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찬기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및 지도자이다.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 대한석탄공사 축구단에서 활동했으며,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59년과 1960년 메르데카컵, 1960년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2년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1964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1970년부터 중앙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아 정해성, 김주성 등을 육성했고,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1979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중고교축구연맹 부회장과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198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3명 모두 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장남 김석원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하여 부자 국가대표 선수 기록을 세웠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앙고등학교 축구부의 축구 감독 - 정해성
정해성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로, 럭키금성 황소 선수, 2002 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 부천 SK 감독,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전남 드래곤즈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축구협회 사외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의 축구 선수 - 김홍복 (축구인)
김홍복은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두 차례 우승을 이끌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기여한 축구인이다. - 대한석탄공사 축구단의 축구 선수 - 박종환 (축구인)
박종환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및 지도자로, 선수 시절 대한석탄공사에서 활약하고 은퇴 후 국제 심판으로 활동했으며, 지도자로서는 대한민국 여러 대표팀 감독과 성남 FC 창단 감독을 역임하며 K리그 3연속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으나,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어 20세기 한국 최고의 축구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강압적인 지도 방식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대한석탄공사 축구단의 축구 선수 - 유광준 (축구인)
김찬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찬기 |
로마자 표기 | Gim Chan-gi |
한자 표기 | 金燦基 |
출생일 | 1931년 12월 30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사망일 | 2011년 2월 1일 |
사망지 | 미국 로스앤젤레스 |
신장 | 167cm |
포지션 | 은퇴 (과거 센터백)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한양공업고등학교 |
대학교 | 경희대학교 (1950-1952) |
프로 클럽 | 육군 헌병감실 (1954-1964) 석탄공사 (1964-1965)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1958-1964) |
국가대표팀 출전 | 31 |
국가대표팀 득점 | 0 |
지도자 경력 | |
고등학교 | 중앙고등학교 (1970-1981) |
청소년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U-20 (1978-1979) |
수상 내역 | |
아시안 게임 | 1958 도쿄 단체전 은메달 1962 자카르타 단체전 은메달 |
아시아 선수권 대회 | 1960 대한민국 우승 |
2. 선수 경력
서울 출신으로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과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195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1958년 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959년 1959년 메르데카컵, 1960년 1960년 메르데카컵과 대한민국에서 열린 1960년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1962년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964년 도쿄에서 열린 1964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종목에 출전했다.
1970년부터 중앙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으며, 정해성과 김주성 등을 육성했다. 1978년과 1979년에 대한민국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으며,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1979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팀의 감독을 맡았다.
지도자 활동 외에 중고교축구연맹 부회장과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198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5]
슬하에 3남을 두었으며, 세 아들 모두 축구 선수로 활동하였다. 장남 김석원은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부자가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하는 기록을 세웠다. 차남 김석범은 연세대학교에서, 3남 김석준은 고등학교까지 축구 선수 생활을 했다.[5]
2011년 2월 3일 새벽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6]
[1]
웹사이트
Kim Chan-ki
https://www.olympedi[...]
2022-05-01
3. 지도자 경력
4. 기타 경력
5. 가족 관계
6. 사망
참조
[2]
웹사이트
Profile
http://de.fifa.com/w[...]
fifa.com
2012-05-29
[3]
뉴스
조도전축구팀과 대전할 6대학팀 프로필 경희대팀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62-07-11
[4]
뉴스
國軍蹴球의 現況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62-04-21
[5]
뉴스
4부자 축구가족 미국 이민 김찬기 중앙고감독, 우선 막내 석준만 데리고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1-11-11
[6]
뉴스
축구원로 김찬기 선생, 노환으로 별세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2011-02-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