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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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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딕토 6세는 973년 1월에 즉위한 교황으로, 로마 귀족들의 반발과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의 등장으로 폐위된 후 살해당했다. 그는 972년 교황 요한 13세가 사망한 후 선출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을 거쳐야 했기에 즉위가 늦어졌다. 오토 1세의 보호 아래 교황이 되었지만, 로마 귀족들은 그를 황제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973년 오토 1세가 사망하고 오토 2세가 즉위하면서 로마 귀족들은 베네딕토 6세를 폐위시키고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를 옹립했다. 베네딕토 6세는 산탄젤로 성에 갇혔으며, 보니파시오 7세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베네딕토 7세가 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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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교황
이름베네딕토 6세
원래 이름베네딕투스
재임 시작973년 1월 19일
재임 종료974년 6월
선임자요한 13세
후임자베네딕토 7세
출생지교황령 로마
사망974년 6월
사망 장소교황령 로마, 신성 로마 제국
이전 직책추기경 사제 (964–974)

2. 생애 초기와 교황 선출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의 게르만계 로마인의 아들로 태어난[11] 베네딕토는 10세기 초에서 10세기 중후반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교황령을 사실상 통치한 투스쿨룸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수브 카피톨리오''(아우구스투스 로마의 옛 8번째 구역, 포룸 로마눔) 지역에서 태어났다.[1]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그는 산 테오도로 알 팔라티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었다.[12]

베네딕토 6세는 산 테오도로 성당의 추기경이었다(18세기 이미지)


972년 교황 요한 13세가 선종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따르던 대다수 교황 선거인단은 베네딕토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에 먼저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973년 1월까지 교황좌에 착좌하지 못했다.[13] 로마 시정과 교회 문제에 있어서 사실상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로마의 귀족들은 오토 1세 황제의 보호 아래 교황으로 즉위한 베네딕토 6세를 황제의 꼭두각시로 간주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14]

3. 교황으로서의 재임

베네딕토 6세의 재임 기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파사우의 필그림이 베네딕토 6세에게 팔리움을 수여하고 주교로 임명하여 헝가리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베네딕토 6세의 답신은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15] 프랑스 국왕 로테르 4세와 프랑스의 엠마 왕비의 요청에 따라 블랑댕 수도원을 교황의 보호 아래 두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프리드리히와 그의 후임자들이 구 로마 제국의 상,하 판노니아 및 노리쿰 지역에서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의 교황 칙서가 있으나,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다.[16]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하고 오토 2세가 즉위하면서 독일에서 귀족들과의 마찰이 발생하였다. 오토 2세가 로마에 신경 쓰지 못하자, 독일 황제의 로마 간섭에 반감을 가진 로마 귀족들은 베네딕토 6세를 몰아낼 기회로 판단했다. 대크레센티우스와 부제급 추기경 프란코 페루치(반독일 세력의 교황 후보)가 이끄는 무리가 974년 베네딕토 6세를 산탄젤로 성에 가두었다.[17] 페루치 추기경은 스스로 교황 보니파시오 7세라고 칭하며 대립교황이 되었다.

베네딕토 6세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오토 2세는 시코 백작을 로마로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스테파노라는 사제에게 베네딕토 6세를 교살하라고 지시하였다.[18][19]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974년 7월 베네딕토 6세를 교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교황 베네딕토 7세가 베네딕토 6세의 뒤를 이었다. 일부 옛 문헌에서 교황 베네딕토 6세와 교황 베네딕토 7세 사이에 나오는 도노 2세(Donus II)라는 교황은 도미누스 파파(Dominus Papa)를 도누스 파파(Donus Papa)로 오역한 것이므로 실존 인물이 아니다.

972년 9월 교황 요한 13세가 사망하자 황제파는 베네딕토 6세를 후임으로 선택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승인을 받아 973년 1월에야 축성되었다.[3] 오토 1세의 보호 아래 교황으로 즉위한 베네딕토 6세는 로마의 민사 및 교회 문제에 대한 황제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현지 로마 귀족들에게 황제의 꼭두각시로 여겨졌다.[4]

4. 폐위와 죽음

973년 베네딕토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오토 1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오토 2세가 즉위하면서 독일에서는 귀족들과의 마찰이 수면 위로 부상하였다. 이 때문에 새 황제가 로마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자, 평소에 독일 황제들이 로마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던 로마의 귀족들은 베네딕토 6세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크레센티우스 1세와 부제급 추기경 프랑코 페루치(반독일 세력이 내세운 유력한 교황 후보)이 이끄는 일련의 무리가 974년 베네딕토 6세를 기습적으로 포박해 당시 크레센티 가문의 근거지였던 산탄젤로 성에 가두었다.[17] 이후 페루치 추기경은 스스로 교황 보니파시오 7세라고 참칭하며 대립교황이 되었다.

베네딕토 6세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오토 2세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대표자로 시코 백작을 로마로 보냈다.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스스로 물러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한 사제에게 감옥에 투옥된 베네딕토 6세를 교살하라고 지시하였다.[18][19]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974년 7월 베네딕토 6세를 교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베네딕토 6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교살당한다.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가 쫓겨난 후, 교황 베네딕토 7세가 베네딕토 6세의 뒤를 이었다. 한편, 일부 옛 문헌에서는 교황 베네딕토 6세와 교황 베네딕토 7세 사이에는 소위 도노 2세(Donus II)라는 교황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어느 연대기 작가가 도미누스 파파(Dominus Papa)를 도누스 파파(Donus Papa)로 오역한 것이므로 실존 인물이 아니다.

4. 1. 베네딕토 6세의 죽음에 대한 논란

오토 1세가 973년 베네딕토 6세 선출 직후 사망하자 오토 2세가 즉위하면서 독일에서 귀족들과의 문제가 발생했다.[7] 새로운 황제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로마 귀족 세력은 오토 제국의 로마 내정에 대한 간섭에 반대하여 베네딕토 6세에 대항할 기회를 잡았다.[7] 크레센티우스 1세와 반 오토 세력이 선호한 후보였던 추기경 부제 프랑코 페루치가 이끄는 이 세력은 974년 6월 베네딕토 6세를 체포하여 당시 크레센티우스 가문의 요새였던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7][8] 페루치는 새로운 교황으로 선포되어 보니파시오 7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7]

베네딕토 6세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토 2세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제국 대표인 시코 백작을 보냈다.[9] 보니파시오는 물러설 의사가 없었기에,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사제에게 감옥에 있는 베네딕토를 살해하도록 명령하여 목 졸라 죽였다.[9][10] 보니파시오 7세는 오늘날 대립 교황으로 간주되며, 베네딕토 7세가 베네딕토 6세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10]

5. 유산

참조

[1] 서적 Gregorovius
[2] 서적 Mann
[3] 서적 Mann
[4] 서적 Keepers of the keys of heaven: a history of the papacy Basic Books 2009
[5] 서적 Mann
[6] 서적 Mann
[7] 서적 Gregorovius
[8] 서적 Norwich
[9] 서적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2000
[10] 서적 Mann
[11] 서적 Gregorovius
[12] 서적 Mann
[13] 서적 Mann
[14] 서적 Keepers of the keys of heaven: a history of the papacy Basic Books 2009
[15] 서적 Mann
[16] 서적 Mann
[17] 서적 Norwich
[18] 서적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2000
[19] 서적 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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