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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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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산조 천황은 1068년부터 1073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71대 천황이다. 그는 고스자쿠 천황의 아들로, 섭정 가문인 후지와라 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도했다.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통해 황실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섭정 가문의 권력 독점을 견제했다. 1072년 아들인 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이듬해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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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산조 천황
고산조 천황. 이시모토 슈우엔 '대례복 착어도'에서
이름고산조 천황
일본어고산조 덴노 (後三条天皇)
다카히토 (尊仁)
별칭금강행 (법명)
엔큐제이
통치
직위일본 천황
재위 기간1068년 5월 22일 – 1073년 1월 18일
일본식 재위 기간지랴쿠 4년 4월 19일 - 엔큐 4년 12월 8일
즉위식1068년 8월 21일 (지랴쿠 4년 7월 21일)
대례1068년 12월 19일 (지랴쿠 4년 11월 22일)
연호지랴쿠
엔큐
수도교토
황거해당 정보 없음
추존호고산조인 (후삼조원), 고산조 천황 (후삼조천황)
선대 천황고레이제이 천황
후대 천황시라카와 천황
생애
출생1034년 9월 3일
일본식 출생조겐 7년 7월 18일
출생지헤이안쿄 (현재의 교토, 일본)
사망1073년 6월 15일 (향년 38세)
일본식 사망엔큐 5년 5월 7일
사망지오이노미카도도노 헤이안쿄 (현재의 교토, 일본)
장례1073년 6월 25일 (엔큐 5년 5월 17일)
능묘엔소지노미사사기 (엔소지릉) - 교토
원복1047년 1월 17일 (에이쇼 원년 12월 19일)
가계
황후해당 정보 없음
중궁케이시 내친왕
여어미나모토노 기시
후지와라노 쇼시
후인후지와라노 시게코
자녀사토시 내친왕
시라카와 천황
토시코 내친왕
카코 내친왕
아츠코 내친왕
사네히토 친왕
스케히토 친왕
아버지고스자쿠 천황
어머니테이시 내친왕

2. 생애

고스자쿠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다카히토 친왕(훗날의 고산조 천황)은 어머니가 후지와라 씨 출신이 아니었기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에게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고레이제이 천황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황태제가 되었고, 1068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사망하자 황위를 이어받았다.[13]

고산조 천황은 즉위 후, 후지와라노 요시나가와 미나모토노 모로후사 등을 등용하여 섭관 정치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1069년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표하고 기록장원권계소를 설치했으며, 1070년 견포 제도, 1072년 엔큐 선지승이나 고가법 제정 등 율령제도가 무너져 약화된 황실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13] 또한, 엔큐 에조 전투를 통해 쓰가루반도시모키타반도를 포함한 혼슈 전역으로 조정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072년 아들 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하려 했으나, 1073년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였다.[14] 그의 묘(陵)는 교토 료안지에 있으며, 궁내청은 이 무덤을 연조사능(延祚寺陵)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17]

2. 1. 출생과 즉위 전

고산조 상황, 우키요에


황위에 오르기 전 그의 이름(''이미나'')[10]은 '''다카히토'''-신노(尊仁親王, たかひとしんのう)였다.[11]

다카히토-신노는 고스자쿠 천황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황후(こうごう) 사다코(禎子内親王)였는데, 산조 천황의 셋째 딸이었다. 이는 그를 170년 만에(그 이전의 우다 천황 이후) 어머니가 후지와라 씨의 후손이 아닌 첫 번째 천황으로 만들었다. 그의 부모는 외가 쪽으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손자손이었다. 미래의 고산조 천황의 어머니인 황후는 또한 테이시로 알려져 있으며, 요메이몬인(1012-94)이었다.[12] 후지와라 씨와의 연관성이 부족했던 그는 그들에게 특별한 충성을 빚지지 않았고, 이는 그가 그들에게 반대할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고이치조 천황의 황태제인 둔량 친왕(후의 고스자쿠 천황)의 둘째 황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즉위에 따라, 장원 9년 12월에 친왕 선하를 받았다. 관덕 2년(1045년) 1월 16일에 이복형인 고레이젠 천황의 즉위에 따라 12세의 나이로 황태제가 되었다.

2. 2. 섭관가와의 관계

고산조 천황은 즉위 후 반(反)섭정가 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동궁 시절부터 천황을 지지했던 후지와라노 요시나가와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 등을 등용하여 고셋케(五摂家)의 정권 독점을 타파하고자 했다. 또한, 후지와라 사네마사 등의 하급 관리들을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친정을 펼쳤다.

1069년에는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표하고 기록 장원권계소를 설치했으며, 1070년에는 견포 제도, 1072년에는 엔큐 선지승이나 고가법 제정 등 율령제도의 형해화로 약화된 황실의 경제 기반 강화를 도모했다. 특히 엔큐의 장원 정리령은 이전의 정리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치밀함과 공정성을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기준 외의 섭정령이 몰수되는 등 섭정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국가, 장원 영주,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어 "엔큐의 선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반면 섭정 측은 내부 분열로 인해 천황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고산조 천황은 생모가 후지와라씨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도모노의 외손이기는 했으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섭관가의 요리미치·노리미치 형제에게 냉대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복동생인 요시노부의 지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주작 천황이 존닌 친왕(고산조 천황)을 형인 신닌 친왕(고레이젠 천황)의 황태제로 삼고자 했을 때 요리미치가 반대했지만, 요시노부의 강력한 추천으로 황태제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금경』).[23]

하지만 요리미치와 노리미치는 고레이젠 천황의 후궁에 딸을 들여보내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존닌 친왕을 압박했다. 역대 동궁이 계승해 온 「호키리 고켄」을 요리미치가 “후지와라씨(특히 섭관가)의 동궁 보물”이라는 이유로 23년 동안 친왕이 즉위할 때까지 헌상하지 않은 사실이 오에 마사후사의 담화집 『강담초』에 기록되어 있다.

영승 원년의 원복식 때, 요리미치와 소원했고 후견인이 없는 황태자에게 딸을 들여보내는 공경은 없었다. 그래서 요시노부가 아내의 조카인 양녀 후지와라 시게코를 비로 맞이했지만, 친아버지가 중납언이라면 동궁비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게코는 권대납언 후지와라 키미나리의 딸이자 요시노부의 양녀였다. 요시노부는 존닌 친왕이 황태자였을 때 동궁대부를 역임하며 신임을 얻었다. 요시노부는 고산조가 즉위하기 전인 강평 8년 71세로 사망했지만, 고산조가 즉위하자 양자인 요시나가가 황태자 정닌의 삼촌으로서 동궁대부에 임명되고, 연구 원년에는 요시나가의 딸 미치코가 동궁비가 되었다.

하지만 존닌 친왕의 조모는 모두 후지와라씨의 섭관가 출신이고, 친왕이 즉위해도 섭관가 이외에 외척의 조건을 충족하는 집안이 없다는 점, 요리미치가 존닌 친왕의 비로 후이치조 천황의 황녀인 니오이코 내친왕을 들이게 한 점 등, 존닌 친왕(고산조 천황)과 후지와라씨(섭관가)의 혈연관계는 “소원하다”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산조 천황의 어머니 요시코 내친왕은 어머니 겐시의 사후 조토몬인 아키코가 후견인이었고, 고산조 천황 자신도 미도류 중심의 환경에서 자라 미도류를 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산조 천황이 즉위해도 노리미치를 관백에서 몰아낸 것은 아니었고, 고산조 천황의 어머니는 황녀였고, 노리미치를 대신할 강력한 외척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고산조 천황 자신과 그 다음 황위 계승자가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는 것이었다.

고산조 천황은 갑자기 라이쓰류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엔큐 3년 3월 9일, 모로사네의 양녀 카타코가 사다히토의 비로 맞이해졌다. 카타코의 친부는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 아키후사이지만, 아키후사의 아버지인 모리후사는 라이쓰의 정실 다카히메 조오의 동생이며, 라이쓰의 양자이며, 미도류의 한 사람으로 여겨져 왔다. 이로써 라이쓰류는 고산조나 사다히토와 외척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지만, 장래의 천황의 외조부가 될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사다히토 즉위 후 조호 원년, 카타코는 황자 아쓰후미를 출산했고, 모로사네는 천황의 외조부가 되는 출발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산조가 라이쓰류에 친밀해진 이유는 엔큐 3년 2월 10일에 미나모토 모토코가 고산조의 황자 산히토를 낳은 것이 관계하고 있다. 모토코는 고산조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다. 사다히토가 즉위한 후 산히토가 황태자로 책봉된 것으로 보아, 산히토가 태어난 후 고산조 천황은 산히토를 황위에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산조 천황이 사다히토를 황태자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산히토를 즉위시키려고 모의하고 있었고, 황위 계승의 혼란이 우려되고 있었다. 당시 정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라이쓰류와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은 산히토의 황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 카타코를 비로 맞이한 것은 사다히토였지만, 사다히토가 즉위하고 산히토가 황태자가 되고, 모로사네도 동궁부에 취임했기 때문에, 모로사네도 산히토의 육성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고산조는 모로사네와 사다히토·산히토 모두를 묶어, 모로사네의 보호 아래 사다히토에서 산히토로의 황위 이양을 원활하게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3. 엔큐의 선정 (延久の善政)

고산조 천황은 즉위 후, 섭정 가문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이었던 후지와라노 요시나가와 무라카미 겐지 가문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 등을 등용하여 고셋케(五摂家)의 정권 독점을 깨뜨리려 했다. 또한, 후지와라노 사네마사 등의 하급 관리들을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직접 정치를 펼쳤다.[13]

1069년,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표하고 기록장원권계소를 설치했다.[24] 1070년에는 견포(絹布) 제도, 1072년에는 엔큐 선지승(延久宣旨升)이나 고가법을 제정하는 등 율령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약해진 황실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특히 엔큐의 장원 정리령은 이전의 정리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꼼꼼함과 공정함을 보여주었으며, 그 때문에 기준에 맞지 않는 섭정가의 영지가 몰수되는 등 섭정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24]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국가와 장원 영주,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어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이라 불린다. 한편, 섭정 측은 내부 분열로 인해 천황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시기에 벌어진 엔큐 에조 전투에서 쓰가루반도시모키타반도까지 혼슈 전 국토가 조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지방에서도 착실하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1072년, 즉위 4년 만에 제1 황자인 사다히토 친왕(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하려 했으나, 다음 해에 병으로 쓰러져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4][15]

2. 4. 퇴위와 죽음

1072년, 고산조 천황은 즉위 4년 만에 제1황자인 사다히토 친왕(시라카와 천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인세이를 시작하려 했다.[14] 그러나 이듬해인 1073년 1월 18일(엔큐 4년 12월 8일)에 퇴위하였고,[14]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쓰러져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5] 1073년 5월 11일(엔큐 5년 4월 21일)에 불교 승려가 되었고, 승려로서의 이름은 금강행(金剛行)이었다.[15]

고산조 천황의 묘는 교토(京都)의 료안지에 있는 "칠황릉(七陵)"에 있다.[16] 궁내청은 이 장소를 고산조 천황의 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공식 명칭은 연조사능(延祚寺陵)이다.[17] 호소카와 고산조 천황을 기념하는 봉분은 현재 슈잔(修山)이라고 불린다.[18]

3. 정책

고산조 천황은 즉위 후 섭정 가문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 인물로, 동궁 시절부터 천황을 옹호하던 후지와라노 요시나가와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 등을 등용하여 고셋케(五摂家)의 정권 독점을 깨뜨리려 했다. 또한 후지와라노 사네마사 등의 하급 관리들을 등용하여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친정(親政)을 적극적으로 펼쳤다.[1]

1069년에는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표하고 기록 장원권계소를 설치했으며, 1070년에는 견포(絹布) 제도, 1072년에는 엔큐 선지(宣旨)와 고가법을 제정하는 등, 율령 제도가 형식적으로만 남아있어 약화된 황실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특히 엔큐의 장원 정리령은 이전의 정리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꼼꼼함과 공정성을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기준에 맞지 않는 섭정가의 영지가 몰수되는 등 섭정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조치는 국가와 장원 영주,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어 "엔큐의 선정(善政)"이라 불린다. 한편 섭정 측은 내부 분열로 인해 천황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1]

또한 이 시기에 벌어진 엔큐 에조 전투에서 쓰가루 반도와 시모키타 반도까지 혼슈 전역이 조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등, 지방에서도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1]

4. 가계도

배우자자녀
황후 가오루코 내친왕 (1029~1093) - 고이치조 천황의 황녀
증황태후(贈皇太后) 동궁비(東宮妃) 후지와라노 시게코(藤原 茂子) (?~1062) - 후지와라노 킨나리(藤原 公成)의 딸이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 能信)의 양녀
뇨고(女御) 호리카와노 뇨고(堀河 女御) 후지와라노 아키코(藤原 昭子) (1016~?) - 후지와라노 요리무네(藤原 頼宗)의 딸
뇨고(女御) 효부노 뇨고(兵部 女御) 미나모토노 모토코(源 基子) (1049~1134) - 미나모토노 모토히라(源 基平)의 딸
덴지(典侍) 후지와라노 교시(藤原 行子) (1049~1134) - 후지와라노 사네츠네(藤原 実経)의 딸



고산조 천황에게는 세 명의 후궁이 있었다.[15]

5. 연호

고산조 천황의 치세는 다음의 연호(넨고)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19]

6. 능묘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료안지슈잔의 료안지 안에 있는 '''엔소지릉'''(円宗寺陵)으로 지정되어 있다.[4] 궁내청 상의 형식은 원구이다.[4]

또한 황궁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영이 봉안되어 있다.[4]

참조

[1]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3]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4]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5]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6]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7] 웹사이트 陽成天皇 (71) http://www.kunaicho.[...]
[8]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9]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10] 문서 Emperor Jomei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The "Seven Imperial Tombs" at Ryoan-ji
[17] 서적
[18] 서적 Kyoto: A Contemplative Guide 1978
[19] 서적
[20] 서적 The Imperial Family of Japan 1915
[21]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22] 웹사이트 Go-Sanjō emperor of Japan https://www.britanni[...]
[23] 간행물 壷切御剣之事 1891-06
[24] 서적 後二条師通記
[25] 서적 今鏡
[26] 서적 長秋記 天承元年8月19日
[27] 간행물 輔仁親王について-今鏡人物考- 1971
[28] 서적 輔仁親王 思文閣出版 2007
[29]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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