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트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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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트하임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위치한 도시로, 800년경에 처음 언급되었다. 10세기에는 노르트하임 백작령의 중심지였으며, 1204년에는 도시로 기록되었다. 1384년에는 한자 동맹에 가입했고, 1854년 하노버에서 괴팅겐으로의 철도 개통으로 중요성이 커졌다. 1992년에는 열차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늘날 노르트하임은 다양한 문화 시설과 교육 기관을 갖추고 있으며, 교통의 요지이자 산업 도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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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트하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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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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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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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니더작센주 |
군 | 노르트하임 군 |
면적 | 145.67 |
우편 번호 | 37154 |
지역 번호 | 05551, 05503, 05553, 05554 |
자동차 번호판 | NOM, EIN, GAN |
행정 구역 코드 | 03 1 55 011 |
하위 행정 구역 | 16개 오르트스타일 |
웹사이트 | www.northeim.de |
시장 | 지몬 하르트만 |
시장 임기 | 2018–23 |
소속 정당 | SPD |
지리 정보 | |
해발 고도 | 120 |
언어 정보 | |
저지 독일어 | Nuurten |
추가 정보 |
2. 역사
노르트하임은 800년 프랑크 귀족이 풀다 수도원에 재산을 양도하는 문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2] 10세기에 주변 지역은 노르트하임 백작령이 되었고, 지크프리트가 982년에 첫 번째 백작으로 언급되었다.[2] 1061년부터 1070년까지 오토 2세 백작은 바이에른 공작령을 소유했지만,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작센 음모에 연루되어 잃었다.[2]
1050년경 오토는 오토 2세의 딸 리헨차와 결혼하여 영지를 확장했다. 1061년 아그네스로부터 바이에른 공작령을 받았으나, 1069년 하인리히 4세 암살 음모 연루 혐의로 영지와 공작위를 잃었다. 1083년 사망했지만, 노르트하임에 수도원(장크트 브라지엔 수도원)을 설립할 계획이었고, 이 수도원 보호 아래 시장 중심의 취락이 건설되어 노르트하임의 맹아가 되었다.
1110년 오토의 손녀 리헨차 폰 노르트하임은 로타르 폰 젝트링겐과 결혼했고, 리헨차는 황후가 되었다. 1147년 노르트하임 백작의 남계 가문은 단절되었고, 영지는 빈첸부르크 백작 헤르만 2세에게 넘어갔으나, 5년 뒤 헤르만이 살해당하면서 수도원은 하인리히 사자공의 소유가 되었다. 성 블라시우스 수도원은 1100년경에 설립되었다.[2] 1002년 노르트하임 백작의 궁정이 소재한 도시로서 처음 기록되었다.[2]
1252년 노르트하임은 도시권을 얻었고,[2] 시벽이 건설되었다. 1384년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경제적으로 흥성했다.[2] 1539년 종교 개혁가 안톤 코르비누스는 최초의 교회법을 제정했다. 1554년 노르트하임은 한자 동맹에서 탈퇴했다.[2]
1532년에 프로테스탄트교가 도입되었다. 30년 전쟁 중 1626년 황제군에 의해 세 차례 포위되었고, 1629년 방어 시설이 파괴되었다. 1641년 피콜로미니 장군에게 약탈당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1832년 화재로 중세 시대 시청과 40채 이상의 주택이 불탔다.[2] 1854년 하노버에서 괴팅겐까지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 분기점이 되어 중요성이 커졌다. 남 하르츠 철도는 1868년에, 졸링 철도는 1878년에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4년 9월, 1945년 2월, 1945년 3월에 폭탄 공격을 받아 기차역 등이 파괴되었다.[2] 노르트하임은 윌리엄 셰리단 앨런의 저서 "권력 장악의 나치"의 주제이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향민 수용소가 있던 임브스하우젠이 1974년 도시에 편입되었다.[4] 1992년 11월 15일 급행 열차와 화물 열차 충돌 사고로 11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했다.[5]
2. 1. 초기 역사 (8세기 ~ 11세기)
800년경, 프랑크 귀족이 풀다 수도원에 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기록한 문서에 노르트하임이 처음 언급되었다.[2] 7세기에 노르트하임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기록되어 있는데, 프랑크족 귀족 니타르트와 그의 아내 에게힐트가 노르트하임, 메덴하임, 주트하임의 토지를 풀다 수도원에 기증했다는 내용이다.[2] 800년경, 현재의 성 지크스티 교회 부근에 작센족의 정착지가 있었으며, 이 마을은 후에 "오버도르프"라고 불렸다. 이 정착지의 원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시기에, 근처에는 통상로 보호에 기여해야 할 프랑크족 정착지가 있었다.[2]10세기에 이 마을은 노르트하임 백작의 영지가 되었다. 노르트하임 백작령의 첫 번째 백작인 지크프리트는 982년에 언급되었다. 리티가우 백작 지크프리트 폰 노르트하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982년 날짜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 오토 1세의 문서에 남아 있다.[2]
2. 2. 중세 시대 (11세기 ~ 16세기)
10세기경 노르트하임 주변 지역은 노르트하임 백작의 통치를 받는 노르트하임 백작령이 되었다. 노르트하임 백작 중 첫 번째인 지크프리트는 982년에 언급되었다.[2] 오토 2세 백작은 1061년부터 1070년까지 바이에른 공작령의 줄기 공작령을 제국 봉토로 소유했지만,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작센 음모에 연루되어 다시 잃었다.[2]1050년경 노르트하임 백작 오토는 에초 가문슈바벤 공작오토 2세의 딸이자 베를 백작 헤르만 3세의 미망인 리헨차와 결혼하여 영지를 크게 넓혔다. 그는 1061년 하인리히 3세의 미망인 아그네스로부터 바이에른 공작령을 받았다. 그러나 1069년 하인리히 4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불경죄 유죄 판결을 받고 영지와 바이에른 공작위를 잃었다. 1083년 사망했지만, 노르트하임에 수도원(장크트 브라지엔 수도원)을 설립할 계획이었고, 이 수도원의 보호 아래 현재 브라이텐 거리 부근에 시장을 중심으로 한 취락이 건설되어 노르트하임의 맹아가 되었다.
1110년 오토의 손녀 리헨차 폰 노르트하임은 로타르 폰 젝트링겐과 결혼했다. 로타르는 훗날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가 되었고, 리헨차는 황후가 되었다. 리헨차는 하인리히 사자공의 조모이다. 1147년 하인리히 폰 보이네부르크의 죽음으로 노르트하임 백작의 남계 가문은 단절되었다. 수도원을 포함한 노르트하임 백작의 영지는 빈첸부르크 백작 헤르만 2세에게 넘어갔으나, 5년 뒤 헤르만이 살해당하면서 수도원은 하인리히 사자공의 소유가 되었다.
성 블라시우스 수도원은 1100년경에 설립되었다.[2] 1002년 노르트하임 백작의 궁정이 소재한 도시로서 처음 기록되었다.[2] 노르트하임의 지크프리트 1세, 지크프리트 2세, 벤노 및 하인리히 폰 카틀렌부르크는 4월 30일 밤에서 5월 1일 사이 페르데 수도원에서 마이센 변경백 에케하르트 1세를 살해했다.

1204년 노르트하임은 처음으로 "civitas"(라틴어로 "도시")로 기록되었지만, 1252년 도시권이 부여되었다.[2] 이로 인해 현재 일부가 남아있는 시벽이 건설되었다. 1246년 노르트하임은 50 km 떨어진 도시 한뮌덴과 상호 방어 동맹을 맺었다. 1334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의 대리 관청이 시청사로 사용되었다(1832년 화재로 황폐해지기 전까지). 같은 시기 노르트하임은 화폐 주조권을 획득했다. 1384년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경제적으로 흥성했다.[2] 1477년 최초의 시립 학교가 설립되어 김나지움 코르피니아눔으로 현존한다. 1480년경 모든 수도원 시설이 개축되었고, 1485년 수도원의 고딕 양식 홀식 교회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이러한 건설 공사는 중단되었다. 1539년 3월 7일, 종교 개혁가 안톤 코르비누스는 최초의 교회법을 제정했고, 의회는 성 긱스티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1529년부터 몇 년 후 1562년까지 수도원은 시의 저당으로 잡혔다가 종교 시설로서 폐쇄되었다. 1554년 노르트하임은 한자 동맹에서 탈퇴했다.[2] 1568년과 1574년 루메 강에 처음으로 석교가 건설되었고, 최초의 약국이 세워졌다.

2. 3. 근세 시대 (16세기 ~ 19세기)
1532년에 프로테스탄트교가 도입되면서 모든 교회는 프로테스탄트교에 할당되었다. 이 도시는 하노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노르트하임의 역사의 전환점은 1529년에 수도원에 대한 저당권을 상실하면서 찾아왔다. 30년 전쟁은 노르트하임도 비켜가지 않았다. 1626년에는 황제군에 의해 세 차례나 포위되었다. 처음에는 4월 8일부터 17일까지 마르티니 대령이 이끄는 군대에, 다음은 8월 6일부터 10일까지 블랑카르트 대령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세 번째 포위전은 9월부터 퓌르스텐베르크 백작과 블랑카르트 대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 노르트하임은 항복하여 300명의 주둔군을 받아들이고 주당 300탈러의 식료비를 공급해야 했다. 가톨릭 군의 장군 틸리 백작은 노르트하임의 방어 시설 파괴를 명령했고, 방루 해체, 내호 매립은 1629년에 이루어졌다. 1641년은 노르트하임에게 암울한 해였다. 무장 해제된 이 도시는 피콜로미니 장군에게 습격당하여 가차없이 약탈당했고, 많은 노르트하임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이전의 경제적 번영은 늦어도 30년 전쟁으로 종언을 고했고, 이후 쇠퇴하고 빈곤해졌다.

1702년, 시의회의 주권은 해소되었고, 영방 군주의 지배하에 시 참사회 제도로 대체되었다. 전쟁으로 생긴 공터는 18세기 전반에 국가가 장려하는 건설 프로그램으로 사라졌다. 이 세기 후반에는 시장 요한 아하터키르헨의 지휘 아래 모범적인 행정 운영이 이루어졌다. 가르데퀴아라지아 거리의 아홉 곳에 드물게 남은 무덤 중 하나가 아하터키르헨의 묘이다. 1773년, 낡은 시문이 새롭고 넓은 문으로 개축되었다. 이는 새로운 헤르 거리 건설에 맞춰 필요했던 것이다. 1803년, 소위 게준트브룬넨(건강의 샘) 인근에서 유황천이 발견되었다. 베스트팔렌 왕국 시대(1807년 - 1813년), 노르트하임은 라이네 현 괴팅겐 관구에 속했다. 최초의 신문은 "노르트하이머 보헨블라트"로, 1831년부터 발행되었다.
1832년에 노르트하임의 일부가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시청과 40채 이상의 주택이 불탔다.[2] 1832년 시의 중심부에 막대한 화재가 발생하여 46채의 주택, 약국, 호화로운 시청사가 희생되었다. 시청사를 잃은 이 도시는 1842년에 엔텐마르크트 인근의 루마니아 귀족의 저택을 구입했고, 이 저택은 20세기 중반까지 시청사로 이용되었다. 1848년, 오래전에 중요성을 잃었던 시문이 마침내 철거되었다. 같은 해 시민군이 조직되었고,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체조 클럽이 설립되었다.
1854년에 하노버에서 괴팅겐까지의 철도가 개통된 후 노르트하임은 중요성을 얻었고 철도 분기점이 되었다. 남 하르츠 철도는 1868년에, 졸링 철도는 1878년에 개통되었다. 19세기 후반, 노르트하임 군의 설립으로 이 도시에 광역 행정 본부가 설치되었다.
이 무렵,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이 다시 증가했다. 1854년에 하노버에서 괴팅겐으로의 철도가 개통되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시벽이 열리고 신설된 군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어지는 쿠르첸 거리가 여기에 놓였다. 병원으로서의 기능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이 건물에 유지되었다. 1950년대에 비터 엔데에 새로운 건물이 건설되어 병원은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로 인해 비어 있는 옛 병원 건물은 시청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비터 거리 부근의 시벽이 철거되면서, 베르크 비터는 1867년에 주택지로 개발되었다. 1868년의 철도 남하르츠선 개통에 따라 역이 설치되었다. 1878년에 졸링 철도가 개통되어 노르트하임은 중요한 환승역이 되었다. 철도는 이후 이 도시의 발전에 기여했다. 1883년, 노르트하이머 베르크 산정상에 현재도 하이킹의 목적지로 인기가 있는 비터 타워가 건설되었다. 1890년에는 시립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892년부터 노르트하임의 산업화가, 특히 담배 산업과 제당업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대규모 정수 시설 루메뮐레가 건설되었다. 같은 1892년 노르트하임은 다시 화재를 겪어, 마르크트 광장의 동쪽 가옥과 브라이텐 거리 동부의 북쪽이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 마르크트 광장 인근에 역사주의 양식의 석조 건축물이 비교적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2. 4. 현대 시대 (20세기 이후)
1832년에 노르트하임 일부가 화재로 파괴되어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시청과 40채 이상의 주택이 불탔다.[2] 1892년에는 시장 광장의 여러 역사적인 건물을 파괴한 화재로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2]1854년에 하노버에서 괴팅겐까지의 철도가 개통된 후 노르트하임은 중요성을 얻었고 철도 분기점이 되었다. 남 하르츠 철도는 1868년에, 졸링 철도는 1878년에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트하임은 1944년 9월, 1945년 2월, 1945년 3월에 폭탄 공격을 받았다. 기차역, 5개의 공장, 18채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80채의 주택이 손상되었다.[2] 역사적인 중심지는 심각한 폭탄 피해를 입지 않았다.[2]

노르트하임은 필명 '탈부르크'로 윌리엄 셰리단 앨런의 저서 "권력 장악의 나치"의 주제이며, 이는 마을 수준에서 나치즘의 성공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이다.[3] 이 책은 나치가 도시의 모든 사회 집단을 장악하고 나치화했지만 나치 국가에 대한 긍정적인 열정을 불어넣는 데 실패했음을 설명한다.[3] 대신, 인구는 "원자화"되었고 집단적 불만을 표출할 수단이 박탈되었다.[3] 이 책은 자율성을 유지한 교회의 역할을 무시했다고 비판을 받았다.[3] 그러나 비평가들조차 이 책이 나치 독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학문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3]
1920년에 수도와 운하 정비가 시작되었다. 7년 후, 두 번째 노르트하임의 신문 "노르트하이머 노이에스텐 나하트리히텐"이 발간되었다. 현재 이 신문은 헤센/니더작센 알게마이네의 일부로 존속하고 있다. 1912년부터 노르트하임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노르트하임에 하사관 양성 학교가 설치되었다. 이 학교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운영되었다. 1920년부터 주택난이 심각해져 전입이 금지되었고, 공익 건설 협회가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군의 구역 실향민 수용소의 부지였던 임브스하우젠은 1974년에 도시에 편입되었다.[4] 1992년 11월 15일에는 급행 열차가 노르트하임 근처에서 탈선한 화물 열차의 잔해와 충돌하여 11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5]
노르트하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가 사회주의의 발흥기는 윌리엄 앨런의 작품 『Das haben wir nicht gewollt!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의 테마가 되었다. 다만, 노르트하임은 여기서는 독일의 평균적인 소도시의 예로서 "탈부르크"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NSDAP는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인 노르트하임에서 급속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1933년부터 시벽과 방루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1934년부터 1936년에 국가 노동 봉사단에 의해 니더작센 야외 무대가 조성되었으며, 현재도 북독일 최대의 야외 무대 중 하나이다. 1934년과 1939년에 이 도시는 NSKOV (국가 사회주의 전쟁 상이자 조직)의 집회가 개최되어 제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트하임은 격렬한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1944년 9월, 노르트하임 구시가지 주변에 대한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1945년 2월과 4월의 격렬한 공습으로, 웅장한 개찰구를 갖춘 노르트하임 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당시 노르트하임 역의 중요성은 괴팅겐 역이 큰 손해를 입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4월 9일에 미군의 전차대가 이 마을에 침공하여 노르트하임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도시와 역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노르트하임은 새롭게 설치된 니더작센 주의 일부가 되었다. 1952년에 시 창립 700주년 축제가 열렸고, 폴란드 (구 실롱스크 지방)의 프루드니크의 지원 도시가 되었다. 1958년에 대규모 학교 건설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 노르트하임은 병영 소재지였지만, 1961년부터 다시 독일 연방군 주둔지가 되었다. 이 주둔지는 1992년에 폐지되었다. 1967년에 프랑스의 도시 투르라빌과 자매 도시가 되었다. 1969년부터 구시가지의 현대화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수도원 건물의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시티 센터가 건설되었다. 니더작센 주 전체를 대상으로 한 행정 개혁에 의해, 주변의 15개 촌락이 노르트하임에 합병되어 현재의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노르트하임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어섰다. 노르트하임 군은 아인벡 군 및 간데르스하임 군 및 두더슈타트 군의 일부를 편입했다. 노르트하임 시는 새로운 노르트하임 군에서도 군청 소재 도시의 지위를 유지했다. 1976년부터 구시가지의 역사적 건물의 수복이 시작되었다. 이 해에는 시립 홀이 건설되었지만, 수년 후에 소실되었고, 1986년에 새로 재건되었다. 1986년부터 시내 중심부에, 거의 전 방향으로의 도로를 포함하는 보행자 전용 지구가 설치되었다. 그 전까지는 중심부는 자동차 통행이 가능했었다. 이듬해 1987년에 동쪽 우회도로, 서쪽 우회도로가 개통되었다. 2002년, 노르트하임은 "니더작센의 날"의 주최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김나지움 콜비니눔의 창립 525주년 축제가 개최되었다.
3. 지리
노르트하임은 북쪽으로 아인벡, 카를스펠트, 클라인젠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카트렌부르크-린다우, 남쪽으로는 네르텐-하르덴베르크, 서쪽으로는 모링겐과 접한다.
3. 1. 위치
노르트하임은 하르츠 산지 남서쪽 지맥의 가장 바깥쪽, 졸링에서 수 킬로미터 동쪽의 니더작센주 벨클란트의 남니더작센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는 대도시 괴팅겐 북쪽 20km에 위치해 있다. 이 시의 중심부를 동경 10도의 경선이 지나간다. 상점가 브라이테 거리에는 흰 포석으로 경선을 표시하고 있다.노르트하임을 루메 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에는 과거 노르트하이머 뮐레(수차)가 가동되었다[10]。랑겐홀텐젠 지구를 흐르는 듀네 강은 연방도 B241호선 교량 부근에서 루메 강과 합류한다[11][12]。시의 서쪽에서 멀지 않은 곳을 라이네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핵심 시가지의 북서쪽 4.5km 지점에서 루메 강과 서쪽에서 흘러온 몰레 강이 라이네 강에 합류한다.
노르트하임은 노르트하임 호수 지역과 접해 있다. 이 호수 지역은 2006년 8월 현재, 사력 채취로 형성된 총 면적 360ha의 12개 호수가 있다. 채취 완료까지 최소한 3개의 호수가 더 나타날 것이다. 가장 큰 단일 호수는 면적이 160ha를 넘는다. 이 호수는 해수욕장이나, 예를 들어 정기적인 요트 경주 등 수상 스포츠에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는 노르트하임 호수 축제가 개최된다. 호수 지역의 기타 부분은 노르트하임 호수 지역 수조류 보호 구역 등의 자연 보호 구역이 되고 있다.
3. 2. 자연 환경
노르트하임은 하르츠 산지 남서쪽 지맥의 가장 바깥쪽, 조링에서 동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니더작센주 벨클란트의 남니더작센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는 대도시 괴팅겐 북쪽 20km 지점에 있으며, 시 중심부를 동경 10도의 경선이 지난다. 상점가 브라이테 거리에는 흰 포석으로 경선을 표시하고 있다.노르트하임을 루메 강이 흐르고 있으며, 이 강에는 과거 노르트하이머 뮐레(수차)가 가동되었다[10]。랑겐홀텐젠 지구를 흐르는 듀네 강은 연방도 B241호선 교량 부근에서 루메 강과 합류한다[11][12]。시 서쪽에서 멀지 않은 곳을 라이네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핵심 시가지 북서쪽 4.5km 지점에서 루메 강과 서쪽에서 흘러온 몰레 강이 라이네 강에 합류한다.
노르트하임은 노르트하임 호수 지역과 접해 있다. 이 호수 지역은 2006년 8월 현재, 사력 채취로 형성된 총 면적 360ha의 12개 호수가 있다. 채취 완료까지 최소한 3개의 호수가 더 생길 것이다. 가장 큰 단일 호수는 면적이 160ha를 넘는다. 이 호수는 해수욕장이나, 정기적인 요트 경주 등 수상 스포츠에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는 노르트하임 호수 축제가 개최된다. 호수 지역의 기타 부분은 노르트하임 호수 지역 수조류 보호 구역 등의 자연 보호 구역이 되고 있다.
노르트하임 호수 지구는 쇄석 채취로 형성되었으며, 약 360ha의 면적에 현재 12개의 인공 호수가 있다. 앞으로 최소 3개가 더 늘어날 예정이다. 이곳에서는 산책로, 물놀이, 요트, 서핑, 잠수 및 낚시 등 여러 가지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동식물 보호 구역인 "노르트하임 호수 지구 조류 보호 구역"이 있다. 이 보호 구역은 처음에는 3개의 호수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 4개로 확장되었다. 호수 지구는 오늘날 이미 노르트하임의 문화 생활과 여가 생활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요트 및 레가타 국제 스포츠 대회와 호수 축제에는 먼 곳에서 온 수천 명의 손님들이 호수 또는 도시를 방문한다.
좁은 골목길에 가로막혀 있는 많은 소공원이 시벽의 북쪽 끝을 나타낸다. 그곳은 녹지로 둘러싸인 산책로가 되어 있다. 게다가 많은 연못(일부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과 큰 어린이 놀이터를 갖춘 미니 골프장도 근처에 있다.
가데퀴라지아 거리(Garde-Cürassier-Straße)를 따라 18세기부터 19세기에 사용되었던 오래된 시립 묘지가 있다. 이 구 묘지는 가장 잘 보존된 시벽 앞에 위치해 있다. 묘지는 1875년 10월 19일에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함멘 거리(Hämenstraße)의 암 하르츠토어 시립 묘지로 이전되었다. 구 묘지는 현재 공원이 되어 있으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묘석과 묘소가 옛 용도를 짐작하게 한다.
3. 3. 도시 구성
시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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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발츠하우젠 | |
뷰레 | |
덴카르스하우젠 | |
에데스하임 | |
함멘슈테트 | 귄트겐부르크 (2005년 현재 6명 거주) |
힐레르제 | |
헤켈하임 | |
호른슈테트 | |
홀렌슈테트 | 구트 비커스하우젠 |
잉프스하우젠 | |
라게르스하우젠 | |
랑엔홀텐젠 | 브룬슈타인 |
슈네딩하우젠 | |
슈테크하임 | 베체 |
즈토하임 |
4. 정치
노르트하임 시의회는 38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1월, 시의회는 34표의 찬성으로 당시 시장 퀠레의 해임을 결의했으며, 2013년 2월 4일 주민 투표로 해임이 확정되어 퀠레는 시장직을 상실했다.[13][14]
2017년 9월에는 후임 시장으로 선출된 한스-에리히 탄호이저에 대해서도 시의회가 선거 무효 절차를 개시했고, 탄호이저는 2017년 9월 11일 사임을 표명하고 퇴임했다.[15]
노르트하임은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6]
4. 1. 시의회
노르트하임 시의회는 38석으로 구성되어 있다.4. 2. 시장
예르크 도덴회프트(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