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나오마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난부 나오마사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하치노헤번의 2대 번주이다. 초대 번주 난부 나오후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166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상속받았다. 1672년 모리오카번과의 영토 경계를 확정하고, 1695년에는 영내 인구 조사를 실시하는 등 통치 기반을 다졌다. 학식이 뛰어나 시문집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흉작으로 인해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 산킨코타이 수행 무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모아이 제도를 시행했으며, 1688년부터 1689년까지 쇼군의 소요닌을 역임했다. 1699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양자인 난부 쓰시가 뒤를 이었다. 사망 원인으로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없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치노헤번주 - 난부 히로노부
난부 히로노부는 에도 시대 하치노헤 번의 3대 번주로서 검지 실시와 하치노헤 산샤 대제의 기초를 다지는 등 번정 발전에 기여했지만 흉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가로 나카자토 유키오에게 《난부 중흥기》와 《난부 가계》를 편찬하게 했다. - 하치노헤번주 - 난부 노부요리
난부 노부요리는 제5대 번주 난부 노부오키의 적남으로 가문을 계승하여 무예를 장려했으나 흉작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장남에게 가독을 물려준 뒤 35세로 사망했다. - 1699년 사망 - 경민황귀비
경민황귀비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옹친왕 인상의 생모이며, 비빈으로 총애를 받아 윤상 등 자녀를 낳고 사망 후 민비로 추증, 아들 윤상의 공헌으로 황귀비로 추봉, 최종적으로 경민황귀비로 추존되어 경릉에 합장되었으나, 출생년도, 입궁 시기, 가족 배경 등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 1699년 사망 - 크리스티안 5세
크리스티안 5세는 1670년부터 1699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한 국왕으로, 절대왕정 강화, 《단스케 로브》 발포, 스코네 전쟁 참여, 과학 발전 기여 등의 업적을 남겼다. - 1661년 출생 -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후계자 부재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야기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을 가져온 스페인 국왕이다. - 1661년 출생 - 김주신
김주신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이며, 순안현령으로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인원왕후가 왕비가 된 후 영돈녕부사에 제수되고 경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사후 효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난부 나오마사 | |
---|---|
기본 정보 | |
씨명 | 난부 씨 |
이름 | 난부 나오마사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분 원년 5월 6일 (1661년6월 2일) |
사망 | 겐로쿠 12년 3월 16일 (1699년4월 15일) |
어릴 적 이름 | 부타유 |
개명 | 나오마사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의 곤치인 |
관위 | 종5위오미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쓰나요시 |
번 | 무쓰하치노헤 번 번주 |
씨족 | 난부 씨 |
부모 | 아버지: 난부 나오후사, 어머니: 레이쇼인 |
형제자매 | 나오마사, 나오쓰네, 이치하시 마사카쓰 정실 |
배우자 | 정실: 난부 유키노부의 딸 |
자녀 | 구쓰키 주코 정실, 난부 가쓰노부 정실 |
양자 | 미치노부 |
하치노헤 번 번주 | |
대수 | 2대 |
재임 기간 | 1668년 ~ 1699년 |
전임 | 난부 나오후사 |
후임 | 난부 미치노부 |
에도 막부 소바요닌 | |
재임 기간 | 1688년 ~ 1689년 |
전임 | 마키노 다다타카 |
후임 | 야나기사와 야스아키 |
2. 생애
난부 나오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측실 레이쇼인이다.[1] 간분 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간분 12년, 모리오카번과의 영토 경계를 확정하고, 겐로쿠 8년에는 처음으로 영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시문집 『신편 문림 전집』을 편찬하는 등 학식도 높았다. 그러나 엔포 연간에는 "야마세"에 의한 흉작이 겹쳐 번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나오마사 대에는 산킨코타이 수행을 명받은 가중 무사의 부담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모아이(묶어두기)" 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가중 무사에게 금전 등을 출자하게 하고 필요에 따라 지급하는 제도였다.
겐로쿠 원년부터 다음 해 겐로쿠 2년까지 쇼군의 소요닌을 역임했다.
겐로쿠 12년 사망, 향년 39세. 뒤를 양자 쓰시가 이었다. 묘소는 도쿄도미나토구의 킨치인에 있다. 사인에 관해, 하치노헤 입번을 원망하는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에 의한 독살설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선대에도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의 관여가 소문이 돌았으며, 막부에 의한 조사가 진행되었다.[1]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초대 번주 난부 나오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측실 레이쇼인이다. 어릴 적 이름으로는 백부 난부 시게노부에게서 받은 무타유, 미즈구치보 별당 호메이인 니치에이에게서 받은 운하치, 무료인(조센인 에이손)에게서 받은 히코하치로가 있다.[1]간분 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했다.
2. 2. 번주로서의 통치
난부 나오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측실 레이쇼인이다.[1] 간분 8년 (166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겐로쿠 원년 (1688년)부터 다음 해 겐로쿠 2년 (1689년)까지 쇼군의 소요닌을 역임했다.
간분 12년 (1672년), 모리오카번과의 영토 경계를 확정하고, 겐로쿠 8년 (1695년)에는 처음으로 영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시문집 『신편 문림 전집』을 편찬하는 등 학식도 높았다. 그러나 엔포 연간에는 "야마세"에 의한 흉작이 겹쳐, 번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나오마사 대에는 산킨코타이의 수행을 명받은 가중 무사의 부담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모아이(묶어두기)"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가중 무사에게 금전 등을 출자하게 하고 필요에 따라 지급하는 제도였다.
겐로쿠 12년 (1699년) 사망, 향년 39세. 사인에 관해, 하치노헤 입번을 원망하는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에 의한 독살설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2. 3. 소요닌 역임과 사망
간분 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했다. 겐로쿠 원년부터 다음 해 겐로쿠 2년까지 쇼군의 소요닌을 역임했다.겐로쿠 12년 사망, 향년 39세. 뒤를 양자 쓰시가 이었다. 묘소는 도쿄도미나토구의 킨치인에 있다. 사인에 관해, 하치노헤 입번을 원망하는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에 의한 독살설이 있으나, 이를 완전히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선대에도 모리오카번 난부 가문의 관여가 소문이 돌았으며, 막부에 의한 조사가 진행되었다.[1]
3. 인물
나오마사는 학식이 매우 높았으며, 측근 시절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바치는 헌상품의 봉인을 풀기 위한 문답을 혼자서 풀어내어 중용되는 등 재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4. 가계
- 아버지: 난부 나오마사
- 어머니: 레이쇼인 (가와구치 겐노조의 딸[1], 측실)
- 정실: 난부 유키노부의 딸
- 자녀
- 쿠키 치카쓰나의 정실
- 난부 가쓰노부의 정실
- 양자: 난부 쓰신 (난부 시게노부의 아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