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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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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사 천황은 쓰치미카도 천황의 아들로, 1242년에 즉위하여 1246년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한 일본의 제88대 천황이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이온지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으며, 상황이 된 후에는 인세이를 펼쳤다. 고사가 천황은 가메야마 천황이 아닌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면서 지묘인 왕통과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왕통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남북조 시대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1268년에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으며, 127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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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가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사가 천황, 천자섭관어영
고사가 천황, 천자섭관어영
추존호고사가 천황 (後嵯峨天皇)
일본어고사가 천황 ()
구니히토 (邦仁)
법명소가쿠 (素覚)
통치 정보
국가일본
칭호일본 천황
재위 기간1242년 2월 21일 ~ 1246년 2월 16일
일본력 재위 기간닌지 3년 1월 20일 ~ 간겐 4년 1월 29일
즉위례1242년 4월 19일 (닌지 3년 3월 18일)
대嘗祭1242년 12월 6일 (닌지 3년 11월 13일)
시대가마쿠라 시대
연호닌지
간겐
수도교토
쇼군구죠 요리쓰네
구죠 요리쓰구
섭정구죠 요리쓰네
구죠 요리쓰구
간파쿠고노에 가네쓰네 (1242년)
니조 요시자네 (1242년~1246년)
이치죠 사네쓰네 (1246년)
태정대신고노에 가네쓰네 (1241년~1242년)
사이온지 사네우지 (1246년~1247년)
선대 천황시조 천황
계승 천황고후카쿠사 천황
계보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쓰치미카도 천황
배우자후지와라노 깃시 (1242년 결혼)
자녀고후카쿠사 천황
가메야마 천황
무네타카 친왕
생애
출생1220년 4월 1일
사망1272년 3월 17일 (향년 51세)
사망 장소다이가쿠지 (大覚寺), 헤이안쿄
능묘사가노미나미노미사사기 (嵯峨南陵) (교토)

2. 생애



쓰치미카도 천황시코쿠도사국으로 옮겨가자, 고사가 천황은 어머니 쪽 친족에게 양육되었다. 1242년 10세의 시조 천황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황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조정 귀족들과 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기대가 상충하면서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졌다. 구조 미치이에를 비롯한 조정 귀족들은 준토쿠 천황의 아들인 다다나리 친왕을 지지했지만, 싯켄 호조 야스토키조큐의 난에 연루된 준토쿠 천황의 아들을 반대하고 쓰치미카도 천황의 아들인 구니히토 친왕을 중립적인 인물로 지지했다.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11일 동안 왕위가 비어 있었다.[6][7][8]

1242년 구니히토 친왕은 고사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1246년 아들인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여 상황(원정)이 되었다. 1259년에는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강제로 양위하도록 하여 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이 즉위하게 했다. 무네타카 친왕은 호조 섭정 대신 쇼군이 되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은 황실에서 나왔으나, 호조 섭정은 막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섭정 정치 체제를 수립했다.

고사가 천황의 두 아들 후손들은 왕위를 놓고 경쟁하며 지묘인통(고후카쿠사의 후손)과 다이카쿠지통(가메야마의 후손) 두 계열로 나뉘었다. 이들의 계열은 결국 남북조 시대의 분열로 이어졌다.

1272년 고사가 천황이 사망했다. 고사가 천황의 능묘는 교토 덴류지에 있는 사가노미나미노 미사사기(사가 남릉)이다.[9]

2. 1. 초기 생애

고사가 천황은 1220년 쓰치미카도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쓰치미카도 천황이 도사로 유배되면서, 외가 쪽 친척인 나카노인 미치카타와 쓰치미카도 사다미치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11] 쓰치미카도 가문의 몰락으로 인해 어려운 생활을 겪었으며, 20세가 넘도록 출가원복(성인식)을 하지 못했다.[11]

2. 2. 천황 즉위

1242년 시조 천황이 1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황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였다. 구조 미치이에를 비롯한 조정 귀족들은 준토쿠 천황의 아들인 다다나리 친왕을 지지하였으나, 싯켄 호조 야스토키조큐의 난에 연루된 준토쿠 천황의 아들을 반대하고, 중립적인 입장에 있던 쓰치미카도 천황의 아들 구니히토 친왕(후의 고사가 천황)을 지지했다.

결국 호조 야스토키의 지지를 받은 구니히토 왕이 1242년 2월 21일에 고사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11일 동안 황위가 비어있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6][7][8]

2. 3. 치세와 인세이

1242년 2월 21일 고사가 천황은 즉위했다. 당시 궁정의 실력자였던 사이온지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입지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1246년 아들 히사히토 친왕(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서 인세이를 시작했다. 이 해에 정적이던 구조 미치이에가 실각하여 상황이 조정 내 정무를 주도하게 되었다.[15]

이후 고사가 상황은 아네가코지 아키토모, 나카미카도 쓰네타다 등 실무 담당 중급 귀족을 측근으로 등용하여 인세이를 전개했다. 1259년에는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동생 쓰네히토 친왕에게 양위하도록 했다. 1247년 호지의 난 직후 호조 도키요리 등 막부 요인들은 고사가 인세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이전까지 셋케(攝家) 출신 쇼군 대신 고사가 천황의 장남 무네타카 친왕가마쿠라 막부 쇼군으로 옹립하는 데 합의했다. 이후 왕족 출신이 가마쿠라 막부 쇼군직을 이었다. 고사가 천황 시대는 조정 인세이와 막부 정치를 모두 장악한 싯켄 호조 집안과 제휴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으나, 막부와 쇼군에 대한 호조 가문의 영향력은 여전히 조정보다 강력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상황의 인세이조차도 막부의 통제하에 있었다.[17]

1268년 10월 고사가 천황은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고 다이가쿠지로 옮겨갔다. 1272년 2월 사망했다. 고사가 천황이 고후카쿠사 천황이 아닌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훗날의 고우다 천황)을 황태자로 세우면서, 그의 두 아들 후손들은 지묘인 왕통(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과 다이카쿠지 왕통(가메야마 천황의 혈통)으로 나뉘어 황좌를 두고 경쟁했다. 이는 남북조 시대, 나아가 후남조로 이어지는 대란의 원인이 되었다.

2. 4. 사후

고사가 천황이 고후카쿠사 천황이 아닌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훗날의 고우다 천황)을 황태자로 세운 것은 이후 지묘인 왕통(고후카쿠사 천황 계통)과 다이카쿠지 왕통(가메야마 천황 계통)의 대립을 초래했다.[9] 이러한 대립은 남북조 시대와 후남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장기간의 혼란을 야기했다.[9]

고사가 천황의 능묘는 교토 덴류지에 있는 사가노미나미노 미사사기(사가 남릉)로 지정되어 있다.[9]

3. 가계도

大宮院일본어 사이온지 (후지와라노) 기쓰시(1225-1292) - 사이온지 사네우지의 딸


  • * 제4황자 : 히사히토 친왕(1243-1304)
  • * 황녀 : 겟카몬인(月華門院) 소우시 내친왕(1247-1269)
  • * 제8황자 : 쓰네히토 친왕(1249-1305)
  • * 제11황자 : 마사타카 친왕(1254-1256)
  • * 제13황자 : 사다요시 친왕(1256-1260)
  • * 황녀 : 불명(1260-?), 요절
  • 비 : 神仙門院일본어 타이시 내친왕(1231-1301) - 고호리카와 천황의 딸
  • * 황녀 : 불명(?-1281), 요절
  • 궁녀 : 准三后일본어 大納言二位局일본어 타이라노 무네코(1242-1274) - 타이라노 무네모토의 딸[5]
  • * 제3황자 : 무네타카 친왕(1242-1274) - 가마쿠라 막부의 6대 쇼군
  • 궁녀 : 後坊門局일본어 후지와라노 히로코(?-?) - 후지와라노 타카토키의 딸
  • * 제7황자 : 카쿠죠 법친왕(1247-1336)
  • * 황녀 : 五条院일본어 에키시 내친왕(1262-1294)
  • * 황녀 : 유텐(?-?)
  • 궁녀 : 大納言三位局일본어 사이온지(후지와라노) 긴코(?-?) - 사이온지 긴쓰네의 딸
  • * 제12황자 : 자쇼 법친왕(1254-1295)
  • * 황녀 : 延政門院일본어 에츠시 내친왕(1259-1332)
  • 궁녀 : 按察三位局일본어 시조(후지와라노)씨(?-?) - 시조 다카히라의 딸
  • * 제9황자 : 사이죠 법친왕(1253-1293)
  • 궁녀 : 御匣殿일본어 산조(후지와라)씨(?-1247) - 산조 긴후사의 딸
  • * 황자 : 츄죠 법친왕(?-1290)
  • * 제6황자 : 세이죠 법친왕(1247-1282)
  • 궁녀 : 아네코지(후지와라)씨(?-?) - 아네코지 사네미요의 딸
  • * 제10황자 : 쇼죠 법친왕(1253-1280)
  • 궁녀 : 右衛門督局일본어 이치조(후지와라)씨(?-?) - 이치조 요시야스의 딸
  • * 제1황자 : 엔죠 법친왕(1236-1282)
  • 궁녀 : 二条局일본어 오오토모(후지와라)씨(?-?) - 오오토모 지카히데의 딸
  • * 황녀 : 가이시 내친왕(1249-1284)
  • 궁녀 : 一条殿局일본어 후지와라씨(?-?) - 승려 호겐 쇼엔의 딸
  • * 제5황자 : 고에 법친왕(1244-1298)
  • 궁녀 : 大納言局일본어 나카노인(미나모토)씨(?-?) - 나카노인 미치카타의 딸
  • * 황자 : 불명(1243-?), 요절
  • 궁녀 : 구죠(후지와라)씨(?-?) - 구죠 요시히라의 딸
  • 궁녀 : 미나모토씨(?-?)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증손
  • * 황자 : 쇼죠(?-?)
  • 궁녀 : 후지와라씨(?-?)
  • * 제2황자 : 고호겐니치(1241-1316)

4. 연호

仁治|닌지일본어 (1240년 ~ 1243년)

寛元|간겐일본어 (1243년 ~ 1247년)[10]

5. 평가

고사가 천황의 치세는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이 강화되고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는 과도기였다. 고사가 상황은 호조 씨와의 연계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는데, 호지 원년(1247년) 호지 합전 직후에는 호조 토키요리 이하 막부 요인들이 "공가(황실)에 대해 각별히 존경해야 한다" [16]는 합의를 하여 고사가 인세이에 대한 전면적인 협력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셋칸 쇼군 대신 무네타카 친왕을 장군으로 옹립하는 데 합의하기도 하였다(미야 쇼군).

그러나 고사가 상황 시대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조정 장악이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고사가 상황의 인세이는 거의 막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또한 고사가 상황은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자가 아닌, 가메야마 천황의 황자인 요히토 친왕(후의 고우다 천황)을 황태자로 삼고, 치텐노키미를 정하지 않은 채 붕어하였다. 이는 훗날 '''북조·지묘인통'''(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과 '''남조·다이카쿠지통'''(가메야마 천황의 혈통) 간의 갈등을 초래하였고,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 더 나아가 고난조까지 이어지는 200년에 걸친 대란의 근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2] 서적
[3] 문서 Fortunes of Emperors
[4] 문서 Emergence of Japanese Kingship
[5] 간행물 The Changing of the Shogun 1289: An Excerpt from Towazugatari 1972-11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10] 서적
[11]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12] 뉴스 聖武天皇の命日、1日間違えた 宮内庁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2-09-26
[13] 서적 鎌倉幕府連署制の研究 岩田書院 2020
[14] 서적 鎌倉時代政治構造の研究 校倉書房 2016
[15] 서적 鎌倉幕府連署制の研究 岩田書院 2020
[16] 문서 吾妻鏡 null
[17] 간행물 〈宮家〉成立の諸前提 同成社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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