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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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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기 전쟁은 1581년 폴 에밀이 저술한 책에서 명명된, 프랑스 왕실 권력에 대항한 주요 봉건 영주들의 투쟁을 지칭하는 비꼬는 표현이다. 이 전쟁은 148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났으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왕실 섭정에 대항하여 벌인 일련의 갈등을 포함한다. 1차 광기 전쟁은 부르주 조약으로 일단락되었으나, 브르타뉴의 독립을 둘러싼 갈등은 2차 광기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브르타뉴 공국의 프랑스 병합을 가속화했으며, 프랑수아 2세의 딸 안 드 브르타뉴의 결혼을 통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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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광기 전쟁
일부앵글로-프랑스 전쟁
시기1485년–1488년
장소프랑스
결과프랑스 왕실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교전국 2반란 귀족 세력
반란 귀족로렌
브르타뉴
알브레 영주령
오랑주
앙굴렘
지원국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카스티야
지휘관
프랑스샤를 8세
안 드 프랑스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반란 귀족르네 2세 드 로렌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장 4세 드 리외
루이 2세 도를레앙
샤를 도를레앙
오데 데디
장 4세 드 샬롱아를레
알랭 달브레
기타
비트레 성
프랑스와 브르타뉴 국경의 중요 요새 중 하나인 비트레 성.

2. 명칭과 중요도

"광기 전쟁"은 왕실 중심 권력에 대항한 주요 봉건 영주들의 투쟁을 지칭하는 비꼬는 표현으로, 1581년에 발행된 폴 에밀(Paul Emile)의 프랑스 왕들의 행적, 위업 및 정복사|프랑스 왕들의 행적, 위업 및 정복사frm에서 만들어졌다.[5][1]

이 사건이 단일 전쟁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공익 동맹의 결성은 15세기 후반 왕실과 왕국의 대영주들 간의 갈등을 이어지게 했다. 이 분쟁의 일부로서, 1484-1485년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특정 영주들의 지지를 받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활동을 폐위시키는 시도를 벌였다. 안 드 프랑스는 주로 외교와 무력의 조합을 통해 커다란 전투 없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조약으로 교전이 연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조약이 1차 광기 전쟁을 끝냈다고 하며, 1486년 6월부터 1488년 11월까지의 2차 분쟁 시기를 '브르타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인 일부 해설가들은 1차부터 2차 시기까지의 분쟁을 브르타뉴-프랑스 전쟁이라고 하거나 이전의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연결시켜 심지어는 브르타뉴 독립 전쟁이라고도 정의내린다.

3. 배경

"광기 전쟁"이라는 명칭은 1581년 폴 에밀(Paul Emile)이 쓴 프랑스 왕들의 행적, 위업 및 정복사frm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앙 왕권에 반발한 주요 봉건 귀족들의 저항을 비꼬는 표현이다.[1]

이 사건들을 단일 전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5세기 후반 공익 동맹 결성 이후 왕실과 대영주들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1484~1485년 사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등 여러 영주들의 지지를 받아 섭정 안 드 보죄를 몰아내려 했다. 안은 외교와 무력을 통해 큰 전투 없이 반란을 진압했고,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평화 조약으로 분쟁이 일단락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조약을 광기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이 끝난 것으로 보며, 1486년 6월~1488년 11월까지의 두 번째 국면을 "브르타뉴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 두 국면을 하나로 묶어 프랑스-브르타뉴 전쟁, 또는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과 연결하여 브르타뉴 독립 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3. 1. 15세기 프랑스의 정치 상황

"광기 전쟁"이라는 용어는 1581년에 발행된 폴 에밀(Paul Emile)의 저서 ''Histoire des faicts, gestes et conquestes des roys de France''에서 유래되었으며, 왕실 중심 권력에 대항한 주요 봉건 영주들의 투쟁을 비꼬는 표현이다.[5]

공익 동맹의 창단은 15세기 후반 왕실과 왕국의 대영주들 간의 갈등을 지속시켰다. 이 분쟁의 일환으로, 1484-1485년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특정 영주들의 지지를 받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는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활동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안 드 프랑스는 외교와 무력을 동원하여 큰 전투 없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조약으로 교전이 연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약이 1차 광기 전쟁을 끝냈다고 보며, 1486년 6월부터 1488년 11월까지의 2차 분쟁 시기를 ''브르타뉴 전쟁''이라고 부른다. 주로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인 일부 해설가들은 1차부터 2차 시기까지의 분쟁을 브르타뉴-프랑스 전쟁이라고 하거나 이전의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연결시켜 브르타뉴 독립 전쟁이라고도 정의한다.

광기 전쟁 바로 이전 시기인 1477년의 왕실 영지, 공작령, 영주령을 나타낸 지도.


샤를 8세의 집권이 시작될 무렵, 루이 2세 도를레앙은 섭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투르의 삼부회(1484년 1월 15일-3월 11일)가 이를 거절하였다. 4월에 루이는 프랑수아 2세와 합류하기 위해 브르타뉴로 떠났다. 그는 또한 프랑수아의 후계자인 안 드 브르타뉴와 혼인할 수 있게 교황에게 자신의 혼인을 무효화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11월 23일 그는 안과의 혼인을 예상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왕궁으로 돌아가 왕을 그의 보호권으로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안 드 프랑스가 무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했다. 그는 왕실 경호원이던 일부 영주들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오를레앙 공작을 기엔에 감금시켰다.

1485년 1월 17일 기엔에서 탈출하기 위해 루이는 파리에 연락을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는 2월 3일 알랑송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3월 12일에 공식 사과를 하였다. 왕실 군대는 그가 브르타뉴로 가는걸 막고자 에브뢰에 배치되었으며, 그는 오를레앙에 갇히게 되었다. 동시에 성난 브르타뉴 귀족들은 왕실 군대에게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30일, 루이는 섭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왕실 군대는 오를레앙으로 파견됐고, 루이는 보장시로 달아났으며 9월에 젊은 시절의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에게 쫓겨났다. 8월 9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강화 조약에 동의했다. 그 강화 조약은 1년간 유지되며, 부르주 조약으로도 알려져있고, 1485년 11월 2일에 서명되었다.

3. 2. 브르타뉴 공국의 특수성

공익 동맹 결성 이후 15세기 후반, 왕실과 왕국의 대영주들 간의 갈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의 일환으로 1484-1485년에 브르타뉴 공국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특정 영주들의 지지를 받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활동을 폐위시키려 시도했다. 안 드 프랑스는 주로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조합하여 큰 전투 없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고,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조약으로 교전이 연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약이 1차 광기 전쟁을 끝냈다고 보며, 1486년 6월부터 1488년 11월까지의 2차 분쟁 시기를 '브르타뉴 전쟁'이라고 부른다. 반면, 주로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인 일부 해설가들은 1차와 2차 시기 분쟁을 통틀어 브르타뉴-프랑스 전쟁이라 칭하거나, 이전의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연결하여 브르타뉴 독립 전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5]

4. 전개 과정

샤를 8세 통치 초, 루이 2세 도를레앙은 섭정을 노렸으나 투르(1484년) 삼부회에서 저지당했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연합, 안 드 브르타뉴와의 혼인을 추진했으나 안 드 프랑스가 막았다. 1485년, 기엔과 알랑송 탈출 시도 후 섭정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보장시로 피신했으나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에게 쫓겨났다. 프랑수아 2세는 강화 조약(1485년 부르주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 조약 후 반란이 재발, 1486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 북부를 침공했으나 격퇴, 프랑수아 드 뒤누아는 파르트네 성을 포위했다. 1487년 루이 2세는 다시 브르타뉴로 도주, 왕실 군대는 오데 데디를 해임, 피에르 드 보주로 대체하고 앙굴렘 백작 샤를은 항복했다.[2] 왕실 군대는 파르트네를 탈환, 뒤누아는 낭트에서 루이 2세와 합류 후 브르타뉴로 진격, 샤토브리앙 조약으로 귀족들과 협상했다.

북쪽에서 에케르드 육군 원수는 막시밀리안 1세를 격퇴, 남쪽은 캉달 영주가 농트롱 전투에서 알랭 달브레를 격퇴했다. 브르타뉴는 로앙 자작의 친왕실 세력이 플뢰르멜 점령했다.

1487년 프랑수아 2세의 군대 동원은 실패, 왕실 군대는 여러 도시 점령했다. 낭트는 포위되었으나, 브르타뉴-콘월 동맹군과 용병이 풀었다. 노르만 사략선은 브르타뉴 해안을 봉쇄했다.

1488년 오를레앙 공작과 브르타뉴 공작은 반란자로 선포, 오를레앙 공작은 동맹을 위해 투쟁 재개했다. 재산 압류, 알랭 달브레, 막시밀리안 1세, 스케일스 자작 등이 브르타뉴에 합류하나, 수적 열세와 플랑드르 반란으로 약화되었다.

1488년 왕실 군대는 푸제르, 디낭 점령,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장 4세 드 리외의 브르타뉴군은 대패, 전쟁은 종결, 오를레앙 공작은 포로, 프랑수아 2세는 조약을 체결했다.

루이 2세 도를레앙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4. 1. 1차 광기 전쟁 (1484-1485)

샤를 8세의 통치 초기에 루이 2세 드 오를레앙은 섭정을 차지하려 했으나,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1484년 1월 15일~3월 11일)에서 거부당했다.[5] 4월, 루이는 브르타뉴로 가서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합류했다. 그는 교황에게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해 달라고 요청하여 프랑수아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11월 23일, 그는 안과의 결혼을 구상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왕궁으로 돌아온 루이는 국왕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려 했으나, 안 드 프랑스가 무력으로 이를 막았다. 그녀는 왕실 근위대의 일부 영주들을 막았고, 오를레앙 공작을 지엔에 가택 연금했다.[5]

1485년 1월 17일 지엔에서 탈출한 루이 드 오를레앙은 파리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2월 3일 알랑송으로 탈출했고, 3월 12일 amende honorable|공식 사과프랑스어를 했다. 에브뢰 주변에 배치된 왕실 군대는 그가 브르타뉴에 합류하는 것을 막았고, 그는 오를레앙에 갇혔다. 동시에, 소집된 브르타뉴 귀족들은 왕실 군대에 의해 질서를 회복했다.[5]

8월 30일, 루이 드 오를레앙은 섭정에 반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왕실 군대는 오를레앙으로 진군했지만, 루이는 보장시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젊은 루이 2세 드 라 트레모유에 의해 9월에 쫓겨났다. 8월 9일, 브르타뉴의 프랑수아 2세는 1년간의 휴전에 동의했다. "부르주 평화"로 알려진 이 휴전은 1485년 11월 2일에 체결되었다.[5]

4. 2. 2차 광기 전쟁 (브르타뉴 전쟁, 1486-1488)

"광기 전쟁"은 왕실 중심 권력에 대항한 주요 봉건 영주들의 투쟁을 지칭하는 비꼬는 표현이다.[5] 이 사건은 15세기 후반 왕실과 왕국의 대영주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1484-1485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루이 2세 도를레앙은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활동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외교와 무력의 조합으로 실패했고,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조약으로 교전이 연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약으로 1차 광기 전쟁이 끝났다고 보며, 1486년 6월부터 1488년 11월까지의 2차 분쟁 시기를 ''브르타뉴 전쟁''이라고 부른다.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은 이 분쟁을 브르타뉴-프랑스 전쟁,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연결시켜 브르타뉴 독립 전쟁이라고도 한다.

샤를 8세의 집권 초기, 루이 2세 도를레앙은 섭정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투르의 삼부회(1484년)가 이를 거절하였다. 루이는 브르타뉴로 가서 프랑수아 2세와 합류, 안 드 브르타뉴와 혼인하려 했으나 안 드 프랑스가 저지했다. 1485년 루이는 기엔과 알랑송에서 탈출을 시도, 섭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보장시로 도피했으나,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에게 쫓겨났다. 프랑수아 2세는 강화 조약에 동의했고, 부르주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 조약이 끝나자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1486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 북부를 침공했지만 격퇴되었고, 프랑수아 드 뒤누아가 파르트네 성을 포위했다. 1487년 루이 2세는 다시 브르타뉴로 도주했다. 왕실 군대는 오데 데디를 해임하고 피에르 드 보주로 대체, 앙굴렘 백작 샤를은 항복했다.[2] 왕실 군대는 파르트네를 되찾았고, 뒤누아는 낭트에서 루이 2세와 합류했다. 이후 왕실 군대는 브르타뉴로 진격, 샤토브리앙 조약을 통해 브르타뉴 귀족들과 협상했다.

북쪽에서는 에케르드 육군 원수가 막시밀리안 1세를 격퇴했고, 남쪽에서는 캉달 영주가 농트롱 전투에서 알랭 달브레를 격퇴했다. 브르타뉴에서는 로앙 자작이 이끄는 친왕실 세력이 플뢰르멜을 차지했다.

1487년 프랑수아 2세의 군대 동원 시도는 실패했고, 왕실 군대는 브르타뉴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낭트는 포위되었지만, 브르타뉴의 콘월 동맹군과 용병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노르만 사략선들은 브르타뉴 해안을 봉쇄했다.

1488년 오를레앙 공작과 브르타뉴 공작은 반란자로 선포되었고, 오를레앙 공작은 동맹 세력을 위한 투쟁을 재개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재산 압류 명령이 선포되었고, 알랭 달브레와 막시밀리안 1세, 스케일스 자작 등이 브르타뉴 공작에 합류했다. 그러나 브르타뉴 동맹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플랑드르 반란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1488년 왕실 군대는 푸제르디낭을 점령했고,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장 4세 드 리외가 이끈 브르타뉴군은 대패, 전쟁은 종결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포로가 되었으며, 프랑수아 2세는 가혹한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4. 2. 1. 주요 전투 및 사건

연도주요 사건 및 전투
1484년
1485년
1486년
1487년
1488년



5. 결과 및 영향

사블레 조약으로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왕의 봉신임을 인정하고, 그의 딸들의 혼인에 프랑스 군주의 동의를 받는 등 여러 조항에 합의했다.[7][8] 이후 프랑수아 2세는 딸 안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시켜 브르타뉴의 주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488년 9월 9일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490년 12월 19일 안과 막시밀리안 1세의 대리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프랑스 군주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블레 조약 위반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브르타뉴와 전쟁을 다시 시작했고, 1491년 렌이 함락되면서 안은 결국 샤를 8세와 혼인하게 되었다. 이 혼인은 1492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승인을 받았다.

5. 1. 사블레 조약 (1488)

1488년 8월 20일, "라베르제 조약" 또는 "오르샤르 조약"이라고도 알려진 사블레 조약이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와 샤를 8세 사이에 체결되었다.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왕의 봉신임을 인정하고, 공국에서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으며, 프랑스가 정복한 브르타뉴 영토를 프랑스 통제하에 두기로 약속했다.[7][8] 샤를 8세도 프랑수아 2세가 약속한 영토의 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브르타뉴에서 철수시켰다. 이 조약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수아 2세의 딸들이 혼인할 때 프랑스 군주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데디, 뒤누아, 많은 전투원에게 사면이 이루어졌고, 오를레앙 공작은 요새에 투옥되었지만 샤를 8세가 통치 3년 차에 그를 사면하였다.

5. 2. 브르타뉴의 프랑스 통합

1488년 8월 20일, 사블레 조약이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샤를 8세 사이에 체결되었다.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왕의 봉신임을 인정하고, 공국에서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프랑스가 정복한 브르타뉴 영토를 프랑스 통제하에 두기로 합의했다.[7][8] 샤를 8세도 프랑수아 2세가 약속한 영토의 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브르타뉴에서 철수시켰다.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프랑수아 2세의 딸들이 결혼할 때 프랑스 군주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데디, 뒤누아, 그리고 많은 전투원들이 사면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요새에 투옥되었지만, 샤를 8세가 통치 3년 차에 그를 사면하였다.

프랑수아 2세는 그의 딸 안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시켜 브르타뉴의 주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1488년 9월 9일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자, 안은 그 다음 해 1월 여공작으로 즉위하였다. 프랑수아 2세의 충신들은 1490년 12월 19일 대리 결혼으로 안과 막시밀리안 1세의 결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혼인은 프랑스 군주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블레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고, 프랑스의 적에게 브르타뉴 통치를 맡기는 꼴이어서 프랑스는 브르타뉴와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1491년 봄, 프랑스 사령관 트레무아유가 새로운 승전을 거두었고, 샤를 8세는 렌을 포위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신부를 돕지 못했고, 렌은 함락되었다. 안은 샤를 8세와 약혼하고 랑제에서 혼인하기 위해 떠났다. 오스트리아가 외교적으로 항의했지만, 안은 1491년 12월 6일 샤를 8세와 혼인하였다. 이 혼인은 이후 1492년 2월 1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승인하였다.

5. 3. 광기 전쟁의 역사적 의의

"광기 전쟁"은 왕실 중심 권력에 대항한 주요 봉건 영주들의 투쟁을 비꼬는 표현으로, 1581년에 발행된 폴 에밀(Paul Emile)의 저서 ''Histoire des faicts, gestes et conquestes des roys de France''에서 만들어졌다.[5]

이 사건이 단일 전쟁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분쟁이 존재한다. 공익 동맹의 창단은 15세기 후반 왕실과 왕국의 대영주들 간의 갈등을 이어지게 했다. 이 분쟁의 일부로서, 1484-1485년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특정 영주들의 지지를 받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활동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벌였다. 대부분 외교와 무력의 조합을 통해, 안 드 프랑스는 커다란 전투 없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1485년 11월 2일, 부르주 조약으로 교전이 연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조약이 1차 광기 전쟁을 끝냈다고도 하며, 1486년 6월부터 1488년 11월까지의 2차 분쟁 시기를 ''브르타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인 일부 해설가들은 1차부터 2차 시기까지의 분쟁을 브르타뉴-프랑스 전쟁이라고 하거나 이전의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연결시켜 심지어는 브르타뉴 독립 전쟁이라고도 정의내린다.

참조

[1] 서적 Anne of Brittany Bookshop Guénégaud Edition 2000
[2] 웹사이트 France in the Renaissance 1453-1517 http://www.san.beck.[...]
[3] 서적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Accession of Henry VII, to the Death of Henry VIII, 1485–1547 Longmans, Green, and Co. 1906
[4] 서적 The Pictorial History of England: Being a History of the People, as Well as a History of the Kingdom Charles Knight and Company 1841
[5] 서적 Anne of Brittany Bookshop Guénégaud Edition 2000
[6] 웹인용 France in the Renaissance 1453-1517 http://www.san.beck.[...] 2010-01-01
[7] 서적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Accession of Henry VII, to the Death of Henry VIII, 1485-1547 Longmans, Green, and Co. 1906
[8] 서적 The Pictorial History of England: Being a History of the People, as Well as a History of the Kingdom Charles Knight and Company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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