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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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는 1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출신이다. 툴루스는 5군단 알라우다에의 군사 호민관, 퀘스토르, 평민 호민관,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70년부터 73년까지 제3군단 아우구스타의 군단장으로 누미디아 속주를 통치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에 의해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에서 군사 훈장을 받았으며, 셉템비리 에풀로눔 사제단에 입회했다. 또한 85/86년에 아프리카 속주의 집정관 총독을 수행했다. 그의 형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루카누스와의 관계가 돈독했으며, 플리니우스의 서신을 통해 그의 말년의 쇠약한 건강 상태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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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 |
---|---|
기본 정보 | |
이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
로마자 표기 | Gnaeus Domitius Tullus |
출생 | 서기 1세기 |
사망 | 서기 1세기 |
활동 시기 |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 |
경력 | |
아버지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
형제 | 도미티아 롱기나 |
배우자 | 안니아 |
자녀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
직업 | 원로원 의원, 군인 |
2. 초기 생애
툴루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출신으로, 아버지는 섹스투스 쿠르비우스 툴루스이며 어머니는 티티아 마르셀라로 추정된다.[3] 역사가들은 툴루스와 그의 형제 루카누스가 마르쿠스 에피디우스 티티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친척에게 입양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4]
툴루스의 쿠르수스 호노룸(정무관 경력)은 두 개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공직 생활의 대략적인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17][6]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툴루스의 아버지는 웅변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에게 기소되어 시민권과 재산을 박탈당했다.[5] 그러나 아페르는 툴루스와 루카누스 형제를 자신의 유언 상속인으로 삼았고, 형제가 그의 성씨(도미티우스)를 따르는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주었다.[5]
3. 경력
3. 1. 초기 경력
툴루스의 쿠르수스 호노룸은 두 개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삶의 개요를 전한다.[17][6] 그는 10대 시절, 원로원 의원 아버지를 둔 젊은이들이 정치 경력을 시작하는 관례에 따라 '비긴티비리'의 네 개 부서 중 하나인 '데켐비리 스틀리티부스 유디칸디스'(decemviri stlitibus iudicandis)의 일원으로 원로원 경력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라인강 국경의 알라우다이 제5군단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복무했으며, 이는 그의 형제 루카누스가 복무했던 군단과 같다.
3. 2. 주요 경력
툴루스의 쿠르수스 호노룸(경력 과정)은 두 개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삶의 개요를 알 수 있다.[17][6] 그는 10대에 원로원 의원 가문 자제들이 정치 경력을 시작하는 비긴티비리의 네 부서 중 하나인 '데켐비리 스틀리티부스 유디칸디스'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라인강 국경의 알라우다이 제5군단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했는데, 이는 그의 형제 루카누스가 복무했던 군단과 동일하다.
그 뒤 툴루스는 공화정 시대의 정무관직들을 차례로 거쳤다. 처음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황제(네로로 추정되는데, 기록말살형 때문에 비문에서 이름이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를 보좌하는 재무관을 지냈고, 이어서 호민관과 법무관을 역임했다.
법무관직 이후, 툴루스와 그의 형제 루카누스는 70년부터 73년까지 누미디아 속주를 다스리는 아우구스타 제3군단의 레가투스 레기오니스(군단장)으로 함께 임명되었다. 역사가 베르너 에크는 이때 루카누스가 민간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툴루스가 군단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주장한다.[18][7]
72년 또는 73년에 툴루스와 루카누스 형제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에 의해 파트리키(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편입의 정확한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네 명의 황제의 해 동안 형제가 보여준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지 W. 휴스턴(George W. Houston)은 증거 검토 후, 당시 아우구스타 제3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섹스투스 센티우스 카이킬리아누스를 대체할 법무관 출신 인물이 급히 필요했던 비상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19][8]
파트리키 계층으로 상승한 후, 툴루스는 게르만 부족들을 상대하는 벡실라티오(파견 부대)의 프라이펙투스(지휘관)를 맡아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이 공적으로 그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군사 훈장인 '도나 밀리타리아'를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고대 로마에서 가장 명망 높은 네 개의 사제단 중 하나인 '셉템비리 에풀로눔'의 일원이 되었다.
툴루스는 84/85년에 아프리카 속주의 프로콘술(총독)로 부임한 형 루카누스를 보좌하는 레가투스로 1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85/86년에는 직접 아프리카 속주의 프로콘술 총독직을 수행했다.[20][9]
4. 가족
툴루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출신 섹스투스 쿠르비우스 툴루스와 티티아 마르셀라로 추정되는 여성의 아들이었다.[3] 일부 역사가들은 툴루스와 그의 형제 루카누스가 마르쿠스 에피디우스 티티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친척에게 입양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4]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툴루스 형제의 아버지 섹스투스는 웅변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에게 기소되어 시민권과 재산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아페르는 이후 툴루스와 루카누스 형제를 자신의 유언 상속인으로 삼았고, 자신의 성씨(노멘)인 '도미티우스'를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주었다.[5] 이로 인해 툴루스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4. 1. 루카누스와의 관계
툴루스와 형제 루카누스가 같은 시기에 동일한 관직을 역임했다는 사실 외에도, 두 형제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는 명확한 일화가 플리니우스의 서신을 통해 전해진다.[22]루카누스는 55년에 보좌 집정관을 지낸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의 딸과 결혼하여 딸 도미티아 루킬라를 두었다. 그러나 장인 만키아는 사위 루카누스를 심하게 미워하여, 루카누스가 딸 루킬라에 대한 가부(家父, paterfamilias)로서의 권한을 포기한다면 루킬라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는 루카누스가 장인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루카누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으나, 형 툴루스가 조카 루킬라를 자신의 양녀로 입양함으로써 만키아의 계획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플리니우스는 이 사건을 형제간의 깊은 충성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했다.[22]
4. 2. 결혼과 자녀
툴루스의 형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루카누스는 55년에 보충 집정관을 지낸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의 딸과 결혼하여 딸 도미티아 루킬라를 두었다. 그러나 장인 만키아는 사위 루카누스를 미워하여, 루킬라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조건으로 루카누스가 딸에 대한 가부장으로서의 권한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루카누스가 상속 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루카누스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자, 툴루스는 조카인 루킬라를 자신의 양녀로 입양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11][22]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툴루스에게 친자식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는 노년에 병으로 쇠약해졌을 때 결혼했는데, 상대는 "뛰어난 혈통과 정직한 성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결혼하여 자녀를 둔 미망인이었다. 플리니우스는 툴루스의 병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곁을 지킨 그녀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름까지 기록하지는 않았다.[12][23]
5. 말년
툴루스의 활발했던 생애와 달리 말년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리니우스는 툴루스가 노년에 "모든 팔다리가 비틀리고 못 쓰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툴루스는 몹시 쇠약해져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자세를 바꿀 수 없었으며, 씻고 양치하는 일상적인 활동에도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플리니우스는 "그가 약해진 소화력에 불만을 토로하던 시절, 매번 그는 노예의 손가락을 빨았다"라고 덧붙여 전하였다.[21]
참조
[1]
CI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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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to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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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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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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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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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tul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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