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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묘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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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묘인통은 진주후쇼군 후지와라노 모토요리가 자신의 저택 안에 마련한 개인 불당의 이름에서 유래된 일본 천황가의 계통이다.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에 이르는 계통을 지칭하며, 인세이를 행했던 고사가 천황과 가마쿠라 막부의 개입으로 다이카쿠지 왕통과 번갈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는 양통질립 시대를 겪었다. 겐무 신정 붕괴 후 남북조 시대에 북조를 지지하며 북조의 천황을 배출했고, 메이토쿠 화약으로 북조가 승리하며 왕위 계승을 통일했다. 이후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지묘인통을 계승하여 현대 일본 왕실로 이어지고 있으며, 와카와 비파 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2. 역사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이 즉위하고, 모리사다 친왕은 태상천황의 존호를 받았다. 1232년 고호리카와 천황은 시조 천황에게 양위하고 외가인 지묘인도노를 센토고쇼로 삼았다. 이후 고사가, 고후카쿠사 두 상황도 이 전례를 따랐다.

인세이(院政)를 행했던 고사가 천황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도록 하였으며,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봉했다. 그러나 1272년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면서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대립이 생겼고,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중재한 끝에 양측의 자손이 10여 년 주기로 교대로 왕위를 계승(양통질립)하며 인세이를 행하도록 조정하였다.

겐코 3년(1333년) 다이카쿠지 왕통의 방계 출신인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으로 일시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왕위 계승이 통일될 듯했으나, 신정은 2년 반 만에 붕괴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요시노(吉野)로 달아난 고다이고 천황 대신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남조(南朝)를 열었고,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가 열렸다.

훗날 고코마쓰 천황 대에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에 의해 왕위 계승은 지묘인 왕통인 북조(北朝)로 통일되었다. 그 계통도 다음 쇼코 천황(称光天皇) 대에 단절되었고, 같은 지묘인 왕통에 속한 후시미노미야(伏見宮)로부터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이 추대되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 1. 성립 배경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을 지낸 후지와라노 모토요리(藤原基頼)가 자신의 저택 안에 마련한 개인 불당의 이름에서 지묘인 왕통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모토요리의 후손들은 그 불당의 이름을 따서 지묘인 가(持明院家)로 불렸으며, 지묘인 가의 저택은 '''지묘인도노'''('''持明院殿''')라 불리게 되었다. 지묘인도노는 대체로 일본 교토 시 가미교구(上京区) 가미다치우리도리(上立売通) 신마치(新町) 서북쪽 모퉁이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

모토요리의 손자 모토이에(基家)의 딸인 친시(陳子)가 모리사다 친왕(守貞親王)의 비가 되었고, 조큐의 난(承久の乱) 이후 모리사다 친왕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茂仁親王)이 고호리카와 천황(後堀河天皇)으로 즉위하였다. 모리사다 친왕은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받고 고다카쿠라인(後高倉院)이라 칭해졌으나 조오(貞応) 2년(1223년)에 사망한다.

조에이(貞永) 원년(1232년) 고호리카와 천황시조 천황(四条天皇)에게 양위한 뒤 외가인 지묘인도노를 자신의 센토고쇼(仙洞御所)로 삼아 거주하였는데,[6] 이후 고사가 천황(後嵯峨), 고후카쿠사 천황(後深草) 두 상황 부자도 이 전례를 따라 지묘인도노에서 거주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후카쿠사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에 이르는 계통을 '''지묘인토'''('''持明院統''') 즉 지묘인 왕통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후카쿠사 상황 사후에는 그 딸인 무로마치인(室町院) 기시 내친왕(暉子内親王)이 거주하였고, 내친왕 사후 유산 상속에서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인 후시미 천황(伏見上皇)이 지묘인도노를 상속받아 쇼안(正安) 4년(1302년) 센토고쇼로 삼으면서 '지묘인토'라 칭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

인세이(院政)를 행했던 고사가 천황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에게 양위하도록 하였으며,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272년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고후카쿠사와 가메야마 둘 중 누구를 치천의 군으로 삼을 것이냐에 대해 확실하게 명기하지 않아,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대립이 생겼고, 여기에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중재한 끝에 양자의 자손이 10여 년 주기로 교대로 왕위를 계승(양통질립)하며 인세이를 행하도록 조정하였다.

2. 2. 양통질립과 가마쿠라 막부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이 즉위하고, 모리사다 친왕은 태상천황의 존호를 받았다. 1232년 고호리카와 천황은 시조 천황에게 양위하고 외가인 지묘인도노를 센토고쇼로 삼았다. 이후 고사가, 고후카쿠사 두 상황도 이 전례를 따랐다. 이러한 이유로 고후카쿠사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에 이르는 계통을 '''지묘인토'''('''持明院統''') 즉 지묘인 왕통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후카쿠사 상황 사후에는 그 딸인 무로마치인(室町院) 기시 내친왕(暉子内親王)이 거주하였고, 내친왕 사후 유산 상속에서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인 후시미 상황이 지묘인도노를 상속받아 1302년 센토고쇼로 삼으면서 '지묘인토'라 칭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

고사가 천황치천의 군으로써 인세이를 행하며,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도록 하였으며,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272년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면서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고,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중재한 끝에 양자의 자손이 10여 년 주기로 교대로 왕위를 계승(양통질립)하며 인세이를 행하도록 조정하였다.[5]

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겐무 신정으로 왕위 계승이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통일될 뻔했으나, 신정은 2년 반 만에 붕괴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묘 천황을 옹립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를 주장하며 난보쿠초 시대가 열렸다.

훗날 고코마쓰 천황의 대에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으로 왕위 계승은 지묘인 왕통인 북조로 통일되었다. 그 계통도 다음 쇼코 천황 대에 단절되었고, 같은 지묘인 왕통에 속한 후시미노미야로부터 고하나조노 천황이 추대되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사가 천황은 아들인 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고, 후카쿠사 천황이 병에 걸리자, 그 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이 즉위했다. 그 후, 가메야마 천황의 황자 요시히토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황위 계승자를 지명해야 할 치텐노키미인 고사가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에 위탁하는 형식으로 분명한 의사를 전달하지 못한 채 붕어했다. 곤혹한 막부는 고사가 상황의 중궁이자 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의 어머니인 다이구인에게 고사가 상황의 속마음을 묻자, 가메야마 천황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메야마 천황이 치텐노키미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히토에게 양위하고(고우다 천황), 가메야마는 인세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형의 혈통에 해당하는데도 자신의 자손의 황위 계승의 전망이 서지 않게 되자, 불만을 가진 후카쿠사 상황은 태상 천황 호를 반납하고 출가할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동정심을 느낀 막부는 가메야마에게 후카쿠사를 배려하도록 요구했고, 후카쿠사의 황자 히로히토 친왕이 황태자가 된다. 그 후, 시모츠키 소동에 의해 막부 내의 친가메야마 세력이 감퇴하자 후카쿠사 측의 힘이 유리해져, 1287년에 즉위(후시미 천황)했다. 황태자에도 황자 타네히토 친왕이 세워졌다.

가마쿠라 막부는 양통 첩립을 계속할 의향이었고, 타네히토 친왕이 즉위(고후시미 천황)한 후의 황태자에는 고우다 천황의 황자인 구니하루 친왕이 세워진다. 또한, 치텐노키미가 된 후시미 상황의 조정 개혁에 대한 반발도 있어, 그 측근이었던 교고쿠 타메카네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구니하루 친왕의 즉위(고니조 천황) 후, 지묘인통 측은 고후시미 상황에게 아직 황자가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인 토미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이 대략 교대로 즉위하는 양통 첩립이 시작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양통 첩립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호칭이다).

2. 3. 겐무 신정과 남북조 시대

1272년 고사가 천황이 사망하면서, 고후카쿠사 천황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중재로 양측의 자손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양통질립(両統迭立, 両統迭立|료토테쓰리쓰일본어)이 이루어졌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으로 왕위 계승이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통일되는 듯했으나, 신정은 2년 반 만에 붕괴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요시노로 달아난 고다이고 천황 대신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남조(南朝)를 열었고, 이로써 난보쿠초 시대가 시작되었다.[2]

2. 4. 지묘인 왕통의 통합과 분열

조큐의 난 이후 고사가 천황은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도록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강요했고,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이 아닌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삼도록 했다. 1272년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면서 고후카쿠사와 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양측 자손들이 10년 주기로 교대로 왕위를 잇는 양통질립(両統迭立) 방식을 중재했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으로 왕위 계승이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통일되는 듯했으나, 2년 반 만에 신정이 붕괴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했고, 요시노로 달아난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를 세우면서 난보쿠초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코마쓰 천황 대에 메이토쿠 화약으로 왕위 계승은 지묘인 왕통인 북조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쇼코 천황 대에 후사가 끊기면서, 같은 지묘인 왕통인 후시미노미야에서 고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묘인 왕통은 후반에 스코인 류(崇光院流)와 고코곤인 류(後光厳院流)의 두 갈래로 분열되었다.

2. 5.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추대와 현대

1331년 겐코의 난으로 다이카쿠지 왕통의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을 실시하면서 일시적으로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왕위 계승이 통일되는 듯했다. 그러나 겐무 신정은 2년 반 만에 붕괴하였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였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남조를 열었고, 난보쿠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고코마쓰 천황 대에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을 통해 왕위 계승은 지묘인 왕통인 북조로 통일되었다. 이 계통은 쇼코 천황 대에 단절되었고, 같은 지묘인 왕통에 속한 후시미노미야로부터 고하나조노 천황이 추대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3. 문화

후시미 천황은 교고쿠 타메카네와 함께 혁신적인 교고쿠파 와카를 창작했다. 교고쿠파 와카는 자신의 마음을 자유로운 시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1]. 고곤 천황은 『풍아화가집』을 편찬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묘인통의 적자는 비파를 익혔으며,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가업이 되었다[3]

3. 1. 와카(和歌)

후시미 천황이 교고쿠 타메카네와 함께 혁신적인 가풍을 창조한 이후, 교고쿠파의 와카가 읊어지게 되었다[1]. 자신의 마음을 자유로운 시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1]. 후시미 상황 아래, 교고쿠 타메카네에 의해 『옥엽화가집』이 편찬되었고, 고곤 천황은 『풍아화가집』을 편찬하여, 모두 높게 평가받고 있다. 남북조 시대에도 북조에서 교고쿠파 가단이 활동했지만, 고곤 천황이 보수적인 가풍인 니조파로 전환하면서, 초기 후시미노미야 가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읊어지지 않게 되었다.

3. 2. 비파(琵琶)

지묘인통의 적자는 비파를 익히게 되었다. 유파는 "서류"였으며, "양진조", "이시가미 류센", "우에하라 이시가미 류센"과 같은 비곡을 전수받았고, 일인자가 되면 최비곡인 "탁목"이 전수되었다고 한다[3].후시미노미야 가문의 가업이 되었다.

4. 소유 영지

해당 목록에 따르면 쌀 5384, 사금 100, 실 4274냥, 비단 1216, 철 10000정 등의 연공 납부.[4]상당한 수입이었을 것으로 추정.[4]법금강원령자세한 내용은 불분명.상당한 수입이었을 것으로 추정.[4]실정원령75개소.대각사통과 절반으로 나눔. 직인친왕에게 넘어간 후, 후시미노미야에 계승.열전사령25개소, 526정 8단 110보, 연공 1291문.[4]반마국아령연공 3000필(30관문).[4]


5. 역대 천황



또한 현대 일본 왕실도 지묘인 왕통의 후손들이므로, 엄밀하게는 지묘인 왕통을 어느 시점까지 칼로 자르듯 구분하기는 어렵고, 넓은 의미로는 현대까지도 유구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1] 문서 持明院殿に関する記述
[2] 문서 三種の神器と後鳥羽天皇
[3] 논문 崇光天皇 戎光祥出版 2020
[4] 논문 『椿葉記』より見たる持明院統分裂の原因 ‐長講堂領以下の所領を中心として‐ 1953
[5] 웹사이트 교토시정보관 https://www2.city.ky[...]
[6] 문서 센토고쇼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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