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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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스 스테이션은 1985년 10월부터 2004년 3월까지 TV 아사히에서 방송된 일본의 뉴스 프로그램이다. 구메 히로시를 메인 캐스터로 내세워, 기존 뉴스 프로그램과 차별화된 형식과 연출을 시도하며 젊은 세대의 뉴스 시청을 이끌었다. 1999년 소자시 다이옥신 오염 보도와 구메 히로시의 하차 소동 등 논란을 겪었으며, 2004년 종영 후에는 후속 프로그램인 보도 스테이션이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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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스테이션 - [TV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 |
---|---|
프로그램 정보 | |
프로그램 명칭 | 뉴스 스테이션 |
영어 명칭 | NEWS STATION |
장르 | 띠 프로그램 보도 프로그램 |
제작 방송국 | TV 아사히 |
기획 | 오피스 투 원 (기획·제작 협력) |
방송 | |
방송 기간 | 1985년 10월 7일 - 2004년 3월 26일 |
방송 횟수 | 총 4795회 |
음성 | 스테레오 방송 |
주요 출연진 | |
진행자 | 구메 히로시 고미야 에쓰코 와타나베 마리 고바야시 가즈요시 외 |
출연자 정보 | 출연자 참조 |
주제가 | |
주제곡 정보 | 여기 참조 |
오프닝 테마 | 해당 정보는 상동 |
엔딩 테마 | 해당 정보는 상동 |
관련 웹사이트 | |
외부 링크 | 공식 웹사이트 (아카이브) |
기타 정보 | |
금요일 방송 | 방송 시작부터 1988년 3월까지 '금요판'으로 23시대에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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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84년 여름부터 구메 히로시와 오피스 투 원 스태프들은 닛폰 TV의 'TV 스크램블' 기획 회의와 병행하여 뉴스 스테이션의 원형이 되는 기획을 구상했다.[6] 구메 히로시는 'TV 스크램블'을 통해 '중학생도 알 수 있는 뉴스'라는 콘셉트를 구체화했다.[6] 당시 보도 프로그램의 왕좌였던 NHK의 '뉴스 센터 9시'를 의식했지만, 정면 승부보다는 오후 11시부터 30분 시간대를 고려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평일 프라임 타임 시간대의 1시간 시간대라는 구상으로 확대되었고, 채산성 문제로 인해 1시간 15분으로 결정되었다.[7]
이후 덴츠의 참여와 덴츠의 지지로 오피스 투 원 스태프가 TBS를 포함한 재경 각 방송국에 기획서를 제출했다. TV 아사히는 당시 사장이었던 다시로 기쿠오의 판단과 롯폰기 재개발에 따른 아크 힐스로의 본사 이전 및 최첨단 방송 설비를 갖춘 방송 센터 신설에 맞춰 대형 기획을 모색하고 있었기에 참여를 결정했다.[8] 덴츠는 기획 개발 단계부터 특별 팀을 편성하여 시청자 동향 마케팅과 시청률 시뮬레이션을 실시했고, '뉴스 센터 9시'의 뉴스 항목을 1주일에 걸쳐 분석하는 등 기본 구상을 정리했다. TV 아사히 내에서는 "외부 제작 회사의 참여", "프라임 타임대에 시청률을 기대할 수 없는 대형 뉴스 프로그램 투입", "보도 현장을 전혀 모르는 타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 탤런트 캐스터 기용"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있었지만, 오다 히사에몬을 리더로 특별 팀을 편성했다. 제작진에는 사내 유능한 인재들이 모였지만, "적지"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8]
1985년 7월 29일, 프로그램 시작과 구메 히로시의 캐스터 기용이 공식 발표되었다.[9] 구메는 TV 아사히와 2년 계약을 맺었고, 계약금은 2억 엔 또는 4억 엔으로 보도되었지만, 구메의 희망으로 순수 출연료만 받았다. 8월에는 시뮬레이션을 실시했지만, 뉴스와 버라이어티가 뒤섞여 프로그램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이에 TV 아사히 제작국, 오피스 투 원, 보도국 스태프가 협력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형태가 되었다.[9]
전체 회의에서는 정장 차림의 보도 스태프와 반바지에 T셔츠 차림의 제작 스태프가 대립했다. 보도 측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정통 뉴스 프로그램" 방식을 고집했고, 오피스 투 원 측은 "뉴스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충돌은 프로그램 시작 후에도 이어졌고, 반성회는 새벽 2시까지 이어지며 격렬한 토론이 계속되었다.[10][11]
이러한 준비 기간을 거쳐 1985년 10월 7일에 방송을 시작하여, 2004년 3월 26일 마지막 회에서는 과거 19년간의 뉴스를 되돌아보는 내용과 함께 19년간의 역사에 막을 내렸다.
2. 1. 기획 및 시작 (1984년 ~ 1985년 10월)
1984년 여름부터 구메 히로시와 오피스 투 원 스태프들은 닛폰 TV의 'TV 스크램블' 기획 회의와 병행하여 뉴스 스테이션의 원형이 되는 기획을 구상했다.[6] 구메 히로시는 'TV 스크램블'을 통해 '중학생도 알 수 있는 뉴스'라는 콘셉트를 구체화했다.[6] 당시 보도 프로그램의 왕좌였던 NHK의 '뉴스 센터 9시'를 의식했지만, 정면 승부보다는 오후 11시부터 30분 시간대를 고려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평일 프라임 타임 시간대의 1시간 시간대라는 구상으로 확대되었고, 채산성 문제로 인해 1시간 15분으로 결정되었다.[7]이후 덴츠의 참여와 덴츠의 지지로 오피스 투 원 스태프가 TBS를 포함한 재경 각 방송국에 기획서를 제출했다. TV 아사히는 당시 사장이었던 다시로 기쿠오의 판단과 롯폰기 재개발에 따른 아크 힐스로의 본사 이전 및 최첨단 방송 설비를 갖춘 방송 센터 신설에 맞춰 대형 기획을 모색하고 있었기에 참여를 결정했다.[8] 덴츠는 기획 개발 단계부터 특별 팀을 편성하여 시청자 동향 마케팅과 시청률 시뮬레이션을 실시했고, '뉴스 센터 9시'의 뉴스 항목을 1주일에 걸쳐 분석하는 등 기본 구상을 정리했다. TV 아사히 내에서는 "외부 제작 회사의 참여", "프라임 타임대에 시청률을 기대할 수 없는 대형 뉴스 프로그램 투입", "보도 현장을 전혀 모르는 타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 탤런트 캐스터 기용"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있었지만, 오다 히사에몬을 리더로 특별 팀을 편성했다. 제작진에는 사내 유능한 인재들이 모였지만, "적지"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8]
1985년 7월 29일, 프로그램 시작과 구메 히로시의 캐스터 기용이 공식 발표되었다.[9] 구메는 TV 아사히와 2년 계약을 맺었고, 계약금은 2억 엔 또는 4억 엔으로 보도되었지만, 구메의 희망으로 순수 출연료만 받았다. 8월에는 시뮬레이션을 실시했지만, 뉴스와 버라이어티가 뒤섞여 프로그램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이에 TV 아사히 제작국, 오피스 투 원, 보도국 스태프가 협력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형태가 되었다.[9]
전체 회의에서는 정장 차림의 보도 스태프와 반바지에 T셔츠 차림의 제작 스태프가 대립했다. 보도 측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정통 뉴스 프로그램" 방식을 고집했고, 오피스 투 원 측은 "뉴스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충돌은 프로그램 시작 후에도 이어졌고, 반성회는 새벽 2시까지 이어지며 격렬한 토론이 계속되었다.[10][11]
이러한 준비 기간을 거쳐 1985년 10월 7일에 방송을 시작했다.
2. 2. 초기 (1985년 10월 ~ 1988년 4월)
"'''지금까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보도 프로그램을 목표로 한다'''"라는 컨셉 아래 1985년 10월 7일 민영 방송 최초로 평일 프라임 타임 시간대에 1시간을 초과하는 와이드 편성을 한 보도 프로그램으로 방송을 시작했다.[13] 메인 캐스터는 구메 히로시, 서브 캐스터는 고미야 에츠코(당시 TV 아사히 아나운서, 1991년부터 프리 아나운서), 코멘테이터는 고바야시 잇키(당시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였다.[14]초기에는 월요일부터 목요일은 22:00 - 23:17 ( "[스모 다이제스트]]" 방송 시에는 23:15까지), 금요일만 22시대는 《필살 시리즈》 등 당시 아사히 방송 (현재의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제작 시간대였기 때문에, 시작 당시에는 이 시간대에 대해 아사히 방송과의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아 1시간 늦은 "금요판"으로 23:00 - 다음날 0:00에 방송되었다( "[스모 다이제스트]" 방송 시에는 넷 스폰서 시간대의 23:45까지).
첫 방송에서는 이시카리 나베에 들어가는 연어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 하세가와 히로카즈(당시 홋카이도 TV 아나운서)의 자택, 큐슈 아사히 방송·가고시마 방송의 스튜디오, 니가타 TV21의 서비스 지역에 있는 니가타현무라카미시를 연결하여 생중계를 했다. 당초 "연어를 통해 환경 문제를 생각한다"는 취지였으나, 본방송 중 최신형 VTR 재생기가 고장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방송 초기에는 관객을 동원한 공개 방송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A 스튜디오에서는 일반 뉴스를 보도하지 않고 버라이어티 성격을 가미한 내용을 방송했다. 일반 뉴스는 보도국 인접 N 스튜디오에서 코미야와 츠보이 키쿠미가 전달하는 별도 코너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스의 21년 만의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 에두사 혁명 등 주요 뉴스가 발생하면서 전편을 N 스튜디오에서 임시 편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일반 공모로 선발된 캐스터들이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초기 시청률 부진까지 겹쳐 프로그램 내용과 캐스터 배치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결국 방송 시작 몇 회 만에 A 스튜디오에서의 관객 입장이 폐지되었다.
1986년 4월부터는 쿠메, 코미야, 고바야시 세 사람이 뉴스를 전달하는 보도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개편되었다.
1988년 4월, 아사히 방송이 금요일 22시대 편성을 철회하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 시간이 통일되었다.
2. 3. 중기 1 (구메-고미야 시대, 1988년 4월 ~ 1998년 3월)
1988년 4월 4일부터 새로운 체제로 개편되어 전 요일이 통일, 보도 중심의 구성이 강화되었지만, 금요일에는 금요판의 흔적이 남아 "금요 콘서트" 등의 다양한 기획을 마련했다.[15] 1990년대에는 테리 이토나 쇼후쿠테이 마츠노스케 등 금요일에만 출연하는 레귤러를 기용하는 등, 월요일부터 목요일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금요판을 계승하는 형태로 뮤지션이나 개그맨이 게스트로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990년, 구메 히로시는 제27회 갤럭시상 TV 부문 개인상을 수상했다.[15] 1993년에는 프로그램이 갤럭시상 30주년 기념상을 수상했다.[16]
1995년 4월부터 금요일에는 서브 캐스터 1명을 추가, 4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1998년 3월 27일, 고미야 에츠코가 슈퍼J 채널 메인 캐스터로 취임하기 위해 하차했다.[16]
2. 4. 중기 2 (구메-마리 시대, 1998년 4월 ~ 1999년 12월)
1998년 5월 11일, 개편 시기에서 약 1개월 늦게 새로워졌다. 구메 히로시에 더해, 새로운 서브 캐스터로 TBS 퇴사 직후의 와타나베 마리, TV 아사히 스포츠국 기자 시라키 기요카, 1997년 11월부터 출연하고 있는 해설자 스게누마 에이이치로의 4인 체제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금요일만 4인 체제였지만, 이 변화를 통해 모든 요일에 4인 체제가 되었다. 주제가가 고스페라즈의 곡으로 바뀌었고, 프로그램의 타이틀 로고도 새로워졌다. 오프닝 영상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뉴스 영상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다시로 마사시의 하차에 따라, 고미야가 금요일에도 『슈퍼J 채널』에 출연하기 위해 1998년 9월 25일을 기해 완전히 하차했다. 다음 주 10월 2일에는 마루카와도 하차했다. 그 다음 주 10월 5일부터, 마리와 시라키는 모든 요일에 출연하게 되었다. 1999년 2월부터 시라키는 수요일부터 금요일을 담당하고, 월요일과 화요일만 우에야마 지호가 담당했다.
1999년 8월, 세트를 새로 단장했다. 그러나 그 약 2개월 후인 10월 6일 방송을 기점으로, 계약 만료를 이유로 구메가 프로그램에서 일시 하차하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받아들여 다음 10월 7일 방송부터 약 3개월간, 연말까지 와타나베 요시쓰구가 대타를 맡았다.
2. 5. 후기 (2000년 1월 ~ 2003년 7월)
2000년 1월 4일, 구메 히로시가 3개월 만에 프로그램에 복귀하면서 프로그램이 개편되었다. 우에야마 치호가 모든 요일을 담당하게 되어, 구메 히로시, 와타나베 마리, 우에야마 치호와 코멘테이터 4인 체제가 되었다. 코멘테이터는 시미즈 켄우, 하기야 준, 모리나가 타쿠로, 후나비키 타케오 4명의 윤번제로 바뀌었다. 후나비키 타케오는 2000년 중간부터 2002년까지 출연했다. 주제곡은 후쿠오카 유타카가 작곡한 것으로 변경되었다. 스튜디오 세트와 타이틀 로고, 그래픽 디자인도 새로워졌다. 타이틀 로고가 가타카나 표기인 "뉴스 스테이션"에서 영문 표기인 "NEWS STATION"으로 변경되었다. 오프닝 영상도 그날 방송할 뉴스 내용을 알리는 스타일로 바뀌었다.[1]2000년 3월 27일, 방송 시작 시간이 6분 앞당겨져 21시 54분에 시작하는 플라잉 스타트가 되었다. 종료 시간도 23시 20분에서 23시 9분으로 11분 앞당겨졌다. 프로그램 구성도 약간 변경되었다. 같은 해 4월 14일, 금요일 여성 스포츠 캐스터가 변경되어, TV 아사히를 퇴사한 나가시마 미나를 대신하여 탤런트 겸 배우 마나카 히토미(현・아즈마 카즈코)가 기용되었다.[1]
같은 날부터 NHK가 이 프로그램에 대항하는 형태로 같은 시간대에 『NHK 뉴스 10』을 시작했다.[1]
2002년에는 한국과 일본 공동 개최 2002 FIFA 월드컵 관련 기획을 방송했다. 연초에는 구메 히로시가 일본의 대전 상대인 튀니지에서 생중계했다. 4월 1일부터 6월 28일까지는 오프닝에서 매일 FIFA 월드컵의 역사를 내보내는 특별 오프닝을 방송했다.(내레이션은 축구 전문 캐스터 카와히라 지에이, 주제곡은 Char가 담당).[1]
2002년 10월 개편으로 프로그램 시작부터 17년간 출연해 온 와타나베 요시쓰구가 『슈퍼 모닝』 메인 캐스터로 취임하기 위해 하차했다.[1]
2. 6. 프로그램 종영 (2003년 8월 ~ 2004년 3월)
2003년 8월 25일, 이듬해 봄을 기점으로 프로그램 방송 종료가 발표되었다. 구메 히로시는 프로그램 종료 이유로 "충분히 했다, 스태미나 부족", "2000년 복귀 후 3년이라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들었다.[17] 2003년 9월 29일, TV 아사히 본사 이전과 함께 방송 스튜디오가 아크 힐즈에서 롯폰기 힐즈로 옮겨졌다.2004년 3월 26일, 마지막 회에서는 과거 19년간의 뉴스를 되돌아보는 내용과 함께 19년간의 역사에 막을 내렸다.
3. 주요 코너
뉴스 플래시
: 방송 프로그램 후반부에 방송되었다. 처음에는 "'''뉴스 워치'''"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배경으로 코미야와 츠보이(타카시)가 교대로 읽었다. 이후 쿠메, 코미야, 코멘테이터의 3인 체제가 정착된 1990년대까지는 쿠메 단독, 혹은 쿠메와 서브 캐스터(코미야→마리) 2인이 16개 항목을 표시 가능한 전광판을 사용하면서 뉴스를 1개 항목당 20초 정도로 전달했다.[21] 1990년대 중반에는 보드를 갱신한 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보드에 비춰진 사진과 관련된 뉴스를 전달하고, 보드의 패널을 회전시켜 뉴스 항목을 표시하는 장면 전환 연출을 추가했다.
: 2000년부터 프로그램 종료까지는 초기처럼 스튜디오 연출을 사용하지 않고 영상만으로 구성, BGM이나 효과음도 더해졌다(읽기는 주로 마리가 담당). 이때, 쿠메가 전반부에서 "'''가능한 한 뉴스'''"[21]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
일기 예보
: 일기 예보 캐스터가 읽었다. 기상 예보사 자격을 가진 캐스터가 직접 해설하는 연출도 있었다. 1991년부터 웨더뉴스가 개발한 3DCG에 의한 연출을 실시했다. 중기에는 계절의 변화 등과 같은 시점에 유명한 산지나 명소에 가거나, 벚꽃 야간 중계나 폭포 중계, 단풍 중계와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특집
: 다양한 뉴스나 그 뉴스에 관련된 내용 등, 다종다양하게 다루었다. 이 외에도, 기획, 각 달의 행사나 최신 유행, 화제가 되는 것과 관련된 것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2000년대에는 궁금한 현대 사회 문제의 뉴스나 최근 뉴스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NEWS IN-DEPTH'''"라는 코너도 있었다. 또한, 1988년 5월 3일부터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가정한 드라마를 프로그램 내에서 방영했다(거리에 사이렌이 울리는 날).
스포츠
: 본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스포츠 뉴스에 힘을 쏟아 프로그램 후반부의 많은 시간을 스포츠 코너에 할애했다. 쿠메는 "스포츠는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다. (중략) 스포츠가 얼마나 우리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가. (중략) 텔레비전이 그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르가 스포츠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스포츠 담당 스태프와 "스포츠의 중요성을 시청자에게 전달하자, 이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자"라는 방침을 공유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기획과 전달 방식이 이루어졌다.
프로야구와 관련해서는 당일 경기 속보가 프로그램의 주력 콘텐츠로 계속 이어졌다. 2월의 "캠프 플래시", 3월의 "순위 예상", 10월의 "일본 시리즈 예상 & 해설"이 연례 행사였다. 일본 시리즈에 관해서는 해당 팀 이외의 감독, 선수가 해설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 '''프로야구 속보'''
:: 프로그램 초기, 프로야구가 있는 날은 "일본에서 가장 빠른 프로야구 속보"를 내세웠던 스포츠 TODAY에 대항하기 위해 22시 25분경부터 "프로야구 속보"로 방송했다. 경기 속보는 취재한 방송국이 편집・내레이션을 했으며, 각 리그의 순위표가 초대 세트의 일부에 포함되었다.
:: 경기 영상은 각 방송국에서 배포했으며(내레이션도 원칙적으로 각 방송국 아나운서가 담당했다. 지방 구장 원정의 경우, 계열국이 없는 지역에서는 테레아사 또는 인근 계열국 아나운서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영상이 끝나고, 도쿄 스튜디오에서 자세한 스코어 테이블을 전체 화면으로 표시하고, 선수・감독의 코멘트, 기록 등의 한입 메모를 내보내는 형식이었다.
::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프로야구에서 당연했던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만 집중하고 퍼시픽 리그는 외면한다는 식의 전달을 하지 않고, 센트럴・퍼시픽 양 리그를 구분하지 않고 전 구단을 평등하게 속보했다.[35]
:: 처음부터 독자적인 코너 징글을 채용했으며,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주제가 인트로를 가공한 것도 사용되었다.
:: 또한, 1992년 시즌부터 팀의 호칭을 보도 프로그램으로는 처음으로 애칭명("자이언츠", "라이온즈" 등)만 사용했다. 그 후 한때 "모회사명 + 애칭명"의 풀 네임이 된 시기도 있었지만, "거인" 또는 모회사명만 부르는 것은 프로그램 종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구단은 팬의 것이며, 스폰서 회사의 것이 아니다. 스포츠를 기업 주체로 상업화, 광고탑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의한 것이다. 페넌트레이스 우승팀 결정이 다가오면 금술이 세트에 매달리고, 우승이 결정되면 그것을 깨서 축하하는 장면도 있었다.
- '''닛칸 스포츠와의 중계'''
:: 목요일 방송에서 닛칸 스포츠의 노자키 야스히로 편집위원이 출연. 동사 도쿄 본사(쓰키지)와 중계 회선을 연결하여 프로야구 해설 및 다음날 닛칸 스포츠 지면 소개를 했다.
- '''프로야구 1분 승부'''
:: 뉴스 플래시 이후 방송된 명장면(진 플레이)을 중심으로, 그날의 프로야구를 1분으로 정리한 코너. 1999년 시즌까지 방송되었다. BGM은 마코토 브라더스의 "도카〜안", 다카하라 아네의 "천하무적의 일발녀" 등이었다.
- '''쿠도 짱, 나베 짱 캠프 프라이데이'''
:: 1987년 춘계 캠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재적했던 쿠도 키미야스와 와타나베 히사노부에 의한 캠프지 리포트 코너.
- '''자이언츠 에이드'''
:: 히로시마 팬인 쿠메 히로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인 유명인(이토이 시게사토, 구로테츠 히로시, 가와사키 토오루)를 초청하여 자이언츠가 우승하기 위한 책략 등을 주장하게 했다.
- '''요시츠구와 드래곤즈'''
:: 프로야구 캠프 취재에서는, 열렬한 주니치 팬인 와타나베 요시츠구가 매년 주니치의 기타야 캠프를 취재하여 감독 등에게 인터뷰하고 마지막으로 "모에요 드래곤즈!"를 열창하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
- '''쿠메 씨, 시구식이네요!'''
:: 2000년, 쿠메 히로시가 후쿠오카 돔에서 열리는 후쿠오카 다이에 대 지바 롯데의 개막전 시구식을 맡게 되어, 시구식용 연습 모습이나 캐치볼, 본방에 이르는 모습이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쿠메는 팬인 다이에의 유니폼으로 등장했고, 등번호는 이 해, 당 프로그램이 플라잉 스타트(9시 54분)를 시작한 것에 맞춰 "'9:54'"였다.
가와히라 지에이가 전속 캐스터로서, J리그 개막부터 프로그램 종료까지 출연했다. J리그도 경기가 있는 날은 모든 경기의 결과를 방송, 특집 시간을 J리그 정보에 할애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98년 축구 월드컵에서는 가와히라가 프랑스에서 연일 방송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TV 아사히가 담당한 일본 대 튀니지전의 방송을 구메와 가와히라가 공동 진행했다.
방송일에 J리그 경기가 있는 경우, 다른 스포츠 뉴스에서는 경기 영상이 끝나는 부분에서 그 경기의 스코어 결과를 자막으로 내보냈지만, 이 프로그램은 프로 야구와 같은 방식으로, 경기 영상을 처음에 보여준 후, 영상이 끝나고 나서 다른 컷으로 자세한 스코어 테이블을 전체 화면으로 표시하고, 거기에 가와히라가 선수·감독의 담화나 기록 등의 한입 메모를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일부 날짜, 1~2경기 정도밖에 열리지 않은 경우는 제외).
- '''먼데이 J/MJ'''
:: 수요일의 상시 개최가 없어지면 월요일에 명장면을 방송하는 "MJ(Monday J League)"를 방송. 일본인 선수의 해외 진출과 2002년 월드컵 인기도 있어, 해외 리그의 화제도 전했다. 특히 1999년J2리그 발족 이후부터는, 주말에 열린 J2의 경기를 다른 스포츠 뉴스보다 자세하게 전했다 (J1은 주목할 만한 카드 몇 경기를 발췌하여 방송). 이것에는 가와히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 '''가와히라 지에이의 J2 탐방'''
:::: 이 "먼데이 J"와의 연동으로, 1999년 J2 발족 당시, "J2의 오리지널 10"이라고 불리는 팀을 가와히라가 방문하여, 그 팀의 J리그에서의 노력과 경기 관전 리포트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 '''츠나미 씨와 함께'''
:: 당시 축구 해설자였던 츠나미 사토시가 등장하여, 가와히라와 함께, 축구에 대한 미니 지식 등을 해설한 코너.
- '''레인보우'''
:: Over The Rainbow의 일렉 기타 연주와 함께, 골 장면의 영상을 되돌아보고, 볼의 궤도를 무지개에 비유하여 연출한다. 일본 대표팀 경기의 일본 대표 선수 골 장면 등에 사용.
- '''"다음은 언제?"'''
:: 가와히라에게는 익숙한 문구가 많이 존재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나 심취했을 때의 "크으으으!" 등. 하이텐션이 너무 심해서, 구메로부터 "다음은 언제 오는 거야?"라고 농담 반으로 질문을 받고, 미정이라고 하면 "(불러주면) 언제든지!!"라고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 '''특집'''
:: 스포츠 특집은 야구, 축구 외의 폭넓은 종목으로 확대되었다. 마이너 스포츠의 취재 수에서는 다른 스포츠 뉴스 프로그램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매년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다카르 랠리, 아메리카스컵 등). 스포츠 특집에는 미야지마 야스코가 디렉터로 취재했다.
- '''스포츠 중계 고지'''
:: TV 아사히에서 방송되는 스포츠 중계의 고지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르망 24시나 브리티시 오픈 골프, US 오픈 골프 (남녀·시니어)가 열리는 시기에는 개최지에서 해설진이 최신 상황을 전달하는 등 고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브리티시 오픈 때의 쿠메와 아오키 이사오의 대화도 명물이었다.
- '''네이밍'''
:: 이런저런 말장난이나 재치 있는 문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J리그 순위 게시판 "회전군" "카메스케"나, 2002년 FIFA 월드컵 카운트다운의 "아토 한일군" 등.
- '''카쿠자와 포지션 (각포지)'''
:: 2000년 1월 4일 쿠메 복귀에 맞춰 스튜디오 리뉴얼에 따라, 부메랑 테이블 앞에 당시 스포츠 담당이었던 카쿠자와 테루하루의 전용석이 마련되었고, 이후 카쿠자와 담당 요일에는 그 전용석에 카쿠자와가 앉아 스포츠 코너를 진행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카쿠자와는 쿠메, 마리, 우에야마 3명을 등지고 진행하는 형태가 되어, 각 출연자의 표정도 함께 엿볼 수 있게 되었다.[21] 기본적으로는 코너 전체를 통해 전용석에서 진행했지만, 처음에는 전용석에서 진행하다가 도중에 부메랑 테이블로 이동하여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 전용석과 부메랑 테이블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 전용석은 통칭 "카쿠자와 포지션"이라고 불렸다.
:: 또한, 카쿠자와 이외의 여성 스포츠 캐스터는 종래대로 부메랑 테이블에서 진행했지만, 카쿠자와 부재 시 대행 담당자들이 "각포지"를 사용하면 카비라바나 우에야마 지방과 같은 명칭이 붙었다.
4. 특징 및 연출
1988년 4월 4일, 새로운 체제로 개편되면서 모든 요일이 통일되어 보도 중심의 구성이 강화되었지만, 금요일은 '금요판'의 흔적이 남아 '금요 콘서트' 등의 기획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는 테리 이토나 쇼후쿠테이 마츠노스케 등 금요일에만 출연하는 고정 출연자를 기용하는 등, 월요일부터 목요일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는 현재의 보도 스테이션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금요판의 연장선으로 뮤지션이나 개그맨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1990년에는 쿠메 히로시가 제27회 갤럭시상 TV 부문 개인상을 수상했고[15], 1993년에는 프로그램으로서 갤럭시상 30주년 기념상을 받았다.[16]
1993년 7월 1일, 쿠메 히로시는 그해 하반기를 맞이하여 안경정확히는 노안경이다 (당시 쿠메는 48세).영어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안경은 보도 캐스터다운 심플한 테가 없는 렌즈뿐인 것이었고, 1999년 10월 일시 하차할 때까지 바꾸지 않고 계속 착용했다.
1995년 4월부터 금요일에만 서브 캐스터를 1명 추가하여 2명의 교대제를 시행했다. 금요일에는 쿠메, 코미야 에츠코, 코멘테이터를 포함한 4인 체제가 되었다. 1997년 4월부터는 금요일에만 여성 스포츠 캐스터를 배치했는데, 초대 캐스터는 TV 아사히 스포츠국 기자 나가시마 미나가 맡았다.
1998년 3월 27일, 코미야 에츠코가 이시다 준이치의 후임으로 슈퍼J 채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메인 캐스터로 취임하면서 하차했다.코미야는 하차 후에도 이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국정 선거 개표 특별 프로그램 선거 스테이션에서 2003년 11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까지 쿠메와 함께 제1부 메인 캐스터를 맡았다.영어 다만, 슈퍼J 채널 금요일은 개편되지 않고 코미야는 금요일에만 이 프로그램에 남았기 때문에, 금요일은 출연자 교체가 없었다. 코미야가 하차한 월요일부터 목요일은 2대 서브 캐스터 취임까지 5주 동안 3명의 대리 캐스터가 이어갔다. 호리코시 무츠코만 1998년 4월 3일 금요판에도 출연.영어
1998년 5월 11일, 개편 시기에서 약 1개월 늦게 개편되었다. 쿠메 히로시와 함께 후임 서브 캐스터로 TBS 퇴사 직후의 와타나베 마리, TV 아사히 스포츠국 기자 시라키 기요카, 1997년 11월부터 출연하고 있는 코멘테이터 스게누마 에이이치로의 4인 체제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금요일만 4인 체제였지만, 이 개편으로 모든 요일이 4인 체제가 되었다. 주제가가 고스페라즈의 곡으로 바뀌었고, 프로그램의 타이틀 로고도 변경되었다. 오프닝 영상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뉴스 영상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뉴스 영상이 아닌 경우(개편 첫날에는 구메, 마리, 시라키가 스튜디오로 향하는 모습의 영상을 내보냈다.또한, 리뉴얼 첫날의 프리 프로그램 비트 다케시의 TV tackle 본편 종료 직후에 방송된 크로스 프로그램에서도 마리가 TV 아사히 국내 복도를 걷는 영상을 내보냈다.영어)나 주제가의 편곡 변경 등 예외적인 날도 있었다.
다시로 마사시의 하차로 인해 코미야가 금요일에도 슈퍼J 채널에 출연하게 되면서 1998년 9월 25일에 완전히 하차했다. 다음 주인 10월 2일에는 마루카와도 하차했다. 그 다음 주인 10월 5일부터 마리와 시라키는 모든 요일에 출연하게 되었다. 1999년 2월부터 시라키는 수요일부터 금요일을 담당하고, 월요일과 화요일만 우에야마 치호가 담당했다.
1999년 8월, 세트를 개편했다. 그러나 약 2개월 후인 10월 6일 방송을 기점으로, 계약 만료를 이유로 쿠메 히로시가 프로그램에서 일시 하차하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받아들여 다음 10월 7일 방송부터 약 3개월간, 연말까지 와타나베 요시츠구가 대역을 맡았다.
; 메인 캐스터・서브 캐스터・코멘테이터
기간 | 메인 캐스터 | 서브 캐스터 | 코멘테이터 | ||
---|---|---|---|---|---|
월요일 - 목요일 | 금요일 | ||||
1985.10.7 | 1991.2.22 | 쿠메 히로시[21] | 코미야 에츠코 | 코바야시 잇키 | |
1991.2.25 | 1991.5.17 | (부재) | |||
1991.5.20 | 1992.10.9 | 타도코로 타케히코 | |||
1992.10.12 | 1996.3.29 | 와다 슌 | |||
1996.4.1 | 1997.10.31 | 타카나리 토오루 | |||
1997.11.3 | 1998.3.27 | 스게누마 에이이치로 | |||
1998.3.30 | 1998.4.3 | 호리코시 무츠코1 | |||
1998.4.6 | 1998.4.17 | 호리코시 무츠코1 | 코미야 에츠코 | ||
1998.4.20 | 1998.5.1 | 와타나베 미나미1 | |||
1998.5.4 | 1998.5.8 | 와타나베 요시츠구1 | |||
1998.5.11 | 1998.9.25 | 와타나베 마리 | |||
1998.9.28 | 1998.10.2 | (부재) | |||
1998.10.5 | 1999.4.20 | 와타나베 마리 | |||
1999.4.23 | 1999.10.6 | 쿠비키다 타카시2 | |||
1999.10.7 | 1999.12.23 | 와타나베 요시츠구3 | |||
2000.1.4 | 2002.3.29 | 쿠메 히로시 | 시미즈 타케우4 하기야 준4 모리나가 타쿠로4 후나비키 타케오4 | ||
2002.4.1 | 2004.3.26 | 시미즈 타케우4 하기야 준4 모리나가 타쿠로4 | |||
colspan=13 style="text-align:left"| |
- 코바야시를 포함한 뉴스 해설자로서의 코멘테이터는 후나비키·모리나가를 제외하고 역대, 아사히 신문 기자 또는 그 경험자였다. 시작에 앞서 인선은 아사히 신문사에 의뢰했고, 코바야시가 선발되었다. 코멘테이터뿐만 아니라 밖에서의 중계 리포트 등도 담당하며, 1999년에 방송된 "뉴스 스테이션 이야기"에서는 "캐스터"로 소개되었다.
- 초대 코멘테이터인 코바야시는, 쿠메, 코미야와 명 트리오로 친숙했지만, 1991년 2월 19일에 사망했다. 코바야시는 쿠메 부재 시에 한 번만 메인 대역을 시도한 적이 있다.
- 1990년대까지 금요일에는 주로 게스트 코멘테이터가 출연하는 경우가 있었다.
- 와타나베 마리는 쿠메와 같은 TBS 출신이며, 이 프로그램과 그 경쟁 프로그램 "츠쿠시 테츠야 NEWS23" 양쪽에서 캐스터를 맡은 유일한 인물이다.
; 게스트 코멘테이터
- 쿠로야나기 테츠코 - 본인의 유니세프 친선 대사 활동 보고 및 "유니세프 카드" 등의 고지를 위해 자주 게스트 출연했고, 더 베스트 텐에서의 콤비네이션도 보였다. 주로 금요일 출연이 많았다.
- 후쿠오카 마사유키 - 국정 선거 시에 출연하여, 선거 예상를 모두 맞춰 유명해졌다.
- 아오키 이사오 - 특히 전미·전영 오픈 골프 대회 (그가 해설자로 출연)의 PR과 현지 중계 리포트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 쇼후쿠테이 마츠노스케 - 금요일에 코멘테이터로 출연했다 (1996년).
- 테리 이토 - 금요일에 코멘테이터로 출연했다 (1997년 - 1998년경).
- 이토이 시게사토 - 주로 초기의 금요일판에 출연.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라는 점도 있어, "자이언츠 에이드"에도 출연했다.
- 쿠로테츠 히로시 - 자이언츠 팬 대표로 "자이언츠 에이드" 등에 출연. 어떤 상황에서도 자이언츠가 우승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안심 이론"을 전개했다.
- 쿠리야마 히데키 - 본인에 의한 취재 리포트가 중심, 후속 프로그램 "보도 스테이션"도 계속 출연.
- 오하시 쿄센 - 본인 왈 "'''출연해주지'''". 그러나, 쿠메 본인은 그를 욕설하기도 했다.
: 등
; 서브 캐스터・스포츠 캐스터・날씨 캐스터
기간 | 서브 캐스터 | 스포츠 캐스터 | 날씨 캐스터 | ||||||
---|---|---|---|---|---|---|---|---|---|
월요일・화요일 | 수요일・목요일 | 금요일 | 월요일 - 수요일 | 목요일 | 금요일 | 월요일 - 목요일 | 금요일 | ||
1985.10.7 | 1986.3.31 | 하시야 노리코1 츠보이 키쿠미1 | 아사오카 사토시 스기모토 노리코 | 마츠모토 히로코 하시야 노리코 | |||||
1986.4.1 | 1987.9.18 | 없음 | 아사오카 사토시 | 마츠모토 히로코 | |||||
1987.9.21 | 1988.3.25 | 마츠이 야스마2 | |||||||
1988.3.28 | 1988.9.30 | 마츠이 야스마3 | 아사오카 사토시3・4 | 오오타니 치아키 | |||||
1988.10.3 | 1990.3.30 | 카츠 케이코 | |||||||
1990.4.2 | 1991.3.22 | 마츠이 야스마 | |||||||
1991.3.25 | 1991.3.29 | 마츠이 야스마 | 마츠이 야스마 이이무라 신이치 | ||||||
1991.4.1 | 1993.9.24 | 이이무라 신이치 | |||||||
1993.9.27 | 1993.10.1 | 카츠 케이코 | 츠보이 나오키 | ||||||
1993.10.4 | 1994.3.25 | 츠보이 나오키 | 카츠 케이코 츠보이 나오키 | ||||||
1994.3.28 | 1994.4.1 | 카츠 케이코 츠보이 나오키 | 카츠 케이코 오오이시 메구미 | ||||||
1994.4.4 | 1995.3.31 | 오오이시 메구미 | |||||||
1995.4.3 | 1996.3.29 | 없음 | 오카다 요코5 | 오오이시 메구미 나이토 사토코 | |||||
1996.4.1 | 1996.10.2 | 오카다 요코5 코타니 마오코 | 이누이 키미코 카와이 카오루 | ||||||
1996.10.3 | 1997.3.28 | 카도자와 테루하루 | |||||||
1997.3.31 | 1998.3.27 | 코타니 마오코 마루카와 타마요 | 카도자와 테루하루 | 나가시마 미나 | |||||
1998.3.30 | 1998.5.8 | 마루카와 타마요 | |||||||
1998.5.11 | 1998.10.2 | 시라키 키요카 | |||||||
1998.10.5 | 1999.1.29 | 시라키 키요카 | |||||||
1999.2.1 | 1999.12.23 | 우에야마 치호 | 시라키 키요카 | ||||||
2000.1.4 | 2000.3.31 | 우에야마 치호 | 마스다 마사아키 | 사이토 요시오 미야베 지로 이이지마 에이이치6 | |||||
2000.4.3 | 2000.4.7 | 나가시마 미나 마나카 히토미 | |||||||
2000.4.10 | 2000.12.28 | 마나카 히토미 | |||||||
2001.1.4 | 2002.6.28 | 우에야마 치호 | |||||||
2002.7.1 | 2002.9.27 | 카도자와 테루하루7 | 코노 아키코 | ||||||
2002.9.30 | 2004.3.26 | 코노 아키코7 | |||||||
colspan=13 style="text-align:left"| |
; 스포츠 캐스터 (메인 외)
; 서브 캐스터 (부정기 출연, 대역 시)
- 야마모토 아케미
- 다카하시 마키코
- 하기노 시호코
- 요시모토 준코
- 가와키타 모모코
- 히라이시 나오유키 (2002년 1월 - 2004년 3월)
뉴스 프로그램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도입하여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정치 뉴스를 전달할 때는 정치인 인형이나 나무 블록을 활용하여 복잡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쉽게 풀어냈다.
또한, 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야외 중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한 야경을,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의 모습을,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중계하여 시청자들에게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했다. 특히 벚꽃 야간 중계는 1986년 3월 31일부터 2004년 3월 26일(프로그램 마지막 회)까지 매년 봄에 진행된 대규모 중계로, 난카이 방송과 시코쿠 방송 등 다른 계열사도 중계에 협력했다.[36] 첫 회와 마지막 회 모두 가고시마시의 센간엔(이소야마)이 중계 장소가 되었다. 쿠메 히로시는 "일본의 미"를 연출하기 위해 임시 가설 구조물을 조립하여 500W와 1W의 파 라이트를 10~20개 정도 설치했다고 밝혔다.[37]
4. 1. 스튜디오 세트
기존 뉴스 프로그램과 달리, 도심의 고급 맨션의 한 방과 같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오피스 공간을 콘셉트로 한 스튜디오 세트를 사용했다. '구메 히로시의 방'이라는 콘셉트로, 방송 종료까지 5번 개축되었다.[40] 특징적인 '부메랑 테이블'[48]은 출연자 간의 원활한 소통과 시청자와의 양방향 소통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었다.스튜디오 세트는 tv아사히 아크 방송 센터 지하 3층에 있던 A 스튜디오 (tv아사히 본사 이전 후에는 롯폰기 힐즈 신 본사 4층에 있는 제4 스튜디오)에 상시 설치된 상태였다. 2층(말기의 세트에서는 3층)까지 만들어졌으며, 게스트를 초대하는 방과 가구까지 갖춰지는 등 대규모로 매우 공들여 만들어졌다.
; 초대: 1985년 10월 7일 - 1990년 10월
- 드라마 담당 미술 디자이너가 담당했다. 미국 ABC의 아침 보도·정보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의 스튜디오 세트에서 채용되었던 리빙 스타일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42]
- 세트는 흰색을 기조로 하고, 갈색·나무결 무늬의 집기류가 악센트를 더했다. 배경의 호리존트 막에는, 아크 힐즈에서 보이는 도쿄도 도심부의 고층 빌딩 군을 재현한 미니어처를 배치했다. 빌딩 상부의 항공장애등 점멸까지 재현되었으며, 도쿄 지방에 비가 오는 날에는 창밖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창문에도 빗물이 흘러내리는 등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 2대: 1990년 10월 - 1995년 11월
; 3대: 1995년 11월 - 1999년 8월
; 4대: 1999년 8월 - 1999년 12월 23일
- 3대의 "버블 시대의 화려함과 호화로움 다음으로 오는 것"이라는 테마와 사용 재료가 목재라는 부분을 남긴 채 소규모 세트가 만들어졌다. 3대의 2층에 있다는 설정의 "서재"가 테마였다.[46]
; 5대: 2000년 1월 4일 - 2003년 9월 26일
- 벽돌이 악센트가 된 세트였다.
; 6대: 2003년 9월 29일 - 2004년 3월 26일
- tv아사히의 사옥 이전으로, 사용하고 있던 스튜디오는 아크 방송 센터 A 스튜디오에서, 롯폰기 힐즈 신 본사의 제4 스튜디오로 변경되었다.
- "도쿄 만에 떠 있는 700ton급 화물선의 선저를 이미지했다"는 3층 구조로, 40ton이나 되는 철을 사용했다.[47]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캐스터석에 특징적인 「'''부메랑 테이블'''」이 사용되었으며,[48] 이 프로그램의 명물이었다.
부메랑 테이블에 대해서는, 「만곡된 쪽이 출연자끼리 이야기하기 쉽다」,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청자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을 파악하여, 다시 뉴스를 전달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4. 2. 음악
오프닝 테마곡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85년 10월 7일 ~ 1987년 9월 25일: "ANN 뉴스의 테마" (마츠오카 나오야)
- 1987년 9월 28일 ~ 1989년 1월 27일: 곡명 없음 (마에다 노리오)
- 1989년 1월 30일 ~ 1993년 4월 16일: "Good Evening" (혼다 토시유키)
- 1993년 4월 19일 ~ 1996년 10월 4일: "Harmony" (혼다 토시유키)
- 1996년 10월 7일 ~ 1998년 5월 8일: "36도선" (ASKA)
- 1998년 5월 11일 ~ 1999년 12월 23일: "신발은 신은 채" (고스페라즈)
- 2000년 1월 4일 ~ 2002년 3월 29일: "NS2000 (NEW STREAM 2000)" (후쿠오카 유타카)
- 2002년 4월 1일 ~ 2002년 6월 28일: "A FAIR WIND" (Char)
- 2002년 7월 1일 ~ 2003년 9월 26일: "사라반드" (사라 브라이트만)
- 2003년 9월 29일 ~ 2004년 3월 26일: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약속의 땅)" (U2)
이 외에도 일기 예보의 BGM, 스포츠 코너의 테마, 뉴스 플래시, 엔딩 등 다양한 코너에서 여러 음악이 사용되어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4. 3. 기타 연출
뉴스 프로그램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도입하여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정치 뉴스를 전달할 때는 정치인 인형이나 나무 블록을 활용하여 복잡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쉽게 풀어냈다. 이는 딱딱한 뉴스 보도의 틀을 벗어나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 참신한 시도였다.또한, 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야외 중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한 야경을,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의 모습을,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중계하여 시청자들에게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했다. 특히 벚꽃 야간 중계는 1986년 3월 31일부터 2004년 3월 26일(프로그램 마지막 회)까지 매년 봄에 진행된 대규모 중계로, 난카이 방송과 시코쿠 방송 등 다른 계열사도 중계에 협력했다.[36] 첫 회와 마지막 회 모두 가고시마시의 센간엔(이소야마)이 중계 장소가 되었다. 구메 히로시는 "일본의 미"를 연출하기 위해 임시 가설 구조물을 조립하여 500와트와 1와트의 파 라이트를 10~20개 정도 설치했다고 밝혔다.[37] 이러한 야외 중계는 단순한 뉴스 전달을 넘어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5. 평가 및 영향
어려운 용어나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설하여 정치나 경제에 흥미가 없었던 젊은 세대가 뉴스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 이후 뉴스 프로그램에서 보도 경험이 없는 탤런트 등이 캐스터나 해설자로 기용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텔레비전에서 '전문가'의 코멘트가 사용될 기회가 증가했으나, 안이한 인선, 졸속 내용이라는 비판도 있었다.[51]
기존 보도 프로그램에 없었던 오락 프로그램적 요소를 도입한 것은 '보도 버라이어티'로 평가되어 보도 프로그램의 와이드쇼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매년 8월 중순 2주 동안은 아사히 방송 제작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열투 고시엔』 방송을 위해 특례 편성이 이루어졌다. 연도별 편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평일 편성 | 비고 |
---|---|---|
1989년까지 | 22:00 - 22:30 | 1982년 제1회 열투 고시엔만 21시 시작, 1983년부터 22시 시작 |
1986년, 1987년 | 22:30 - 23:47 (금요일 23:30 - 다음날 0:30) | 30분 지연 |
1988년, 1989년 | 22:30 - 23:30 | 1시간 단축 |
1990년 - 1999년 | 대회 전반부: 22:00 - 23:17 (또는 23:20), 대회 후반부: 22:00 - 23:00 | 8월 15일 전후로 편성 변경 |
2000년 이후 | 21:54 - 23:09 (또는 23:10) | 전 일정 동일 시간대 |
스모 개최 기간 중에는 『스모 다이제스트』 방송으로 인해 'N스테'가 3분 단축되었으나, 1995년 4월 개편으로 해소되었다. 2000년 4월 플라잉 스타트 시작 이후에는 네오 버라이어티・금요 나이트 드라마 후에 『다이제스트』를 방송했다. 『다이제스트』는 2003년 9월 롯폰기 힐즈 신사옥 이전 직전에 종료되었다. 1988년 3월까지 금요판은 23:45까지 45분 단축 방송했다.
6. 1. 도코로자와 다이옥신 문제 (1999년)
所沢ダイオキシン問題일본어는 1999년 2월 1일, 뉴스 스테이션이 "오염지의 고뇌, 농작물은 안전한가?"라는 특집에서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의 시금치를 중심으로 한 채소에서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한 사건이다. 이 보도는 민간 환경 측정 컨설팅 회사인 주식회사 환경종합연구소가 1998년에 측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소자시의 시금치에서 1그램당 3.8피코그램의 다이옥신 농도가 검출되었다고 보도했다.[38]이 보도로 인해, 식품슈퍼 등 소매업체들이 소자산 채소가 다이옥신에 오염되었다고 인식하여, 소자·이루마군산을 비롯하여 사이타마현산 농작물 전반에서 판매 중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농작물 출하는 계속되었지만, 청과 시장에서 사이타마현산 농작물의 도매 가격이 절반 이하로 폭락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사이타마현은 2월 5일 사실 확인을 실시했고, 2월 18일 보도의 최고치는 센차였다고 발표했다. 센차는 건조되어 있어 자체 무게가 가벼워 신선 채소와 같은 양의 다이옥신이 외견상 많이 계산되므로, 음용으로는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또한, 시금치도 1그램당 최고 0.75피코그램이었음이 밝혀졌다.
JA 소자(현: JA 이루마노)와 지역 농가는 TV 아사히에 항의했고, 농가 측은 풍평 피해를 입었다며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6월 16일, TV 아사히가 농가 측에 사과하고 화해금 1000만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화해가 성립되었다.[38]
이 사건으로 인해, 나카가와 쇼이치농수산상 및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소자산 채소를 시식하고 안전 선언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는 "다이옥신류 대책 특별 조치법"·"순환형 사회 형성 추진 기본법"이 시행되어, 폐기물 및 소각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6. 2. 구메 히로시 하차 소동 (1999년)
1999년 9월 28일, 구메 히로시는 방송 중 갑작스럽게 다음 달 6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출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TV 아사히와의 계약 갱신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52] 1999년 10월 6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약 3개월간 프로그램을 하차했다.[52] 이 기간 동안 와타나베 요시쓰구와 와타나베 마리가 진행을 맡았다. 이후 TV 아사히 측의 설득으로 3개월간의 휴양과 1년마다의 계약 갱신 조건으로 복귀했다.7. 방송국
방송 대상 지역 | 방송국명 | 계열 | 방송 시작·비고 |
---|---|---|---|
관동 광역권 | TV 아사히(ANB→EX) | TV 아사히 계열 | 제작국, 2003년 9월까지는 ANB |
홋카이도 | 홋카이도 TV 방송(HTB)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아오모리현 | 아오모리 아사히 방송(ABA) | 1991년 10월 1일 개국[51] | |
이와테현 | 이와테 아사히 TV(IAT) | 1996년 10월 개국부터 | |
미야기현 | 히가시니혼 방송(KHB)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아키타현 | 아키타 아사히 방송(AAB) | 1992년 10월 개국부터 | |
야마가타현 | 야마가타 TV(YTS) | 1993년 4월 1일부터 ANN에 재가맹, ANN 풀 네트워크 방송국이 됨 | |
후쿠시마현 | 후쿠시마 방송(KFB)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니가타현 | 니가타 TV21(NT21) | ||
나가노현 | 나가노 아사히 방송(abn) | 1991년 4월 1일 개국부터 | |
시즈오카현 | 시즈오카 아사히 TV(SATV) | 프로그램 시작부터 (1993년 9월까지는 시즈오카 현민 방송(시즈오카 켄민 텔레비전・SKT)) | |
이시카와현 | 호쿠리쿠 아사히 방송(HAB) | 1991년 10월 개국부터 | |
주쿄 광역권 | 나고야 텔레비전(NBN)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긴키 광역권 | 아사히 방송(ABC) | 프로그램 시작부터 (현: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 |
히로시마현 | 히로시마 홈 텔레비전(HOME)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야마구치현 | 야마구치 아사히 방송(yab) | 1993년 10월 개국부터 | |
가가와현 오카야마현 | 세토우치해 방송(KSB)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에히메현 | 에히메 아사히 TV(eat) | 1995년 4월 개국부터 | |
후쿠오카현 | 규슈 아사히 방송(KBC)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나가사키현 | 나가사키 문화 방송(NCC) | 1990년 4월 개국부터 | |
구마모토현 | 구마모토 아사히 방송(KAB) | 1989년 10월 개국부터 | |
오이타현 | 오이타 아사히 방송(OAB) | 1993년 10월 개국부터 | |
가고시마현 | 가고시마 방송(KKB) | 프로그램 시작부터 | |
오키나와현 | 류큐 아사히 방송(QAB) | 1995년 10월 개국부터 |
8. 관련 프로그램
- 보도 스테이션
- : 본 프로그램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후루타치 이치로를 중심으로 2004년 4월 5일부터 방송을 시작하여 '뉴스 스테이션'의 제작 기법 등을 계승하였다.[29]
- 뮤직 스테이션
- : '뉴스 스테이션' 시작 1년 후인 1986년 10월 24일부터 매주 금요일 20시대→21시대에 방송되고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세키구치 히로시→타모리가 사회를 맡고 있으며, 프로그램 제목에 '스테이션'을 가진 '뉴스 스테이션'의 파생 프로그램이다. 초대 타이틀 로고는 '뉴스 스테이션'의 초대 타이틀 로고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 선거 스테이션
- : 국정 선거의 개표 속보 프로그램이다. 1986년 7월의 중의원·참의원 동시 선거부터 2003년 11월의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까지 '뉴스 스테이션'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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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宮悦子がサンテレビの震災特番「バトン1.17〜あなたへ〜」に出演 17日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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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家「ツケ負わされた」 産廃施設、報道後に激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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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米宏Nステ休業「14年間に疲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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やっぱり…久米宏Nステ降板の舞台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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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米Nステ復帰も降板問題再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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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米宏、今晩Nステ復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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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米宏、Nステに緊急復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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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沢の方には迷惑かけた(笑)」 久米宏が「ダイオキシン騒動」振り返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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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レビ美術から見る 「キャスターショー」の誕生と発展 〜『ニュースセンター9時』と『ニュースステーション』のスタジオセット分析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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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組ホームページ内の初代〜3代目の紹介ページ(アーカイ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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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品リストー舞台・他ーニュースステー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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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視聴率今年の上位番組
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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