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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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연희는 939년부터 944년까지 민나라의 왕이자 황제였다. 왕심지의 아들로, 좌복야와 동평장사를 역임했다. 왕계붕 재위 시기, 주문진과 연중우의 반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국호를 왕희로 개명하고 후진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사치와 폭정을 일삼았으며, 동생 왕연정과의 내전 끝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944년 주문진과 연중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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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연희 | |
---|---|
기본 정보 | |
칭호 | 대민 황제 |
이름 | 왕연희 (王延羲) -> 왕희 (王曦) |
시대 이름 | 영륭 (永隆) |
시호 | 예문광무명성원덕융도대효황제 (睿文廣武明聖元德隆道大孝皇帝) |
묘호 | 경종 (景宗) |
왕위 | |
왕조 | 민 |
재위 | 941년 - 944년 4월 8일 |
이전 통치자 | 왕계붕 |
다음 통치자 | 주문진 (민나라 왕으로서) |
왕위 (민왕) | |
재위 (민왕) | 939년 8월 30일 - 941년 |
이전 통치자 (민왕) | 왕계붕 |
다음 통치자 (민왕) | 주문진 (민나라 왕으로서) |
배우자 | |
황후 | 이황후 |
첩 | 존재 |
자녀 | 왕아징, 아들, 최소 1명의 딸 |
가문 | |
왕조 | 왕 |
아버지 | 왕심지 |
출생 및 사망 | |
사망일 | 944년 4월 8일 |
사망 장소 | 푸저우 |
2. 생애
왕연희는 왕심지의 28번째 아들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왕계붕 재위 기간 동안 좌복야(左僕射)와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역임했다. 왕계붕은 의심이 많아 왕연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택에 연금되었다. 939년, 주문진과 연중우가 반란을 일으켜 왕연희를 추대하고 왕계붕을 살해하자, 왕연희는 국왕을 자칭하고 이름을 왕희로 고쳤다. 즉위 후 후진에 의해 왕으로 책봉되었다.[1]
왕연희는 즉위 후 호화로운 사치와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고 친척들을 심하게 의심하였다. 동생인 건주 자사 왕연정의 간언은 오히려 둘 사이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940년 왕연희는 건주를 공격하여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이 수년간 이어졌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고, 이듬해 왕연희는 황제를 자칭하였다.
왕연희의 포악성은 개선되지 않았고, 944년 주문진과 연중우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왕연희를 살해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왕계붕 재위 기간 동안, 왕연희는 좌복야(左僕射)와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왕계붕은 의심이 많아, 왕연희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친척들을 자택에 연금시켰다.[1] 939년(통문 4년) 주문진, 연중우가 반란을 일으켜 왕연희를 왕으로 추대하고 왕계붕을 살해했다. 이로써 왕연희는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을 자칭하며, 이름을 왕희(王曦)로 고쳤다. 왕위에 오른 왕연희는 후진에 의해 왕으로 책봉받았다.[1]2. 2. 민나라 왕으로서의 통치
939년(통문 4년) 주문진, 연중우가 반란을 일으켜 왕연희를 추대하고 왕계붕을 살해하였고, 왕연희는 권력을 장악하여 국왕을 자칭하고 이름을 왕희로 개명하였다. 즉위한 왕연희는 후진에 왕으로 책봉받았다.[1]즉위 후 왕연희는 호화로운 사치와 황음무도하게 지내고, 친척들을 많이 의심했다. 동생인 건주 자사 왕연정은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양자의 대립이 깊어져, 940년(영륭 2년) 왕연희는 건주 공격을 개시하였고, 내전이 일어났다. 민나라 내전은 몇 년간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다음 해에 왕연희는 황제로 자칭하였다.[1]
왕연희의 포학성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주문진과 연중우는 신변에 위험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944년(영륭 6년) 두 사람에 의해서 왕연희는 살해되었다.[1]
2. 3. 황제 즉위와 폭정
939년(통문 4년) 주문진, 연중우가 반란을 일으켜 왕연희를 추대하고 왕계붕을 살해하였고, 왕연희는 권력을 장악하여 국왕을 자칭하고 이름을 왕희로 개명하였다. 즉위 후 왕연희는 후진에 왕으로 책봉되었다.왕연희는 즉위 후 호화로운 사치와 황음무도한 생활을 하고, 친척들을 심하게 의심하였다. 동생인 건주자사 왕연정이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양자의 대립이 깊어져, 940년(영륭 2년) 왕연희는 건주 공격을 개시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은 몇 년간 계속되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고, 이듬해 왕연희는 황제를 자칭하였다.
왕연희의 포악성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944년(영륭 6년) 신변에 위험을 느낀 주문진과 연중우에 의해 살해되었다.[2]
2. 4. 최후
왕연희는 포악한 정치를 일삼았는데, 944년 (영륭 6년)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낀 주문진, 연중우에 의해 살해되었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왕계붕 |
아내 | 이씨 |
4. 평가
왕연희에 대한 평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십국춘추(十國春秋)에서는 왕연희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민국의 군주로서 939년부터 944년까지 재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
5. 둘러보기
939년 - 944년
939년 - 944년
939년 - 940년
939년 - 94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