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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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윤인함(尹仁涵, 1531년 ~ 159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입니다. 자는 양숙(養叔), 호는 죽재(竹齋) 또는 죽당(竹堂)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입니다.
생애 및 활동:
- 1531년 출생,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 1552년(명종 7년) 진사가 되고, 1555년(명종 10년)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 승문원권지를 시작으로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정자, 부수찬, 저작, 박사, 부수찬 겸 지제교 등 옥당(玉堂)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 1561년 병조좌랑,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 1563년 이조정랑 재직 중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되었습니다.
- 이후 성균관전적, 종부시첨정, 풍덕군수, 양주목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 1578년(선조 11년) 사복시정, 1581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1584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 1585년 의주목사를 거쳐 남원부사가 되었으나, 의주에서의 일로 면직되었습니다.
- 이후 황주목사, 선산부사, 호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에 제수되었습니다.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주부윤으로, 전투를 독려하고 의병장들과 함께 문천회맹을 맺는 등 항전을 독려했습니다.
- 경주성이 함락되자 유신(儒臣)으로서 나약하고 겁을 낸다는 이유로 교체되었으나, 의병을 모아 왜군 수백 명을 물리쳤습니다.
- 1593년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습니다.
- 1596년 형조 참판이 되었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 영위사(迎慰使)를 겸하여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영접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학문 및 저술:
- 문장과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호를 죽재라 했습니다.
- 저서로 『죽재집(竹齋集)』이 있습니다.
가족 관계:
- 증조부: 윤사하(尹師夏)
- 조부: 윤탕(尹宕)
- 아버지: 첨정 윤응규(尹應奎)
- 어머니: 이수동(李壽童)의 딸
- 부인: 나주 정씨(羅州丁氏) 정응두(鄭應斗)의 딸
- 자녀: 3남 3녀 (윤홍의, 윤홍립, 윤홍유, 김지회 처, 박원 처, 이유 처)
기타: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에 윤인함의 신도비와 묘가 있습니다.
- 임진왜란 당시 동도(경주)를 탈환할 때 활약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동도복성비가 경주에 있었으나, 박의장의 후손들이 비석을 묻었다가 1920년에 발견되어 윤인함의 후손들이 서울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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