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난부 유키노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난부 유키노부는 간에이 19년(1642년)에 태어나 겐로쿠 5년(1692년)에 모리오카 번의 5대 번주가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가즈노 금산의 금 생산 감소, 흉작과 대기근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신덴 개발, 세제 개혁 등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유교를 숭상하고 장남의 장례를 유교식으로 치르는 등 번정에 소홀하여 유신이 권력을 잡는 결과를 낳았다. 무예에도 능하여 포술과 승마에서 유파를 열었으며, 겐로쿠 15년(1702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02년 사망 - 윌리엄 3세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었으며, 명예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올라 프랑스의 팽창을 막고 잉글랜드 의회 권한을 강화했으며, 대동맹 전쟁을 이끌고 잉글랜드 은행 설립을 지원하다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 1702년 사망 - 난부 시게노부
    에도 시대 모리오카 번의 2대 번주인 난부 시게노부는 초대 번주 난부 도시나오의 아들로, 검지 실시, 신전 개발, 모리오카 성 수복, 기타카미 강 방재 사업 등 번의 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와카에도 능통한 문화적 역량을 지녔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시게나오
    난부 시게나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모리오카 번의 2대 번주이며 모리오카성 축성을 완성하고 산킨코타이 지각으로 처벌받았으며 네덜란드 선박 승무원을 심문하기도 했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도시나오
    난부 도시나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모리오카 번의 초대 번주이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고 모리오카 번의 기반을 다지고 광산 개발과 모리오카 성 축성 등을 통해 번의 발전에 기여했다.
  • 1642년 출생 - 메흐메트 4세
    메흐메트 4세는 6세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여 쾨프륄뤼 가문의 재상들이 제국을 이끌었으나, 빈 전투 패배 후 폐위되어 '사냥꾼 메흐메트'로 불리기도 했다.
  • 1642년 출생 - 이하라 사이카쿠
    이하라 사이카쿠는 1642년에 태어나 하이카이 시인으로 활동하다 소설가로 전향하여 우키요조시라는 새로운 소설 장르를 확립하고, 호색물, 마치닌물, 무가물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으며, 『호색일대남』, 『일본영대장』, 『세켄무네산요』 등의 대표작을 통해 당시 사회와 인간의 욕망을 묘사하여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난부 유키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난부 유키노부의 초상
이름난부 유키노부
원어 이름南部行信
출생1642년 9월 11일
출생지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사망1702년 11월 29일
사망지일본 에도
묻힌 곳모리오카시 쇼주지
국적일본
다른 이름야치 (어린 시절 이름)
난에이
신신
작위모리오카번 다이묘
재임 기간1692년 - 1702년
이전 계승자난부 시게노부
다음 계승자난부 노부오키
배우자모리 미쓰히로의 딸 구마히메
아버지난부 시게노부
어머니다마야마 히데히사의 딸, 다이치인
관위
관위종5위하 시나노노카미
종4위하
가계
자녀사네노부
노부오키
도시미키
아오야마 유키미쓰 정실
마키노 히데시게 정실
난부 나오마사 정실
아키히메
마쿠코
기타 정보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쓰나요시
씨족난부 씨
묘소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쇼주지
계명도쿠운인덴 교쿠오 소사쓰 다이코지

2. 생애

간에이 19년(1642년) 8월 17일, 제3대 번주 난부 시게노부의 장남으로 모리오카에서 태어났다. 간분 6년 (1664년) 4월 28일에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28일에 종5위하, 시나노노카미에 서위 및 임관되었다. 겐로쿠 5년 (1692년) 6월 27일, 시게노부의 은거로 51세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겐로쿠 7년 (1694년) 8월 21일, 동생 마사노부에게 신덴 5,000석, 동생 가쓰노부에게 신덴 3,000석을 나누어 주고, 각자 하타모토로 열했다. 겐로쿠 12년 (1699년) 12월 18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

유키노부가 번주가 되었을 무렵에는 가즈노 금산을 시작으로 모리오카 번 내의 금 생산 감소, 겐로쿠 7년 (1694년)의 흉작에서 겐로쿠 8년 (1695년)의 대기근과, 해마다 흉작이 이어져 4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등, 번 재정이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신덴 개발의 장려, 검약의 철저, 겐미제 폐지에 의한 세제 개혁, 군마 사육 의무 면제 등 다양한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고, 겐로쿠 15년 (1702년)에는 2만 6,0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유키노부는 점차 번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유교에 맹신적인 경향을 보여, 요절한 장남 사네노부의 장례는 불교식 대신 유교식으로 거행했고, 에도에서 낙서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신(儒臣)이 권세를 잡고, 대신 후계자가 된 노부오키를 폐적하려 하기까지 했다.

또한 무예에서는 포술에 능했고, 여러 유파를 합쳐 심적묘화류를 열어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앞에서 선보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 승마에서도 유키노부류를 열었다.

겐로쿠 15년 (1702년) 10월 11일, 부친을 따라 모리오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뒤는 삼남 노부오키가 이었다.

2. 1. 번주 취임 이전

간에이 19년(1642년) 8월 17일, 제3대 번주 난부 시게노부의 장남으로 모리오카에서 태어났다. 간분 6년 (1664년) 4월 28일에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28일에 종5위하, 시나노노카미에 서위 및 임관되었다.

2. 2. 번주 시절

간에이 19년(1642년) 8월 17일, 제3대 번주 난부 시게노부의 장남으로 모리오카에서 태어났다. 간분 6년 (1664년) 4월 28일에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28일에 종5위하, 시나노노카미에 서위 및 임관되었다. 겐로쿠 5년 (1692년) 6월 27일, 시게노부의 은거로 51세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겐로쿠 7년 (1694년) 8월 21일, 동생 마사노부에게 신덴 5,000석, 동생 가쓰노부에게 신덴 3,000석을 나누어 주고, 각자 하타모토로 열했다. 겐로쿠 12년 (1699년) 12월 18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

유키노부가 번주가 되었을 무렵에는 가즈노 금산을 시작으로 모리오카 번 내의 금 생산 감소, 겐로쿠 7년 (1694년)의 흉작에서 겐로쿠 8년 (1695년)의 대기근과, 해마다 흉작이 이어져 4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등, 번 재정이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신덴 개발의 장려, 검약의 철저, 겐미제 폐지에 의한 세제 개혁, 군마 사육 의무 면제 등 다양한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고, 겐로쿠 15년 (1702년)에는 2만 6,0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유키노부는 점차 번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유교에 맹신적인 경향을 보여, 요절한 장남 사네노부의 장례는 불교식 대신 유교식으로 거행했고, 에도에서 낙서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신(儒臣)이 권세를 잡고, 대신 후계자가 된 노부오키를 폐적하려 하기까지 했다.

또한 무예에서는 포술에 능했고, 여러 유파를 합쳐 심적묘화류를 열어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앞에서 선보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 승마에서도 유키노부류를 열었다.

겐로쿠 15년 (1702년) 10월 11일, 부친을 따라 모리오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뒤는 삼남 노부오키가 이었다.

2. 2. 1. 번정 개혁

겐로쿠 5년(1692년) 유키노부가 번주가 되었을 무렵, 가즈노 금산을 시작으로 모리오카 번 내의 금 생산이 감소하였다. 겐로쿠 7년(1694년)의 흉작과 겐로쿠 8년(1695년)의 대기근으로 4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번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신덴 개발 장려, 검약, 겐미제 폐지를 통한 세제 개혁, 군마 사육 의무 면제 등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고, 겐로쿠 15년(1702년)에는 2만 6,0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2. 2. 2. 유교 정치와 말년

난부 유키노부는 번주가 된 후 번 재정이 악화되자 여러가지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가즈노 금산을 시작으로 모리오카 번 내의 금 생산량이 감소했고, 1694년의 흉작과 1695년의 대기근을 시작으로 흉년이 계속되어 4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신덴 개발 장려, 검약, 겐미제 폐지를 통한 세제 개혁, 군마 사육 의무 면제 등 다양한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고, 1702년에는 2만 6,0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유키노부는 점차 번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유교에 맹신하여 요절한 장남 사네노부의 장례를 불교식 대신 유교식으로 치뤄 에도에서 낙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학을 숭상하는 신하(유신)들이 권세를 잡고, 대신 후계자가 된 노부오키를 폐적하려 하기까지 했다.

무예에서는 포술에 능하여 여러 유파를 합쳐 심적묘화류를 열어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앞에서 선보인 적도 있었다. 이 외에 승마에서도 유키노부류를 열었다.

1702년 10월 11일, 아버지의 뒤를 따라 모리오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뒤는 삼남 노부오키가 이었다.

2. 3. 죽음

3. 개인적 면모와 평가

3. 1. 문화적 소양

3. 2. 성격 및 평가

4. 가계

난부 유키노부는 남부 시게노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다마야마 로쿠베에 히데히사의 딸 다이치인이다. 정실은 모리 미츠히로의 딸인 구마히메(세이조인)이다. 차남은 남부 사네노부이며, 딸은 아오야마 유키모리의 정실이 되었다. 또 다른 딸은 남부 나오마사의 정실이 되었고, 다섯째 딸 마쿠코는 모리 타카히사의 정실이 되었다가 이후 코이데 시게오키의 계실이 되었다.

측실로는 나카자토 한베에의 딸 코쇼인이 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은 마키노 히데나리의 정실이 되었다. 이와마 마사쓰구의 딸인 유리코(신코인)과의 사이에서는 넷째 아들 남부 토시모토를 얻었다. 이와이 요이치로의 딸 지온인과의 사이에서는 셋째 아들 남부 노부오토를 얻었다. 시이나 씨의 딸인 이토메(케이운인)과의 사이에서는 츠야히메(즈이레이인)을 얻었으며, 츠야히메는 구로다 노리마사의 정실이 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