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우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우초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남부 지역에서 유래된 기마 민족으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세기부터 라플라타 강 유역에서 스페인 농업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인디오와의 항쟁 속에서 야생 소와 말을 쫓아 생계를 유지하는 유목민의 형태로 변화했다. 19세기에는 독립 전쟁과 내전에서 활약하며 민족주의적 상징으로 부상했지만, 19세기 후반 서구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했다. 오늘날 가우초는 숙련된 기마술과 전통 문화를 간직한 채, 관광, 축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2. 어원

"가우초"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었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33년에 이미 한 작가는 36가지의 다른 이론을 언급했으며, 최근에는 50가지가 넘는 이론이 존재한다.

가우초는 과라니족의 '고아'나 '방랑자'를 가리킨 말이 어원으로 추측되며, 마푸체족의 말로 '친구'(가츄)를 나타낸다는 설도 있고, 브라질 남부 방언으로 "소잡는 사람"(가우데리오)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원래는 페루 방면에서 라 플라타 지방을 개척하러 온 스페인 농업 이민자를 가리키던 말이었지만, 인디오와의 항쟁 중에 점차 농업을 포기하고 야생 을 쫓아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라 플라타에서 태어난 가우초는 1680년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건설로 시작된 반다 오리엔탈을 둘러싼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경쟁 중에 브라질 남부에도 전파되어, 히우그란지두술주를 중심으로 포르투갈어로 가우슈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카우보이와 비슷한 일을 했으며, 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이 많아졌다.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몬테비데오 상인에게 수출용 소나 말의 가죽과 고기를 도매하는 일에 종사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는 하층 계급의 부랑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흑인(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아프리카계 우루과이인) 등도 포함되었다.

"가우초"에 대한 몇 가지 제안된 설명
#제안자추정 근원과 진화반대(들)토론
1에메릭 에섹스 비달영어 'gawky' (어색한, 거친)와 같은 어원가장 초기의 이론 (1820), "유머러스하다"며 기각Paullada 1961; Trifilo 1964
2몽로와 디에스프랑스어 'gauche' (거친, 세련되지 못한) > 아르헨티나 가우초프랑스어가 이 지역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음Paullada 1961
3에밀리오 데리아랍어 'chauch' (목동) > 안달루시아 스페인어 chaucho > 인두음 아메리카 원주민 가우초스페인어 chaucho는 증명되지 않음. 인디언이 "chaucho"를 발음할 수 없었다는 것은 유지할 수 없다.Groussac 1904; Paullada 1961; Trifilo 1964; Gibson 1892;
4로돌포 렌츠페우엔체어 'cachu' (친구) 또는 아라우칸어 'kauchu' (영리한 남자) > 아르헨티나 가우초반대의 경우였을 수도 있다는 증거 없음Paullada 1961; Hollinger 1928
5마르티아노 레기사몬케추아어 'huajcho' 또는 'wáhča' (고아, 버려진, 부랑자) > 식민지 스페인어 guacho > 음운 전위에 의한 아르헨티나 가우초Guacho > 가우초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음운 전위. 이 이론은 브라질 gaúcho를 설명하지 않는다.Groussac 1893; Groussac 1904; Paullada 1961; Rona 1964;
6비쿠냐 매케나칠레 케추아어 또는 아라우칸어 'guaso' (현대 철자 huaso') (시골 사람 또는 카우보이) > guacho > gaucho5번과 동일.Hollinger 1928
7레만-니체Gitano (즉, 스페인 로마어) 'gachó' (외국인) > 안달루시아 gachó (보헤미안, 방랑자) > 아르헨티나 가우초 또는 브라질 gaúcho전환 설명되지 않음Lehmann-Nitsche 1928
8폴 그루삭라틴어 gaudeo (나는 즐긴다) > 스페인어 'gauderio' (농민, 삶을 즐기는 사람) > 우루과이 gauderio (낮은 사람, 가축 도둑) > 경멸적 *gauducho > gaúchogaucho*Gauducho는 증명되지 않았으며 언어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음. 가우초로의 전환은 있을 법하지 않음Groussac 1904; Paullada 1961; Hollinger 1928; Rona 1964
9Buenaventura Caviglia, Jr'*Garrucho' (스페인어 garrocha에서 유래, 가축 막대) > gaúcho, "흑인 영향 아래" > 가우초가축 막대 기원은 있을 법하지 않은 추측; 흑인 이론은 유지할 수 없음Rona 1964
10페르난도 O. 아순상학습된 스페인어 'gaucho' (수학 및 건축에서 "수평이 아님", "뒤틀린")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엘리트 기술 용어Assunção 2011; Hollinger 1928.



우루과이 가우초의 초기 묘사 (에메릭 에섹스 비달,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 비데오의 그림 같은 삽화'', 1820)


이 단어가 라플라타 강 북쪽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고려할때, 우루과이의 사회언어학자 호세 페드로 로나는 이 단어의 기원이 "우루과이 북부에서 아르헨티나의 코리엔테스주와 그 사이의 브라질 지역에 이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의 국경 지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세 페드로 로나는 두 형태, 즉 ''gaúcho''와 ''gaucho'' 중에서 전자가 먼저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gaúcho''가 억양 변화를 통해 ''gáucho''로 진화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언어적으로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오귀스탱 생틸레르는 1820년 10월 16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 ''Ces hommes sans religion et sans morale, le plus part indiens ou métis, que les Portugais désignaient sous le nom de "Garruchos ou Gahuchos".'' (종교나 도덕성이 없는 이들, 대부분 인디언이나 혼혈인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이들을 ''Garruchos'' 또는 ''Gahuchos''라고 불렀다).


요약하면, ''gaúcho''는 우루과이-브라질 방언 경계 지역에서 유래되었으며, 경멸적인 토착어 ''garrucho''에서 파생되었고, 스페인 지역에서 억양 변화를 통해 ''gaucho''로 진화했다.

3. 역사

19세기에 들어 가우초는 각지의 카우디요에 이끌려 1806년, 180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공격해 온 영국군을 물리쳤다. (영국의 라플라타 침략) 싸움에 능한 특성 상 이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의 독립전쟁과 내전에도 종군 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학자 마르티니아모 레기사몬은 "자신의 란초에 처자를 남겨두고, 봉급도 옷도 받지 않고, 때로는 약간 허용된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술, 담배, 마테차에도 미련을 버리고 진군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음을 넘어 굳센 긍지를 가지고 깃발 아래에서 죽을 각오를 하며, 스스로를 믿는 자에게는 조금의 속임수 없이 신뢰하고, 백병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적진에 뛰어든다. 이것이 가우초이다."라고 기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스스로도 목장주였고, 젊은 시절부터 가우초에 둘러싸여 가우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시대(1829년~1852년)에 가장 우대받았으며, 국내의 중앙 집권파나 영국,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찰스 다윈이 1833년에 황야 정복 작전에서 팜파의 인디오를 토벌하는 로사스의 군대를 보았을 때 인디오와 싸우는 영웅으로서 로사스 장군을 칭찬하면서도 "혼혈과 흑인뿐이며, 이런 악당 같은 도적 떼의 군대는 전대미문이다", "가우초와 농민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가우초는 언제나 너그럽고 친절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무례한 자나 불친절한 자는 본 적이 없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겸손하지만, 동시에 무모하고 용감하다."라고 기록했다.

1852년의 카세로스 전투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로사스 시대가 끝나고, 1862년에 자유주의자 바르톨로메 미트레 주도로 전 아르헨티나가 통일되어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성립되자, 이전의 카우디요 정치에 대한 반동과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로 인해 1868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가우초를 "근성이 삐뚤어진 두 다리의 동물"이라고 부르며, 스페인적인 낡은 것, 야만적인 것의 표본처럼 취급하여 혐오했다. 1878년부터 시작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사막 정복 작전에 대표되는 팜파 남부, 파타고니아에서의 주로 마푸체족을 비롯한 일련의 수렵 인디오와의 싸움에서 가우초는 선주민의 축출·살육을 위해 징병되었고, 니콜라스 아베자네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근대화의 장벽으로 간주했던 가우초와 인디오를 서로 싸우게 했다. 그 후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로의 대규모 이주에 따른 목축업의 발전, 소유지의 확정과 철조망의 도입 등으로 인해 팜파가 세분화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공간이 되면서 거의 소멸했다.

3. 1. 기원

17세기에 유목 기마병들은 팜파스에서 야생 소를 사냥하면서 사회 계층으로 시작되었다. 리처드 W. 슬라타는 "소, 말, 타조[6] 및 기타 야생 동물이 풍부한 팜파스의 엄청난 자연적 풍요는 숙련된 기마병과 사냥꾼이 가죽, 깃털, 모피를 팔고 공짜 쇠고기를 먹으면서 영구적인 고용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팜파의 풍요로움은 가우초의 독립적이고 이주적인 삶과 정착된 생활 방식에 대한 혐오를 형성했다."라고 하였다.
스페인 관료 펠릭스 데 아자라, 고야 작품


원래 가우초는 전형적으로 이베리아 남성과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사이의 결합에서 비롯되었지만, 아프리카 조상도 가질 수 있었다.

가우초는 18세기에 반다 오리엔탈(현재의 우루과이)을 관할했던 스페인 식민 당국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이름으로 언급된다. 그들에게 그는 무법자, 소 도둑, 강도 및 밀수업자였다. 펠릭스 데 아자라 (1790)는 가우초를 "리오 데 라 플라타와 브라질의 찌꺼기"라고 말했다. "가우초"는 모욕적인 표현이었지만, 적대감 없이 일반적으로 시골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가우초의 기술은 강도질이나 밀수에 유용했지만, 국경 경찰에서 복무하는 데에도 똑같이 유용했다. 스페인 행정부는 밀수 방지 부대인 쿠에르포 데 블란덴게스를 무법자들 중에서 모집했다. 우루과이 애국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그러한 경력 전환을 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우초는 각지의 카우디요에게 이끌려 1806년과 180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쳐들어온 영국군을 격파했고(영국의 라플라타 침략, British invasions of the Río de la Plata), 무예의 달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의 독립 전쟁과 내전에 참전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학자 마르티니아모 레기사몬은 가우초에 대해 "스스로를 믿는 자에게는 조금의 속임수 없이 신뢰하고, 백병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적진에 뛰어든다."라고 기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시대(1829년~1852년)에 가장 우대받았으며, 국내의 중앙 집권파나 영국,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찰스 다윈이 1833년에 황야 정복 작전, Desert Campaign (1833–34)에서 팜파의 인디오를 토벌하는 로사스의 군대를 보았을 때, "가우초는 언제나 너그럽고 친절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무례한 자나 불친절한 자는 본 적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1852년의 카세로스 전투, Battle of Caseros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로사스 시대가 끝났다. 1862년에 자유주의자 바르톨로메 미트레, Bartolomé Mitre 주도로 전 아르헨티나가 통일되어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성립되자, 1868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Domingo Faustino Sarmiento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가우초를 "근성이 삐뚤어진 두 다리의 동물"이라고 부르며, 스페인적인 낡은 것, 야만적인 것의 표본처럼 취급하여 혐오했다. 1878년부터 시작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Julio Argentino Roca의 사막 정복 작전, Conquest of the Desert에 대표되는 팜파 남부, 파타고니아에서의 주로 마푸체족을 비롯한 일련의 수렵 인디오와의 싸움에서 가우초는 선주민의 축출·살육을 위해 징병되었고, 니콜라스 아베자네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근대화의 장벽으로 간주했던 가우초와 인디오를 서로 싸우게 했다. 그 후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로의 대규모 이주에 따른 목축업의 발전, 소유지의 확정과 철조망의 도입 등으로 인해 팜파가 세분화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공간이 되면서 거의 소멸했다.

3. 2. 독립 전쟁과 내전 (19세기)

19세기에 가우초는 각지의 카우디요에 이끌려 1806년과 180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공격해 온 영국군을 물리쳤다. (영국의 라플라타 침략, British invasions of the Río de la Plata) 싸움에 능한 특성상 이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의 독립전쟁과 내전에도 종군했다.

구에메스와 그의 가우초: 재현


가우초는 타고난 기병이었으며, 독립 전쟁에서 애국자로서의 용맹함, 특히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휘하에서의 활약은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이미지를 개선시켰다. 스페인 장군 가르시아 감바는 살타에서 구에메스에 맞서 싸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군은 "가우초"가 모욕적인 표현임을 알고 애국 민병대에게 이를 퍼부었지만, 구에메스는 이를 명예로운 훈장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군대를 "나의 가우초"라고 불렀다.

새롭게 부상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방문한 사람들은 "가우초"가 시골 사람이나 목동을 의미한다고 인식했으며, 경멸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 가우초를 그린 최초의 예술가인 에메릭 에섹스 비달은 그들의 기동성을 언급했다(1820).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한 투쿠만 지방의 가우초 — 아사도의 최초 묘사 (에메릭 에섹스 비달, 1820)


찰스 다윈은 6개월 동안 팜파스에서의 삶을 관찰하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1833).

아르헨티나의 역사학자 마르티니아모 레기사몬은 "자신의 란초에 처자를 남겨두고, 봉급도 옷도 받지 않고, 때로는 약간 허용된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술, 담배, 마테차에도 미련을 버리고 진군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음을 넘어 굳센 긍지를 가지고 깃발 아래에서 죽을 각오를 하며, 스스로를 믿는 자에게는 조금의 속임수 없이 신뢰하고, 백병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적진에 뛰어든다. 이것이 가우초이다."라고 기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스스로도 목장주였고, 젊은 시절부터 가우초에 둘러싸여 가우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시대(1829년~1852년)에 가장 우대받았으며, 국내의 중앙 집권파나 영국,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찰스 다윈이 1833년에 황야 정복 작전, Desert Campaign (1833–34)에서 팜파의 인디오를 토벌하는 로사스의 군대를 보았을 때 인디오와 싸우는 영웅으로서 로사스 장군을 칭찬하면서도 "혼혈과 흑인뿐이며, 이런 악당 같은 도적 떼의 군대는 전대미문이다", "가우초와 농민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가우초는 언제나 너그럽고 친절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무례한 자나 불친절한 자는 본 적이 없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겸손하지만, 동시에 무모하고 용감하다."라고 기록했다.

1852년의 카세로스 전투, Battle of Caseros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로사스 시대가 끝나고, 1862년에 자유주의자 바르톨로메 미트레, Bartolomé Mitre 주도로 전 아르헨티나가 통일되어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성립되자, 이전의 카우디요 정치에 대한 반동과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로 인해 1868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Domingo Faustino Sarmiento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가우초를 "근성이 삐뚤어진 두 다리의 동물"이라고 부르며, 스페인적인 낡은 것, 야만적인 것의 표본처럼 취급하여 혐오했다. 1878년부터 시작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Julio Argentino Roca의 사막 정복 작전, Conquest of the Desert에 대표되는 팜파 남부, 파타고니아에서의 주로 마푸체족을 비롯한 일련의 수렵 인디오와의 싸움에서 가우초는 선주민의 축출·살육을 위해 징병되었고, 니콜라스 아베자네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근대화의 장벽으로 간주했던 가우초와 인디오를 서로 싸우게 했다. 그 후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로의 대규모 이주에 따른 목축업의 발전, 소유지의 확정과 철조망의 도입 등으로 인해 팜파가 세분화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공간이 되면서 거의 소멸했다.

3. 3. 쇠퇴와 변화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에 명시된 유럽 이민 장려 정책은 가우초를 포함한 인구가 희소한 내륙 지역의 "하위 인종"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배층은 그들이 희망이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다고 믿었다.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는 가우초가 대담하고 시골의 지혜에 능숙하지만, 잔인하고 무능하며, 불결하게 게으르게 살고, 카우디요(지방의 실력자)를 지지함으로써 국가 통합의 장애물이라고 썼다. 헌법 제정자인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는 "통치하는 것은 인구를 늘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852년의 카세로스 전투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시대가 끝나고, 1862년에 바르톨로메 미트레 주도로 전 아르헨티나가 통일되어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868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가우초를 "근성이 삐뚤어진 두 다리의 동물"이라고 부르며, 스페인적인 낡은 것, 야만적인 것의 표본처럼 취급하여 혐오했다. 1878년부터 시작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사막 정복 작전에 대표되는 팜파 남부, 파타고니아에서의 주로 마푸체족을 비롯한 일련의 수렵 인디오와의 싸움에서 가우초는 선주민의 축출·살육을 위해 징병되었고, 니콜라스 아베자네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근대화의 장벽으로 간주했던 가우초와 인디오를 서로 싸우게 했다. 그 후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로의 대규모 이주에 따른 목축업의 발전, 소유지의 확정과 철조망의 도입 등으로 인해 팜파가 세분화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공간이 되면서 거의 소멸했다.

1882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바라데로에스탄시아의 노동자


정치적 안정성이 달성되자 1875년경부터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 나라의 민족 구성이 바뀌었다. 1914년에는 아르헨티나 주민의 40%가 외국 태생이었다.

1876년부터 저렴해진 철조망은 팜파를 울타리로 만들었고 "그리하여 가우초 카우보이의 필요성을 없앴다". 가우초는 땅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찾아 시골 마을로 떠돌았지만, 일부는 소작인으로 남아 있었다. 커닝엄 그레이엄은 1870년대에 가우초로 살다가 1914년에 "그의 첫사랑인 아르헨티나"로 돌아왔고, 그곳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끊임없이 비난했던 진보가 가우초를 사실상 멸종시켰다".

우루과이의 3분의 2는 리오 네그로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1870~1880년대에 가장 집중적으로 울타리가 쳐졌다. 가우초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종종 ''pueblos de ratas''(문자 그대로 쥐 마을, 시골 빈민가)에 살도록 내몰렸다.

리오 네그로 북쪽에서는 이동하는 가우초가 비교적 오랫동안 생존했다. 중앙 정부는 시골에 대한 권력을 통합하는 데 실패했고, 가우초가 지휘하는 군대는 1904년까지 이에 계속 저항했다. 예를 들어, 사비아스와 같은 격동적인 가우초 지도자들은 유럽 이민이 훨씬 적었던 브라질 국경 너머의 소 사육업자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19세기 말까지 국경 지대에서 흔해지지 않았다.

브라질의 혁명적인 전투는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독재 아래 1930년까지 끝났고, 그는 사설 가우초 군대를 무장 해제하고 공공 장소에서 총기 소지를 금지했다.

4. 문화

가우초는 이 지역, 특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의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15] 많은 사람들에게 가우초의 필수적인 속성은 그가 숙련된 기마술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티슨은 1882년에 "그는 걷기도 전에 승마를 처음 배웠다"고 언급했다. 말 없이는 가우초는 스스로 무력감을 느꼈다. 19세기의 남부 콘 전쟁 동안, 모든 측의 기병대는 거의 전적으로 가우초로 구성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와 같은 가우초 군대는 스페인의 진격을 늦추었다. 게다가 많은 카우디요es가 아르헨티나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가우초 군대에 의존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의 팜파스에서 태어난 박물학자 윌리엄 헨리 허드슨은 어린 시절의 가우초들이 말 없는 사람은 다리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기록했다.

''크리오요'' 말은 작지만 튼튼했다. 안토니오 가짜노의 ''엘 탐보 데 키리노''(1873년), 캔버스에 유채 (세부), 포르타바트 미술 컬렉션. 가우초의 ''파콘''(단검-검)에 주목하라.


''감독관들'', 1861년, 프릴리아노 푸에이레돈의 세심한 묘사. "그들은 거의 걷는 법을 모른다... 대화가 몇 시간이나 이어져도 그들은 말 위에 머물러 있다."


가우초가 말을 사용하여 소를 모으고, 표시하고, 몰고 가거나 길들이고, 어망을 끌고, 타조를 사냥하고, 멧도요를 덫으로 잡고, 우물물을 끌어오고, 심지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장례식까지 말을 타고 갔다고 언급한다. 가우초에게 말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었다. 허드슨은 "그는 매일 광활한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보고, 빠르게 판단하며, 항상 배고픔과 피로, 격렬한 온도 변화, 크고 갑작스러운 위험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우초는 모든 말을 같은 색으로 소유하는 것을 열정으로 삼았다.

''히네테아다''(Jineteada), 브롱코 타기와 유사한 현대 스포츠. 15초 동안 버텨야 한다; 진짜 가우초 스포츠는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었다.


리처드 W. 슬라타는 19세기 가우초들이 즐기던 극한의 승마 스포츠의 사례들을 수집했다. 이러한 스포츠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우초들이 팜파스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용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스포츠의 대부분은 엘리트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 크라우딩(Crowding): 두 명의 남자가 서로 밀어내기 위해 말을 박차며, 각자의 목표는 상대방을 특정 장소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 ''친차다''(Cinchada): 꼬리를 맞댄 채 말을 타는 줄다리기로, 밧줄은 안장에 묶였다.
  • ''페찬도''(Pechando): 두 명의 기수가 전속력으로 달려 서로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 바 넘기기: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 문 위에 바가 놓였다. 가우초는 질주하며 바 위를 뛰어넘어 안장으로 다시 착지했다.
  • ''마로마''(Maroma): 가우초가 바에서 경주하는 야생마나 야생 황소의 등에 뛰어드는 변형된 경기.
  • 레카도(Recado): 기수는 팜파스를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자신의 ''레카도''(다층 안장)를 풀고 조각들을 떨어뜨렸다.
  • ''피알라르''(Pialar), 특히 위험한 스포츠. 한 남자가 가우초 무리를 지나 말을 몰았고, 가우초들은 그의 말 다리에 올가미를 던졌다.
  • ''라 소르티하''(La sortija): 창을 든 기수가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실에 매달린 작은 고리를 꿰뚫어야 했다.
  • ''파토''(Pato): 말 위에서 하는 럭비와 유사한 게임이지만, 몇 마일에 걸쳐 진행된다.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마테es를 마시고 기타를 치는 가우초


리처드 구이랄데스가 돈 세군도 솜브라es를 쓰도록 영감을 준 세군도 라미레스


호세 에르난데스에 의해 쓰여진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es는 아르헨티나의 국가 서사시로 간주되기도 한다. 부패에 맞서고 유럽화 경향에 맞서는 아르헨티나의 국가적 전통의 상징으로 가우초를 사용했다. 시의 영웅인 마르틴 피에로는 국경 전쟁을 위해 아르헨티나 군대에 징집되어 탈영하여 무법자가 된다. 자유로운 가우초의 이미지는 종종 브라질 북부 땅에서 일했던 노예들과 대조를 이룬다. 더 많은 문학적 설명은 리카르도 구이랄데스의 돈 세군도 솜브라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우초는 일반적으로 강하고, 정직하며, 과묵한 유형으로 알려졌지만, 자부심이 강하고 도발당하면 폭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가우초가 사용하는 파콘es은 (가우초의 허리띠 뒤에 일반적으로 꽂아두는 큰 칼) 전설적이며, 종종 상당한 유혈 사태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파콘es은 일반적으로 가우초가 휴대하는 유일한 식사 도구였다.

가우초의 식단은 목초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쇠고기로 구성되었으며, 예르바 마테 잎으로 만든 허브차인 마테]]/마테 (음료)es로 보충되었다. 예르바 마테는 겨우살이의 일종으로 카페인과 영양소가 풍부하다. 마테es를 위한 물은 주전자에 담아 끓기 직전까지 데우고, 전통적으로 속이 빈 호리병에 담아 밤비야es라는 금속 빨대를 통해 마셨다.

가우초는 북미 카우보이와는 매우 다른 복장과 도구를 사용했다. 가우초는 올가미 외에도 볼라스es 또는 볼레아도라스es(볼레아데이라스pt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전형적인 가우초 복장에는 판초 (안장 담요와 침구로 사용), 파콘es (단검), 레벤케es라고 불리는 가죽 채찍, 그리고 봄바차/wikt:bombachaes라고 불리는 헐렁한 바지나 치리파/

그들의 임무는 소를 목초지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와 같은 시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예라es는 동물의 소유자 표식으로 동물을 낙인 찍는 것이다.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그들의 일반적인 활동 중 하나였다. 길들이기는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는 거래였으며, 야생 망아지를 길들이는 경연 대회는 축제에서 여전히 열렸다. 대부분의 가우초는 문맹이었고 시골 사람으로 여겨졌다.

가우초는 풀페리아라고 알려진 작은 상점을 자주 방문했는데, 이곳은 잡화점, 선술집, 때로는 훔친 물건을 팔아넘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풀페리아는 일반적으로 시골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예르바 마테, 술, 담배, 설탕, 옷, 말 장비 및 시골에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기타 물품을 판매했다.[16]

4. 1. 복장과 도구

4. 2. 생활 방식

많은 사람들에게 가우초의 필수적인 속성은 숙련된 기마술이다. 1882년 스코틀랜드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데이비드 크리스티슨은 "그는 걷기도 전에 승마를 처음 배웠다"고 언급했다. 말 없이는 가우초는 스스로 무력감을 느꼈다. 19세기의 남부 콘 전쟁 동안, 모든 측의 기병대는 거의 전적으로 가우초로 구성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와 같은 가우초 군대는 스페인의 진격을 늦추었다. 게다가 많은 카우디요es가 아르헨티나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가우초 군대에 의존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의 팜파스에서 태어난 박물학자 윌리엄 헨리 허드슨은 어린 시절의 가우초들이 말 없는 사람은 다리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음식 때문에 구걸해야 했지만 품위 있게 행동하며 말을 타고 다니는 눈먼 가우초를 만난 것을 묘사했다. 가우초에 대한 학술 저술의 저자인 리처드 W. 슬라타는 가우초가 말을 사용하여 소를 모으고, 표시하고, 몰고 가거나 길들이고, 어망을 끌고, 타조를 사냥하고, 멧도요를 덫으로 잡고, 우물물을 끌어오고, 심지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장례식까지 말을 타고 갔다고 언급한다.

명성으로 전형적인 가우초 카우디요es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도 모자를 땅에 던지고 갤럽을 하면서 손으로 안장을 만지지 않고 주울 수 있었다. 가우초에게 말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었다. 허드슨은 "그는 매일 광활한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보고, 빠르게 판단하며, 항상 배고픔과 피로, 격렬한 온도 변화, 크고 갑작스러운 위험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명한 copla]]/

{{verse translation|lang=es|

Mi caballo y mi mujer

viajaron para Salta,

el caballo que se vuelva,

mi mujer que no me hace falta.

|

내 말과 내 여자는

살타로 떠났네

말은 돌아오라

내 여자 따위는 필요 없어.

}}

가우초는 모든 말을 같은 색으로 소유하는 것을 열정으로 삼았다. 허드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말을 타는 가장 가난한 노동자부터 토지와 소의 가장 큰 소유주에 이르기까지 가우초는, 또는 그 당시에는 모든 승마용 말을 한 가지 색상으로 갖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사람은 규칙적으로 그의 트로필라(tropilla) — 자신의 반 다스 또는 한 다스 이상의 안장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가능한 한 비슷하게 만들어서 한 사람은 밤색, 다른 사람은 갈색, 베이, 은색 또는 철 회색, 검은색, 검은 반점 말, 흰색 또는 얼룩말 말을 가지고 있었다.


카우디요es 차초 페냐로사는 자신의 인생의 최저점을 "칠레에서 − 그리고 걸어서!"라고 묘사했다.(En Chile y a pie.es)

리처드 W. 슬라타는 19세기 가우초들이 즐기던 극한의 승마 스포츠의 사례들을 수집했다. 이러한 스포츠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우초들이 팜파스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용기가 필요했다. 가우초들은 말들이 흔했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대했다. 가난한 가우초조차도 보통 열두 마리의 ''트로필라''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스포츠의 대부분은 엘리트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1920년대 초에 글을 쓴 한 방문객은 옛 가우초 승마 기술들이 사라졌다고 관찰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기수도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마로마나 피알라르를 하지 않았다. 그는 현대 에스탄시아의 목부들은 "정말 나쁜 말을 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우초 선배가 거의 모든 말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는 정교하게 연마된 승마 기술을 잃어버렸다.

4. 3. 현대의 가우초

가우초의 울타리 설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우초의 필요성을 종식시켰지만, 북아메리카카우보이 문화와 마찬가지로, 가우초 문화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과 얽혀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시골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이 되고 있다. 가우초의 역할은 유목적인 목동에서 엘리트 승마 기술을 갖춘 목장 일꾼이자 축산업자로 진화했다. 오늘날 가우초들은 대규모 에스탄시아에서 소, 양, 말을 돌보며 가우초의 삶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트럭, 전지형 차량 및 현대 장비가 현대 작업에 통합되었지만, 이 지역의 험준한 지형과 문화를 기리기 위해 여전히 승마 기술이 중요하다.

가우초의 삶이 소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쇠고기는 여전히 그들의 요리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사도라고 알려진 대규모 요리 행사의 전통[15]은 특정 지역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이 행사는 킨초라고 알려진 대형 그릴과 야외 주방이 설치된 별채에서 열린다. 일반적인 음식으로는 불에 구운 고기와 치미추리, 엠파나다 및 마테(음료)와 같은 주식이 있다.

구전은 가우초의 유산을 유지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민속 음악은 종종 사랑, 시골 생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파야다와 같은 장르는 이러한 구두 스타일 매체를 강력하게 사용하며, 파야도르라고 알려진 공연자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승자가 분명해질 때까지 즉흥적인 구절을 주고받는 대결을 펼친다.[17]

가우초와 일반적으로 연관된 의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전통 의상은 여전히 축제와 행사에서, 그리고 파라도르라고 알려진 관광객을 위한 특정 에스탄시아에서 작업복으로 착용되기도 한다. 파콘은 상징적인 의미로, 그리고 고기를 자르기 위해 아사도에서 여전히 자주 착용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의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농업 방식을 추구하는 가우초의 이념에서 영감을 얻었다. 풀을 먹여 키운 쇠고기에 대한 대중의 지지, 생물 다양성 유지, 생태 관광은 현대 가우초의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일치한다. 가우초의 라이프스타일은 문화적으로 크게 낭만화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서부 지역의 게스트 랜치와 마찬가지로 에스탄시아에서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다. 이러한 목장에서 손님들은 승마, 로핑과 같은 전통적인 활동에 참여하며, 물새, 붉은 사슴 사냥과 송어 낚시와 같은 다른 야외 활동도 일반적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직업, 사회 계층으로서의 가우초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현재 아르헨티나인, 우루과이인과 브라질 남부의 히우그란지두술 주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가우초(포르투갈어로는 가우쇼)를 자칭한다.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가우초스럽다"고 하면 관대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며, "가우초답게 행동한다"고 하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고, "가우초의 말"이라고 하면 그것은 "무사의 한마디"를 의미한다. 여행자나 거주자들이 종종 말하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강렬한 개인주의는 가우초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탱고의 악곡에 "가우초의 탄식"이 있으며, 강한 질투심을 가진 가우초가 등장하는 가사가 붙어있다.

덧붙여 직업으로서의 소몰이꾼은 바케로, 소몰이꾼에 한정되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는 고용인은 페온이라고 불린다.

일본에서는 2016년경부터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가우초 팬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가우초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큐롯 스커트와 비슷하여 "다리의 짧음과 굵기를 커버할 수 있으며 움직이기 쉽고 약간 귀엽다"는 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여겨진다.

5. 대중문화

마르틴 피에로es(1872)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세 에르난데스가 쓴, 동명의 가우초의 삶을 그린 2,316행의 서사시이다. 1968년에는 이 시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아르헨티나 영화가 제작되었다.

1819년 연방 동맹의 호세 아르티가스es와 함께 싸운 바르톨로메 이달고es는 가우초를 새로운 국가의 정신을 반영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가우초 문학es을 시작했다. 가우초 문학은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es』 등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국민 문학이 되었다.

진 티어니와 로리 칼훈이 출연한 1952년 영화 ''가우초의 길'', 더글러스 페어뱅스가 출연한 1927년 영화 ''가우초'', 1817년 아르헨티나 북부 살타에서 스페인 왕당파에 맞선 가우초 전쟁을 배경으로 한 1942년 아르헨티나 영화 라 게라 가우차es 등이 가우초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디즈니의 1942년 장편 애니메이션 묶음 영화 살루도스 아미고스es의 세 번째 부분은 "엘 가우초 구피"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카우보이 구피가 아르헨티나 팜파스로 신비하게 끌려가 토착 가우초의 방식을 배우는 내용이다. 미국의 서부극 ''쓰리 메스퀴티어스'' B급 영화인 ''엘 도라도의 가우초''(1941)도 있다.

스틸리 댄의 1980년 앨범 ''가우초''에는 같은 이름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데이브 매튜스 밴드의 2012년 앨범 어웨이 프롬 더 월드에도 ''가우초''라는 노래가 수록되었다.

로베르토 폰타나로사의 이노도로 페레이라es는 가우초에 대한 아르헨티나 유머 만화 시리즈이다.

알베르토 게르추노프가 쓴,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가우초에 대한 1910년 소설 ''유대인 가우초''는 1975년 영화 로스 가우초스 후디오스es로 각색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의 마스코트는 가우초이다.

6. 각주




참조

[1] 웹사이트 Folklore Paraguayo https://www.mre.gov.[...] 2024-07-17
[2] 웹사이트 El Tribuno https://www.eltribun[...]
[3] 문서 Copla mocking the besiegers of Montevideo and incident in São Borja
[4] 문서 Extinction of the Charrua language
[5] 문서 Comparison of theories on the origin of "garrucho"
[6] 문서 Reference to the Rhea (bird)
[7] 문서 See the article on that artist.
[8] 문서 Meaning of "gringo" in Argentina
[9] 문서 Voces usadas con generalidad en las Repûblicas del Plata, la Argentina y la Oriental del Uruguay
[10] 문서 Francisco Muñiz
[11] 문서 Examples of gaucho terms
[12] 문서 Gaucho references in censuses and farm records
[13] 문서 References to DeLaney (1996) and Goodrich (1998)
[14] 문서 Adolfo Prieto's thesis
[15] 학술지 The Horsemen of the Americas https://www.jstor.or[...] 1962
[16] 학술지 Between the Gaucho and the Tango: Popular Songs and the Shifting Landscape of Modern Argentine Identity, 1895-1915 https://www.jstor.or[...] 2011
[17] 학술지 The Gaucho Poetry of Argentina https://www.jstor.or[...] 19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