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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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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언랑은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당나라 말기의 군인으로 검남동천 절도사를 역임했다. 황소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우위대장군까지 올랐으며, 887년 검남동천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부임 과정에서 검남서천 절도사 진경현과 갈등을 겪었으나, 왕건과 연합하여 진경현을 공격했다. 이후 왕건과 함께 진경현을 제거하는 데 기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아들 고재순은 전촉에서 가주 자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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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언랑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고언랑
원어명顧彦朗
국가당나라
직책검남동천절도사
출생일불명
출생지풍주(豐州,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바얀누르시)
사망일891년
사망지재주(梓州, 지금의 사천성 면양시)
국적당나라
경력천덕군(天德軍) 소교(小校) → 천덕군 대장 → 우위(右衛)대장군검남동천(劍南東川)절도사
형제동생 고언휘
자녀아들 고재순(顧在珣)
직업당나라 말기 군벌, 검남동천(劍南東川)절도사

2. 생애

고언랑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당서 열전에 따르면, 그는 풍주(豐州,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시) 출신으로 동생 고언휘와 함께 천덕군(天德,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 시 우라터 중기에 있던 기지부대)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7][1]

천덕군방어사 채경(蔡京)은 고언랑, 고언휘 형제가 장차 높은 벼슬길에 오르리라고 여겨 그들을 후대하였다.[7] 이후 황소의 난장안 탈환에 기여한 고언랑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위(右衛)대장군에 이르렀다.[7][1]

887년, 당 희종은 고언랑을 검남동천 절도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검남서천 절도사 진경선의 방해로 부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이주(利州, 지금의 사천성 광원시)에 머무르다 조정의 중재로 겨우 부임할 수 있었다.[7]

888년 당 희종이 사망하고 당 소종이 즉위한 후, 고언랑은 왕건과 함께 진경현과 전령자가 황실에 반역했다고 상소했다. 당 소종은 재상 위조도를 서천의 새 절도사로 임명하고 진경현을 소환했으나, 진경현이 거부하자 진경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선포했다. 위조도가 지휘하고 고언랑, 왕건, 산남서도 절도사 양수량이 부관으로 임명된 이 작전은 수년간 지속되었다.[3]

891년경, 진경현은 궁지에 몰렸지만, 황실 정부는 하동 절도사 이극용과의 전투로 자원이 고갈되어 작전 중단을 결정했다. 당 소종은 진경현의 직위를 복원하고 고언랑과 왕건에게 철수를 명했지만, 왕건은 위조도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돌려보내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결국 진경현과 전령자는 항복했고, 왕건은 서천의 절도사가 되었다. 얼마 후 고언랑은 사망했다.[4]

2. 1. 가세(家世) 및 초기 경력

고언랑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당서 열전에 따르면, 그는 풍주(豐州,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시) 출신이다. 그와 그의 동생 고언휘는 모두 천덕군(天德,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 시 우라터 중기에 있던 기지부대)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7][1]

천덕군방어사 채경(蔡京)은 고언랑, 고언휘 형제가 장차 높은 벼슬길에 오르리라고 여겨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후대하는 한편 아들 채숙향(蔡叔向)을 시켜 그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그들도 점점 관직이 올라갔다.[7] 이후 황소의 난으로 이어진 대규모 농민 반란 동안, 고언랑과 고언휘는 황소에 대항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당나라가 수도 장안을 황소로부터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고언랑은 이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벼슬이 우위(右衛)대장군에 이르렀다.[7][1]

2. 2. 검남동천 절도사 시절

887년, 당 희종은 고언랑을 검남동천 절도사에 임명하였다. 그가 부임하는 길에 검문(劍門, 지금의 사천성 광원시)을 지날 때, 인근 번진의 검남서천 (본부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에 있었다) 절도사 진경선의 부하들이 그의 부절을 빼앗아, 그가 검남동천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이주(利州, 지금의 사천성 광원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사자의 조정이 있고 나서야, 진경선은 고언랑이 검남동천도로 부임하는 것을 허가했다. 임지에 도착한 고언랑은 동생 고언휘를 한주(漢州, 지금의 사천성 덕양시) 자사에 임명하였다.[7]

한편, 예전에 고언랑과 신책군(神策軍) 시절에 동료였던 왕건이 낭주(閬州, 지금의 사천성 남충시)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하는 한편 군대를 파견하여 인근 지역들을 습격하였다. 고언랑은 왕건에게 습격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그들의 그 당시의 우정을 내세워, 왕건에게 군량을 제공하겠다는 것을 여러 차례 제의하였다. 결국 왕건은 검남동천도를 습격하지 않았다.[8]

진경현은 고언랑과 왕건이 힘을 합쳐 서천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진경현의 형제이자 전 최고 환관 전령자는 이전에 왕건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가 왕건을 불러 진경현 밑에서 일하도록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진경현이 동의했고, 전령자는 왕건에게 편지를 써서 진경현 밑에서 일하도록 초청했다. 왕건은 전령자의 소환에 처음에는 동의하는 듯했으며, 그의 가족을 동천의 수도인 자주(梓州)에 고언랑과 함께 남겨두고 자신은 서천의 수도 청두시로 향했다. 그러나 왕건이 가는 도중, 진경현의 부하 이애(李乂)는 진경현에게 왕건을 믿을 수 없다고 설득했고, 진경현은 왕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왕건은 멈추지 않았고,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진경현의 장교들을 격파하고 청두로 진격했다. 고언랑은 고언휘의 지휘 하에 군대를 출동하여 왕건을 도왔다. 그들은 청두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를 풀었다.[3]

2. 3. 왕건과의 연합 및 진경현과의 대립

887년, 당 희종이 고언랑을 검남동천 절도사로 임명했을 때, 검남서천 절도사 진경현의 부하들이 고언랑의 부절을 빼앗고 동천 진입을 막았다. 고언랑은 이주(利州)에 머물다가 조정 사자의 중재로 겨우 부임할 수 있었다.[7] 한편, 고언랑의 신책군(神策軍) 시절 동료였던 왕건은 낭주(閬州)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하며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고언랑은 왕건을 회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우정을 강조하고 군량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왕건은 검남동천도를 공격하지 않았다.[8]

진경현은 고언랑과 왕건의 연합을 두려워하여, 그의 형제이자 전 최고 환관 전령자의 제안으로 왕건을 자신의 밑으로 들이려 했다. 전령자는 이전에 왕건을 양자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처음에는 동의하는 척하며 가족을 자주(梓州)에 남겨두고 청두시로 향했지만, 진경현의 부하 이애(李乂)의 설득으로 진경현이 마음을 바꾸면서 왕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왕건은 멈추지 않고 진경현의 군대를 격파하며 청두로 진격했고, 고언랑은 고언휘를 보내 왕건을 도왔다. 이들은 청두를 포위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3]

888년 당 희종이 사망하고 당 소종이 즉위한 후, 왕건과 고언랑은 진경현과 전령자가 황실에 반역했다고 상소했다. 소종은 재상 위조도를 서천의 새 절도사로 임명하고 진경현을 소환했으나, 진경현이 거부하자 소종은 진경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선포했다. 위조도가 지휘하고 고언랑, 왕건, 산남서도 절도사 양수량이 부관으로 임명된 이 작전은 수년간 지속되었다.[3]

891년경, 진경현은 궁지에 몰렸지만, 황실 정부는 하동 절도사 이극용과의 전투로 자원이 고갈되어 작전 중단을 결정했다. 소종은 진경현의 직위를 복원하고 고언랑과 왕건에게 철수를 명했지만, 왕건은 위조도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돌려보내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결국 진경현과 전령자는 항복했고, 왕건은 서천의 절도사가 되었다. 얼마 후 고언랑은 사망했다.[4]

2. 4. 최후

891년경, 진경현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지만, 황실 정부의 자원은 다른 군벌인 하동 절도사(본부는 현재 산시성 타이위안시) 이극용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고갈되었다. 소종은 진경현에 대한 작전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진경현의 직위를 복원하고 고언랑과 왕건에게 군대를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4] 그러나 왕건은 진경현이 멸망에 가까워지자 재상 위조도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돌아가게 하고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진경현과 전령자는 항복했고, 왕건은 서천의 절도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언랑이 사망했고, 고언휘가 동천 절도사 대행을 맡게 되었다.[4]

고언랑의 아들 고재순(顾在珣)은 나중에 왕건의 아들 왕건(왕건이 건국한 전촉의 두 번째 황제)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가주(嘉州) 자사로 복무했다.[5][6]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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