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콜 다리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르콜 다리 전투는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요제프 알빈치 장군 지휘 하의 오스트리아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프랑스군은 아르콜 다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트리아군의 만토바 구원 계획을 좌절시켰다. 나폴레옹의 용맹한 지휘는 프랑스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영웅적 이미지를 형성하여 나폴레옹 몰락까지 이어진 나폴레옹 전설의 시작이 되었다.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만토바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며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96년 11월 -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조지 워싱턴의 불출마로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토머스 제퍼슨이 부통령이 되었으며,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른 정당 출신으로 선출된 최초의 사례이다. - 1796년 이탈리아 - 몬도비 전투
몬도비 전투는 1796년 4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을 격파하고 몬도비를 점령하여 전략적 우위를 확보, 사르데냐의 동맹 이탈과 나폴레옹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전투이다. - 1796년 이탈리아 - 치스파다나 공화국
치스파다나 공화국은 1796년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북부에 설립되었으며, 이탈리아 국기인 삼색기를 최초로 사용했고, 1797년 트란스파다나 공화국과 통합하여 치살피나 공화국을 형성하면서 소멸했다. - 1796년 분쟁 - 로디 전투
1796년 5월 1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로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로디 전투는 로디 다리에서의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폴레옹 신화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전략적 중요성은 제한적이었으나 나폴레옹의 용맹함이 부각되어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키고 밀라노 점령의 발판을 마련했다. - 1796년 분쟁 - 몬테노테 전투
몬테노테 전투는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이며, 이탈리아 원정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콜 다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아르콜레 전투 |
관련 전쟁 | 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탈리아 전역 (1796-1797년) |
![]() | |
날짜 | 1796년 11월 15일 - 1796년 11월 17일 |
장소 | 이탈리아 북부 아르콜레 늪지대 |
결과 | 프랑스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오스트리아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앙드레 마세나 피에르 오주로 장 란 장조제프 기외 장바티스트 뮈롱 유제프 술코프스키 |
오스트리아 | 요제프 알빈치 안톤 페르디난트 미트로프스키 |
병력 규모 | |
프랑스 | 20,000명 |
오스트리아 | 24,000명 |
피해 규모 | |
프랑스 | 전사 및 부상: 3,500명 포로: 1,300명 |
오스트리아 | 전사 및 부상: 2,200명 포로: 4,000명 |
2. 배경
179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북이탈리아를 장악해 나갔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만토바 요새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요제프 알빈치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군대를 파견했다.[4]
나폴레옹은 베로나 동쪽 지역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고 베로나 시와 아디제 강을 건너 후퇴한 뒤, 아디제 강 남쪽 강변을 따라 이동하여 부교(浮橋)를 건설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리 맞은편은 군대가 들어가기 어려운 소택지였고, 아디제 강 및 북쪽에서 합류하는 아르포네 강과 그 밖의 작은 지류의 제방 위 보도(步道)를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했다.
나폴레옹은 아디제 강 북쪽 강변에 교두보를 설치하고, 여기서 보도를 따라 서쪽으로 약간의 부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보도가 좁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숫적 우위를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남은 부대는 보도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아르포네 강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려고 했다.
2. 1. 오스트리아군의 전략
알빈치는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펠트마르샬-로이테난트 파울 다비도비치 휘하의 부대는 북쪽에서 아디제강 계곡을 따라 남하하고, 알빈치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동쪽에서 베로나 방면으로 진격하여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군을 협공하려 했다.[4]페터 비투스 폰 쿠스다노비치가 지휘하는 프리울리 군단은 베로나 방향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고, 다비도비치가 이끄는 티롤 군단은 알프스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쿠스다노비치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부름저는 만토바에서 탈출하여 후방에서 프랑스 야전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4]
쿠스다노비치의 프리울리 군단(26,432명)은 피아베강에서 만토바를 향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알빈치가 동행했다. 이 병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5]
지휘관 | 부대 | 병력 |
---|---|---|
프리드리히 프란츠 자비에르 제너럴마요르 | 선봉대 | 4,397명 |
필리프 피토니 폰 단넨펠트 제너럴마요르 | 예비대 | 4,376명 |
조반니 마르케세 디 프로베라 펠트마르샬-로이테난트 | 주력 부대 | 제1선 9,380명, 제2선 8,279명 |
주력 부대는 게르하르트 로셀미니와 안톤 립테이 데 키스팔루드 제너럴마요르의 여단으로 구성된 제1선, 안톤 쉼비르츠 폰 초비닌과 아돌프 브라베크 제너럴마요르가 이끄는 여단으로 구성된 제2선으로 세분화되었다. 프리울리 군단에는 54문의 야전포와 20문의 예비포가 있었다.[5]
다비도비치의 티롤 군단(보병 18,427명, 기병 1,049명)은 6개 여단 규모의 대열로 나뉘었다.[6]
지휘관 | 부대 | 병력 |
---|---|---|
요한 로던 | 제1대열 | 보병 3,915명, 기병 362명 |
요제프 오츠카이 폰 오츠코 | 제2대열 | 보병 4,200명, 기병 463명 |
스포르크 | 제3대열 | 보병 2,560명 |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 | 제4대열 | 보병 3,772명, 기병 30명 |
제5대열 | 보병 2,958명, 기병 120명 | |
세울렌 대령 | 제6대열 | 보병 1,022명, 기병 74명 |
티롤 군단은 40문의 야전포와 20문의 예비포를 보유했다.[7] 안톤 페르디난트 미트로프스키 제너럴마요르의 여단(약 3,000명)은 다비도비치와 쿠스다노비치 휘하 부대를 연결하면서 브렌타강 상류를 점령했다.[6][21]
2. 2. 프랑스군의 대응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양동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다. 그는 클로드 앙리 벨그랑 드 보부아의 부대로 파울 다비도비치를 견제하고, 앙드레 마세나와 피에르 오주로의 부대로 요제프 알빈치의 주력 부대를 저지하려 했다.[8]보나파르트는 클로드 앙리 벨그랑 드 보부아 사단장 휘하의 10,500명의 병력을 라비스에 배치하여 다비도비치를 감시했다. 바사노 델 그라파에서는 앙드레 마세나 사단장의 9,540명의 병사가 브렌타강을 방어했고, 피에르 오주로 사단장의 8,340명의 병력이 아디제강을 방어했다. 샤를 에드와르 제닝스 드 킬메인 사단장은 8,830명의 병력으로 만토바에 있는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부름저의 대규모 수비대를 봉쇄했다. 프랑수아 마카르 사단장의 2,750명의 보병 예비군은 빌라프란카 디 베로나에 배치되었고,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 사단장은 1,600명의 기병 예비대와 함께 베로나에 주둔했다.[8]
두 번의 격전 끝에 보나파르트는 "생존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낙담했다."[19] 그는 마카르와 3,000명을 베로나를 지키도록 배치했다.[20] 약간 증강된 보부아는 약 8,000명의 병력으로 강력한 진지를 지키며 다비도비치의 14,000명의 병사를 아디제 계곡에 묶어두었다. 만토바 내 뷔름서의 수비대를 봉쇄하기 위해 킬마인은 다른 지휘부에 증원을 제공한 후 6,626명의 병력만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보나파르트는 마세나의 7,937명, 오제라우의 6,000명, 2,600명의 보병과 기병 예비대로 구성된 야전군을 갖게 되었으며, 총 병력은 18,000명이었다. 이때 알빈치의 주력군은 약 23,000명으로 집계되었다.[21]
보나파르트는 대담한 전략을 결정했다. 그는 마세나와 오주로를 아디제 강 서쪽 제방을 따라 알빈치의 좌익 후방에 위치한 론코 알'아디제의 교량 건설 장소로 강행군시켰다. 그는 군대를 강 건너로 이동시킨 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적의 수송대와 포병 기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23]
강 건너편에는 병력이 침투할 수 없는 습지가 있었는데, 이는 모든 이동이 아디제 강둑의 둑길이나 제방, 그리고 북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알포네 강이라는 작은 지류의 제방의 둑길로 제한됨을 의미했다. 알포네 강은 폭이 약 18.29m이고 깊이가 약 1.52m에 불과했다.[24] 험난한 지형에서 프랑스군은 유리할 수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좁은 전장에서 우세한 병력을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22]
2. 3. 초기 전투
11월 초, 프랑스군은 두 번째 바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했지만,[11] 칼리아노 전투에서는 패배하며 전황이 불리해졌다.[12][13] 이후 알빈치의 주력 부대가 베로나로 접근하면서, 나폴레옹은 아디제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나폴레옹은 베로나 동쪽 지역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베로나 시와 아디제 강을 통과해 철수한 후, 아디제 강 남쪽 강변을 따라 이동하여 부교를 건설할 수 있는 장소로 향했다. 다리 맞은편은 군대가 들어가기 어려운 소택지였고, 아디제 강 및 북쪽에서 합류하는 아르포네 강과 그 밖의 작은 지류의 제방 위 보도를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했다.
나폴레옹은 아디제 강 북쪽 강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여기서 보도를 따라 서쪽으로 약간의 부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막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보도가 좁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숫적 우위를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남은 부대는 보도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아르포네 강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려고 했다.
3. 전투 경과
베로나 동쪽 지역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받고 베로나 시와 아디제 강을 통과해 철수한 나폴레옹은 아디제 강 남쪽 강변을 따라 이동하여, 부교를 설치할 수 있는 론코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이곳에 부교를 설치하고 병력을 도하시켜 오스트리아군의 좌측 후방을 노렸다.
강 건너편은 군대가 들어가기 어려운 늪지대였고, 아디제 강 및 북쪽에서 합류하는 알포네 강과 그 밖의 작은 지류의 제방 위 좁은 길로만 이동이 가능했다. 알포네 강은 폭이 약 18.29m이고 깊이가 약 1.52m에 불과했다.[24] 험난한 지형은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좁은 전장에서 수적 우세를 활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2]
나폴레옹의 계획은 아디제 강 북쪽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여기서 좁은 길을 따라 서쪽으로 약간의 부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좁은 길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숫적 우위를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군의 나머지 부대는 좁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알포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론코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약 약 2.41km 거리에 있는 다리까지 제방을 따라 이어졌고, 다리 동쪽에는 아르콜레 마을이 있었다. 거기에서 도로는 계속해서 강의 동쪽 제방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져 주요 고속도로 근처의 산 보니파치오로 향했다. 또 다른 도로는 론코에서 북서쪽으로 벨피오레를 거쳐 칼디에로로 이어지는 제방을 따라 이어졌다.[24]
3. 1. 아르콜 다리에서의 격전 (11월 15일 ~ 17일)
아프로네 강을 따라 1마일 앞 아르콜레 마을에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고, 이것을 건너면 북쪽으로 뻗은 오스트리아군의 연락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폴레옹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아르포네 강의 동쪽 강변에 정렬해 다리를 건너는 프랑스군을 종사(縱射)했기 때문에 프랑스측이 아르콜레 다리를 빼앗으려고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병사들 대부분은 사격을 피하기 위해 보도의 그늘진 곳에 엎드렸다. 한 명의 목격자는 이때 나폴레옹이 직접 군기를 갖고 부하들인 척탄병을 이끌고 돌격했다고 이야기 했다.[48][49]이것은 나폴레옹 전설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실제 다리를 건너는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이 사실보다도 예술적인 해석에 기초한 것이라는 게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이때 다리위에 있는 것은 영웅적인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여러명 죽었고, 혹은 부상을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말에서 떨어져, 늪지의 진창이 있는데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전투 첫날 어떻게든 다리를 건너려고 했으나, 다시 퇴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격렬한 전투가 거의 이틀간 계속된 뒤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은 겨우 오스트리아의 수비대를 몰아내고, 아르포네 강을 가로질러 아르콜레 다리를 건너갈 수 있었다. 이것은 11월 17일 다음날 이어진 암흑속에서였다.

4.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3,500명의 사상자와 1,300명의 포로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2,200명의 사상자만 냈지만, 4,000명의 포로와 11문의 대포를 잃었다.[38] 프랑스군 측에서는 장군 장 질 앙드레 로베르가 치명상을 입었고,[39] 오스트리아군 게르하르트 로셀미니 소장은 11월 19일 비첸차에서 사망했다.[40]
나폴레옹은 알빈치의 주위를 부대의 북쪽 측면으로 향하게 하고, 티롤에서 진격했던 제2의 오스트리아 부대도 격파했기 때문에 알빈치는 다시 동쪽으로 퇴각했다. 프랑스군이 포위한 만토바에 입성하여 수비대를 구원한다는 오스트리아군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것을 승리했다고 인정했다.
장 란은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선두에서 세 번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계속 싸웠다. 나폴레옹은 그의 용기에 감동하여 빼앗은 군기에 메시지를 적어 랑에게 보냈고, 이후 그를 부하로서 뿐만 아니라 친구로서 대했으며, 그 관계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행동은 프랑스 예술가들과 신문에 의해 빠르게 전설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따라서 아르콜 전투는 나폴레옹 몰락(1815년)까지 이어진 나폴레옹 전설의 시작으로 널리 여겨진다.
5. 전투의 의의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500명의 사망 및 부상자와 1,300명의 포로 및 실종자를 냈고, 오스트리아군은 2,200명의 사망 및 부상자를 냈지만 4,000명의 병력과 11문의 대포를 잃었다.[38] 프랑스군 장 질 앙드레 로베르 장군은 치명상을 입었고,[39] 오스트리아군 게르하르트 로셀미니 소장은 11월 19일 비첸차에서 사망했다.[40]
프랑스군이 아르포네 강 다리를 건넜을 때 오스트리아군 대부분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이 포위한 만토바에 입성하여 수비대를 구원하려던 오스트리아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이 전투를 승리로 평가했다. 또한 티롤에서 진격해 온 오스트리아군 부대도 격파하여 알빈치는 동쪽으로 퇴각했다.
장 란은 아르콜레 전투에서 프랑스군 선두에 서서 3일 동안 세 번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계속 싸웠다. 나폴레옹은 그의 용기에 감동하여 아르콜레에서 빼앗은 군기에 메시지를 적어 랑에게 보냈다. 이후 나폴레옹은 랑을 부하로서 뿐만 아니라 친구로서 대했으며, 이 관계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랑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5. 1. 나폴레옹 전설의 시작
나폴레옹은 아르콜레 다리를 건너 오스트리아군의 연락선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강 동쪽에 배치되어 프랑스군을 종사(縱射)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다리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대부분의 프랑스 병사들은 총격을 피해 엎드려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직접 군기를 들고 척탄병을 이끌고 돌격했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이는 나폴레옹 전설의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진다. 비록 나폴레옹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담긴 그림은 예술적 해석에 기반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그의 용맹한 행동은 프랑스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폴레옹의 부관이었던 오귀스트 마르몽은 나폴레옹이 다리에서 200보 앞까지 전진했지만, 한 보병 장교에게 몸을 잡혀 후퇴했다고 증언했다.[48] 또 다른 증언에서는 나폴레옹이 다리에서 55보 앞까지 전진했다고 한다.[49] 나폴레옹이 말에서 떨어져 늪지 진흙탕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아르콜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의 행동은 프랑스 예술가들과 신문에 의해 빠르게 전설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아르콜 전투는 1815년 나폴레옹 몰락까지 이어진 나폴레옹 전설의 시작으로 널리 여겨진다.
6. 기타
이 부분은 '트리비아' 하위 섹션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기타' 섹션에는 별도로 내용을 추가하지 않는다.
6. 1. 트리비아
파리 시내에는 아르콜 다리 전투를 기념하는 아르콜 다리(Pont d'Arcole)가 있다.[1] 'Arcole'은 프랑스어로는 '아르콜', 이탈리아어로는 '아르콜레'로 읽히므로, 이탈리아에 있는 다리는 '아르콜레 다리', 프랑스에 있는 다리는 '아르콜 다리'로 구분하는 것이 좋다.[1] 따라서 '아르콜 다리 전투'도 '아르콜레 다리 전투'로 표기해야 혼동을 줄일 수 있다.[1]참조
[1]
서적
The Development of Modern Europe: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Current History
Ginn & Company
1907
[2]
서적
Art of War
[3]
서적
2001
[4]
서적
2001
[5]
서적
2001
[6]
서적
2001
[7]
서적
2001
[8]
서적
2001
[9]
서적
1966
[10]
서적
2001
[11]
서적
1998
[12]
서적
2001
[13]
서적
1998
[14]
서적
2001
[15]
서적
2001
[16]
서적
2001
[17]
서적
2001
[18]
서적
1998
[19]
서적
1966
[20]
서적
1966
[21]
서적
2001
[22]
서적
1966
[23]
서적
2001
[24]
서적
2001
[25]
서적
2001
[26]
서적
2001
[27]
서적
1966
[28]
서적
2001
[29]
서적
2001
[30]
서적
2001
[31]
서적
2001
[32]
서적
2001
[33]
서적
[34]
서적
Dictionnaire des gens de couleur dans la France moderne: Paris et son Bassin
Droz
2011
[35]
서적
2001
[36]
서적
Boycott-Brown
2001
[37]
서적
Boycott-Brown
2001
[38]
서적
Rothenberg
1980
[39]
서적
Schom
1997
[40]
문서
Smith-Kudrna, "Rosselmini"
[41]
서적
Boycott-Brown
2001
[42]
서적
Smith
1998
[43]
서적
Boycott-Brown
2001
[44]
서적
Smith
1998
[45]
서적
Chandler
1966
[46]
서적
Boycott-Brown
2001
[47]
서적
Martin (2005), ''1797 Le frégate la Muiron''
[48]
서적
Memoires du duc de raguse de 1792 a 1832.
https://www.worldcat[...]
Theclassics Us
2013
[49]
서적
The road to Rivoli : Napoleon's first campaign
https://www.worldcat[...]
Cassell
20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