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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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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내궁은 8세기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 유학생으로, 발해에서 음악(음성)을 배우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불운을 겪었다. 덴표 12년(740년) 제2차 견발해사에 대사 오오토모 이누카이를 따라 발해로 건너가 음악을 배운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계 도래인 씨족 출신으로 발해에 파견된 배경으로 추정된다. 덴표호지 7년(763년) 귀국선에서 폭풍을 만나 일가족이 희생되는 사건을 겪었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호키 4년(773년) 발해 사신이 그의 안부를 묻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형제에 비유하는 등, 고내궁은 발해와 일본 간 외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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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개인 정보
본명미상
예명고내궁
출생일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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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미상
국적미상
거주지미상
직업 및 활동
직업미상
장르미상
악기미상
활동 시기미상
관련 활동미상
가족 정보
배우자미상
가족미상
기타
서명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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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내궁은 덴표 12년(740년) 견발해사의 일원으로 오오토모노 이누카이를 따라 발해에 건너가 음악을 배웠다.[1] 덴표호지 7년(763년) 일본으로 돌아오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했고, 이타부리노 카마타의 명령으로 아내를 잃었다.[6]

호키 4년(773년) 발해사 우시후츠가 고내궁의 안부를 확인하러 일본에 온 것으로 보아, 발해에서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7]

2. 1. 발해 파견 및 음악 학습

덴표 12년(740년) 제2차 견발해사에서 음성(音樂)을 배우기 위해 대사 오오토모 이누카이를 따라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1] 고씨는 여러 계통이 있으나,[2] 모두 고구려도래 씨족이므로, 고내궁도 고구려계 도래 씨족의 한 사람이며, 이 사실이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식되었던 발해에 파견된 배경으로 추정된다.[3] 음성은 음악을 뜻하며,[4] 특히 피리를 중심으로 한 발해악의 악기 주법으로 보인다.[5]

덴표호지 7년(763년) 제7차 견발해사의 귀국선(노토)에서, 선사 이타부리노 카마타에게 이끌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나 뱃길을 잃고, 타륜사공이 파도에 휩쓸려 침몰했다. 카마타는 이 재난이 다른 지방의 부녀자와 평범하지 않은 우바새를 승선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사공들에게 명하여 고내궁의 발해인 아내, 록아, 유모, 우바새 등 4명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럼에도 바람이 거세어 10일 남짓 표류하다 오키국에 도착했다.[6] 같은 해 10월, 카마타는 이 조치로 죄를 받아 옥에 갇혔다.

그 후 고내궁의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호키 4년(773년) 제8차 발해사 대사 우시후츠가 노토국에 왔을 때, 과거 발해에서 음성을 배워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전해지는 '''고내궁'''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견사의 명목이라고 밝혔다.[7] 이를 통해 고내궁이 발해악을 배워 일본으로 귀국한 것을 발해가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3] 우시후츠는 발해와 일본을 형제라고 칭하고, 고내궁의 음성 학문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발해가 일본에게 음성을 가르친다는 발해 측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1]

2. 2. 귀국길의 비극

덴표 12년(740년) 제2차 견발해사에서 오오토모 이누카이 대사를 따라 발해로 건너가 음성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1]

덴표호지 7년(763년) 제7차 견발해사의 귀국선(노토)에서, 선사 이타부리노 카마타와 함께 가족과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 폭풍을 만나 뱃길을 잃고 타륜사공이 파도에 휩쓸려 침몰했다. 카마타는 표류의 원인이 다른 지방의 부녀자와 평범하지 않은 우바새를 승선시켰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사공들에게 나이궁의 발해인 아내, 록아, 유모, 우바새 등 4명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 10여 일간 표류하다 오키국에 도착했다.[6] 같은 해 10월, 카마타는 이 조치로 죄를 받아 본래 참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옥에 갇히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2. 3. 발해와 일본의 외교 관계

덴표 12년(740년) 제2차 견발해사에서 오오토모 이누카이 대사를 따라 발해로 건너가 음성(音聲)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1] 고씨는 고구려도래 씨족이므로, 고내궁도 고구려계 도래 씨족의 한 사람이며, 이 사실이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식되었던 발해에 파견된 배경으로 예상된다.[3] 음성(온조)은 음악을 뜻하며,[4] 특히 피리를 중심으로 한 발해악의 악기 주법으로 보인다.[5]

덴표호지 7년(763년) 제7차 견발해사의 귀국선(노토)에서, 선사 이타부리노 카마타에게 이끌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 폭풍을 만나 뱃길을 잃고 오키국에 표류하였다.[6]

호키 4년(773년) 제8차 발해사 대사 우시후츠가 노토국에 왔을 때, 과거 발해에서 음성을 배워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전해지는 '''내웅'''(고내궁)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을 견사의 명목으로 삼았다.[7] 이를 통해 고내궁이 발해악을 배워 일본으로 귀국한 것을 발해가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3] 우시후츠는 발해와 일본을 형제라고 칭하고, 고내궁의 음성 학문에 대해 언급하여, 발해가 일본에게 음성을 가르친다는 발해 측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1]

3. 가계

続日本紀|속일본기일본어에 따른다.[6]

관계이름
아버지불명
어머니불명
아내고씨
? - 763
생모 불명의 자녀고광성


3. 1. 가족의 죽음

続日本紀|속일본기일본어에 따른다.[6]

  • 아버지: 불명
  • 어머니: 불명
  • 아내: 고씨
  • * 딸: (?-763)
  • 생모 불명의 자녀
  • * 아들: 고광성

참조

[1] 서적 大日方 2017
[2] 서적 『新撰姓氏録』左京諸蕃下
[3] 서적 大日方 2017
[4] 서적 雅楽寮 吉川弘文館 1982
[5] 서적 雅楽『新靺鞨』にみる古代日本と東北アジア 校倉書房 2001
[6] 서적 『続日本紀』天平宝字7年10月6日条
[7] 서적 『続日本紀』宝亀4年6月12日条
[8] 서적 日本・渤海間の名分関係 山川出版社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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