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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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이경손(李慶孫, 1905년 10월 12일 ~ 1977년 4월 4일)은 일제강점기에 한국과 상하이에서 주로 활동한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평론가, 연극 배우이자 동시 작가입니다.
생애 및 활동:
- 출생 및 성장: 1905년 황해도 개성(혹은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대대로 의원을 배출한 의원 집안이었으나, 이경손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 학력: 체신국 부설 학교인 상성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분교인 경성신학교에서 2년간 종교, 윤리,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 초기 활동: 1922년부터 연극 공부를 시작, 1923년 무대예술연구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연극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영화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평론가로 꼽힙니다.
- 영화계 입문: 1924년 부산에서 일본인 실업가들의 후원으로 설립된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에 입사, 창립 작품인 《해의 비곡》에서 조감독 및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 감독 데뷔: 1925년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전》으로 감독 데뷔했습니다.
- 영화 제작: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독립하여 고려 키네마를 설립,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1925)를 감독 및 각색했습니다. 이후 계림영화사를 설립하여 《장한몽》(1926), 《산채왕》 등을 발표했습니다. 1928년에는 이경손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 해외 활동: 193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양자강》을 제작했습니다. 이후 태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태국에서는 영어 교사, 목재상 등 다양한 사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 가족: 태국 망명 시 만난 부인 Prayong Hiranbanthow 여사와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습니다.
주요 작품:
- 《심청전》 (1925, 감독)
- 《개척자》 (1925, 감독, 각색)
- 《장한몽》 (1926, 감독)
- 《산채왕》 (1926, 감독, 각색)
- 《봉황의 면류관》 (1926, 감독)
- 《숙영낭자전》
- 《춘희》
- 《양자강》 (1931, 감독)
기타:
- 한국어, 영어, 중국어, 태국어 4개 국어를 구사했습니다.
- 한국 최초로 개인 커피숍(카카듀)을 차린 모던 보이였다고 합니다.
- 그의 자녀들은 뒤늦게 아버지가 영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영상자료원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 이경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원어명 | 李慶孫 |
| 본명 | 알려지지 않음 |
| 다른 이름 | 이경손 / Lee Gyeong-son |
| 출생일 | 1905년 10월 12일 |
| 출생지 | 경기도 개성 |
| 사망일 | 1977년 4월 4일 |
| 사망지 | 태국 |
| 국적 | |
| 배우자 | Prayong Hiranbanthow |
| 자녀 | 1남 3녀 |
| 웹사이트 | 알려지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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