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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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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문은 고대 지명으로, 현재의 남원 일대로 비정된다. 백제가 무령왕 대에 기문 지방을 장악했고, 대가야와 백제 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었으며, 결국 백제에 귀속되었다. 기문은 마한에 속했다가 가야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백제의 세력 회복 이후 가야는 기문 지역을 백제에 빼앗기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명칭 및 위치 비정

기문(옛 지명)의 명칭 및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김천 개령면 일대: 양주동 등은 감문국(甘文國)과 이름이 비슷하다 하여 김천시 개령면 일대로 비정했었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 대에 기문지방이 백제 영토가 되었고, 감문국은 진한에 속하여 신라의 영토 또는 세력권 하에 있었으므로 이 설은 무리가 있다.
  • 예산 대흥현 일대: 삼국사기 지리지에 당나라가 백제 고토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산하 지심주에 기문현(己汶縣)이 나온다. 본래 이름이 금물(今勿)이라 하여 지금의 예산군 대흥현이므로 이 일대라는 설이 있다.
  • 남원 일대: 섬진강의 옛 이름이 다사강(多沙江)이라는 이름과 함께 기문하(基汶河)이므로 그 일대로 비정이 가능하다는 설이 있다. 지금의 남원의 옛 이름이 고룡군(古龍郡)인데, 己나 基의 고음은 "ko"이고[2] 용의 순 우리말이 "미르"이므로 고룡, 기문, 기물은 모두 큰 물(大水)이라는 뜻의 "코밀(Komil)"로 개련된다.[3] 따라서 남원 및 그 일대가 옛 기문지방으로 비정할 수 있다.

2. 1. 사료에 나타난 명칭

양주동 등은 감문국(甘文國)과 이름이 비슷하다 하여 김천군 개녕면 일대로 비정했었다. 그러나 백제가 무령왕 대에 기문지방을 장악했고 최종적으로 백제 영토가 되었고, 반대로 감문국은 진한에 속하여 일찌감치 신라의 영토 또는 세력권 하에 있었으므로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당나라가 백제 고토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산하 주 중에 지심주가 있고, 지심주 산하에 기문현(己汶縣)이 나온다. 본래 이름이 금물(今勿)이라 하여 지금의 예산군 대흥현이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옛 이름은 다사강(多沙江)이라는 이름과 함께 기문하(基汶河)이므로 그 일대로 비정이 가능한데, 지금의 남원의 옛 이름이 고룡군(古龍郡)이다. 己나 基의 고음은 "ko"이고[2] 용의 순 우리말이 "미르"이니 고룡이든 기문, 기물이든 모두 큰 물(大水)이라는 뜻의 "코밀(Komil)"로 개련되므로 남원 및 그 일대가 옛 기문지방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3]

2. 2. 위치 비정

양주동 등은 감문국과 이름이 비슷하다 하여 김천시 개령면 일대로 비정했었다. 그러나 백제무령왕 대에 기문지방을 장악했고 최종적으로 백제 영토가 되었고, 반대로 감문국은 진한에 속하여 일찌감치 신라의 영토 또는 세력권 하에 있었으므로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당나라가 백제 고토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산하 주 중에 지심주가 있고, 지심주 산하에 기문현(己汶縣)이 나온다. 본래 이름이 금물(今勿)이라 하여 지금의 예산군 대흥현이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옛 이름이 다사강(多沙江)이라는 이름과 함께 기문하(基汶河)이므로 그 일대로 비정이 가능한데, 지금의 남원의 옛 이름이 고룡군(古龍郡)인데 古자는 말할 것도 없고 己나 基의 고음이 "ko"이고[2] 용의 순 우리말이 "미르"이니 고룡이든 기문, 기물이든 모두 큰 물(大水)이라는 뜻의 "코밀(Komil)"로 개련되므로 남원 및 그 일대가 옛 기문지방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3]

3. 상기물, 하기물

하기물은 남원시 일원이라는 것에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상기물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설이 나뉘고 있다.

3. 1. 하기물(下己汶)

하기물은 남원시 일원이라는 것에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3. 2. 상기물(上己汶)

상기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뉘고 있다.

4. 역사

마한 시기 기문 지역은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나,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대가야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대가야는 기문을 포함한 섭라 지역을 섬진강 이서 지역의 거점으로 삼고, 등을 고구려를 통해 북위에 수출하는 등 대외 교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동성왕과 무녕왕 대에 백제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기문을 둘러싼 백제와 가야 간의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백제는 기문 지역이 본래 마한의 영토였고, 마한은 백제의 일부였다는 논리로 기문의 반환을 요구했다. 가야는 이에 저항했으나 군사력과 외교력에서 백제에 밀려 결국 기문을 빼앗겼다. 이 사건은 가야 쇠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7]

4. 1. 마한 시기

초기에 마한 지역에 속했다. 마한은 이미 백제의 온조왕~다루왕 대에 대부분의 지역(경기도~전라북도)이 백제에 복속된 상태였지만 남부 지역(전남)에 잔존 세력이 있었고 그 지역들도 어느 정도 독립성은 유지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왕 대에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백제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급기야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패망시키자 전라도 지역은 힘의 공백 지역이 되고 말았다. 그 틈에 역시 고구려에 패망해 가락국 대신에 가야 연맹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伴跛國)-대가야가 전라도 동부 지역에 대한 진출을 개시해 장악함으로써 섬진강 이서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 지역 중에 기문 지방이 있었고 그 외에 광양만 일대의 물혜[4], 달이[5], 사타[6] 지역 등도 가야의 영역에 들어 섭라 지방이 되었다. 이 지역은 금관가야의 패망으로 신라에게 넘겨야 했던 김해만 일대를 대신해 새로운 가야의 대외 교역 창구가 되었다.[7] 가령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玉)은 고구려로 수출되어 다시 고구려가 북위와의 교역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4. 2. 가야의 진출과 섭라 지배

마한은 초기에 백제온조왕~다루왕대에 대부분의 지역(경기도~전라북도)이 백제에 복속되었지만, 남부 지역(전남)에는 잔존세력이 남아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왕대에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남부 지역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패망시키자 전라도 지역은 힘의 공백 지역이 되었다.

그 틈을 타 고구려에 패망하여 가야 연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가락국 대신, 가야 연맹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대가야)이 전라도 동부 지역을 장악하여 섬진강 이서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지역에는 기문 지방을 비롯하여 광양만 일대의 물혜[4], 달이[5], 사타[6] 지역 등이 포함되었으며, 섭라 지방으로 불렸다. 이곳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넘겨준 김해만 일대를 대신하여 새로운 가야의 대외 교역 창구가 되었다.[7] 예를 들어,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려로 수출되어 북위와의 교역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웅진으로 천도한 뒤 동성왕~무녕왕대에 세력을 회복한 백제가 남부 지역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면서, 가야의 호남 동부 지역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제는 기문 일대의 가야 세력을 방치하면 노령 이남의 전남 지역 지배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고, 기존 영토인 전주 지역 등 전북 일대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세기 초, 백제는 기문 지방 등 섭라 지방이 본래 마한에 속했고 마한은 백제의 일부이므로, 섭라는 자신들의 옛 영토라는 주장을 펴며 가야와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가야는 기문 지방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며 저항했지만, 군사력으로 백제에 미치지 못했고, 왜국이 가야 대신 백제를 지원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밀려 결국 기문 등 섭라 지역을 백제에 빼앗겼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가야는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4. 3. 백제와 가야의 영토 분쟁

게이타이 천황 7년 6~11월 조에 대가야백제가 기문과 대사를 사이에 두고 영토분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1] 이 시기 백제와 가야 사이의 영토분쟁 기사는 모두 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마한온조왕~다루왕대에 대부분의 지역(경기도~전라북도)이 백제에 복속되었지만, 남부 지역(전남)에는 잔존세력이 남아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한 채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왕대에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남부지역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함락시키면서 전라도 지역은 힘의 공백 상태가 되었다.

이 틈을 타 고구려에 패망하여 가야연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가락국 대신 가야연맹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伴跛國)-대가야가 전라도 동부지역 진출을 개시, 장악함으로써 섬진강 이서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문 지방 외에도 광양만 일대의 물혜[4], 달이[5], 사타[6] 지역 등도 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어 섭라지방이 되었다. 이 지역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넘겨준 김해만 일대를 대신해 새로운 가야의 대외 교역 창구가 되었다.[7]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玉)은 고구려로 수출되어 북위와의 교역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성왕~무녕왕대에 웅진 천도 이후 세력을 회복한 백제는 남부지역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면서 가야의 호남 동부지역 지배권을 흔들기 시작했다. 백제는 기문 일대의 가야 세력을 방치하면 노령 이남의 전남지역 지배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고, 기존 영토인 전주 지역 등 전북 일대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세기 초 백제는 기문 지방 등 섭라 지방이 본래 마한에 속했고 마한은 곧 백제이므로 섭라는 자신들의 옛 영토라는 주장을 펴며 가야와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가야는 기문 지방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등 크게 저항했지만, 군사력에서 백제에 미치지 못했고, 왜국마저 백제 편을 들면서 외교적으로도 밀려 결국 기문 등 섭라 지역을 백제에 빼앗겼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가야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4. 4. 백제의 지배와 가야의 쇠퇴

마한은 이미 백제온조왕~다루왕대에 대부분의 지역(경기도~전라북도)이 백제에 복속된 상태였지만 남부 지역(전남)에 잔존세력이 있었고 그 지역들도 어느정도 독립성은 유지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왕대에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백제의 남부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급기야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패망시키자 전라도 지역은 힘의 공백지역이 되고 말았다. 그 틈에 역시 고구려에 패망해 가야연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가락국 대신에 가야연맹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伴跛國)-대가야가 전라도 동부지역에 대한 진출을 개시해 장악함으로써 섬진강이서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 지역 중에 기문 지방이 있었고 그 외에 광양만 일대의 물혜[4], 달이[5], 사타[6]지역 등도 가야의 영역에 들어 섭라지방이 되었다. 이 지역은 금관가야의 패망으로 신라에게 넘겨야 했던 김해만 일대를 대신해 새로운 가야의 대외교역창구가 되었다.[7] 가령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고구려로 수출되어 다시 고구려가 북위와의 교역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웅진으로 천도한 뒤 동성왕~무녕왕대에 들어서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백제가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금 확립하면서 가야의 호남 동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제로서는 기문일대의 가야세력을 방치하면 노령 이남의 전남지역의 지배권을 제대로 행사하기도 어렵고 기존 영토인 전주지역등의 전북일대까지 위협받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6세기 초 백제는 기문지방등 섭라지방이 당초에 마한에 속했고 마한은 백제이므로 섭라는 곧 옛 자신들의 영토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해 가야와 영토분쟁을 야기했다. 가야는 기문지방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등 크게 저항했지만 군사력으로 백제에 역부족이었고 왜국이 가야대신 백제편을 든 것처럼 심지어 외교면에서조차 백제에게 밀림으로서 결국 기문등의 섭라지역을 백제에게 뺏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가야는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참조

[1] 문서
[2] 문서
[3] 서적 가야연맹사(加耶聯盟史) 1993
[4] 문서 광양
[5] 문서 여수
[6] 문서 순천
[7] 서적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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