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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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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정치가, 법학자, 작가이다. 영국 침략 당시 군인으로 복무하고 애국시를 썼으며, 5월 혁명에 참여하여 1차 후헌타 구성을 지지했다. 아르헨티나 국가의 가사를 썼으며, 제헌 의회 의원, 재무관, 대통령을 역임했다. 브라질 제국과의 협상 스캔들 이후 임시 대통령을 지냈으나, 망명 생활을 거쳐 귀국 후 사법재판소 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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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아르헨티나 대통령
순서2대
임기 시작1827년 7월 7일
임기 종료1827년 8월 17일
이전 대통령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다음 대통령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역임
임기 시작1852년 2월 13일
임기 종료1852년 7월 26일
이전 주지사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다음 주지사마누엘 도레고
출생일1785년 5월 3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
사망일1856년 10월 10일
사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배우자루시아 페트로나 리에라 메를로
직업변호사

2. 초기 생애 및 교육

Alejandro Vicente|알레한드로 비센테es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평생 첫 번째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1] 로페스는 산 프란시스코 학교(San Francisco School영어)에서 초등 교육을 시작했고, 이후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인 레알 콜레지오 산 카를로스(Real Colegio San Carloses)에서 공부했다. 그는 추키사카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라플라타의 영국 침략 당시 애국 연대(Regimiento de Patricioses)에서 대위로 복무했다. 아르헨티나의 승리 후 그는 ''El triunfo argentino|엘 트리운포 아르헨티노es''(아르헨티나의 승리)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3. 정치 활동

그는 1810년 5월 22일의 5월 혁명에 참여하여 1차 후헌타 구성을 지지했다.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에서 왕당파 인사들이 축출된 후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코르넬리오 사아베드라(Cornelio Saavedra)의 노선에 반대하며 제1삼두정부 창설에 참여했고 재무관을 지냈다.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많은 공직자들처럼, 그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다.[2]

로페스는 13년차 제헌의회 의원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했다. 의회의 요청으로 "애국가 행진곡"(Marcha Patrióticaspa)의 가사를 썼는데, 이는 훗날 아르헨티나 국가(Argentine National Anthem)가 되었다. 이 곡은 카탈루냐 출신의 블라스 파레라(Blas Parera)가 작곡한 군악 행진곡으로, 1813년 3월 11일에 공식 승인되었다. 같은 해 5월 7일, 마리키타 산체스 데 톰프슨(Mariquita Sánchez de Thompson)의 집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서 처음으로 공개 낭독되었다. 이 곡은 에스테반 데 루카(Esteban de Luca)가 작곡한 다른 행진곡을 대체했는데, 로페스의 작품이 더 군사적인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로페스는 카를로스 마리아 데 알베아르(Carlos María de Alvear) 정부에 참여했으나, 알베아르 정권이 무너지면서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몇몇 공직을 거쳐 1825년 제헌 의회 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 대통령 밑에서 장관직을 수행했다.

브라질 제국(Brazilian Empire)과의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로 리바다비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로페스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새로 선출된 주지사 마누엘 도레고(Manuel Dorrego)가 로페스 정부의 장관직을 맡으면서 연방주의자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도레고가 실각하고 후안 라바예(Juan Lavalle)에게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로페스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우루과이(Uruguay)로 망명해야 했다.

4. 말년

그는 1830년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사법재판소(Tribunal of Justice) 구성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사법재판소의 소장을 역임했고, 그중에서도 후안 파쿤도 키로가 암살자들의 재판을 주재했다.

그는 마르코스 사스트레가 이끄는 문학 살롱의 회장이었지만, 그의 두 아들인 비센테 피델 로페스와 루시오 비센테 로페스가 속한 '37년 세대'(Generation of '37)에는 속하지 않았다.

참조

[1] 뉴스 Vicente López y Planes, el autor del Himno al que la política llamaba cuando las papas quemaban https://www.infobae.[...] Infobae 2024-05-21
[2] 서적 10,000 Famous Freemasons Macoy Publishing & Masonic Supply Co Inc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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