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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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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글렌코 학살은 1692년 2월 스코틀랜드 글렌코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윌리엄 3세 정부의 명령에 따라 맥도널드 씨족 38명이 살해되고 40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윌리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글렌코 맥도널드 씨족이 표적이 되었다. 학살은 정부군의 잠입과 배신, 그리고 잔혹한 살해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의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은 미흡했고, 자코바이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글렌코 학살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억압과 배신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오늘날까지도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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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코 학살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글렌코 학살
전체재커바이트의 반란
날짜1692년 2월 13일
장소스코틀랜드 포트윌리엄 남부 글렌코
결과맥도널드 가문의 학살
교전 세력
교전국 1아가일 백작 보병 연대
교전국 2글렌코의 맥도널드 가문
지휘관
지휘관 1제5대 글렌리온 지주 로버트 캠벨
지휘관 2알라스다르 맥클레인
병력
병력 1120명
병력 2불명
사상자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78명
추가 정보
관련 사건재커바이트 봉기
"글렌코 학살 이후", 피터 그레이엄
지도 유형스코틀랜드
전투 참가자 1스코틀랜드 왕국
지휘관 1 상세소령 던컨슨
대위 글렌리온
대령 해밀턴
대령 힐
병력 1 상세920명
사상자 1 상세없음
전투 참가자 2글렌코 맥도널드 일족
지휘관 2 상세알라스다르 맥이아인
사상자 2 상세약 30명 사망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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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7세가 폐위되고 윌리엄 3세메리 2세가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코바이트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 저항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 지역은 잉글랜드와 사회, 문화적으로 달랐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불편했으며, 언어와 민족도 잉글랜드와는 차이가 있어 중앙 정부 통제를 벗어나 '화외의 민'으로 여겨졌다.

던디 백작이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는 킬리크랭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던디 백작이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덩켈드 전투에서 잉글랜드 측이 승리하며 명예혁명 체제가 스코틀랜드의 주류가 되었지만, 하이랜드에는 여전히 자코바이트 세력이 남아 있었다.

윌리엄 3세 정부는 남쪽의 프랑스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북쪽 하이랜드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다. 하이랜드의 평화를 위해서는 로카버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 지역은 글렌코 맥도널드를 포함한 여러 씨족들의 근거지였다.

2. 1.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일부 역사가들은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가 종종 제기되는 것보다 더 평화로웠다고 주장하지만, 예외적으로 로카버는 정부 관리, 다른 족장 및 게일어 시인들에 의해 가축 강도와 도둑들의 피난처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록에서 네 개의 로카버 씨족, 즉 글렌코 맥도널드, 케포크 맥도널드, 맥그리거 씨족, 캐머런 씨족이 꾸준히 언급되었다.[10]

이들 씨족 병력은 1678년에서 1680년 사이에 집회를 진압하는 데 사용된 독립 하이랜드 부대에 복무했다. 또한 1685년 아가일의 봉기 이후 애솔 백작이 이끈 습격에 참여했는데, 이 습격은 주로 코월과 킨타이어에 정착한 저지대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중부 및 남부 하이랜드의 광범위한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688년 9월, 제임스 7세는 11월 영광스러운 혁명으로 폐위되기 직전 케포크 맥도널드를 불법화했다.[10]

1689년 3월, 제임스는 왕국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아일랜드에 상륙했고, 캐머런과 케포크 맥도널드는 던디 백작에 합류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7월 27일 킬리크랭키 전투에서 정부군에 대한 승리는 던디와 600명의 하이랜드인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조직적인 자코바이트 군사 저항은 1690년 5월 크롬데일 전투 이후 대부분 끝났다. 그러나 많은 외딴 하이랜드 지역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이 지역을 통제하는 데는 9년 전쟁 (플랑드르)에 필요한 자원이 사용되었다. 스코틀랜드 서부와 얼스터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한 나라의 불안이 다른 나라로 쉽게 번졌기에, 하이랜드의 평화를 위해서는 로카버를 통제해야 했고, 이는 외견상 보이는 것보다 더 넓은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10]

17세기 말, 그레이트브리튼섬 북쪽 끝 하이랜드 지방 사람들은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화외의 민’이었다.[10]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통도 불편했고, 언어와 민족도 달랐다.[10]

명예혁명기 영국 본토 북단 하이랜드에서는 두 가지 이유로 혁명에 반대하는 여론이 주류였다. 하나는 친밀감 문제로, 하이랜드 관점에서는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 총독보다는 스코틀랜드 왕가 후손인 제임스가 왕으로서 더욱 바람직했다. 또 다른 하나는 타나이스터리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법과 전통이었다. 잉글랜드와 달리[12] 법적으로 윌리엄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할 근거가 희박했다. 신하가 왕을 폐위할 수 있는 것은 스코틀랜드 법에 따르면, 여론을 거스르고 잉글랜드에 굴복했을 때뿐이었다.

하이랜드 사람들은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였기에, 당장은 윌리엄에게 따르는 것이 무난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윌리엄 지지를 분명히 한 캠벨 씨족은 하이랜드 씨족 사회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국왕 윌리엄과 잉글랜드 정부는 캠벨 씨족을 통해 하이랜드 정보를 얻거나 회유하려고 하기도 했다.

2. 2. 명예혁명과 자코바이트의 저항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7세(스코틀랜드 왕)가 폐위되고 윌리엄 3세메리 2세가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를 지지하는 세력인 자코바이트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던디 백작이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는 킬리크랭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10] 이 전투에서 던디 백작이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10] 이어진 덩켈드 전투에서는 잉글랜드 측이 승리했다. 스코틀랜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코바이트 일색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두 전투를 통해 명예혁명 체제를 따르는 풍조가 주류가 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즉시 스코틀랜드의 안정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이랜드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자코바이트들이 잠재해 있었다. 남쪽의 적국 프랑스와 대치하는 데 있어 북쪽 하이랜드의 불안은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리엄 3세 정부는 하이랜드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든 실력을 과시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3. 하이랜드 씨족 사회와 윌리엄 3세 정부의 갈등

하이랜드 씨족 사회는 17세기 말, 잉글랜드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불편했으며, 언어와 민족도 잉글랜드와는 차이가 있었다.[10] 이들은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의 중앙 정부 통제를 벗어나 '화외의 민'(문명화되지 않은 백성)으로 여겨졌다.[10]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하이랜드 지역을 복속시키고자 했다. 이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하이랜드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적 목적도 있었다.[11]

그러나 하이랜드 씨족들은 자코바이트 세력이 강했고, 제임스 7세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들은 타나이스터리 등 스코틀랜드 고유의 법과 전통을 따랐으며, 잉글랜드와 달리 윌리엄 3세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할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여겼다.[12]

던디 자작을 중심으로 한 자코바이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킬리크랭키 전투에서 패배하고 던디 자작이 전사하면서 주춤했다. 이후 덩켈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승리하면서 명예혁명 체제가 스코틀랜드의 주류가 되었지만, 하이랜드에는 여전히 자코바이트 세력이 남아 있었다.

윌리엄 3세 정부는 하이랜드를 통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투입했지만, 9년 전쟁으로 인해 자원이 부족했다. 스코틀랜드 서부와 얼스터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한 지역의 불안이 다른 지역으로 쉽게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했고, 하이랜드의 평화를 위해서는 로카버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이랜드 씨족 사회는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윌리엄 3세에게 복종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캠벨 씨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씨족들은 윌리엄 3세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윌리엄 3세 정부는 캠벨 씨족을 통해 하이랜드 씨족들을 회유하고 정보를 얻으려 했다.

당시 잉글랜드 사회에는 1641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프로테스탄트 학살 사건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대한 공포와 적대감이 팽배했다.[13] 하이랜드 지역은 가톨릭 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잉글랜드의 적개심을 더욱 부추겼다.[13]

3. 충성 맹세와 글렌코 맥도널드의 지각

1691년 8월 27일, 윌리엄 3세는 하이랜드의 스코틀랜드 씨족장들에게 이듬해 1월 1일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하며, 이를 어길 시 피의 보복을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씨족장들은 프랑스에 망명 중인 제임스 2세에게 의견을 구했으나, 제임스 2세는 결정을 미루며 시간을 지체했다.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제임스 2세는 일단 서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씨족장들은 겨울 눈 속에서 서둘러 서명 장소로 향했다.

일부 씨족은 마감 시한이 임박해서야 서명 장소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측은 막판에 서명 장소를 변경하고 검문소를 설치하여 이들의 발을 묶었다.[14] 결국 글렌코의 맥도널드는 1월 2일에 도착했고, 치안판사의 부재로 서명은 1월 5일로 미뤄졌다. 이를 빌미로,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존 달린플을 비롯한 정부 내 강경파는 글렌코의 맥도널드를 무력 행사의 표적으로 삼았다.

맥도널드 씨족이 표적이 된 또 다른 이유는, 잉글랜드와 씨족 사회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캠벨 씨족의 오랜 숙적이었기 때문이다. 맥도널드 씨족은 캠벨 씨족과 마찬가지로 하이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 중 하나였고, 양측 모두 하이랜드 서해안이 주요 세력권이었다. 두 씨족은 이웃 씨족들이 흔히 그렇듯이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소 훔치기 등의 작은 충돌이 빈번했으며, 종종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브레덜베인 백작 존 캠벨은 맥도널드의 지각을 놓치지 않고, 이를 숙청하도록 스테어 백작 등에게 건의했다.

학살 명령을 기록한 서한의 사본

3. 1. 윌리엄 3세의 충성 맹세 요구

1691년 8월 27일, 윌리엄 3세는 하이랜드의 스코틀랜드 씨족장들에게 다음 해 1월 1일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였다.[10] 씨족장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고, 프랑스에 망명 중인 제임스 2세에게 의견을 구했다. 제임스 역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고, 시간만 흘러갔다.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제임스로부터 일단 서명하라는 뜻이 전달되었다. 씨족장들은 겨울 눈 속에서 서둘러 서명 장소로 향했다.

이에 앞서, 스코틀랜드 정부는 킬리크랭키 전투 이후 제이코바이트 수장들과 협상을 시도했는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건에 따라 조건이 달라졌다. 1690년 3월, 국무장관 스테어 경은 그들이 윌리엄과 메리에게 충성 맹세할 것을 동의하는 대가로 12000GBP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수장들은 1691년 6월 아할라더 성에서 맹세 하기로 동의했고, 존 캠벨, 브레달베인 백작이 정부를 대표하여 서명했다. 중요한 점은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분쟁으로 맹세가 지연되었다. 게다가 브레달베인은 그 일부가 글렌코 맥도널드가 그의 영지에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11]

7월 12일의 오그림 전투는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에서 제이코바이트의 승리 가능성과 스튜어트 왕조 복고의 즉각적인 전망을 종식시켰다. 8월 26일, 스코틀랜드 정부는 1692년 1월 1일 이전에 맹세를 한 모든 사람에게 사면을 제공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보복을 가하겠다는 왕실 선포를 발표했다. 이틀 후, 제이코바이트 침략이 발생할 경우 아할라더 협정을 무효화하는 비밀 조항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브레달베인을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브레달베인은 맥도널드 수장 글렌가리가 조작했다고 주장했다.[11] 스테어의 편지는 이제 그의 신념, 즉 위조되었든 아니든 서명자 중 누구도 약속을 지킬 의향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여 집행에 초점을 맞추었다.[11]

10월 초, 제이코바이트 수장들은 마감일 전에 침략을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 중인 제임스 2세에게 마감일 전까지 맹세를 할 수 있는지 허락을 요청했다.[11] 그의 승인을 부여하는 문서가 12월 12일 생제르맹앙레에서 발송되어 12월 23일 글렌가리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28일까지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지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 제안은 글렌코와 같은 성공회 신자 맥도널드와 글렌가리가 이끄는 가톨릭 소수파 사이의 내부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한다.[11]

결과적으로, 글렌코의 맥아이언이 맹세를 하기 위해 포트윌리엄의 사령관인 존 힐 중령에게 가기 위해 포트윌리엄으로 출발한 것은 12월 30일이 되어서야였다. 그는 맹세를 받아들일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힐은 지역 치안 판사인 콜린 캠벨 경에게 보낼 편지와 함께 맥아이언을 인버레이로 보냈다. 그는 1월 6일에 맹세를 집행했고, 그 후 맥아이언은 집으로 돌아왔다.[11]

3. 2. 제임스 2세의 허락과 글렌코 맥도널드의 지각

제임스 2세는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망명지인 생제르맹앙레에서 하이랜드 씨족장들에게 윌리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허가를 내렸다. 이 문서는 12월 23일 글렌가리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는 28일까지 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지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성공회 신자인 글렌코 맥도널드와 가톨릭 소수파인 글렌가리 간의 내부 권력 투쟁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결과적으로 글렌코의 맥아이언(맥도널드 씨족장)은 12월 30일에야 맹세를 하기 위해 포트윌리엄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포트윌리엄의 사령관 존 힐 중령은 맹세를 받을 권한이 없었기에, 맥아이언을 지역 치안 판사인 콜린 캠벨 경에게 보낼 편지와 함께 인버레이로 보냈다. 맥아이언은 1월 6일에야 맹세를 할 수 있었고, 이는 윌리엄 3세 정부에게 보복의 빌미를 제공했다.[14]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스테어 경은 글렌코 맥도널드를 본보기로 삼아, 맹세 마감일 이전에 그들을 숙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월에 스테어는 스코틀랜드 군 사령관 토마스 리빙스턴 경에게 연이어 세 통의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는 "...아가일 경이 글렌코가 맹세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기쁘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14]

글렌코 맥도널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2년간의 협상 끝에 스테어는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아가일은 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친척인 브레달베인과 경쟁했으며, 브레달베인 역시 그 계획에 동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14]

3. 3. 글렌코 맥도널드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

글렌코 맥도널드는 여러 씨족 중 맹세를 늦게 한 씨족 중 하나였지만, 윌리엄 3세 정부가 이들을 특별히 표적으로 삼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로카버 지역은 예외적으로 가축 강도와 도둑들의 피난처로 여겨졌다. 이 지역의 네 씨족, 즉 글렌코 맥도널드, 케포크 맥도널드, 맥그리거 씨족, 캐머런 씨족이 특히 문제로 지목되었다.[14]

이들은 1678년에서 1680년 사이 집회를 진압하고, 1685년 아가일의 봉기 이후 애솔 백작의 습격에 참여하는 등 정부군에 복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8년 제임스 7세가 폐위되고, 1689년 자코바이트 봉기가 일어나면서 하이랜드 지역은 다시 불안정해졌다.

킬리크랭키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는 제이코바이트 수장들과 협상을 시도했고, 1691년 6월 아할라더 성에서 윌리엄과 메리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대가로 12,000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돈 분배 문제와 브레달베인 백작의 글렌코 맥도널드에 대한 보복 요구로 인해 맹세는 지연되었다.

1691년 8월, 스코틀랜드 정부는 1692년 1월 1일까지 맹세를 하지 않으면 가혹한 보복을 가하겠다는 선포를 발표했다. 제이코바이트 수장들은 마감일 전에 맹세를 할 수 있도록 제임스 2세에게 허락을 요청했고, 12월에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글렌코의 맥아이언은 12월 30일에야 포트윌리엄에 도착했고, 치안판사의 부재로 1월 6일에야 맹세를 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스테어 경


국무장관 스테어 경은 글렌코 맥도널드를 본보기로 삼아 하이랜드 전체를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1월 초, 스코틀랜드 군 사령관에게 글렌코를 포함한 로카버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글렌코 맥도널드가 표적이 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스테어는 하이랜드 문제 해결을 위한 본보기가 필요했고, 아가일은 정치적 경쟁자인 브레달베인과의 관계, 그리고 브레달베인 역시 이 계획에 동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14] 또한, 글렌가리는 내부 경쟁자를 제거하고 윌리엄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기 위해 글렌코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마지막으로, 글렌코 맥도널드는 캠벨 씨족과의 오랜 갈등 관계에 있었고, 이는 캠벨 씨족 출신인 브레달베인 백작이 글렌코 맥도널드를 숙청하도록 스테어 백작 등에게 건의하는 배경이 되었다.

4. 학살의 진행

1691년 6월 선언 장소였던 아할라더 성 폐허


킬리크랭키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는 제이코바이트 수장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1690년 3월, 국무장관 스테어 경은 그들이 윌리엄메리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대가로 12,000파운드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수장들은 1691년 6월 아할라더 선언에서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고, 존 캠벨, 브레달베인 백작이 정부를 대표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분쟁으로 맹세는 지연되었다.

1691년 7월 12일, 오그림 전투는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에서 제이코바이트의 승리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8월 26일, 스코틀랜드 정부는 1692년 1월 1일 이전에 맹세를 한 모든 사람에게 사면을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보복을 가하겠다는 왕실 선포를 발표했다.

10월 초, 제이코바이트 수장들은 제임스 2세에게 마감일 전까지 맹세를 할 수 있는지 허락을 요청했다. 그의 승인 문서는 12월 12일 생제르맹앙레에서 발송되어 12월 23일 글렌가리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28일까지 공유하지 않았다. 글렌코의 맥아이언은 12월 30일이 되어서야 맹세를 하기 위해 포트윌리엄으로 출발했다. 그는 맹세를 받아들일 권한이 없었던 존 힐 중령에 의해 인버레이의 콜린 캠벨 경에게 보내졌고, 1월 6일에 맹세를 집행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글렌가리 자신은 2월 4일까지 맹세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대리로 맹세했지만, 맥아이언만이 스코틀랜드 비밀 의회가 발표한 면책에서 제외되었다. 12월 2일 스테어가 브레달베인에게 보낸 편지는 맹세 마감일 이전에 그를 본보기로 삼기로 한 결정을 보여준다.

1월에 스테어는 스코틀랜드의 군 사령관인 토마스 리빙스턴 경에게 연이어 세 통의 편지를 썼다. 1월 11일 편지에는 "...아가일 경이 글렌코가 맹세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기쁘다...."라고 적혀 있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90년에 글렌가리의 땅을 박탈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인버가리 성을 점유했다. 글렌코 맥도널드를 표적으로 한 것은 스테어가 거래를 성사시키도록 압력을 받았고, 아가일은 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브레달베인과 경쟁했으며, 브레달베인도 그 계획에 동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겨울의 글렌코; 학살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1692년 2월 12일, 힐(Hill)은 제임스 해밀턴(James Hamilton) 중령에게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킨로클레번(Kinlochleven)에서 글렌코의 북쪽 출구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던컨슨 소령이 이끄는 다른 400명의 병사들은 글렌라이언(Glenlyon)과 합류하여 계곡을 북쪽으로 진격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며 집을 불태울 것이었다.[15] 그날 저녁 늦게, 글렌라이언은 던컨슨의 명령을 받았다.

해밀턴과 힐에게 1월 30일에 쓴 편지에서 스테어(Stair)는 맥도널드 가문이 경고를 받으면 도망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맥아이언은 살해되었지만 그의 두 아들은 탈출했고, 1695년 위원회는 다양한 사상자 수치를 받았다. 종종 인용되는 38명의 사망자 수치는 살인이 발생한 곳과 반대쪽 끝에 있던 해밀턴 부대가 제공한 것이었다. 맥도널드 가문 자체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살해된 사람들의 수는 약 25명'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연구에서는 학살로 인한 사망자 수를 '약 30명'으로 추산하지만, 노출로 사망했다는 주장은 입증할 수 없다.

4. 1. 정부군의 글렌코 도착과 잠복

1692년 1월 말, 아가일 공작 연대 소속 약 120명의 병사들이 글렌코에 도착했다. 이들은 로버트 캠벨(Robert Campbell of Glenlyon)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겉으로는 세금 징수를 위한 주둔이라고 둘러댔다.[15] 글렌코 맥도널드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이들을 환대했고, 약 2주 동안 숙식을 제공했다.

로버트 캠벨이 이 임무의 성격과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 2월 12일, 로버트는 직속 상관의 명령서를 받았다. 로버트 캠벨은 명령을 받은 후, 희생자 “후보”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다음 날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명령서 사본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15]

명령서 (1692년 2월 12일)
귀관은, 여기에 70세 미만의 반역자들을 모두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특히, 그 늙은 여우와 아들들이 귀관의 칼날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라. 나는 새벽 5시에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에 맞춰 처형을 시작하고, 신속하게 임무를 완료할 예정이다. 만약 내가 5시에 맞추지 못하면, 나 없이도 실행하라. 이 명령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국왕 폐하의 특별 명령이다. 악당들은 뿌리째 뽑혀야 한다. 또한, 이 임무가 후일의 불화를 낳지 않도록, 놓치는 자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관은 폐하나 정부, 군의 명령에 충실하지 않은 자로 취급될 것이다. 나는 귀관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이 명령을 어기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 명령서에 서명한다.


4. 2. 학살 명령과 실행

로버트 캠벨(Robert Campbell of Glenlyon)은 1692년 1월 말 아가일 공작 연대(Earl of Argyll's Regiment of Foot) 소속 병사 약 120명을 이끌고 글렌코(Glencoe)에 도착했다. 2월 12일, 로버트 캠벨은 상관인 던컨슨 소령으로부터 글렌코 맥도널드 일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5]

명령서 (1692년 2월 12일)
귀관은, 여기에 70세 미만의 반역자들을 모두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특히, 그 늙은 여우와 아들들이 귀관의 칼날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라. 나는 새벽 5시에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에 맞춰 처형을 시작하고, 신속하게 임무를 완료할 예정이다. 만약 내가 5시에 맞추지 못하면, 나 없이도 실행하라. 이 명령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국왕 폐하의 특별 명령이다. 악당들은 뿌리째 뽑혀야 한다. 또한, 이 임무가 후일의 불화를 낳지 않도록, 놓치는 자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관은 폐하나 정부, 군의 명령에 충실하지 않은 자로 취급될 것이다. 나는 귀관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이 명령을 어기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 명령서에 서명한다.
로버트 던컨슨



이 명령서에는 70세 미만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특히 늙은 여우(맥아이언)와 그의 아들들을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로버트 캠벨은 명령을 받은 후, 희생자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다음 날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로버트 캠벨. 학살의 “실행범”이 되었다


2월 13일 새벽, 정부군은 잠자고 있던 맥도널드 씨족 주민들을 공격했다. 집은 불탔고, 족장 맥아이언을 포함하여 38명이 살해되었다. 아이들을 포함한 40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그러나 마을 인구는 400명 이상이었고, 상당수가 도망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령의 잔혹성에 병사들이 주저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고, 불복종의 증거로 스스로 칼을 부러뜨린 병사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전멸은 달성되지 않았다.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도 동사자와 아사자가 발생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의 경위를 구전으로 퍼뜨렸다.

4. 3. 학살의 실패와 은폐 시도

로버트 캠벨(Robert Campbell of Glenlyon)이 이끄는 아가일 공작 연대 병사 120명은 '무상 숙영' 명령을 받고 글렌코에 도착했다. 이들은 2주 동안 맥도널드 가문의 환대를 받았다.[15]

1692년 2월 12일, 로버트 캠벨은 상관 던컨슨으로부터 70세 미만의 맥도널드 씨족 전원을 살해하라는 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그날 밤 희생자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다음 날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15]

명령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명령서 (1692년 2월 12일)
귀관은, 여기에 70세 미만의 반역자들을 모두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특히, 그 늙은 여우와 아들들이 귀관의 칼날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라. 나는 새벽 5시에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에 맞춰 처형을 시작하고, 신속하게 임무를 완료할 예정이다. 만약 내가 5시에 맞추지 못하면, 나 없이도 실행하라. 이 명령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국왕 폐하의 특별 명령이다. 악당들은 뿌리째 뽑혀야 한다. 또한, 이 임무가 후일의 불화를 낳지 않도록, 놓치는 자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관은 폐하나 정부, 군의 명령에 충실하지 않은 자로 취급될 것이다. 나는 귀관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이 명령을 어기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 명령서에 서명한다.



2월 13일 새벽,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집을 불태우고 족장 이하 38명을 살해했으며, 아이들을 포함한 40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그러나 마을 인구는 400명 이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도망쳤다. 명령의 잔혹함에 병사들이 주저하거나 불복종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명령서에서 요구하는 완전한 전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던컨슨은 예정보다 2시간 늦은 오전 7시에 도착하여 글렌라이언과 합류, 계곡을 따라 진격하며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몰아갔다. 해밀턴은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킨로클레번(Kinlochleven)에 도착했다. 해밀턴의 부하 프랜시스 파쿠아르(Francis Farquhar)와 길버트 케네디(Gilbert Kennedy)는 명령을 따르기보다 칼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들이 살인 발생 몇 시간 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도 동사자와 아사자가 발생했지만, 생존자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게 되었다. 5월에 프랑스 침공 우려로 아가일 연대는 브렌트퍼드(Brentford)를 거쳐 플랑드르(Flanders)로 이동하여 9년 전쟁(Nine Years' War)이 끝날 때까지 복무한 후 해산되었다. 글렌라이언은 1696년 8월 브뤼헤에서, 던컨슨은 1705년 5월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5. 학살의 여파와 역사적 의미

글렌코 학살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러 가지 여파와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1692년 당시, 리빙스턴은 "도둑 떼(맥도널드 일족)가 파괴될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들 사이에 주둔한 자들이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것이 큰 소음을 낸다"라고 적었다.[1] 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동기는 정치적이었으며, 구체제와 신체제 모두에서 복무했던 스테어는 양측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1]

드 위트 형제 살해 사건, 1672년; 이 학살은 윌리엄이 그들의 살인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의 익명의 문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후, 힐 대령은 대부분의 하일랜더가 평화로웠고, 글렌개리와 같은 지도자들이 무법 상태를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1693년 하일랜드 사법위원회는 법 사용을 장려했지만, 씨족 우두머리들은 자신의 농민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1]

1695년, 1662년 출판물 허가법 만료로 정치적 팸플릿이 급증했는데, 그중 찰스 레슬리가 쓴 책은 1672년 요한 드 위트의 죽음에 대한 윌리엄의 연루를 다루었고, 글렌코 학살은 부차적인 혐의였다.

'신뢰 하의 살인'을 판단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587년 도입된 스코틀랜드 법은 "냉혈" 살인에 적용되었다.[1] 스테어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는데, 윌리엄 자신이 명령서에 서명했고, 그 의도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스테어와 해밀턴에게 책임을 물을 사유가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결정은 윌리엄에게 맡겼다.[1] 스테어는 해임되었지만 복귀하여 앤 여왕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1] 생존자들의 보상 신청은 무시되었고, 그들은 1715년과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에 참여했다.[1] 2019년 고고학 조사는 글렌코가 18세기 중반 하일랜드 청소까지 점령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글렌코, 호레이쇼 매컬러치 작, 1864년; 18세기 하이랜드 토지몰수로 인구가 감소하여 오늘날과 같이 외딴 황량한 풍경으로 남았다.


학살의 잔혹함은 스코틀랜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688년 이후 억압의 자코바이트 상징이 되었다.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 때 찰스 왕자는 레슬리의 팸플릿과 1695년 의회 회의록을 재인쇄하도록 명령했다.[1] 그 후 글렌코는 역사가 토머스 베빙턴 매콜레이가 1850년 그의 ''제임스 2세 즉위 이후 영국 역사''에서 언급할 때까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1] 그는 윌리엄을 레슬리의 모든 혐의에서 벗겨주려고 했으며, 학살이 단순히 맥도널드 씨족과 캠벨 씨족 간의 오랜 불화의 일부였다는 주장의 근원이 되었다.[1]

빅토리아 시대 스코틀랜드는 영국 연합주의적이고 영국 제국적이면서도 독특하게 스코틀랜드적인 가치관을 발전시켰다.[1] 역사적 분열은 공유된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표현되었고, 스코틀랜드 역사의 교육은 대학에서 사실상 사라졌다.[1] 한 현대 역사가는 이것이 글렌코가 역사적 사건으로 분석되는 대신 '스코틀랜드 과거의 감정적인 장식'에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한다.[1]

1950년대에 스코틀랜드 역사 연구가 다시 등장했을 때, 레슬리의 저술은 윌리엄의 통치를 스코틀랜드에 재앙이었다는 견해를 계속해서 형성했다. 학살은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는 데 사용된 여러 사건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다른 사건으로는 다리엔 계획, 1690년대 후반의 기근, 1707년 연합 조약이 있다.[1]

학살은 클랜 도널드 협회의 연례 행사로 기념되고 있다. 1930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글렌코 마을 동쪽 끝에 1883년 설치된 좁고 뾰족한 켈트 십자가인 어퍼 카녹 기념비에서 열린다.[1] 다른 기념물로는 카낙 남쪽에 있는 화강암 덩어리인 헨더슨 스톤이 있다.[1]

5. 1. 스코틀랜드 사회의 충격과 분노

글렌코 학살은 스코틀랜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을 배신하고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을 학살한 행위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1692년 4월 12일, 《파리 가제트(Paris Gazette)》는 에든버러(Edinburgh) 선술집에서 발견되어 프랑스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글렌리온(Glenlyon)의 명령서 사본을 발표했다.[1] 정부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맥도널드(MacDonalds) 가문에 대한 동정은 거의 없었다.[1] 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동기는 주로 정치적이었는데, 구체제와 신체제 모두에서 복무했던 스테어(Stair)는 양측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1]

이후 논쟁에서 힐(Hill) 대령은 대부분의 하일랜더(Highlanders)가 평화로웠다고 주장했다. 1693년 하일랜드 사법위원회(Highland Judicial Commission)는 가축 절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것을 장려했지만, 씨족 우두머리들은 그것이 자신의 농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킨다고 반대했다.[1]

1695년 5월 영국의 1662년 출판물 허가법(Licensing of the Press Act 1662)이 만료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런던에서 발행된 정치적 팸플릿의 수가 급증했는데, 그중에는 《갈리에누스 레디비부스, 또는 살인은 드러난다, 등. 글렌코의 드 위트(De Witting) 사건, 개프니(Gaffney)에 대한 진실된 보고서》가 있었다. 찰스 레슬리가 쓴 이 책은 1672년 요한 드 위트(Johan de Witt)의 죽음에 대한 윌리엄의 연루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글렌코 학살과 다른 범죄는 부차적인 혐의로 다루었다.[1]

'신뢰 하의 살인'에 대한 사건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1587년에 만연한 불화를 줄이기 위해 도입된 스코틀랜드 법으로, 항복 조항이 합의되었거나 환대를 받았을 때 "냉혈"로 저질러진 살인에 적용되었다.[1]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이자 반역죄였기 때문에 스테어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무기였다. 윌리엄 자신이 명령서에 서명했고, 그 의도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명령을 초과했는지 여부, 즉 그 합법성이 아닌 것을 고려하여 스테어와 해밀턴(Hamilton)에게 책임을 물을 사유가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결정은 윌리엄에게 맡겼다.[1] 스테어는 국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지만 1700년 정부에 복귀하여 마지막 스튜어트 군주인 앤 여왕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1]

학살의 잔혹함은 스코틀랜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688년 이후 억압의 제이컵파 상징이 되었다. 1745년에 찰스 왕자는 레슬리의 팸플릿과 1695년 의회 회의록을 에든버러 ''캘리도니안 머큐리''에 재인쇄하도록 명령했다.[1]

사건 정보가 퍼지면서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명예혁명 직후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되고 말았다. 윌리엄이 이끄는 명예혁명 체제 영국의 위신은 손상되었고, 더 이상 강경책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회유하는 한편, 사건의 배후를 캠벨 씨족에게 떠넘겨 불만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사건은 결과적으로 자코바이트에게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씨족 간의 갈등도 심화되어, 영국과 단결하여 맞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사건은 정권에 있어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배신 행위였다. 즉, 맥도널드 씨족은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에 따라 로버트 캠벨 등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2주 동안 숙식을 제공했다. 학살 사건은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먼저 프랑스에서 비판이 일어나 윌리엄과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것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번져, 스코틀랜드는 물론이고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잉글랜드 의원들과 지배층으로부터도 비판이 일어났다. 정부는 조사를 시작하여 스테어 백작이 이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스테어 백작은 심문을 받고 169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16] 스코틀랜드 측의 불만은 이것만으로는 가라앉지 않았고, 윌리엄은 아프리카·인도 회사[17] 설립 신청을 허가해야만 했다.

희생된 맥도널드의 운명에 하이랜드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는 한편 윌리엄과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하였고, 자코바이트가 다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코바이트의 봉기가 여러 번 일어났다. 하이랜드 사람들을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당초의 계획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역효과를 낳았다.

5. 2.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

1692년 4월, 파리 가제트는 에든버러(Edinburgh) 선술집에서 발견되어 프랑스로 가져온 글렌리온(Glenlyon)의 명령서 사본을 발표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맥도널드(MacDonalds) 가문에 대한 동정은 거의 없었다.[16]

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동기는 주로 정치적이었다. 구체제와 신체제 모두에서 복무했던 스테어(Stair)는 양측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695년 5월 영국의 1662년 출판물 허가법(Licensing of the Press Act 1662)이 만료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런던에서 발행된 정치적 팸플릿의 수가 급증했는데, 그중에는 「갈리에누스 레디비부스, 또는 살인은 드러난다, 등. 글렌코의 드 위트(De Witting) 사건, 개프니(Gaffney)에 대한 진실된 보고서」가 있었다. 찰스 레슬리가 쓴 이 책은 1672년 요한 드 위트(Johan de Witt)의 죽음에 대한 윌리엄의 연루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글렌코 학살과 다른 범죄는 부차적인 혐의로 다루었다.

'신뢰 하의 살인'에 대한 사건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1587년에 만연한 불화를 줄이기 위해 도입된 스코틀랜드 법으로, 항복 조항이 합의되었거나 환대를 받았을 때 "냉혈"로 저질러진 살인에 적용되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이자 반역죄였기 때문에 스테어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윌리엄 자신이 명령서에 서명했고, 그 의도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명령을 초과했는지 여부, 즉 그 합법성이 아닌 것을 고려하여 스테어와 해밀턴(Hamilton)에게 책임을 물을 사유가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결정은 윌리엄에게 맡겼다. 스테어는 국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지만[16] 1700년 정부에 복귀하여 앤 여왕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 생존자들의 보상 신청은 무시되었고, 그들은 집을 재건했으며 1715년과 1745년 제이코바이트 봉기(Jacobite risings)에 참여했다.

사건 정보가 퍼지면서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명예혁명 직후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되었다. 윌리엄이 이끄는 명예혁명 체제 영국의 위신은 손상되었고, 더 이상 강경책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회유하는 한편, 사건의 배후를 캠벨 씨족에게 떠넘겨 불만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5. 3. 자코바이트 운동의 상징

글렌코 학살은 자코바이트 운동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자코바이트들은 이 사건을 윌리엄 3세 정부의 잔혹함과 부당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의 반(反)정부 정서를 자극했다.[1] 이후 1715년과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에서 글렌코 맥도널드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자코바이트 편에서 싸웠다.[16]

학살의 잔혹함은 스코틀랜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688년 이후 억압의 제이컵파 상징이 되었다. 1745년 제이컵파 반란 때 찰스 왕자는 찰스 레슬리의 팸플릿과 1695년 의회 회의록을 에든버러 ''캘리도니안 머큐리''에 재인쇄하도록 명령했다.[17]

이 사건은 명예혁명 직후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윌리엄이 이끄는 명예혁명 체제 영국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자코바이트에게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했고, 씨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영국에 단결하여 맞설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1]

희생된 맥도널드 일가에 대한 하이랜드 사람들의 공포와 윌리엄 및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은 자코바이트가 다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코바이트의 봉기가 여러 번 일어났다. 하이랜드 사람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는 당초 계획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역효과를 낳았다.[16]

학살은 클랜 도널드 협회의 연례 행사로 기념되고 있다. 1930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글렌코 마을 동쪽 끝에 1883년 설치된 좁고 뾰족한 켈트 십자가인 어퍼 카녹 기념비에서 열린다.[1]

5. 4. 현대의 기억과 기념

글렌코 학살은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클랜 도널드 협회는 1930년부터 매년 글렌코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는데, 글렌코 마을 동쪽 끝에 1883년 설치된 어퍼 카녹 기념비에서 진행된다.[1] 카낙 남쪽에 있는 헨더슨 스톤도 기념물 중 하나이다.[1]

글렌코 학살은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자주 다루어졌다. 월터 스콧의 "글렌코 학살", T. S. 엘리엇의 "글렌코의 라녹" 등 많은 작가들이 글렌코 학살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다.[2] 에릭 링크레이터, 데이비드 클레멘트-데이비스, 수전 플레처, 제니퍼 로버슨 등도 글렌코 학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3] 조지 R. R. 마틴은 ''얼음과 불의 노래''의 "레드 웨딩"에 글렌코 학살이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했다.[3]

1962년 짐 맥린은 "글렌코 학살"이라는 노래를 작곡했고,[4] 더 코리스가 편곡하여 공연했다.[5] 스코틀랜드 밴드 나자레스는 1972년 앨범에 "1692 (글렌코 학살)"이라는 노래를 수록했다.

캠벨 씨족은 학살 가담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씨족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20세기 후반까지 글렌코와 맥도널드 씨족 계열의 펍 등 많은 곳에서 "행상과 캠벨 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기도 했다.

학살 생존자들은 왕의 허락을 받고 글렌코로 돌아와 마을을 부흥시켰다.[19] 현재 글렌코 마을에는 그 사건을 기리는 노래가 남아 있다.

참조

[1] 학술지 Site Record for Glencoe, Massacre Of Glencoe Memorial; Macdonald's Monument; Glencoe Massacre http://canmore.rcahm[...] Royal Commission on the Ancient and Historical Monuments of Scotland 2013-11-04
[2] 웹사이트 Two Poems from Glencoe http://www.poetrylib[...] 2015-10-05
[3] 잡지 Game of Thrones author George R R Martin why he wrote the red wedding https://ew.com/artic[...] 2019-03-12
[4] 웹사이트 Massacre of Glencoe https://www.songfact[...] 2024-06-27
[5] 웹사이트 The Corrís - Scotland Will Flourish And The Massacre Of Glencoe https://www.discogs.[...] 2024-06-27
[6] Youtube Mad Men - Season 7, Episode 11: Time & Life https://subslikescri[...]
[7] 웹사이트 'A roof o'er their heads': exploring the archaeology of Achtriachtan township in Glencoe https://the-past.com[...] 2022-04-27
[8] 뉴스 Coin hoard could be linked to 1692's Glencoe Massacre https://www.bbc.co.u[...] 2023-10-08
[9] 웹사이트 Turf and Creel House https://www.nts.org.[...] 2024-04-12
[10] 문서 하이랜드의 민족 구성과 언어
[11] 문서 윌리엄 3세와 네덜란드, 잉글랜드 동맹
[12] 문서 영국 법과 명예혁명
[13] 문서 가톨릭 음모 사건
[14] 문서 글렌코 학살의 배경과 전개
[15] 문서 번역 출처
[16] 문서 스코틀랜드 장관 복귀
[17] 문서 스코틀랜드 식민지 무역 회사와 다리엔 계획
[18] 문서 1639년 맥도널드 씨족과 캠벨 씨족의 충돌
[19] 문서 번역 출처
[20] 문서 캠벨 씨족의 주요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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