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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테 바르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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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테 바르트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을 밀고하여 53명 이상을 강제 수용소로 보낸 혐의로 덴마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 중 한 명이다. 공산당원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바르트람은 게슈타포의 첩보원으로 활동하며 남편, 남동생, 동료들을 포함한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을 밀고했다. 체포 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0년 복역 후 석방되어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그녀의 행적은 덴마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전쟁과 배신의 상징으로 남아 여러 문학 작품과 연구의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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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테 바르트람
기본 정보
1942년의 그레테 바르트람
1942년의 그레테 바르트람
본명마렌 마르그레테 톰센
출생일1924년 2월 23일
출생지오르후스, 덴마크
사망일2017년 1월 (92세)
사망지베시고브로, 스웨덴
국적덴마크
다른 이름토라
마렌 마르그레테 바르트람
알려진 이유제2차 세계 대전 중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최소 53명을 밀고함
범죄 정보
유죄 판결반역죄
유죄 판결 상태사망
형벌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2. 생애

그레테 바르트람은 오르후스에서 덴마크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1941년 7월 12일 프로데 톰센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덴마크의 공산주의 계열 레지스탕스 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최소 53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강제 수용소에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그녀의 남편, 남동생, 동료들이 포함되었다.[2]

1946년 10월 29일 오르후스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947년 12월 9일 덴마크 법무부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56년 보석으로 석방된 뒤 스웨덴 할란드로 이주했다.[2]

2. 1. 초기 생애

그레테 바르트람은 오르후스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덴마크 공산당(DKP) 당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닐스 페터 크리스토퍼 바르트람(1896년 출생)은 윌란반도 남부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측으로 참전했다. 그는 전쟁의 충격으로 고통받았고 일하기 어려웠지만, 오르후스 미드트뷔엔에서 작은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했다.[2]

바르트람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고, 16세에 임신하여 1941년 7월 12일 직장 동료인 프로데 톰센(1920년 3월 28일 출생)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1943년 여름에 끝났고, 그들의 아들은 시어머니의 위탁 보호를 받게 되었다.

2. 2. 나치 협력 및 배신 행위

1942년 바르트람의 가족들은 그녀의 오빠 크리스티안 바르트람을 포함하여 덴마크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같은 해 9월, 덴마크 경찰은 오르후스 프레데리시아가데의 한 상점에서 발생한 사보타주 화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1000DKK의 현상금을 걸었다.[3] 바르트람은 오빠를 통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정보를 경찰에 제공했다. 그녀의 오빠를 포함한 5명이 체포되었고, 한 명은 탈출했고 나머지는 1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

이후 바르트람은 게슈타포의 첩보원으로 고용되어 레지스탕스 운동 관련자들과 함께 불법 활동에 참여했다. 1944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6월에는 삼싱 그룹과 그와 연관된 대학생 그룹을 체포하여 노이엔감 수용소로 이송되게 만들었다. 이로써 오르후스와 중앙 윌란 지역의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그룹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당시 레지스탕스 회원들은 여전히 바르트람을 매우 신뢰했고, 1944년 8월 그녀는 오르후스 레지스탕스의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기 위한 대표로 코펜하겐으로 보내졌다. 이후 레지스탕스는 그녀를 의심하게 되었고, 이에 그녀는 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체포되어 프뢰슬레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레지스탕스는 여러 차례 그녀를 암살하려 했으며, 결국 그녀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녀는 회복을 위해 독일로 보내졌다.

1945년 3월, 그녀는 콜링의 게슈타포에 고용되어 덴마크 주둔 독일군의 항복 때까지 근무했다. 항복일인 5월 5일, 그녀는 에스비에르에 있는 게슈타포 본부에 있었는데, 레지스탕스가 그곳에 폭탄을 터뜨리면서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빠르게 회복하여 도움을 받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콜링으로 갔지만, 게슈타포는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바르트람은 그 후 브레이닝으로 가서 5월 10일에 체포되었다.[3]

바르트람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한 달에 500DKK에서 700DKK를 받았지만, 게슈타포의 증인은 그녀가 첩보원에게 지급되는 돈의 3/4, 즉 한 달에 1200DKK에서 1500DKK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 활동하던 덴마크의 공산주의 계열 레지스탕스 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최소 53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강제 수용소에 제공했다. 이 명단에는 바르트람의 남편, 남동생, 바르트람의 동료가 포함되었다.

2. 3. 재판 및 처벌

그레테 바르트람은 전후 재판에서 최소 53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독일 강제 수용소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명단에는 바르트람의 남편, 남동생, 동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의 정보로 인해 15명이 고문을 당했고, 35명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그중 8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2]

바르트람은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했고, 1946년 10월 29일 오르후스 형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1947년 2월 22일 베스트레 란스레트와 1947년 9월 4일 덴마크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2]

그러나 1947년 12월 9일, 법무부 장관 닐스 부쉬-옌센은 바르트람의 형량을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감형 이유는 바르트람이 어렸을 때 "반종교적, 공산주의적, 물질주의적 정신"으로 자랐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었다.[2]

바르트람은 1956년 10월 26일, 10년의 징역형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이후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결혼 후 새 이름으로 살았다.[2]

3. 유산 및 평가

그레테 바르트람은 덴마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행위는 덴마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전쟁의 상처와 배신의 아픔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바르트람은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최소 53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게슈타포에 넘겼다. 이 명단에는 그녀의 남편, 남동생,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바르트람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56년에는 가석방되어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바르트람의 이야기는 여러 문학 작품과 연구의 주제가 되었으며, 전쟁과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그녀를 나치 부역자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하며,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그녀의 행위를 개인적인 일탈로 축소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바르트람의 사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개인의 선택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그리고 배신과 용서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참조

[1] 웹사이트 Den aarhusianske storstikker Grethe Bartram er død https://www.tv2ostjy[...] 2022-08-24
[2] 웹사이트 Gestapos Største Stikker http://samvirke.dk/h[...] Samvirke 2015-08-28
[3] 웹사이트 Grethe Bartram http://www.historie-[...] Historie Online 2015-08-28
[4] 웹사이트 Dödsdömd i Danmark efter kriget, nu avliden i Vessigebro http://www.hn.se/nyh[...]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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