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나리지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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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나리지마번은 1857년 혼고 야스카타가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하며 1만 석 영지를 받아 세워졌으나, 이듬해 직무 태만을 이유로 파면되어 폐지된 번이다. 혼고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의 호코슈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섬겼다. 야스카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히토츠바시 가문 상속을 지지했으나, 안세이 대옥의 일환으로 파면되어 가와나리지마 번은 폐지되었다. 번주였던 혼고 야스카타의 아들 혼고 야스요시는 구 영지에서 미츠마타 생산에 힘썼으며, 후지시 지역의 제지업 진흥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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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나리지마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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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의 역사
가와나리지마는 대대로 상급 하타모토인 혼고 가문/本郷氏일본어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조상은 와카사국 오이군 출신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호코슈(奉公衆일본어)였다. 센고쿠 시대 때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사관했다고 한다.
막부 말기의 안세이 4년(1857년), 당시의 혼고 가문 당주였던 혼고 야스카타가 소바슈(側衆일본어)에서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소령 7천 석에 3천 석이 추가되면서 1만 석의 가와나리지마번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는 직무 태만을 이유로 안세이 5년(1858년)에 와카도시요리의 직책에서 파면되어 영지가 몰수되었다. 이에 따라 가와나리지마 번은 폐번되었다.
2. 1. 전사(前史)
혼고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에 봉공중으로 섬기다가,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초청되어 에도 막부 창설 시에 주자반을 맡았던 혼고 노부토미의 자손에 해당한다. 혼고 노부토미의 손자인 혼고 가쓰요시는 어사반 등을 맡아 2300석까지 가증되었고, 그의 아들 혼고 야스카쓰가 동생에게 분지했기 때문에 지행고는 2000석이 되었다.『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에 따르면, 1674년에 가와나리지마 마을은 혼고 씨의 지행지가 되었다.『간세이 중수 제 가보』에 따르면, 같은 해에 가독을 이은 혼고 히사야스(야스카쓰의 양자)가 1705년에 가이국 야시로군의 지행지를 스루가국 후지군으로 옮겼다고 한다. 후의 야스카타에 의한 입번까지 약 150년 동안, 가와나리지마는 혼고 가문의 지행지였다.
혼고 가문의 당주들은 대부분 코쇼나 쇼인반 등을 맡았다. 히사야스에서 5대째에 해당하는 혼고 야스유키는 도쿠가와 이에하루 아래에서 오소바고요토리쓰기를 맡는 등 영달했다.
2. 2. 혼고 야스카타(本郷泰固) 시대
가와나리지마는 대대로 상급 하타모토인 혼고 가문/本郷氏일본어이 지배하고 있었다. 혼고 가문의 조상은 와카사국 오이군 출신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호코슈(奉公衆일본어)였다. 센고쿠 시대 때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사관했다고 한다.혼고 야스카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히토츠바시 가문 상속 실현을 위해 진력했고, 안세이 4년(1857년)에 측근에서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했다. 이때 3000석의 가증을 받아 지행은 1만 석에 달했고, 가와나리지마번이 입번했다.
그러나 야스카타는 안세이 5년(1858년) 7월, "차시히카에"(差控, 출근 정지)를 명령받았고, 와카도시요리 직에서 파면되었다. 겉으로는 직무 태만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히토츠바시 파로 여겨졌기 때문의 처분으로 보이며, 안세이 대옥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다음 해 안세이 6년(1859년) 10월, 야스카타는 5000석을 삭감한 후, 은거・근신이 명해졌다. 이로 인해 가와나리지마 번은 폐번되었다.
2. 3. 번 이후의 역사
막부 말기의 안세이 4년(1857년), 혼고 야스카타가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하면서 가와나리지마 번이 세워졌으나, 안세이 5년(1858년) 직무 태만을 이유로 파면되어 영지가 몰수되면서 폐번되었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만연 원년(1860년) 9월 야스카타는 근신 처분이 해제되었다.야스카타의 아들 혼고 야스요시는 막부 붕괴 이후 구 영지에 머물면서 구 막신들을 받아들여 삼지닥나무 생산에 힘썼다. 후지 제지 공장 유치에 관여하는 등, 현재의 후지시 지역에서의 제지업 진흥의 일익을 담당했다고 한다.
3. 역대 번주
; 혼고가(本郷家)
1만 석. 후다이.
# 혼고 야스카타
3. 1. 혼고 가문(本郷家)
혼고 야스카타(本郷泰固)는 1만 석을 가진 후다이 다이묘로, 1857년부터 1858년까지 가와나리지마 번을 다스렸다.4. 영지(領地)
4. 1. 가와나리지마(川成島)
후지강은 하류역에서 많은 파천을 동반하며 난류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가와나리지마 마을은 후지강 하구역에 위치한 마을로, 후지강 도선의 거점이기도 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다케다 신겐군은 후지강을 등지고 가와나리지마에 포진했지만, 홍수로 인한 피해를 입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이초 7년(1602년), 도카이도의 도선 역은 가와나리지마 마을에서 우안 쪽의 이와부치 마을(현재의 후지시 이와부치)로 옮겨졌고, 도선 명주들도 가와나리지마에서 이와부치로 이주했다.
가와나리지마 진야는 가와나리지마 마을의 가와나리지마 덴노샤 앞에, 현재의 신후지역 남쪽에 있었다. 혼고 가문이 다이묘가 되었을 때, 나가야문이 있는 진야를 조영했다. 메이지 이후, 이 저택은 혼고 가문의 지행지에서 용인을 맡고 있던 와다 가문이 계승했다. 그러나 1939년(쇼와 14년)부터 1940년(쇼와 15년)에 걸쳐 건물의 대부분은 철거되었다. 진야 터에는 해자와 돌담의 일부만 남아있다.
진야의 나가야문에 대해서는 엔도 가문이 양도받아, 가와나리지마에서 후지노미야시의 후지산 혼구 센겐 타이샤 동쪽으로 이축되어 요정 「다카시마가」의 정문에 사용되었다. 「다카시마가」의 폐업 후, 2003년에 토지와 건물을 후지노미야시가 취득했다. 전시 시설 「나가야문 역사의 관」 및 레스토랑·상업 시설로서 운영자의 변천을 거치면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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