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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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글염은 동오의 인물로, 장온의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맑고 엄격한 성품과 뛰어난 인물 평가 능력을 바탕으로 낭서의 부정을 바로잡고자 급진적인 인사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로 인해 많은 관리들의 원한을 샀다. 결국 손권에게 모함당하여 처형되었으며, 그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저서로는 《글염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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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지옌 |
원어 이름 | 暨豔 |
자 | 자휴(子休) |
출생지 | 쑤저우, 장쑤성 |
사망일 | 224년 |
관직 | |
관직명 | 선조상서(選曹尚書) |
재임 시작 | 알 수 없음 |
재임 종료 | 224년 |
군주 | 손권 |
2. 생애
글염은 장온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장온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기게 되어 선조랑(選曹郞)이 되었고, 후에 상서(尙書)가 되었다.[17] 이전에 글염은 부모의 죄로 평민으로 강등되었으나, 주치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2. 1. 성격 및 인물 평가
글염은 맑고 엄격한 성격으로 인물 평가에 능했다.[17] 그는 직설적이고 성급했으며,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깎아내리는 것을 즐겼다.[3]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3]당시 낭서에는 청탁이 섞여 인선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글염은 이를 바로잡고자 관리들의 위치를 바꾸었다. 주로 높은 관직에 있던 자들이 강등되었고, 특히 탐관오리들은 군리()로 삼았다.[17] 글염은 관료주의에 심각한 인적 자원 관리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많은 관리들이 행정적으로 무능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인원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통해 선량한 사람과 부패한 사람을 분리하고, 그에 따라 강등하거나 해고하고자 했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안은 거의 모든 관리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었고, "도덕성 시험"에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군리로 강등될 것이었다.[4][5]
주거와 육모(陸瑁)는 글염이 지나치게 악인을 싫어하여 탄압하는 것을 말렸으나, 글염은 이를 듣지 않았다.[17] 육손과 노모 역시 글염에게 경고하고 그의 공격적인 행동을 중단하라고 조언했다. 노모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 과오를 용서하고 덕과 기여를 칭찬하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했으며, 주거는 너무 많은 관리의 갑작스러운 강등/해고는 정부에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글염은 이들의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12]
결국 글염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손권(孫權)에게 글염을 참소하였다. 손권은 글염과 선조랑(選曹郞) 서표(徐彪)를 주살하였고, 이를 핑계로 글염과 친했던 장온에게 죄를 주어 오군의 하급 관리로 추방하였다.[17]
2. 2. 급진적인 인사 개혁 추진
글염은 인물 평가에 능하고 맑고 엄격한 성격을 지녔다.[17] 그는 직설적이고 성급했으며,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좋아했다.[3] 당시 낭서에 청탁이 섞여 인선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글염은 이를 바로잡고자 관리들의 위치를 바꾸는 급진적인 인사 개혁을 추진했다.[17]글염은 관료 사회에 심각한 인적 자원 관리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많은 관리들이 행정적으로 무능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인원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실시하여 선량한 사람과 부패한 사람을 분리하고, 그에 따라 강등하거나 해고하고자 했다.[4]
글염의 개혁안은 높은 관직에 있던 자들을 강등시키고, 특히 탐관오리들은 군리(郡吏)로 삼는 것을 포함했다. 이 때문에 글염에게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다.[17] 그는 급진적인 아이디어 때문에 여러 관리들로부터 전문적이지 않고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4][5]
주거와 육모(陸瑁)는 글염이 지나치게 악인을 싫어하여 탄압하는 것을 말렸으나 글염은 이를 듣지 않았다.[17] 육손 역시 글염에게 경고하고 그의 공격적인 행동을 중단하라고 조언했다.[7] 육모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 과오를 용서하고 대신 그들의 덕과 기여를 칭찬하는 데 집중하며, 동오의 미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민 문화를 장려하고 강화하라고 촉구했다.[9][10] 주거는 너무 많은 관리의 갑작스러운 강등/해고는 정부에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과오에 대한 처벌을 삼가고 실수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관직에 남아 있도록 촉구했다. 또한 정직하고 성실한 관리를 칭찬하고 성과가 저조한 관리에게 격려를 해 줄 것을 제안했다.[11] 그러나 글염은 이러한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12]
2. 3. 몰락과 죽음
글염은 성품이 맑고 강직했으며,[17] 인물 평가에 능했다.[17] 당시 인사 청탁으로 관리가 제대로 선발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주로 고위 관직자들이 강등되었고, 특히 탐관오리들은 군리(郡吏)로 좌천되었으니, 이들이 모두 글염에게 원한을 품었다.[17]글염은 직설적이고 성급한 성격으로, 자기 과시욕이 강하고 타인을 비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비판 능력을 뽐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스캔들을 퍼뜨렸다.[3]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시도는 많은 관리들의 원한을 샀다.[4][5]
주거와 육모는 글염의 지나친 탄압을 경고했으나, 글염은 이를 무시했다.[17] 결국 글염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손권에게 참소했다. 육손, 노모 등도 글염에게 여러 차례 그의 행동을 중단하라고 조언했지만, 글염은 듣지 않았다.[8][12]
222년에서 225년 사이, 글염과 장온은 손소를 고발했다. 고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손소가 사임을 요청하자 손권은 사면하고 승상직을 유지시켰다.[6]
평소 글염과 친했던 장온을 싫어하던 손권은, 글염과 서표(徐彪)를 주살하고, 이를 핑계로 장온을 오군의 하급 관리로 좌천시켰다.[17] 224년, 손권은 글염과 서표를 체포, 면직하고 둘은 자결했다. 장온은 글염을 추천하고 친분이 있었기에 연루되어 체포, 투옥되었으나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6년 후 사망했다.[14][15]
2. 4. 손소와의 갈등
글염은 사람됨이 맑고 엄했으며, 인물을 평가하는 데 능했다.[17] 당시 낭서에 청탁이 섞여 인선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고 글염은 이를 바로잡고자 관리들의 위치를 바꾸었는데, 주로 높은 관직에 있던 자들이 강등되었고, 특히 탐관오리들은 군리(郡吏)로 삼았으니 이들이 모두 글염에게 원한을 품었다.[17]222년에서 225년 사이 어느 시점에 글염과 장온은 승상 손소를 고발했다.[6] 손소가 정확히 무엇으로 고발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손소가 사임 요청을 하자 손권은 그를 사면하고 승상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명령했다.[6]
주거와 육모는 글염이 지나치게 악인을 싫어하여 탄압하는 것을 말렸으나 글염은 이를 듣지 않았다.[17] 결국 글염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손권에게 글염을 참소하였다. 진작부터 글염과 친했던 장온을 싫어하던 손권은 글염과 선조랑(選曹郞) 서표(徐彪)를 주살하였고, 이를 핑계로 장온에게 죄를 주어 오군의 하급 관리로 추방하였다.[17] 육손,[7] 육모, 주거 등은 글염에게 여러 차례 경고하고 그의 공격적인 행동을 중단하라고 조언했으나,[8] 글염은 그들의 조언을 무시했다.[12] 주거는 너무 많은 관리의 갑작스러운 강등/해고는 정부에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글염에게 관리들의 과오를 처벌하는 것을 삼가고 그들이 실수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관직에 남아 있도록 촉구했다.[11]
3. 저서
4. 평가 및 영향
기염은 자존심이 강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인물 비평을 즐겨 했다.[1] 같은 군 출신인 장온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고, 선조랑으로 발탁된 후 선조상서까지 승진했다.[1]
당시 낭관의 직책에 있던 자들 중에는 인품이 좋지 않은 자가 많았다.[1] 기염은 선조랑 서표와 함께 대부분 부적임한 인재임을 간파하고, 백관들의 과실을 용서 없이 지적하여 거의 모든 자들을 강등시키려고 선별했다.[1] 원래 직책에 머무를 수 있었던 자는 열 명 중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1] 또한 오염에 손을 댄 자는 모두 군리로 좌천시켜 추방했다.[1] 더 나아가 승상인 손소를 장온과 함께 탄핵하여 일시적으로 실각시켰다.[1] 이러한 처치에 대해 육손, 육모, 주거 등이 강렬하게 간했으나, 기염은 전혀 듣지 않았다.[1]
이러한 처치를 원망한 관료들은 "기염 등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 인사를 전단하고, 타인에게 베푸는 은혜와 처벌도 공정한 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 등 죄를 나열하며 탄핵했다.[1] 이 때문에 손권은 손소 실각 건과 함께 크게 분노하여, 낙통과 육모의 간언도 듣지 않고 기염과 서표를 죄로 다스려 실각시켰다.[1] 기염과 서표 두 사람은 자결에 이르렀다고 한다.[1]
또한 장온도 기염·서표 등과 결탁하여 그들의 전횡을 음으로 선동한 배후로 여겨져, 일족과 함께 좌천되었다.[1] 기염의 사건은 십수 년 후에 여일의 건에서 다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7
[2]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3]
서적
Sanguozhi vol. 57
[4]
서적
Sanguozhi vol. 57
[5]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6]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7
[7]
서적
Sanguozhi vol. 58
[8]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9]
서적
Sanguozhi vol. 57
[10]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1]
서적
Sanguozhi vol. 57
[12]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3]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7
[14]
서적
Sanguozhi vol. 57
[15]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6]
서적
자치통감
[17]
서적
삼국지
[18]
서적
오록
[19]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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