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쓰키 모토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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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쓰키 모토쓰나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155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2세의 나이에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보호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배반했다. 1632년 84세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구쓰키 가문은 분할되었고, 막내 아들인 다네쓰나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신뢰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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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쓰키 모토쓰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족 | 구쓰키 씨 |
이름 | 구쓰키 모토쓰나 |
원어이름 | 朽木元綱 |
로마자 표기 | Kutsuki Mototsuna |
별명 | 미야고로 (弥五郎) |
법명 | 목사이 (牧斎) |
계명 | 조큐인덴 후쿠미네마이토쿠다이고지 (長久院殿福峯米徳大居士) |
묘소 | 시가현 다카시마시 구쓰키 이와세의 고쇼지 |
가명 (통칭) | 야고로 (弥五郎) |
생애 | |
출생 | 덴분 18년 (1549년) |
사망 | 간에이 9년 음력 8월 29일 (1632년 10월 12일)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시나노노카미, 가와치노카미 |
소속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아시카가 요시테루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구쓰키 하루쓰나 |
어머니 | 아스카이 마사쓰나의 딸 |
아내 | 교에의 딸 (정실) |
자녀 | 노부쓰나 도모쓰나 다네쓰나 딸 (호리 나오마사의 부인) |
2. 생애
1550년(덴분 19년) 아버지 구쓰키 하루쓰나가 전사하여, 겨우 2세의 나이로 가문을 상속했다. 1553년(덴분 22년)부터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교토에서 쫓겨난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아버지에 이어 구쓰키 계곡에 숨겼다. 1566년 (에이로쿠 9년) 아사이 나가마사에 의한 오미 국다카시마 군 침공 때 인질을 보냈고, 1568년 (에이로쿠 11년) 12월 아사이 히사마사・나가마사 부자와 기청문을 교환했지만, 곧바로 파기했다.
1570년 (겐키 원년) 아사쿠라 공격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설득을 받아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철퇴('''구쓰키 고에''')를 도왔다. 이후 노부나가에게 섬겨 이소노 가즈마사, 쓰다 노부스미에게 차례로 배속되었지만, 1579년 (덴쇼 7년) 대관직에서 파면되어 노부나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이세아노 군・다카시마 군 내 구라이리지의 대관으로 임명되었고,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했다. 1595년 (분로쿠 4년) 히데요시로부터 다카시마 군 9,203석 2두를 안도받았다.
1590년 (덴쇼 18년),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600년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당초 오타니 요시쓰구를 따라 서군에 속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 호응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등과 함께 동군으로 돌아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달리 사전에 내통 의사를 보이지 않아 전후 2만 석에서 9,550석으로 감봉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몰수된 것은 모토쓰나가 대관을 맡았던 구라이리지(도요토미 정권 직할령)이며 모토쓰나의 소령은 안도되었다는 설, 애초에 모토쓰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1616년 (겐나 2년) 삭발하여 보쿠사이(牧斎)라 불렀다. 1632년 (간에이 9년), 구쓰키 계곡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
사후 유령은 3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어 구쓰키 종가는 6,300여 석이 되었다. 이후 막내아들 다네쓰나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신뢰를 받아 다이묘로 발탁되어, 적류보다 서류가 소령이 많아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2. 1. 가독 상속과 아시카가 요시테루 비호
1550년(덴분 19년) 아버지 구쓰키 하루쓰나가 전사하여, 불과 2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 1553년(덴분 22년)부터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교토에서 쫓겨난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아버지에 이어 구쓰키 계곡에 숨겨 보호하였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아사이 나가마사에 의한 오미 국다카시마 군 침공 때에는 인질을 보냈고, 1568년(에이로쿠 11년) 12월에는 아사이 히사마사・나가마사 부자와 기청문을 교환했지만, 곧바로 파기했다.2. 2. 오다 노부나가 시대
겐키 원년(1570년) 아사쿠라 공격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설득을 받아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철퇴('''구쓰키 고에''')를 도왔다. 후에 노부나가에게 섬겨 노부나가의 휘하로 이소노 가즈마사에게 배속되었고, 가즈마사 추방 후에는 쓰다 노부스미에게 배속되었다. 그러나 덴쇼 7년(1579년)에 대관을 파면당했으므로, 노부나가로부터는 평가받지 못했던 것 같다.2. 3.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덴쇼 18년(1590년)에 구쓰키 모토쓰나에게 도요토미 성을 하사했다. 모토쓰나는 히데요시를 섬겨 이세아노 군・다카시마 군 내의 구라이리지의 대관으로 임명되었고,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가했다. 분로쿠 4년(1595년)에는 히데요시로부터 다카시마 군 9,203석 2두를 안도받았다.2. 4.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당초 오타니 요시쓰구를 따라 서군에 속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 호응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등과 함께 동군으로 돌아섰다.[1]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는 달리 사전에 내통 의사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2만 석에서 9,550석으로 감봉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몰수된 것은 모토쓰나가 대관을 맡았던 구라이리지(도요토미 정권의 직할령)이며 모토쓰나의 영지는 그대로 보전되었다는 설도 있고,[1] 애초에 모토쓰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1]2. 5.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에는 오타니 요시쓰구를 따라 서군에 속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 호응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등과 함께 동군으로 돌아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달리 사전에 내통 의사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2만 석에서 9,550석으로 감봉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몰수된 것은 모토쓰나가 대관을 맡았던 구라이리지(도요토미 정권의 직할령)이며 모토쓰나의 소령은 안도되었다는 설이나, 애초에 모토쓰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1616년에 삭발하여 보쿠사이(牧斎)라고 불렀다. 1632년, 구쓰키 계곡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
사후, 유령은 3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기 때문에, 구쓰키 종가는 6,300여 석이 되었다. 후에 막내인 다네쓰나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신뢰를 받아 다이묘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적류보다 서류가 소령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구쓰키 하루쓰나[2] |
어머니 | 아스카이 마사쓰나의 딸[2] |
부인 | 교에의 딸[2] |
장남 | 구쓰키 노부쓰나 (1582년 ~ 1662년)[2] |
차남 | 구쓰키 도모쓰나 (1599년 ~ 1662년)[2] |
삼남 | 구쓰키 타네쓰나 (1605년 ~ 1660년)[2] |
딸 | 호리 나오마사에게 시집감[2] |
4. 관련 작품
- 이스라필의 소설 담해의 바다 수면이 흔들릴 때에서 주인공은 구쓰키 모토쓰나(작중 모토쓰나)로 환생한다. 이 소설은 역행 환생을 소재로 다룬다.
참조
[1]
웹사이트
Kutsuki Mototsuna
https://samurai-worl[...]
Samurai World
2023-03-23
[2]
웹사이트
Kutsuki Mototsuna 朽木元綱
https://sengokujidai[...]
2023-03-23
[3]
문서
飛鳥井雅綱の子
[4]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
[5]
서적
関ケ原合戦―戦国のいちばん長い日―
中央公論社
1982
[6]
서적
関ヶ原合戦の真実―脚色された天下分け目の戦い―
宮帯出版社
2014
[7]
웹사이트
조선시대 대일외교 용어사전
http://waks.aks.ac.k[...]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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