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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북로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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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규식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복무했으며,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으로 활동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이후 고려혁명군을 창설하고 신민부, 고려혁명당에서 활동하며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31년 옛 동지 최악에게 암살당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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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북로군정서)
기본 정보
김규식
김규식
본관안동 김씨
우사(尤史)
출생1881년 1월 29일
사망1950년 12월 10일 (69세)
사인병사
묘소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학력
최종 학력로어노크 대학교 학사
종교개신교
경력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주요 경력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남북협상 대표
주요 활동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상하이 독립운동
남북협상 참여
소속 정당한국민주당민족자주연맹
가족 관계
배우자조계순, 김순애
자녀김진동, 김정애
기타 정보
서훈건국훈장 대통령장 (1989년)

2. 생애

1882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안말의 281번지에서 태어났다.[3] 1902년에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대한제국 육군 참위를 지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3] 강원도철원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부대장을 보기도 하였다.[3] 1908년 8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투옥된지 2년 후 한일합방때 석방되었다.[3]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사단장 및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3] 북로군정서는 무장 항일 투쟁의 핵심 근거지 중 하나였다.[3]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제2연대장 김좌진 휘하 제1대대장으로 참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3]

1921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에 취임했으나,[3]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었다.[3]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서일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남은 조직은 재정난에 시달렸지만,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3] 1923년 고려혁명군을 창설하고 총사령에 취임, 이범석을 영입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3]

1925년 신민부, 1926년 고려혁명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3] 장기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 옌지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3] 그러나 1931년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최악에게 암살당했다.[3]

김규식은 1931년 주하현 하동향 마의하 부근에서 암살되었다. 김규식을 유인해 암살한 사람은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최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4남 1녀를 두었으며, 3남·4남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후사 없이 사망했다.[1]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의병 활동 (1882년 ~ 1911년)

1882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안말의 281번지에서 태어났다.[3] 1902년에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대한제국 육군 참위를 지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3] 강원도철원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부대장을 보기도 하였다.[3] 1908년 8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투옥된지 2년 후 한일합방때 석방되었다.[3]

2. 2. 만주 망명과 무장 독립운동 (1912년 ~ 1931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사단장 및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3] 북로군정서는 무장 항일 투쟁의 핵심 근거지 중 하나였다.[3]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제2연대장 김좌진 휘하 제1대대장으로 참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3]

1921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에 취임했으나,[3]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었다.[3]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서일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남은 조직은 재정난에 시달렸지만,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3] 1923년 고려혁명군을 창설하고 총사령에 취임, 이범석을 영입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3]

1925년 신민부, 1926년 고려혁명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3] 장기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 옌지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3] 그러나 1931년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최악에게 암살당했다.[3]

2. 3. 최후

김규식은 1931년 주하현 하동향 마의하 부근에서 암살되었다. 김규식을 유인해 암살한 사람은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최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3. 사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4. 가족

김규식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으며, 셋째와 넷째 아들은 독립운동 중 후사 없이 사망했다.[2] 손자는 김건배이다.

5. 평가

참조

[1] 뉴스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 뉴스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http://www.seoul.co.[...] 서울신문
[3] 서적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 I 경기문화재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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