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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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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수원은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첫 선발 투수였으며, 1984년 5월 5일에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본명은 방승환이었으나, 어릴 적 실종된 동생의 이름인 방수원으로 살아왔다. 1983년 잠실 야구장에서 동생과 재회했다. 1987년 투수 교체 시 공을 건네주지 않으려다가 김응룡 감독에게 빼앗긴 일화는 이후 코치가 투수를 교체하는 풍습의 시초가 되었다. 통산 기록은 8시즌 동안 197경기 출장, 18승 29패, 평균자책점 3.7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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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수 이름방수원
원어 이름Bang Soo-Won
출생지경상북도 경산군 (현 광주광역시)
생년월일1960년 1월 4일
포지션투수
투구
타석
프로 입단1982년
드래프트 순위프로 원년 멤버
첫 출장KBO / 1982년 3월 28일 구덕롯데
마지막 경기KBO / 1989년
선수 경력
소속 구단해태 타이거즈 (1982년 ~ 1989년)
지도자 경력
소속 구단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 (1990년 ~ 1995년)
획득 타이틀
타이틀KBO 리그 1호 노히트 노런
학력
출신 학교영남대학교

2. 선수 경력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 첫 선발투수였다. 1982년 3월 28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해태 타이거즈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했으나, 2-14로 크게 패했다.[5]

1984년 5월 5일 원래 선발 등판 예정이던 투수 대신 선발로 나와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당시 김응룡 감독 부임 이래로 줄곧 2이닝만 던졌기에, 이날도 2이닝을 마치고 야구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는데, 더 던지라고 해서 계속 던졌다. 4회 선두타자(김대진)에게 첫 볼넷을 내주자 김응룡 감독이 교체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경기에 투입되었다. 6회 7-0으로 앞설 때 선두타자(김정수)에게 볼넷을 내주자 감독이 다시 나오려다 들어갔다. 이날 노히트 노런은 방수원의 네 번째 완투이자 첫 완봉승, 그리고 마지막 완봉승(완투승)이었다.[5]

1987년까지 투수 교체는 감독이 마운드에 직접 가서 투수로부터 야구공을 건네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김응룡 감독이 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방수원은 세이브 기록 때문에 공을 주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쳤다. 2루까지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공을 빼앗겼다.[5] 이후 김응룡 감독은 투수 교체 시 마운드에 직접 오르지 않고 김인식 수석코치(2020년 현재 KBO 총재 특별보좌)를 보냈다. 다른 팀 감독들도 김응룡 감독을 따라 하면서, 감독이 아닌 코치가 투수를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5]

광주 출신[1]으로, 영남대학교 재학 중이던 1980년 원정 경기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이후 숙소였던 선동열의 실가 여관에서 계엄군과 마주쳐 총검에 찔릴 뻔했지만, 선동열의 아버지 도움으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2] 1982년 영남대학교를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1]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2.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2년 영남대학교를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1]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 첫 선발투수가 되었다.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했지만 2-14로 크게 패했다.[5]

1984년 5월 5일에는 원래 선발 등판 예정이던 투수 대신 선발로 등판,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1989년 은퇴했다.

2. 1. 1. 1982년

1982년 영남대학교를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1] 해태 타이거즈 창단 당시 기념비적인 개막 투수를 맡았으며,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 첫 선발투수이다.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으나, 2-14로 참패했다.[5]

2. 1. 2. 1984년

5월 5일, 방수원은 원래 선발 등판하기로 된 투수 대신 선발로 뛰게 되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경기에서 2이닝을 마치고 야구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는데, 더 던지라고 해서 계속 던졌다. 당시 김응룡 감독이 부임한 이래로 줄곧 2이닝만 던졌기에 그날도 그런 줄로 착각한 것이다.

4회 선두타자(김대진)에게 첫 볼넷을 내주자 김응룡 감독이 나와서 바뀔 줄 알았는데, 다시 들어갔다. 6회 7-0으로 앞설 때 선두타자(김정수)를 볼넷으로 내보내니 감독이 또 나오려다 도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날 노히트 노런은 방수원의 네 번째 완투, 첫 완봉승이자 마지막 완봉승(완투승) 경기였다.[5] 방수원은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2. 1. 3. 투수 교체 일화

1987년까지 투수 교체는 감독이 마운드에 직접 가서 투수에게 야구공을 건네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응룡 감독이 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방수원은 세이브 기록 때문에 공을 건네주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쳤다. 2루까지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5]

이후 김응룡 감독은 투수 교체 시 직접 마운드에 오르지 않고 김인식 수석코치(2020년 현재 KBO 총재 특별보좌)를 대신 보냈다. 다른 팀 감독들도 김응룡 감독을 따라 하면서, 감독이 아닌 코치가 투수를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5]

2. 2. 은퇴

1989년에 성적 부진으로 은퇴했으며, 이후 골프 코치로 전직했다.[1]

3. 선수 경력 이후

광주 출신[1]으로, 영남대학교 재학 중이던 1980년에 원정 경기 도중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이후 숙소였던 선동열의 집(여관)에서 계엄군과 마주쳐 총검에 찔릴 뻔했으나, 선동열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2]

1984년에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지만, 이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1989년에 은퇴한 뒤 골프 코치로 전직했다.

4. 개인사

본명은 방승원이었다. 방수원이라는 이름은 두 살 아래 친동생의 이름이었는데, 동생이 어렸을 때 미아가 되어 10여 년 동안 나타나지 않자 호적을 정리하며 사망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방승원이 사망 신고되면서 동생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5] 1983년 잠실야구장에서 친동생을 찾게 되었고, 동생은 방득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5] 광주 출신[1]으로, 영남대학교 재학 시절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2]

4. 1. 이름에 얽힌 사연

본명은 '''방승원'''이었다. 방수원이라는 이름은 2살 아래인 친동생의 이름이었는데, 동생이 어렸을 때 미아가 되면서 10여 년 동안 나타나지 않자 호적 정리를 하며 사망 신고를 했다.[5] 그런데 실수로 방승원을 사망 신고를 해 버리면서 방승원은 동생의 이름인 방수원으로 여생을 살아오게 되었다.[5] 한창 야구 선수로 생활하던 1983년에 고아원에서 자라왔던 친동생을 잠실야구장에서 찾게 되었고, 동생은 방득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5]

4. 2.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출신[1]으로, 영남대학교 재학 중이던 1980년에 원정 경기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이후 숙소였던 선동열의 집(여관)에서 계엄군과 마주쳐 총검에 찔릴 뻔했지만, 선동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어갔다[2]

5. 출신 학교

6. 통산 기록

연도구단등판선발완투완봉무사사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사사구고의사구데드볼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2년해태341520---6710.462664154 1/3164104838630184673.911.37
1983년321210---3530.3754349410154909313062524.981.60
1984년251411---1800.111280666422006300039283.821.27
1985년10200---1100.5009623 1/31621311900993.471.24
1986년29100---2450.333264636631703340126202.861.32
1987년23000---3230.60027965 2/37122003290039314.251.39
1988년28200---2160.667320806312312230017151.691.08
1989년16200---0100.00022953 1/35472012190130284.721.39
KBO 통산: 8년1974841---1829180.3832566599 2/359932210634238333062503.751.35



방수원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8시즌 동안 통산 197경기에 등판하여 18승 29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75를 기록했다.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특히 1988년에는 1.6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6. 1. 투수 기록

1982년 3월 28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 첫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방수원을 등판시켰으나, 결과는 2-14로 크게 패했다.[5]

1984년 5월 5일에는 원래 선발 등판 예정이던 투수 대신 선발로 등판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경기에서 2이닝을 마치고 야구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는데, 더 던지라는 지시를 받고 계속 투구했다. 당시 김응룡 감독 부임 이후 줄곧 2이닝만 던졌기 때문에 그날도 2이닝만 던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4회 선두타자(김대진)에게 첫 볼넷을 내주자 김응룡 감독이 교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시 마운드에 들어갔다. 6회 7-0으로 앞선 상황에서 선두타자(김정수)를 볼넷으로 내보내니 감독이 다시 나오려다 들어갔다고 한다.

그날 경기는 방수원의 네 번째 완투이자, 첫 완봉승이자 마지막 완봉승(완투승) 경기였다.[5]

연도구단등판선발완투완봉무사사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사사구고의사구데드볼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2해태341520---6710.462664154 1/3164104838630184673.911.37
1983321210---3530.3754349410154909313062524.981.60
1984251411---1800.111280666422006300039283.821.27
198510200---1100.5009623 1/31621311900993.471.24
198629100---2450.333264636631703340126202.861.32
198723000---3230.60027965 2/37122003290039314.251.39
198828200---2160.667320806312312230017151.691.08
198916200---0100.00022953 1/35472012190130284.721.39
KBO:8년1974841---1829180.3832566599 2/359932210634238333062503.751.35


참조

[1] 웹사이트 '혹성탈출' 방수원이 정말 노히트 노런을 했다고?[타이거즈 열전] http://sports.hankoo[...] 2020-04-16
[2] 웹사이트 5.18 그때 광주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https://www.pressian[...] 2015-05-18
[3] 웹사이트 피플인메모리 노히트노런 프로1호 방수원, 골프선생 되다 https://sports.news.[...] 2009-02-12
[4] 뉴스 1984년 방수원 첫 노히트노런 “꿈을 쏘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5] 웹인용 [피플 인 메모리]노히트 노런 프로 1호 방수원, 골프 선생 되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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