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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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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린은 유교 경전인 맹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지켜야 할 외교 원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고려 시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 사대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의미가 구체화되었다. 교린은 조선의 다국적 외교 정책에 적용되었으며, 신유학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양자 외교, 무역 관계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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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린
교린 정책
교린 정책 (한자)交隣政策
교린 정책 (로마자 표기)gyorin jeongchaek
교린 정책 (매큔-라이샤워 표기)kyoryin chŏngch'aek
설명조선의 대외 정책으로, 이웃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함.

2. 어원

'교린'이라는 용어는 유교 경전 맹자를 통해 널리 알려진 개념어이나, 이때의 용법은 사대(事大)에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개념어로써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서로 지켜야 할 유교적 외교원리인 '사대'(事大)와 '사소'(事小)를 아우르는 것이었다.[11] 예를 들어 맹자의 '교린국장(交隣國章)'에 기록된 맹자제 선왕 사이의 문답에 의하면, 제 선왕이 "'교린(交隣)'에 도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으며,[惟仁者為能以大事小] … 오직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惟智者為能以小事大] … "라고 대답하였는데,[12] 이는 맹자에서 교린의 개념이 사대와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더 포괄적인 개념어였음을 보여준다.[11]

3. 용례와 역사

맹자에서 처음 등장한 교린은 고려 시대까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 전기에 들어 '사대'에 대비되는 용어로써 그 용법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1413년 조선 초기 사헌부의 상소에는 "사대하기를 정성으로 하고 교린하기를 신의로 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교린이 사대와 대비되는 의미로 쓰인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 중 하나다. 1554년 '고사촬요'에서는 사대·교린의 대상으로 중국, 일본, 여진족을 들고 있는데, 이는 교린의 대상이 사대의 대상인 중국 외에 나머지 국가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12]

그러나 이러한 용례들은 15~16세기의 조선 전기에 드물게 발견되는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교린'이라는 개념어는 15세기까지 외교 관계에서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는 어휘였다.[12] 16세기 중반까지도 개념 정의 자체가 불분명한 용어였다.[13] 예를 들어 '교린'이 상호주의적·호혜적인 외교관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는 일본, 류큐국 또는 여진족에 대해 조선을 상국으로 하는 계서적인 외교원리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두고 조선 내에서는 약간의 의문만이 제기되었을 뿐, 이를 정리한 이론 체계는 한 번도 제시되지 않았다.[14]

조선 후기에는 '교린'이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관계'를 포괄하는 용어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가리키는 어휘로 그 의미가 구체화되며 여러 공식 문서들에 널리 쓰이게 된다. 이는 당대 동아시아권의 국제질서 변화에 따른 것으로, 명청 전쟁을 거쳐 청나라가 성립하며 중국 대륙과의 외교 창구가 단일화되고, 17세기 초에 류큐국이 일본의 조공국이 되자 중국, 일본 외에 조선이 외교할 상대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조선이 스스로를 소중화로 여기며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을 때, 일본 역시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며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여기고 있었지만, 이러한 상호 간의 우월의식은 전면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2] 이러한 상황에서 교린이 상호주의적 개념인지 또는 조선을 상국으로 하는 계서적인 개념인지의 여부는 점차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14]

4. 다국적 외교 정책

교린 정책은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 (태국) , 여진족 등과의 양자 외교 및 무역 관계에도 적용되었다.[3][4][5][6]

4. 1. 신유학 철학의 영향

조선은 외교 및 무역 정책을 통해 파트너 국가들에게 신유학 철학 원리를 전파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7]

4. 2. 현실 정치와의 관계

맹자에서 처음 등장한 교린은 고려 시대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 전기에 들어 '사대'에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413년 조선 초기 사헌부의 상소에는 "사대하기를 정성으로 하고 교린하기를 신의로 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교린이 사대와 대비되는 의미로 쓰인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 중 하나이다.[12] 1554년 '고사촬요'에서는 사대·교린의 대상으로 중국, 일본, 여진족을 언급하며, 교린의 대상이 중국 외의 국가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12]

그러나 이러한 용례들은 조선 전기(15~16세기)에 드물게 발견되는 사례일 뿐, 15세기까지 외교 관계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고,[12] 16세기 중반까지도 개념 정의 자체가 불분명했다.[13] 예를 들어, '교린'이 상호주의적·호혜적인 외교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본, 류큐국 또는 여진족에 대해 조선을 상국으로 하는 계서적인 외교 원리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이를 정리한 이론 체계는 제시되지 않았다.[14]

조선 후기에 '교린'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가리키는 어휘로 의미가 구체화되며 공식 문서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는 명청 전쟁으로 청나라가 성립하며 중국과의 외교 창구가 단일화되고, 17세기 초 류큐국이 일본의 조공국이 되면서, 조선이 외교할 상대가 중국과 일본 외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스로를 소중화로 여기며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졌을 때, 일본 역시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며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여겼지만, 이러한 상호 간의 우월의식은 전면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2] 이러한 상황에서 교린이 상호주의적 개념인지, 조선을 상국으로 하는 계서적 개념인지의 여부는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14]

교린 정책은 다국적 외교에 적용되었으며,[3] 조선-류큐 왕국 간의 외교 및 무역 접촉 또한 중요했다.[4] 류큐 왕국 사신들은 1392년, 1394년, 1397년에 태조를 만났고, 은 1393년에 사신을 보냈다.[5]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교린 정책은 양자 외교와 여진족과의 무역 관계, 일본, 류큐 왕국, 샴 등에서 전개되었다.[6] 시간이 지나면서 외교 및 무역 정책은 조선의 파트너들에게 신유학 철학 원리가 인식되는 전통적인 문으로 여겨졌다.[7]

조선은 현실 정치적인 이유와 중국을 유교적 도덕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이상주의적 유교적 세계관 모두에 기반하여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8] 교린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 조선 외교는 현실 정치를 고려했다.

교린 양자 외교 교류의 독특한 성격은 중국이 개발한 개념적 틀에서 진화했으며, 점차 이론적 모델은 독특한 관계의 진화를 반영하며 수정되었다.[9]

참조

[1] 논문 The Establishment of Literati Governance Society in Early Joseon, and Its Continuation http://www.dbpia.co.[...] 2005-06
[2] 간행물 "The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the Ryukyu (Liuqiu) Islands 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Ritual and Rectification of Names in a Bipolar Authority Field," p. 54. http://www.chinajapa[...]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3] 웹사이트 사대교린 (조선 외교), Britannica online Korea http://enc.daum.net/[...]
[4]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5]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https://books.google[...] 1976
[6] 웹사이트 Yi Sugwang with Vietnamese counterpart Phùng Khắc Khoan in 1597 http://www.raskb.com[...]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7] 문서
[8] 간행물 Will Flowers Bloom without Fragrance? Korean-Chinese Relations http://www.asiaquart[...] 2009-01-08
[9]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https://books.google[...] 1991
[10] 웹인용 "교린(交鄰)" https://stdict.korea[...] 국립국어원 2024-03-20
[11] 저널 사대(事大)·사소(事小)의 정치사상:『춘추(春秋)』에서 『맹자(孟子)』로 https://www.kci.go.k[...]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23-03-20
[12] 웹인용 사대교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4-03-20
[13] 저널 '事大'와 '交隣'과 '小中華'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https://www.kci.go.k[...] 고려사학회 2023-03-19
[14] 저널 조선 전기의 교린 개념 https://www.kci.go.k[...]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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