나타나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패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8]배넉번 전투 25년 전과 마찬가지로, 라우펜 전투는 이후 향상된 보병 전술에 직면하여 중세 후기 중기병(12세기와 13세기의 고전적인 "기사")이 확실히 쇠퇴했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또한 스위스 십자를 아군을 식별하는 휘장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 십자는 전투원의 의복에 두 줄의 천으로 표시되었다.[17] 1480년대 디볼트 실링 데어 엘더는 삼림주의 군대가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 형태로 이 야전 표식을 착용했음을 보여주었지만, 아직 칸톤 깃발에는 부착되지 않았다. 같은 삽화에서 공격하는 사보이 백국의 기병은 깃발과 기병 방패 모두에 사보이의 흰색 십자가를 표시한다.
5. 3. 사회적 측면
라우펜 전투는 25년 전의 배넉번 전투와 비교할 때, 중세 중무장 기병(12세기와 13세기의 고전적인 ‘기사’)의 쇠퇴를 예고하는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보병 전술의 개선으로 인해 발생했다.[24]이 전투는 또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스위스 십자가를 휘장으로 사용한 첫 번째 사건이기도 하다.[24] 그것은 전투원의 의복에 두 줄의 직물로 표시되었다. 1480년대에 디볼트 실링 엘더는 삼림주의 군대가 착용한 이 들판을 빨간색 배경에 흰색 십자가로 보여주는 점을 지적했지만, 아직 주의 깃대에는 부착되지 않았다. 같은 그림에서 공격하는 사보이아 기병은 기병과 기병 방패에 사보이의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표시한다.
이 전투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스위스 연방의 공개 전투에서 첫 번째 승리로 스위스 군사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위스는 이미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를 패배시켰지만, 이것은 행군하는 군대에 대한 매복이었으며 야전 전투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오랜 갈등은 1291년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 루돌프 1세가 사망한 때부터 여파로 1511년 슈바벤 전쟁의 여파로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2세기 동안 지속된 남부 동맹의 설립과 성장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 2세와의 지속적인 갈등은 취리히의 즉위를 촉발했다. 글라루스, 추크 및 베른은 연합에 참여하여 8개 주를 형성한다. 1375년 소위 구글러 전쟁에서 외부 위협에 맞서 짧은 합스부르크-연방 동맹을 맺은 후, 갈등은 1380년대에 다시 나타나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합스부르크가 패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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