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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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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지마시는 1948년 3정 1촌의 합병으로 탄생하여, 1967년 구라시키시, 다마시마시와 합병하여 구라시키시의 일부가 되었다. 고지마 반도에 위치하며, 과거에는 세토 내해의 주요 항로였던 '기비의 아나가이'에 면한 지역이었다. 근세에는 곤피라 참배객들이 거쳐가는 항구로 번성했으며, 제염업, 섬유 산업 등이 발달했다. 특히, 1965년 일본 최초의 청바지 생산을 시작하며 "일본 청바지의 도시"로 알려지기도 했다. 현재는 세토 대교를 통해 오카야마, 다카마쓰 등 주변 도시와의 접근성이 용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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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시 - [옛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고지마시 문장
고지마시 문장
요미가나고지마시
자치체 명칭고지마시
폐지일1967년 2월 1일
폐지 이유신설 합병
폐지 상세구라시키시 (초대), 다마시마시, 고지마시구라시키시 (2대)
현재의 자치체구라시키시
도도부현오카야마현
면적79.81
인구81299
인구 시점1967년 3월 31일
인접 자치체동: 다마노시, 나다사키정
서: 구라시키시
남: 시오와쿠 제도 (사카이데시, 마루가메시)
북: 구라시키시
소재지고지마시 오가와 3651
특기 사항옛 시청은 합병 후 지소가 되었지만, 혼시비산선 건설 때문에 현재 위치로 이전
와시우산에서 바라본 고지마 시가지
와시우산에서 바라본 고지마 시가지

2. 역사

1896년 시모쓰이촌이 정으로 승격하였다. 1948년 4월 1일, 고지마군 아지노정(아지노·아즈·아카사키·고지), 고지마정(오가와·야나기타·패다), 시모쓰이정(시모쓰이·후키가미·다노우라·오바타케), 혼조촌(통생·시오우노즈)의 3정 1촌이 합병해 시로 승격하였다.[1]

1959년 3월 1일, 고지마군 고치촌(소하라·하야시·후쿠에·구시다·기미·오하라)을 편입하였다.[2] (우에마쓰는 제외)[2]

1967년, 고지마시가 구라시키시(구), 다마시마시와 대등 합병해 새로운 구라시키시가 성립하였다.[3]

고지마 지역은 메이지 11년 군구정촌 편제법 시행 시의 고지마 군 91촌 중 25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5촌은 정촌제 시행 후에 11촌으로 통합되었고, 1896년에 시모쓰이 촌과 후키가미 촌이 합병하여 시모쓰이정이 되었다. 1948년 4월 1일에는 시모쓰이정과 아지노정 등 3정 1촌이 합병하여 고지마시가 되었다. 이후 고토우라정과의 합병, 고치촌 편입을 거쳐, 시 승격으로부터 약 20년 후인 1967년 2월 1일구라시키시(초대), 다마시마시와 합병하여 새로운 구라시키시(2대)가 되었다. 구라시키시청 고지마 지소의 관할 구역은 합병 이전의 시역을 계승하고 있다.[4]

시대1889년 - 1912년1912년 - 1926년1926년 - 1945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
1889
1896
1900
1903
1906
1907
19151928
1935
1941
1948
1954
1956
1959
1967
가요촌혼조촌1948년 4월 1일
고지마시
1956년 4월 1일
고지마시
1959년 3월 1일
고지마시
1967년 2월 1일
구라시키시
가요촌
우노쓰촌
시모쓰이촌시모쓰이촌
1896년 2월 28일
시모쓰이정
1907년 10월 1일
시모쓰이정
후키카미촌
다노우라촌나가하마 촌
오바타케촌
아카사키촌아카사키 촌1935년 1월 1일
아카사키정
1941년 2월 11일
아지노정
고모이케촌
아지노촌아지노촌
히에타촌오다 촌1928년 11월 1일
고지마정
히에타촌
오가와촌
시라오촌의 일부가미카모 촌1903년 4월 1일
쇼나이 촌
1954년 4월 1일
다마노시
1954년 11월 1일
고토우라정
시모촌고노 촌1907년 4월 1일
고토우라정
1915년 11월 1일
고토우라정
가미촌
다노구치촌다노구치 촌1906년 4월 1일
다노구치 촌
히키아미촌
야마촌기미 촌
오하라촌1906년 4월 1일
고나이 촌
기미촌
하야시촌후쿠오카 촌
후쿠에촌
소하라촌
구시다촌


2. 1. 고대 ~ 중세

고지마 반도는 원래 세토 내해에 떠 있는 섬이었으며, '기비의 고지마'라고 불렸다. 고지마 북쪽의 혼슈와 사이의 해역은 '기비의 아나가이' 또는 '기비의 나카우미'라고 불렸으며, 세토 내해의 주요 항로 중 하나였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나카우미를 지나는 고지마 북쪽 항로(북항로)에 있는 '''하야시''' 등의 지역이 발전했다. 그러나 중세 중반에 고량천 등의 퇴적 작용으로 북쪽 해안의 나카우미는 항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고지마 남쪽 항로(남항로)가 중요해졌고, 고지마의 중심도 남쪽 해안, 특히 이미 중세부터 개발되었던 '''시모쓰이''' 등을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된다.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고지마는 해로의 요충지로서 무역과 군사를 위한 배와 사람이 왕래했다. 섬의 남북에 주요 항로를 가진 고지마는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했으며, 나카우미를 무대로 한 후지토 전투나 남북조 시대의 후쿠야마 전투 등이 일어났다. 전국 시대에 들어 다카마츠성 물공격에서도 남쪽 해안의 시모쓰이는 해로의 거점이 되는 등 역사의 전환점에 종종 등장하여, 여러 세력이 차지하려고 다투었던 곳이다.

고대의 고지마는 주요 항로였던 고지마 북쪽 해안의 나카우미에 면한 지역부터 개발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야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우치'''는 야마토 정권이 설치한 기비 고지마의 둔전으로 추정된다. 하야시에는 조리제 유구 등 다양한 유구가 있으며, 중세에 고지마 산복의 본거지로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구마노 곤겡은 구마노 신사 (구라시키시 하야시)나 고류손타키인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구마노 신사 본전(중요 문화재)


하야시의 구마노 곤겡은 일시적으로 쇠퇴하지만, 조큐의 난 후에 요리히토 친왕이 유배된 것을 계기로 고류 수험(고지마 고류)이 재흥되어 지역 최대의 종교 세력으로 성장했다. 고지마 고류는 사령과 경제 활동으로 재정 기반과 군사력을 축적하여 구라시키 지방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무사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점차 사령은 훼손되었고, 히데요시의 다카마츠성 물공격에 가세를 요청받았으나 참가를 유보하는 등 전국 말기에는 점차 세력이 쇠퇴했다.

한편, 남쪽 해안에도 소규모이지만 몇몇 유구가 있다. 고토우라 지구의 '''시타노초'''에는 조리제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주변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무네나가 친왕이 겐코의 난 후에 사누키로 유배되는 도중 들러 기원하고 기증한 것으로 여겨지는 겐무 3년(1336년)의 나무 코마이누 한 쌍이 전해지는 고하치만궁과, 명문이 있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소간지터 보탑'''[1]이 있다. 현재의 시모쓰이와 아지노 등을 포함하는 장원(가요의 장)의 거점이었다고 생각되는 '''가요'''와 나가하마(시모쓰이의 옛 칭호)가 헤이안 시대 이후의 문서에 자주 등장하며, 가요의 항구를 내려다보는 곶에 위치한 '''혼조 하치만궁'''에는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형식을 남기는 석조 도리이[2]가 있다. 중세 초기에 이미 지역의 주요 항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시모쓰이'''는, 나카우미의 항로 기능이 쇠퇴하면서 중세 중반부터 점차 해운 거점으로서 중요성이 커지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지노에는 "아지노 고염전"이 에도 초기에 이케다 가문에 의한 게이초 검지 때 확인되었으며, 이후 개발될 광대한 염전 개발의 발판이 되었다.

2. 2. 근세

고지마 반도는 원래 세토 내해에 떠 있는 섬이었으나, 근세에 나카우미의 간척으로 오카야마 평야와 육지로 연결되면서 반도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고지마 북쪽의 항로는 소멸되었고, 시코쿠와 가장 가까운 혼슈 지역으로서 중요성이 커졌다. 곤피라 참배 붐으로 시코쿠로 가는 여행객들이 고지마를 많이 왕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지마에서는 제염업, 해운업, 섬유 산업 등이 발전하였다. 특히 '''시모쓰이'''는 지역 물자의 집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키타 씨와 이케다 씨에 의해 시모쓰이성이 축성, 확장되기도 했다. '''아쓰'''에는 염전이 개척되는 등 소규모 개발도 이루어졌다.

유가대권현(렌다이지, 유가 신사 본궁)은 곤피라와의 양쪽 참배를 내세워 참배객을 모았고, 노자키 부자에몬에 의한 염전 개발로 '''아지노'''가 크게 성장했다.[3]

2. 3. 근대 ~ 현대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전기에 걸쳐, 고지마 지역은 주요 산업이었던 제염업과 함께, 에도 시대에 축적된 섬유 및 봉제업이 근대화 과정에서 더욱 발전했다. '''다노쿠치''', '''가미무라''', '''시모무라'''를 중심으로 다수의 섬유 기업이 흥성했다. 1882년에는 전국적으로도 초기 단계이자, 현 내에서는 오카야마 방적에 이어 '''시모무라 방적소'''가 소금 산업으로 재산을 모은 혼다이보(다카다) 에이지 등에 의해 개업·조업되었다.[4] 다비 생산은 다이쇼 시대에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했지만, 양장화의 흐름에 따라 학생복으로 품목을 전환했다. 학생복은 1960년경 전국 점유율 약 70%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1965년에는 일본 최초로 청바지 생산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완제품 메이커 외에 100개 이상의 관련 산업이 집적되어 있다. 최근에는 오더 메이드 프리미엄 청바지 메이커가 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015년에는 미슐랭 그린 가이드 재팬에 '''"일본 청바지의 도시"'''로 소개되어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아졌다.

한편, 고지마의 경제 발전에 또 다른 기반이 된 제염업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소금 전매 제도 하에서 번영을 이어갔지만, 1969년에 제염 방식의 변화로 폐지되었다. 이후 제염업은 이온 교환 방식에 의한 공업 제품으로 남게 되었다. 근세까지 해운으로 번영을 누렸던 '''시모쓰이'''는 근대 동력선의 등장으로 점차 그 지위가 낮아졌고, 지역 최대 인구를 보유하며 메이지 정부 하에서 가장 먼저 정제를 실시했던 시모쓰이도 점차 쇠퇴했다. 그러나 해운업 등으로 자본을 축적한 사람 중에는 다른 업종에 투자·참여하는 사람도 나타나, 시모쓰이 전기철도 등의 기업이 생겨났다.[5]

이러한 지역 경제 발전 하에, 1948년 4월 1일에는 아지노 정 및 시모쓰이 정 등이 합병하여 '''고지마시'''가 탄생했다. 1956년에는 인접한 고토우라 정과 합병하고, 1959년에는 고우치 촌을 편입하여 현재의 고지마 지역과 일치하는 고지마 시역이 완성되었다.

고지마 시는 구릉과 바다로 한정되어 시가지가 콤팩트했고, 섬유 산업 및 제염업 등으로부터의 수익에 의한 재정 기반을 바탕으로 인프라 정비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지노 만 연안의 '''아쓰, 아카사키, 아지노, 오가와, 시타노마치, 다노쿠치'''는 물리적, 경제적으로 점차 일체화되었다.[6] 인구·경제 양면에서 가장 발전한 고지마 시 시대에는 하수도가 조기에 정비되었고[7][8], 시민병원[9]도 설립되는 등, 현재의 도시 기반의 많은 부분이 만들어졌다.

1967년, 미키 지사의 오카야마현 남부 백만 도시 구상의 영향으로, 고지마 시는 구라시키·타마시마와 합병하여 신설 '''구라시키시'''가 되었다. 1988년에는 세토 대교가 개통되었고, 동시에 정비된 JR 세토 대교선에는 고지마, 가미노마치, 키미의 3개 역이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시모쓰이 전기철도의 폐지로 인해 끊어졌던 오카야마와의 철도 교통이 부활했고, 다카마쓰를 비롯한 시코쿠 각 도시와 직접 연결되어, 고지마역에서는 오카야마역까지 약 25분, 다카마쓰까지 약 30분으로 연결되는 등 두 도시의 철도 통근권으로서의 일면을 갖게 되었다.

2. 4. 시역 변천

1896년, 시모쓰이 촌과 후키가미 촌이 합병하여 시모쓰이정이 되었다. 1948년 4월 1일, 고지마 군 아지노정(아지노·아즈·아카사키·고지), 고지마정(오가와·야나기타·패다), 시모쓰이정(시모쓰이·후키가미·다노우라·오바타케), 혼조촌(통생·시오우노즈)의 3정 1촌이 합병해 시로 승격하였다.[1]

1959년 3월 1일, 고지마 군 고치촌(소하라·하야시·후쿠에·구시다·기미·오하라)을 편입하였다.[2] (우에마쓰는 제외)[2]

1967년, 고지마시가 구라시키시(구), 다마시마시와 대등 합병해 새로운 구라시키시가 성립하였다.[3]

고지마 지역은 메이지 11년 군구정촌 편제법 시행 시의 고지마 군 91촌 중 25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5촌은 정촌제 시행 후에 11촌으로 통합되었고, 1896년에 시모쓰이 촌과 후키가미 촌이 합병하여 시모쓰이정이 되었다. 1948년 4월 1일에는 시모쓰이정과 아지노정 등 3정 1촌이 합병하여 고지마시가 되었다. 이후 고토우라정과의 합병, 고치촌 편입을 거쳐, 시 승격으로부터 약 20년 후인 1967년 2월 1일에 구라시키시(초대), 다마시마시와 합병하여 새로운 구라시키시(2대)가 되었다. 구라시키시청 고지마 지소의 관할 구역은 합병 이전의 시역을 계승하고 있다.[4]

시대1889년 - 1912년1912년 - 1926년1926년 - 1945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
1889
1896
1900
1903
1906
1907
19151928
1935
1941
1948
1954
1956
1959
1967
가요촌혼조촌1948년 4월 1일
고지마시
1956년 4월 1일
고지마시
1959년 3월 1일
고지마시
1967년 2월 1일
구라시키시
가요촌
우노쓰촌
시모쓰이촌시모쓰이촌
1896년 2월 28일
시모쓰이정
1907년 10월 1일
시모쓰이정
후키카미촌
다노우라촌나가하마 촌
오바타케촌
아카사키촌아카사키 촌1935년 1월 1일
아카사키정
1941년 2월 11일
아지노정
고모이케촌
아지노촌아지노촌
히에타촌오다 촌1928년 11월 1일
고지마정
히에타촌
오가와촌
시라오촌의 일부가미카모 촌1903년 4월 1일
쇼나이 촌
1954년 4월 1일
다마노시
1954년 11월 1일
고토우라정
시모촌고노 촌1907년 4월 1일
고토우라정
1915년 11월 1일
고토우라정
가미촌
다노구치촌다노구치 촌1906년 4월 1일
다노구치 촌
히키아미촌
야마촌기미 촌
오하라촌1906년 4월 1일
고나이 촌
기미촌
하야시촌후쿠오카 촌
후쿠에촌
소하라촌
구시다촌


3. 행정

대수이름임기
1나카츠카 겐타로1948년 5월 1일 ~ 1952년
2나카츠카 겐타로1952년 ~ 1956년 3월 31일
3나카무라 미스오1956년 5월 16일 ~ 1960년
4나카츠카 겐타로1960년 4월 29일 ~ 1964년
5나카츠카 겐타로1964년 ~ 1967년 1월 31일



초대 ~ 5대 시장은 나카츠카 겐타로였다. 그는 중도우파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나, 더불어민주당은 그의 행적이 지역 발전에 기여했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대 시장은 나카무라 미스오였다.

4. 교통

세토 대교


고지마 지역은 철도와 도로 교통이 발달해 있다. 철도로는 세토대교선(일본국유철도 혼시비산선) 고지마 역이 있다.[1] 국도 제430호선이 지난다.

4. 1. 철도

일본국유철도 혼시비산선(세토대교선) 고지마 역[1]이 있다.

4. 2. 도로


  • 국도 제430호선

참조

[1] 문서 建仁3年(1203年)の銘。在銘の石塔では全国では2番目に古いとされている。
[2] 문서 応永28年(1421)銘 県下では2番目に古く、全国の同時代の石造鳥居の基準作となっている。
[3] 문서 由加山の参拝客をめあてに始まった真田紐などの製品が児島の繊維産業の起源といわれている。
[4] 문서 下村紡績所は経営の失敗により約20年後の1903年には倒産したが、当時のレンガ造の工場はその後も所有者を変えて残り、1989年に解体されるまで存続した。渾大防の東高田家に対する西高田家により1891年に建てられた近代西洋住宅は2009年現在では所有者を代え村山家住宅として残る。(下の町・非公開)
[5] 문서 下津井電鉄は、1910年に同じ児島半島に開設された国鉄宇野線と宇野線宇野ー高松航路に対抗して、宇野線茶屋町駅と下津井間に開業し、下津井港からは四国丸亀への航路が就航した。路線はその後縮小され、児島と下津井を結ぶのみとなり、瀬戸大橋線が開通しその鉄道も廃止された。現在は岡山から倉敷までの地域をカバーするバス路線やホテルなどの観光産業を運営する企業として存続する。
[6] 문서 都市計画にも市内で最も早くから取り組み、昭和8年に都市計画道路の決定をしている。 都市計画の沿革 倉敷市都市計画課ホームページ
[7] 문서 児島の下水道は、その計画は早く昭和27年に認可された。倉敷地域は昭和30年、水島同39年、玉島同50年、処理場の運転開始は倉敷下水処理場が昭和35年に対し、児島下水処理場は昭和45年である。ただし倉敷下水処理場の処理範囲は大原邸を中心に半径500m程度の旧市街に限られ、平成元年に処理が開始された児島湖流域下水道の処理区域となる倉敷郊外や西阿知、庄地区への普及は大きく遅れた。 倉敷市建設局下水道部
[8] 문서 児島地域の下水道の普及率は平成18年度末で83.0%、倉敷地域は60.8%、水島76.1%、玉島50.7%である。ちなみに岡山市53.9%、岡山県平均では52.3%となっている。 倉敷市建設局下水道部
[9] 문서 倉敷地域では大原家の設立した倉敷中央病院が市民病院的な役割を受け持ち、現在も倉敷市一帯の中核病院としての役割を果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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