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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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전쟁은 나폴레옹 몰락 후 나폴리 왕국의 조아생 뮈라가 왕위를 지키고 이탈리아 통일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전쟁이다. 뮈라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회의를 통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자 나폴레옹과 다시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뮈라는 리미니 선언을 통해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자극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반격으로 패배했고, 톨렌티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후 처형당했다. 이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으며, 뮈라의 시도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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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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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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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15년 3월 15일 – 1815년 5월 20일 (2개월 5일) |
장소 | 이탈리아 |
일부 | 제7차 대프랑스 동맹 |
결과 | 오스트리아 제국의 승리 카살란차 조약 조아킴 뮈라가 나폴리 왕좌에서 축출됨 |
영토 | 해당 없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오스트리아 제국 토스카나 대공국 시칠리아 왕국 지원 세력: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영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병력 파견 없음) |
교전국 2 | 나폴리 왕국 프랑스 제국 (병력 파견 없음) |
주석 | 1815년 4월 초 나폴리에 선전포고함. 공식적으로 나폴리의 동맹국이었지만,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음.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요한 마리아 필리프 프리몬트 프리드리히 비안키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라발 누겐트 폰 베스트메스 |
교전국 2 지휘관 | 조아킴 뮈라 미켈레 카라스코사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60,000명 (롬바르디아 주둔), 35,000명 (전투 참여) |
교전국 2 병력 | 82,000명 (뮈라 보고), 50,000명 (실제)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사상자 | 5,000명 (사망, 부상, 포로) |
교전국 2 사상자 | 10,000명 (사망, 부상, 포로) |
2. 배경
프랑스 혁명 전쟁 이전 나폴리(나폴리 왕국)는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트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나폴레옹의 자연스러운 적이었으며 그에 대항하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패배와 프레스부르크 조약 이후 1806년 초 나폴리를 프랑스에 양도해야 했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나폴리를 통치했다. 그 후 1808년 조제프는 스페인 왕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의 매형인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 왕으로 임명했다. 뮈라는 프랑스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법률 및 사회 시스템에 따라 나폴리를 통치했으며, 동시에 나폴레옹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전투의 참패 이후 뮈라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대육군을 버렸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의 패배가 다가오면서 뮈라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고, 결국 1814년 1월 오스트리아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연합국 편에 섰다. 하지만 빈 회의가 진행되면서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복귀하려는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뮈라의 입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뮈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었는데, 그들은 뮈라의 왕위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더욱이 시칠리아에서 페르디난트를 보호하며 그가 시칠리아 왕위를 유지하도록 보장했다.
1815년 3월 1일 뮈라는 엘바에서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이 탈출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자 다시 한번 그와 손을 잡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2. 1. 나폴레옹 시대의 나폴리 왕국
프랑스 혁명 전쟁 이전 나폴리는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트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나폴레옹의 적이었으며 그에 대항하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패배와 프레스부르크 조약 이후 페르디난트는 1806년 초 나폴리를 프랑스에 양도해야 했다.처음에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나폴리를 통치했다. 그 후 1808년 조제프는 스페인 왕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의 매형인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 왕으로 임명했다.
뮈라는 프랑스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법률 및 사회 시스템에 따라 나폴리를 통치했으며, 동시에 나폴레옹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전투의 참패 이후 뮈라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대육군을 버렸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의 패배가 다가오면서 뮈라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고, 결국 1814년 1월 오스트리아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연합국 편에 섰다.
하지만 빈 회의가 진행되면서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복귀하려는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뮈라의 입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뮈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었는데, 그들은 뮈라의 왕위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더욱이 시칠리아에서 페르디난트를 보호하며 그가 시칠리아 왕위를 유지하도록 보장했다.
1815년 3월 1일 뮈라는 엘바에서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이 탈출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자 다시 한번 그와 손을 잡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2. 2. 빈 회의와 뮈라의 불안한 지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아생 뮈라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대육군을 버렸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패배가 확실해지자 뮈라는 나폴레옹에게서 멀어졌고, 1814년 1월 오스트리아 제국과 조약을 맺고 연합군 편에 섰다.그러나 빈 회의가 진행되면서 페르디난트 4세를 왕위에 복귀시키려는 여론이 강해져 뮈라의 지위는 불안해졌다. 뮈라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국가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었는데, 이들은 뮈라의 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시칠리아에서 페르디난트 4세를 보호하며 그가 시칠리아 왕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3. 전쟁의 발발
조아생 뮈라는 1815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와 백일천하를 시작하기 5일 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뮈라가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영토 통과를 요청했을 때부터 전쟁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선포 전에 롬바르디아 주둔군을 벨레가르데 지휘 하에 증강했다.
전쟁 초기 뮈라는 7,000명의 기병과 90문의 대포를 포함하여 82,000명의 군대를 보유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이탈리아인들의 합류를 독려하기 위해 과장된 수치였다. 실제 병력은 약 50,000명 정도였다. 뮈라는 시칠리아 침공에 대비하여 예비 병력인 '내륙군'을 남겨두고, 두 정예 근위 사단을 교황령을 통해 보냈다. 교황은 제노바로 피신해야 했다. 3월 30일, 뮈라는 리미니에 도착하여 리미니 선언을 발표하고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전쟁을 호소했다.
이탈리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빈 회의에서 정해진 조건에 따라,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19년 만에 밀라노 공국에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가 회복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에도 합스부르크 군주들이 복귀했기 때문이다.
뮈라는 이탈리아인들의 봉기를 기대했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이 불안을 빠르게 진압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은 뮈라를 이탈리아 통일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는 인물로 보았다.
3. 1. 뮈라의 선전포고와 리미니 선언
조아생 뮈라는 1815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와 백일천하를 시작하기 5일 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뮈라가 몇 주 전에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을 때 의심을 품고 전쟁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선포 전에 롬바르디아에 주둔한 군대를 벨레가르데의 지휘 하에 증강했다.전쟁 초기에 뮈라는 7,000명의 기병과 90문의 대포를 포함하여 82,000명의 군대를 보유했다고 전해졌지만, 이 수치는 이탈리아인들이 그의 대의에 합류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었다. 실제 병력은 약 50,000명 정도였다.
뮈라는 시칠리아 침공에 대비하여 예비 병력인 '내륙군'을 남겨두고, 두 정예 근위 사단을 교황령을 통해 보냈다. 교황은 제노바로 도망가야 했다. 뮈라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안코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볼로냐로 향했다. 3월 30일, 뮈라는 리미니에 도착하여 유명한 리미니 선언을 발표하고 모든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전쟁을 선동했다.
이탈리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경계했는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빈 회의에서 정해진 조건에 따라,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19년 만에 밀라노 공국에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가 회복되었다.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또한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에도 복귀했다.
뮈라는 나폴리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이 너무 많아서 이탈리아인들이 그의 대의를 지지하며 봉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이 모든 불안을 신속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반적인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뮈라는 나폴리 밖에서 무기를 들고 그의 대의에 합류하려는 이탈리아인을 거의 찾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뮈라를 이탈리아 통일의 등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왕관을 지키려는 사람으로 보았다.
3. 2.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한계
빈 회의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19년 만에 밀라노 공국에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가 다시 시작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에도 합스부르크 군주들이 복귀했기 때문이다.조아생 뮈라는 이탈리아인들의 봉기를 기대했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이 불안을 빠르게 진압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은 뮈라를 이탈리아 통일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는 인물로 보았다.
4. 전쟁의 경과
1815년 3월 15일, 조아생 뮈라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5일 전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다. 뮈라는 리미니 선언을 발표해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를 촉구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빠른 진압으로 실패했다. 뮈라는 포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진입을 시도했으나, 오키오벨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했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뮈라에게 선전포고하고 이탈리아에 함대를 파견하자, 프리몽은 반격을 시작했다. 비안키 군단은 카르피로 진격했고, 나이페르크 군단은 나폴리군을 공격해 카사글리아 전투에서 승리했다. 뮈라는 페라라 포위전을 풀고 볼로냐로 퇴각했고, 토스카나의 나폴리군도 후퇴하며 오스트리아군은 피렌체를 탈환했다.
뮈라는 안코나로 후퇴하며 론코 전투와 사비오 강에서 저항했지만, 체세나티코 전투와 페사로 전투에서 기습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톨렌티노 전투에서 뮈라는 비안키에게 패배하고, 스카페차노 전투에서 카라스코사가 나이페르크에게 패배하면서 나폴리군은 궤멸되었다.
영국-오스트리아 연합 함대가 안코나를 봉쇄하고, 비안키와 나이페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리로 진격했다. 뮈라는 결국 코르시카를 거쳐 칸으로 도망쳤다.
4. 1. 나폴리군의 진격 (1815년 3월 ~ 4월)
조아생 뮈라는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를 시작하기 5일 전인 1815년 3월 15일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다. 뮈라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의 군대가 82,000명이라고 과장했지만, 실제로는 약 50,000명 정도였다.뮈라는 예비 병력을 남겨두고, 정예 근위 사단을 교황령으로 보냈다. 교황은 제노바로 피신해야 했다. 뮈라는 안코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볼로냐로 진군했다. 3월 30일, 리미니에 도착한 뮈라는 리미니 선언을 발표하여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참전을 호소했다.
뮈라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이탈리아인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이 신속하게 진압하여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뮈라는 나폴리 밖에서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뮈라를 이탈리아 통일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는 인물로 보았다.
롬바르디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은 60,000명으로 늘어났고, 프리몽 남작이 뮈라를 상대하는 부대를 지휘했다. 프리몽은 피아첸차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나폴리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뮈라가 리미니 선언을 발표한 날, 비안키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 전위 부대가 체세나 근처에서 격퇴되었다. 비안키는 모데나로 후퇴하여 파나로 강 뒤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뮈라는 4월 3일에 볼로냐를 점령했다.
뮈라는 파나로 전투에서 다시 비안키와 교전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모데나로 진격했다. 카라스코사 장군의 사단은 모데나, 카르피, 레조 에밀리아를 점령했다. 뮈라는 페라라로 진격했지만, 페라라 수비대는 나폴리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많은 병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페라라 포위전)
4월 8일, 뮈라는 포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뮈라는 이탈리아 대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를 받는 포 강 북쪽에서 더 많은 지원을 기대했다.
이 지역은 과거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였고, 나폴레옹 전쟁 참전 용사 40,000명이 뮈라가 밀라노에 도착하면 합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뮈라는 오키오벨로에서 도하를 시도하여 프리몽 휘하의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했다.
한편, 뮈라가 교황령으로 보낸 두 근위 사단은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진입하여 4월 8일에 수도 피렌체를 점령했다. 대공은 피사로 피신했고, 누젠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피스토이아로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누젠은 증원군 덕분에 나폴리군의 추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4. 2.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1815년 4월 ~ 5월)
오키오벨로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뮈라의 포강 도하 시도는 실패했고, 이틀간의 격전 끝에 나폴리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섰다. 설상가상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뮈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이탈리아로 함대를 파견했다.한편, 프리몽은 페라라 주둔군을 구원하기 위해 반격을 명령했다. 그는 비안키가 지휘하는 군단을 카르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곳은 굴리엘모 페페가 지휘하는 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또 다른 부대는 페페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카라스코사는 모데나 주변의 나폴리군을 지휘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함정을 간파하고, 파나로 강 뒤의 방어선으로 퇴각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레조 에밀리아와 모데나에서 철수한 그의 사단의 잔여 병력과 합류했다.
그러나 카라스코사의 퇴각 이후에도 뮈라는 여전히 페라라 포위를 계속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프리몽은 나이페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군단에게 그의 강화된 우익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4월 12일, 카사글리아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리군은 강화된 진지에서 몰려났다.
뮈라는 페라라 포위전을 풀고 볼로냐로 가는 길로 퇴각해야 했다. 4월 14일, 프리몽은 파나로 강을 도하하려 했지만 격퇴당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 뮈라와 그의 군대는 볼로냐에서 퇴각했고, 볼로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재빨리 탈환되었다.
한편, 토스카나에서 뮈라의 두 친위 사단도 누젠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방해받지 않고 설명할 수 없이 퇴각했다. 4월 15일까지 오스트리아군은 피렌체를 탈환했고, 이 소식이 뮈라에게 전해지자 그는 주력 부대 전체에게 원래 본부인 안코나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피렌체로 가는 길이 열리고 이탈리아 반도가 눈앞에 펼쳐지자 프리몽은 뮈라를 완전히 처리하기 위해 두 군단을 남쪽으로 보냈다. 비안키의 군단은 나폴리군의 후방을 위협하고 직접적인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피렌체를 거쳐 폴리뇨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나이페르크의 군단은 뮈라가 안코나로 후퇴하는 동안 직접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쟁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프리몽은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는 롬바르디아로 다시 소환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상당 부분도 소환되었고, 이탈리아에는 총 35,000명 정도의 3개 오스트리아 군단만 남았다.
뮈라는 그의 친위 사단에 너무 많은 신뢰를 두었고, 그들이 비안키와 누젠트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천천히 퇴각했으며 심지어 론코 전투와 사비오 강에서 추격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선봉대는 체세나티코 전투와 페사로 전투에서 두 번이나 퇴각하는 나폴리군을 기습했다. 뮈라는 서둘러 퇴각했고, 4월 말까지 그의 주력군은 무사히 안코나에 도착하여 그의 두 친위 사단과 재회했다.
4. 3. 톨렌티노 전투와 뮈라의 패배 (1815년 5월)
비안키의 군단은 빠르게 진격했다. 4월 20일 피렌체에 도착한 오스트리아군은 4월 26일까지 목표 지점인 폴리뇨에 도달하여 뮈라의 퇴각로를 위협했다. 나이페르크의 군단은 뮈라를 추격 중이었고, 4월 29일까지 그의 선봉대는 불과 이틀 거리인 파노에 도착했다.두 오스트리아군은 분리되어 있었고, 뮈라는 나이페르크를 상대하기 전에 비안키를 먼저 격파하고자 했다. 워털루 전투 전 나폴레옹의 전술과 유사하게, 뮈라는 카라스코사 휘하의 사단을 북쪽으로 보내 나이페르크를 지연시키고, 주력 부대는 서쪽으로 향해 비안키와 맞섰다.
뮈라는 원래 톨렌티노 인근에서 비안키와 교전할 계획이었으나, 4월 29일 비안키의 선봉대가 그곳의 작은 나폴리 수비대를 몰아냈다. 먼저 도착한 비안키는 톨렌티노 동쪽 언덕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나이페르크의 군대가 후방에서 접근하자, 뮈라는 1815년 5월 2일 톨렌티노 전투에서 비안키와 전투를 벌였다. 이틀간의 결정적이지 않은 전투 끝에, 뮈라는 나이페르크가 스카페차노 전투에서 카라스코사를 기습하여 격파하고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결국 뮈라는 퇴각을 명령했다.
톨렌티노 전투는 나폴리 군대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많은 고위 장교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궤멸된 나폴리군은 혼란 속에 후퇴했다. 5월 5일, 영국-오스트리아 연합 함대가 안코나를 봉쇄하여 결국 도시의 모든 수비대를 포로로 잡았다.
5월 12일까지, 비안키는 자신의 군단과 나이페르크의 군단을 모두 지휘하며 라퀼라와 그 성을 점령했다. 주 오스트리아군은 포폴리로 진군했다.
같은 시기, 뉘젠트 장군은 피렌체에서 계속 진격했다. 4월 30일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의 귀환을 허용한 뉘젠트는 체프라노로 진군했다. 5월 중순까지, 뉘젠트는 산 제르마노(현재 카시노)에서 뮈라를 가로막았다.
뮈라는 뉘젠트의 진격을 막으려 했지만, 비안키 휘하의 주 오스트리아군이 추격해 오자 5월 16일에 작전을 중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군은 칼비 근처에서 합류하여 나폴리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뮈라는 영국 함대가 나폴리를 봉쇄하고 항구에 있던 모든 나폴리 포격정을 파괴한 후, 덴마크 선박의 선원으로 변장하여 코르시카를 거쳐 칸으로 도망쳤다.
5. 전쟁의 종결과 영향
나폴리 전쟁은 조아생 뮈라가 코르시카로 도망친 후, 1815년 5월 20일 나폴리 장군 페페와 카라스코사가 오스트리아와 카잘란차 조약을 체결하면서 종식되었다.
전쟁 직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두 왕국은 1735년부터 같은 국왕이 통치했지만, 공식적인 통합은 1816년에 이루어졌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4세와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드 3세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얻은 영토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통합했다.
조아키노 뮈라는 왕위를 지키거나 리미니 선언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일부에서는 리미니 선언을 리소르지멘토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개입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일의 가장 큰 반대 세력임을 보여주었고, 이는 결국 스페인 부르봉가와 오스트리아에 맞선 세 차례의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5. 1. 카잘란차 조약과 페르디난트 4세의 복위
조아생 뮈라가 코르시카로 도망친 후, 1815년 5월 20일 나폴리 장군 페페와 카라스코사는 오스트리아와 카잘란차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 18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리에 입성하여 페르디난트 4세를 왕위에 복위시켰다.5. 2. 뮈라의 최후
뮈라는 자신의 왕국을 되찾고자 망명에서 돌아와 1815년 10월 8일 칼라브리아의 피초에 28명의 병력과 함께 상륙했다. 그러나 몇 달 전 나폴레옹과는 달리, 뮈라는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곧 부르봉군에 의해 체포되었다.뮈라는 피초에 상륙한 지 5일 후인 1815년 10월 13일, 마을의 성에서 처형되었으며, 사격대에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것으로 나폴리 전쟁의 마지막 장이 끝났다.
5. 3. 양시칠리아 왕국의 성립과 이탈리아 통일 운동
전쟁이 끝난 직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1735년부터 두 왕국은 같은 국왕이 통치했지만, 공식적인 통합은 1816년에 이루어졌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4세와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드 3세는 스페인 부르봉 군주인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얻은 영토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통합했다.조아키노 뮈라는 왕관을 지키거나 리미니 선언으로 대중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하는 데 실패했지만, 간접적으로 그리고 의도치 않게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일부는 리미니 선언을 리소르지멘토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오스트리아의 개입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일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켰고, 이는 결국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에 맞선 세 차례의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6.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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