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크 다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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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위크 다리 전투는 1643년 9월 23일 잉글랜드 내전 중 벌어진 전투로,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충돌이었다. 존 바이런 경이 이끄는 왕당파 수송대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금과 은 식기를 싣고 슈루즈베리로 향하던 중, 의회군의 공격을 받았다. 의회군은 존 브라운과 에드윈 샌디스가 이끌었으며, 루퍼트 공의 기병대와 교전했다. 전투는 왕당파의 승리로 끝났으며, 루퍼트는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 전투는 엣지힐 전투를 앞두고 양 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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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크 다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포위크 다리 전투 |
부분전 | 제1차 잉글랜드 내전 |
![]() | |
날짜 | 1642년 9월 23일 |
장소 | 우스터셔주 우스터 |
결과 | 왕당파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왕당파 |
교전국 2 | 의회파 |
지휘관 | |
왕당파 지휘관 |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 |
의회파 지휘관 | 에드윈 샌디즈 |
병력 규모 | |
왕당파 병력 | 기병 1,000명 |
의회파 병력 | 기병 1,000명 |
피해 규모 | |
왕당파 피해 | 알 수 없음, 한 추정에 따르면 약 30명 사망 |
의회파 피해 | 30명에서 150명 사이 사망 또는 포로로 추정 |
2. 배경
존 바이런 경은 1643년 5월 찰스 1세를 지지하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기증한 금과 은 식기를 싣고 슈루즈베리에 있는 왕당파 군대로 향하고 있었다. 바이런은 수송대를 이끌고 가던 중 의회군의 접근을 인지하고 우스터로 피신하여 지원군을 기다렸다.
2. 1.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
1642년,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장악한 의원들을 견제하고자 1642년 1월, 반역 혐의로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런던을 탈출했다. 의회는 이에 맞서 3월 민병대 조례를 통과시켜 지방 민병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에 찰스 1세는 6월 징병 위임장을 발급하며 군사적 대치에 나섰다. 양측은 군대를 징집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으며, 결국 8월 22일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왕실 깃발을 올리며 의회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2. 2. 존 바이런의 수송대
존 바이런 경은 1643년 5월, 찰스 1세를 지지하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기증한 금과 은 식기를 싣고 슈루즈베리에 있는 왕당파 군대로 향하고 있었다. 바이런은 수송대를 이끌고 가던 중, 의회군의 접근을 인지하고 우스터로 피신하여 지원군을 기다렸다.3. 서막
의회군은 왕당파 군대의 움직임에 늦게 대응하여 코번트리를 거쳐 우스터로 향했다. 의회군은 존 브라운을 보내 왕당파 호송대를 공격하려 했고, 브라운은 기병대를 이끌고 우스터에 도착했다. 에드윈 샌디스 대령은 호송대의 탈출을 막기 위해 포위크로 이동하여 밤을 지새웠다. 한편, 왕당파의 루퍼트 공 역시 기병대를 이끌고 포위크에 도착했지만, 의회군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한 채 휴식을 취했다.
4. 주요 참전 병력과 전술
당시 기병은 용기병(머스킷으로 무장한 기마 보병)과 조총기병(칼, 권총, 기총으로 무장)으로 나뉘어 운용되었다. 의회군은 네덜란드 공화국 군대의 전술을 차용하여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려 했다. 반면 왕당파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사용했던 전술을 변형하여, 기병 돌격을 통해 백병전을 유도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5. 전투
1642년 9월 23일 오후 4시경, 존 브라운과 샌디스는 우스터를 향해 진격했다. 샌디스는 작은 무리의 군대를 이끌고 좁은 포위크 다리를 건너 전진하다가 왕당파 용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의회군은 재집결하여 반격하려 했으나 루퍼트의 기병대에 의해 저지당하고 패배했다. 의회파 용기병은 기병대의 퇴각을 보호하기 위해 포위크 다리에 후위대를 형성했지만, 루퍼트는 추격을 중단했다.
6. 여파
의회파 기병대는 퍼셔까지 후퇴하며 루퍼트의 기병대가 추격해온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양측 모두 약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의회파의 손실이 더 컸다는 보고도 있다. 루퍼트는 이 전투로 효과적인 기병대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포위크 다리 전투는 왕당파가 의회군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하며, 10월 23일 벌어진 엣지힐 전투를 앞두고 양 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호송대는 국왕에게 전달되었고, 루퍼트는 우스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에식스 군이 우스터에 도착하여 4주 동안 머물렀고, 도시는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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