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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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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가와 쇼이치는 1953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흥업은행에 입사한 일본의 정치인이었다. 198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농림수산대신, 경제산업대신,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는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으며, 북한 문제, 핵무장,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2009년 G7 재무장관 회의에서의 음주 논란으로 재무대신직에서 사퇴했으며, 같은 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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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쇼이치
기본 정보
이름쇼이치 나카가와
원어 이름中川 昭一
로마자 표기Nakagawa Shōichi
출생일1953년 7월 19일
출생지도쿄도 시부야구
사망일2009년 10월 3일
사망지도쿄도
국적일본인
정당자유민주당
배우자유코 나카가와 (1982년 결혼)
학력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관직
제68대 재무대신총리: 아소 다로
임기 시작: 2008년 9월 24일
임기 종료: 2009년 2월 17일
전임자: 이부키 분메이
후임자: 요사노 가오루
농림수산대신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임기 시작: 2005년 10월 31일
임기 종료: 2006년 9월 26일
전임자: 이와나가 미네이치
후임자: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대신총리: 오부치 게이조
임기 시작: 1998년 7월 30일
임기 종료: 1999년 10월 5일
전임자: 시마무라 요시노부
후임자: 다마자와 도쿠이치로
경제산업대신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임기 시작: 2003년 9월 22일
임기 종료: 2005년 10월 31일
전임자: 히라누마 다케오
후임자: 니카이 도시히로
중의원 의원임기 시작: 1983년 12월 19일
임기 종료: 2009년 7월 21일
전임자: 다선거구
후임자: 이시카와 도모히로
선거구: 홋카이도 제5구 (1983-1996), 홋카이도 제11구 (1996-2009)
기타 경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총재: 아베 신조
임기 시작: 2006년 9월 20일
임기 종료: 2007년 8월 27일
자유민주당 홍보본부장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임기 시작: 2001년 5월
임기 종료: 2002년 10월
훈장 및 칭호
위계정3위
훈장[[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욱일대수장
기타중의원 영년재직의원
법학사 (도쿄대학, 1978년)
가족
친족 (정치인)나카가와 분조 (조부)
나카가와 이치로 (부)
나카가와 마사오 (숙부)
나카가와 요시오 (숙부)
웹사이트
웹사이트중천소일 라이브러리
이미지
쇼이치 나카가와 1998
공식 초상, 1998년
20090128 kokkai 7
제171회 국회 (2009년 촬영)

2. 생애

나카가와 쇼이치는 1953년 도쿄에서 태어나 아자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78년 일본흥업은행에 입사했다.[2] 그의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홋카이도의 저명한 정치인이었으나 1983년자살했다.[7] 그 해 나카가와 쇼이치는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7]

1989년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을 거쳐, 1998년 오부치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2003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을 역임했고,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다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다.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자민당 정책조사회 의장을 맡았다.

2008년 아소 다로 내각에서 재무대신 겸 금융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었다.[6] 그러나 2009년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음주 의혹을 받으며 사임했다. 같은 해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으며, 2009년 10월 4일 도쿄도 세타가야구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38]

2. 1. 성장 과정

1953년 7월 19일 도쿄에서 태어나, 아자부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78년 일본흥업은행에 입사했다.[2]

1953년(쇼와 28년) 7월 19일, 도쿄도 시부야구 미야시로초(현: 시부야구 히로오)에서 홋카이도 개발청에 근무하던 나카가와 이치로와 그의 아내 사다코(貞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홋카이도 히로오군 히로오정이었다. 아버지 이치로는 신혼 직후 도쿄로 부임했다.

신주쿠구립 오치아이 제1소학교를 거쳐 아자부 중학교·고등학교로 진학했다.[39] 중학교 입시 때, 어머니 사다코는 쇼이치를 학원이나 가정교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참고서를 이용한 독학으로 합격시켰다고 한다.[39] 아자부 시절에는 축구를 대학 입시 때문에 그만두었지만, 심장 비대를 앓게 되었다. 집에서는 헌법 수호파 학자인 미야자와 슌기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40]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대학교 입학 시험에 불합격하고, 병행 지원했던 게이오기주쿠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게이오의 분위기 자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아자부 동기들은 거의 모두 도쿄대에 합격했는데, 나만 떨어진 것이 분하다"고 느껴 2년 후인 1974년(쇼와 49년) 도쿄대학교 문과 1류에 재입학했다.[41] 전문 과정에서는 동대학교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한 번 사법시험을 응시했지만 불합격했다.[41]

도쿄대 법학부 졸업 후인 1978년(쇼와 53년) 4월, 일본흥업은행에 입행했다. 나카가와는 "관료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실체 경제가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리 공무원이 노력하거나 정치가가 노력해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기, 즉 의식이 확실하지 않으면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흥업은행에 들어간 것은 은행원이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흥업은행에 들어가면 일본 경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강했다"라고 말하고 있다.[41] 흥업은행에서는 예금부와 외환부에서 근무했고, 예금부 시절에는 기업의 자금 조달과 상사를 상대로 수출입 결제 업무를 했다.[41]

2. 2. 정계 입문

1953년 7월 19일 도쿄에서 태어나 아자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78년 일본흥업은행에 입사했다.[2]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홋카이도의 저명한 정치인이었는데, 1983년자살했다.[7] 나카가와 쇼이치는 같은 해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7]

1983년 1월,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가 급사하자, 일본흥업은행을 퇴직하고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홋카이도 5구에서 출마했다. 아버지의 비서를 지낸 스즈키 무네오도 출마하여, 이 선거는 조문객을 대상으로 하는 "조의 선거(弔い選挙)"가 되었다. 두 사람의 후계자 다툼은 언론으로부터 "뼈를 깎는 싸움(骨肉の争い)"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42]

이 선거에서 나카가와는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고, 자유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 스즈키도 하위 순위로 당선되었다.[43] 취임 후에는 자유혁신동우회(구 나카가와 이치로 파)에 소속되었고, 이후에는 청화정책연구회(후쿠다 다케오→아베 신타로→미즈카 히로시 파)→가메이 그룹→지슈회(에토 다카미·가메이 시즈카 파→가메이 시즈카 파→이부키 후미아키 파) 등을 거치며 농수산 계열 보수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89년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에 취임하였다.

2. 3. 농림수산대신

1998년 오부치 내각이 발족하자, 나카가와 쇼이치는 농림수산대신으로 처음 입각했고, 이후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까지 같은 직을 역임했다.[3] 나카가와 이치로는 초대 농림수산대신이었으며, 농림수산성의 명판은 아버지의 글씨였다. 장관 취임 후 처음 출근한 나카가와 쇼이치는 그 명판에 예를 표하며, "제대로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1998년 11월 4일, 나카가와 쇼이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농업 담당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 프란츠 피슈러와 회담을 가졌다.

1998년 11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프란츠 피슈러와 회담하는 나카가와 쇼이치


2005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 다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다.[3]

2008년 5월 2일, 나카가와는 미국 농무장관 에드 셰이퍼와 미국산 쇠고기 시장 접근 및 도하 라운드에 대해 논의했다.

2008년 5월 2일, 미국 농무장관 에드 셰이퍼와 미국산 쇠고기 시장 접근 및 도하 라운드에 대해 논의한 나카가와 쇼이치

2. 4. 경제산업대신 및 재무대신

2003년(헤이세이 15년) 9월 고이즈미 재개조 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에 취임하여 동중국해 가스전 문제에 대해 임페리얼석유에 시추권을 부여하는 등 강경한 자세로 중국과의 협상에 임했다. 2005년(헤이세이 17년) 10월까지 경제산업대신을 역임하고,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는 농림수산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림수산대신으로서 멕시코필리핀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의 성과를 올렸으며, 대한민국을 "화이트 국가"로 인정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신임이 두터웠던 나카가와는 고이즈미로부터 이름("쇼이치")으로 불리는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다.[3]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아베 신조를 지지했고, 아베 총재 취임 후 당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재정 연설을 하는 나카가와 (2009년 1월 28일, 중의원 본회의)


2008년(헤이세이 20년) 9월, 아소 다로 내각이 출범하면서 재무대신 겸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금융)에 취임했다.[6]

나카가와 쇼이치와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 (로마, 2009년 2월 13일)


2008년 10월 10일, G7 회의에서 나카가와 쇼이치는 워싱턴에서 아이슬란드, 브라질, 우크라이나, 파키스탄과 같은 신흥국과 중소국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대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대출 총액은 약 2조달러에 달할 수 있었다.[8][9][10]

국제통화기금(IMF)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무이사와 나카가와 쇼이치 (로마, 2009년 2월 14일)


2009년 2월 14일, 스트로스-칸은 "이 지원은 IMF 회원국이 기여한 단일 최대 규모의 추가 자금 지원이며, 일본의 리더십과 세계 경제 및 금융 문제에 대한 다자간 접근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11]

2. 5. 낙선과 사망

2009년(헤이세이 21년) 8월, 장관직에서 사퇴한 지 약 반년 만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나카가와 쇼이치는 현직 선거구였던 홋카이도 11구에서 재선을 목표로 출마했다. 나카가와는 사과 행보에 힘쓰는 동시에 금주 선언을 하고, 아소아베 등도 지원 유세를 위해 선거구에 들어왔으며, 민주당의 농업 정책일본 국기에 대한 모독 등을 비판했다.[54] 그러나 민주당의 이시카와 토모히로(이듬해 2010년 1월 정치자금규제법 위반으로 체포됨)에게 패배하여 비례 홋카이도 블록에서 득표율 2위인 낙선율 3위에 그치며, 비례 대표 부활도 없이 낙선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하여 정권 교체를 실현했고, 낙선 후 기자회견에서 나카가와는 "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지만, 여러분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달 나카가와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앞으로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나아가겠습니다. 전달해 나가겠습니다. '일본이 위험하다'에서"라고 적었지만,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아 요통감기에 시달리는 동시에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2009년 10월 4일, 도쿄도 세타가야구(世田谷区) 자택 2층 침실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부인 나카가와 이쿠코(郁子)가 발견했다.[38] 도쿄소방청(東京消防庁)에 의해 응급 후송되었으나 현장에서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실제 사망 시각은 발견 전날인 10월 3일로 추정된다.

사인에 대해 유족은 조문객들에게 급성 심근경색(急性心筋梗塞)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해지지만,[55] 실제 사인은 부검(行政解剖)을 통해 순환기(循環器) 계통의 지병 가능성이 지적되었으나 특정되지 않았고, 병리 검사(病理検査)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56] 다만 타살 가능성은 부정되었으며, 나카가와 주변에서는 유서(遺書)가 발견되지 않았다. (참고로, 친부인 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郎)는 나카가와와 비슷한 나이인 57세에 자살(自殺)로 사망했다.)

같은 달 27일, 새롭게 출범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内閣)의 각의(閣議)에서 나카가와에 대한 정삼위(正三位)와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추서를 결정했지만, 수여일은 2009년 10월 3일로 했다.[57]

산케이 신문[58]과 토카치 마이니치 신문[59]은 특집 기사를 통해 나카가와의 죽음을 애도했다. 법명(法名)은 "청방원석소존(青邦院釋昭尊)"이다. 부인 이쿠코와 장녀가 "깨끗한 정치를 관철했다"는 의미를 담아 명명했고, 가마쿠라의 고승의 승낙을 받았다. 이쿠코는 명명에 앞서 당시 TBS(TBSテレビ) 『보도 특집(報道特集)』의 총괄 디렉터로 중의원 선거 활동 중이던 나카가와를 취재하고 있던 야마구치 케이유키(山口敬之)에게 부탁하여 나카가와와 친분이 있는 인물에게 법명 후보가 될 한자를 생각해 달라고 했다.[60] 통야(通夜)와 고별식(告別式)은 2009년(헤이세이 21년) 10월 8일과 9일에 도쿄도 미나토구(港区) 모토아자부(元麻布)의 아자부야마젠푸쿠지(麻布山善福寺)에서 자민당과 나카가와 가문의 합동 장례식으로 거행되었으며, 전 총리 아베 신조, 전 총리 아소 다로, 당시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등 많은 정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고별식에서는 자유민주당 총재(自由民主党総裁) 다니가키 사다카즈[61]가 조사(弔辞)를 낭독했다.[62] 이어 나카가와가 소속되어 있던 지슈회(志帥会)(이부키 파) 회장 이부키 후미아키의 조사가 이어졌다.

친구 대표 아베 신조의 조사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쇼이치(昭一) 씨'라고 불러 드리겠습니다."라고 시작하여,

같은 달 16일에는 홋카이도(北海道) 오비히로시(帯広市)의 홋카이도 호텔(北海道ホテル)에서 "애석의 모임(哀惜の会)"이 개최되었고,[64] 맹우였던 아소 다로가 조사를 낭독했다.[65]

헌정기념관에서는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66], 약 3000명이 참석했고[67], 사십구재 법요에는 친족, 관계자 등 50명 이상이 모였다.[68][69]

사십구재 법요의 제사가 끝난 같은 해 11월 28일, 후원회 조직인 “도카치 연합 후원회”가 해산을 결정했고, 다른 지역 후원회들도 차례로 해산 또는 축소되었다.[70] 같은 해 말, 나카가와의 웹사이트에는 유코(郁子) 부인의 서명으로 지지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이 게재되었지만[71], 2010년(헤이세이 22년) 1월에, 동 웹사이트에서 발표된 『고 나카가와 쇼이치 선생 캘린더 2010[72]』에는 일본 전국에서 대량의 주문이 쇄도하여[73], 매진 후[75], 추가 접수가 이루어질 정도였다.[76]

같은 해 홋카이도 5구에서 마치무라 신타쿠를 누르고 당선된 고바야시 치요미가 의원직을 사퇴하고, 마치무라가 보궐선거에 입후보했기 때문에, 비례대표 홋카이도 블록에서 낙선율 차점이었던 나카가와가 생존해 있었다면 추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마치무라가 당선되었고, 비례대표 구에서는 나카가와 다음으로 낙선율이 높았던 이마즈 히로시가 추가 당선되었다.)

나카가와의 사망 3년 후인 2012년에 실시된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나카가와의 아내 유코가 홋카이도 11구에서 자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신당 다이치로 당적을 바꾼 이시카와 토모히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이시카와는 비례대표로 부활.)

3. 정책 및 정치적 입장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베 신조와 역사 교육에서의 민족주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 헌법 개정 등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4] 자민당 내 대표적인 친미가 아닌 친대만 성향 정치인으로 알려졌다.[5]

2005년 중국 반일 시위 당시 중국의 군사비 증가에 우려를 표명하며, 대만 유사시 일본이 2020년까지 중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4] 2006년 경제산업대신 재임 중 친중파인 니카이 도시히로의 동아시아 EPA 구상에 대해 "일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일본 정부의 대중국 엔화 차관 재개 결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2007년 1월 6일,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카가와는 "여성은 그들 자신의 자리가 있다. 여성답게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예를 들어 꽃꽂이, 바느질 또는 요리와 같이 이를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기사의 연령으로 인해 신문의 편집 정보 책임자는 이 정보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었다.

2007년, "미일 안보 강화"와 "국제 기여 관점에서의 무기 수출 삼원칙 완화"를 주장했다.[93]

교원면허 갱신 제도와 관련하여 나카가와 쇼이치는 일본교직원조합(日教組)의 일부 활동가들이 교육기본법 개정 반대 시위에서 소음을 퍼뜨리고 있다며, 시위라는 저속한 방법으로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면서 면허 박탈을 주장하며 日教組의 활동을 강하게 비판했다.[94]

2007년 12월, 게이오기주쿠 대학 강연에서 "원자폭탄 투하는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갖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실험 대상이 되었다"며 미국에 항의하고, 경우에 따라 국회에서도 비난 결의를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원자력선 또는 원자력잠수함을 갖는다는 논의가 왜 나오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국내 유일의 원자력 실험선이었던 "무쓰"가 방사선 누출 사고를 일으킨 이후, 동력으로서의 원자력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사실상 없어진 것을 지적했다. 군사 목적의 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도 "원자력 유조선"의 실현을 호소했다.[98]

나카가와 쇼이치는 2002년에 국회에 제출된 인권옹호법안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했다. 해당 법안은 2003년에 폐기되었지만, 계속 논란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해당 법안에 강하게 반대했던 아베 신조가 자신의 정권 하에서 나카가와를 정무조정회장에 기용한 데에는, 법안 성립 저지라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자유민주당은 2006년 10월, 그동안 해당 법안 논의를 주도해 온 당 인권문제 등 조사회 회장직을 나카가와에게 맡겼고,[102] 이로 인해 해당 조사회는 사실상 기능을 정지했다.

나카가와는 2007년 11월, 전년도 아베 내각 붕괴 이후 침체되었던 보수 정치 재건을 위한 회합을 열었고,[103] 거기에는 전 농림수산대신 시마무라 요시노부와 전 경제산업대신 히라누마 다케오 등도 참가했다. 이 회합에서 나카가와는 보수주의의 대가인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을 인용하며 집단적 자위권 명확화와 인권옹호법안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회합은 같은 달, 보수의 연구 모임인 진·보수정책연구회로서 회장 나카가와, 최고 고문 히라누마, 의장 시마무라라는 구성으로 발족했다.[104] 이 모임에는 5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참가했지만, 해당 법안 상정을 우려하는 의견이 잇따랐다.

이전부터 나카가와는 해당 법안을 "제2의 치안유지법"이라고 비판해 왔고,[105] 2008년 2월 16일에는 자민당 오사카부 연합 회합에서 법안이 성립되면 자신이나 아베 신조, 아소 다로가 인권침해 명목으로 고소당해 구류장에 갈 수도 있다며 해당 법안에 대한 반대를 강조했다.[106] 같은 해, 인권옹호법안 상정 저지를 위한 "소위 '인권옹호법안' 재제출에 대한 요청 접수 국민 집회"[107]에 참석한 나카가와는 해당 법안의 위험성을 거듭 지적하고, 자신에게 보내지는 국민의 목소리 중 찬성 의견이 하나도 없다는 점, 또한 해당 법안 추진파 의원이 반대파에 대해 협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 1. 농업 정책

1989년(헤이세이(平成) 원년),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에 취임하였다. 1998년 오부치 내각이 발족하자,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했고, 이후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까지 동직을 역임했다.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는 초대 농림수산대신이었으며, 농림수산성의 명판도 아버지의 서예였는데, 장관 취임 후 처음 출근한 나카가와 쇼이치는 그 명판에 대해 일례를 표하며, "제대로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 같다"는 감상을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経済産業大臣)을 역임했을 때에도, 농산물 수출입과 관련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농산물 수입 자유화에 강력히 반대하는 많은 농림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면서 멕시코, 필리핀과의 협정 합의에 이르렀다.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第3次小泉改造内閣)에서는 농림수산대신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상 협상을 수행했다. 재임 중에는 광우병(BSE) 문제(BSE問題)에 직면했다. 2006년(平成18年) 5월, 당시 미국 농무장관(アメリカ合衆国農務長官) 마이크 조핸즈(マイク・ジョハンズ)와 회담했을 때, 미국 국내에서 소 검사 체계가 축소·중단되는 움직임을 전해들은 나카가와는 "안전성보다 규칙의 문제다. 규칙조차 지키지 못하는가"라며 미국을 비판하고, 미국산 소고기(牛肉) 수입 재개에 있어 일본 측이 요구하는 엄격한 검사의 지속을 요구했다.

3. 2. 경제 정책

은행원 출신인 나카가와 쇼이치는 재정과 금융 분야에 밝았다. 고이즈미 내각에서는 경제산업대신을, 아소 내각에서는 재무대신 겸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금융)을 역임하며 주택금융전문회사 문제와 세제 개정에 관여했다.

경제산업대신 시절, 정책금융기관 통합 문제에서 당시 재무대신이었던 다니가키 사다카즈와 함께 정책금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경제재정담당대신 겸 우정민영화 담당 대신이었던 다케나카 헤이조와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재계 등에서 요구하는 법인세 감세에는 찬성 입장을 보이며 2조 엔 규모의 법인세 감세를 주장했다.[77][78]

재무대신 재직 시기는 세계적인 금융위기 시기와 맞물려, 일본 국내 시장의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 보유 주식 매각 동결, 공매도 규제 강화, 달러 공급 조작 확대, 무제한 달러 대출 등의 정책을 펼쳤다.

3. 2. 1. 국제 금융

2008년 10월 10일, G7 회의에서 나카가와 쇼이치는 워싱턴에서 아이슬란드, 브라질, 우크라이나, 파키스탄과 같은 신흥국과 중소국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대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대출 총액은 약 2조달러(약 20조 엔)에 달할 수 있었다. 일부 신흥국과 유럽 중소국에서는 국내 금융기관의 총자산이 국내총생산을 훨씬 초과하여 정부가 국유화와 같은 조치를 통해 부실 금융기관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카가와 플랜"은 중소국과 신흥국의 우려를 완화하고 국제 금융 시장의 긴장을 줄였다.[8][9][10]

2009년 2월 14일, 스트로스-칸은 "이 지원은 IMF 회원국이 기여한 단일 최대 규모의 추가 자금 지원이며, 일본의 리더십과 세계 경제 및 금융 문제에 대한 다자간 접근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스트로스-칸은 다른 국가들이 185개국 기구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일본에 동참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11] 아소 다로 총리는 일본이 긴급 경제 지원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할 경우 외환보유고에서 최대 1조달러를 IMF에 대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닛케이 비즈니스 데일리는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매각하여 IMF에 현금을 제공하면 미국 국채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도쿄는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국채를 IMF에 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공동 성명에서 G7 장관들은 세계 성장과 고용을 지원하고 금융 부문을 강화하는 동시에 보호무역을 피하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기로 약속했다. 장관들은 미국 상원이 7870억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책에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회의를 가졌고, 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길을 열었다. 스트로스-칸은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구체적인 결과는 일본의 대출입니다.... 일본이 앞장서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IMF) 자원을 두 배로 늘리는 목표를 계속 추진하겠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출입니다." 벨라루스, 헝가리,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파키스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 위기에 직면한 여러 국가에 대출이 이루어졌다. 지난달에는 엘살바도르에 대한 예방적 대출을 발표했으며, IMF팀은 터키와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12][13]

은행 근무 경력이 있는 나카가와 쇼이치는 재정 및 금융에 정통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을, 아소 내각에서 재무대신 겸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금융)을 역임하며 주택금융전문회사 문제와 세제 개정에도 관여했다.

경제산업대신 시절, 정책금융기관 통합 문제에서는 당시 재무대신이었던 다니가키 사다카즈와 함께 정책금융의 중요성을 호소하며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경제재정담당대신 겸 우정민영화담당대신이었던 다케나카 헤이조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또한 재계 등이 요구하는 법인세 감세에는 찬성 입장을 취하며 2조 엔의 법인세 감세를 제창했다.[77][78]

재무대신 재직 시기는 세계적인 금융위기 시기였으며, 일본 국내 시장에 대한 위기 극복책으로 정부 보유 주식 매각 동결, 공매도 규제 강화, 달러 공급 조작 확대, 무제한 달러 대출 등을 실시했다.

; IMF 긴급 자금 지원

: 2008년(헤이세이 20년) 10월, 재무대신 취임 직후 선진 7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 참석한 나카가와 쇼이치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신흥·중소국을 위한 새로운 긴급 자금 지원 제도를 마련할 것을 제안하여 각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79] 이른바 "나카가와 구상"은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환영을 표명했으며,[80] 이후 실제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파키스탄이 "나카가와 구상"에 기반한 긴급 자금 지원을 받아 구제되었다.

: 이듬해 2009년(헤이세이 21년) 2월에는 미국 재무장관 티모시 가이트너와 회담하여 미국이 검토 중인 "바이 아메리칸 조항"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보호무역주의 배제에 의견을 같이했다.[81] 이어서 열린 G7 회의에서는 각국 간 보호무역주의적 조치에 대한 견제가 일본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회의 개최국인 이탈리아 언론이 이를 높이 평가했다.[82] 아소 내각은 IMF에 대한 긴급 자금 지원에 대해 "IMF가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담보로 미국 국채를 제공하고, 일본 정부는 재정 부담 없이 이익만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일본의 자금 출연과 높은 평가

: 일본은 신흥·중소국의 구제를 위해 IMF에 외환보유고의 일부를 출연하는[83] 합의에 서명했다.[84] 그 금액(1조달러)는 국제통화기금(IMF) 가맹국에 의한 자금 제공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으며, IMF 전무이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은 "일본의 자금 지원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것이다"라는 감사를 표명했다.[85][86]

3. 3. 외교 및 안보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베 신조와 역사 교육에서의 민족주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 헌법 개정 등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4] 자민당 내 대표적인 친미 성향이 아닌 친대만 성향 정치인으로 알려졌다.[5]

2005년 중국 반일 시위 당시 중국의 군사비 증가에 우려를 표명하며, 대만 유사시 일본이 2020년까지 중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4] 2006년 경제산업대신 재임 중 친중파인 니카이 도시히로의 동아시아 EPA 구상에 대해 "일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일본 정부의 대중국 엔화 차관 재개 결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2008년 5월 2일, 미국 농무장관 에드 셰이퍼와 만나 미국산 쇠고기 시장 접근 및 도하 라운드에 대해 논의했다.

2007년에는 "미일 안보 강화"와 "국제 기여 관점에서의 무기 수출 삼원칙 완화"를 주장했다.[93]

3. 3. 1. 대북 정책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베 신조와 역사 교육에서의 민족주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 헌법 개정 등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4] 특히 대북 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2006년 12월, 교도통신은 나카가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보도했다.[3]

나카가와는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핵무기 대신 원자력 발전소를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동해 쪽에 30기가 넘는 원전이 집중된 현실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87]

2007년 4월, 납치 문제 국민 대집회에 참석한 나카가와는 북한의 불성실한 태도를 비판하며, 일본이 독자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법률 정비를 언급했다. 이는 존 볼턴 등이 사임한 후 대북 온건 대응을 시작한 미국의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되었다.[88]

2008년, 나카가와는 다하라 소이치로, 다나카 히토시와의 대담에서 김정일 체제 붕괴 후 중의원에 "북한 부흥위원회"를 설립하여 자신이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부흥과 민주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89]

3. 3. 2. 핵무장 관련

2006년 10월, 나카가와 쇼이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핵 3원칙은 국민과의 무거운 약속이지만, 최근 북한의 핵무기 실험 동향을 고려하여 이 약속을 재검토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90] 이 발언은 일본 국내 일부 정치인과 반핵 단체,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비판을 받았다. 나카가와는 해명하면서도 "비핵 3원칙 아래서 핵을 가지지 않고 어떤 대응책을 세울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라며 관련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카가와의 발언은 "북한이 핵을 가지면 일본도 핵무장을 할 것인가"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지만, 같은 달 미국을 방문한 나카가와는 전 부통령 댄 퀘일 등 미국 고위 관계자들과의 회담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과 비핵 3원칙을 고수하는 것을 전제로 핵 관련 논의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명확히 했다.

2009년 4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계기로 나카가와는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핵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핵이라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이다"라고 발언하며, 다시 한번 일본의 핵무장 논의를 촉구했다.[90] 나카가와는 2003년부터 "일본은 핵무장을 상황에 따라 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며,[91] 2006년 11월에도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 시기에 제기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사쿠라이 요시코와의 대담에서도 핵무장 논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92]

2006년 12월, 교도통신(共同通信社)은 나카가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고, 그의 발언에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3]

3. 3. 3. 위안부 문제

나카가와 쇼이치는 극우 성향 단체인 일본회의에 소속되어 있었다.[14] 1998년 7월, 그는 일본의 많은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동원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며, 일본 정부와 군이 매춘 업소에서 일하도록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모집하거나 강제로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카가와는 “군대를 따라다닌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인정한다”며 “빈곤 등 여러 문제가 그 배경에 있었고, 매우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는 슬픈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15]

그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매춘 업소에서 일하도록 직접적으로 모집하고 강제로 동원했다는 고노 요헤이의 고노 담화와 상반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현 일본 정부가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은폐하는 한 고노 담화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고노는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도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위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가 위안부에 관한 고노 담화를 즉시 수정하거나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96][97]

4. 논란 및 비판

나카가와 쇼이치는 2009년 2월 G7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서 보여준 '몽롱한 기자회견'으로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이 외에도 정치자금 문제, 아사히 신문과의 갈등, 인권옹호법안 반대 등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2008년 10월 10일, G7 회의에서 나카가와는 아이슬란드, 브라질, 우크라이나, 파키스탄과 같은 신흥국과 중소국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대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대출 총액은 약 2조달러에 달할 수 있었다. 일부 신흥국과 유럽 중소국에서는 국내 금융기관의 총자산이 국내총생산을 훨씬 초과하여 정부가 국유화와 같은 조치를 통해 부실 금융기관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카가와 플랜"은 중소국과 신흥국의 우려를 완화하고 국제 금융 시장의 긴장을 줄였다.[8][9][10]

2009년 2월 14일, 스트로스칸은 "이 지원은 IMF 회원국이 기여한 단일 최대 규모의 추가 자금 지원이며, 일본의 리더십과 세계 경제 및 금융 문제에 대한 다자간 접근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아소 다로 총리는 일본이 긴급 경제 지원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할 경우 외환보유고에서 최대 1조달러를 IMF에 대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닛케이 비즈니스 데일리는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매각하여 IMF에 현금을 제공하면 미국 국채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도쿄는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국채를 IMF에 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공동 성명에서 G7 장관들은 세계 성장과 고용을 지원하고 금융 부문을 강화하는 동시에 보호무역을 피하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기로 약속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길을 연 7870억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책에 미국 상원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스트로스칸은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구체적인 결과는 일본의 대출입니다.... 일본이 앞장서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IMF) 자원을 두 배로 늘리는 목표를 계속 추진하겠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출입니다." 벨라루스, 헝가리,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파키스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 위기에 직면한 여러 국가에 대출이 이루어졌다. 지난달에는 엘살바도르에 대한 예방적 대출을 발표했으며, IMF팀은 터키와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12][13]


  • 아사히 신문과의 갈등: 1998년 농림수산상 취임 당시 성내 회견장에 일장기를 게양한 것을 아사히 신문이 비판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8년에도 각의 후 회견장에 국기를 게양한 나카가와에게 재무성 기자 클럽 일부 기자가 비판하자, 나카가와는 "세계에 발신하는 장이라는 인식으로 국기 게양은 당연하다"고 반박했다.[99] 또한, 나카가와는 NHK 프로그램 개변 문제와 관련하여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대해 "공정 중립의 입장에서 방송해야 함을 지적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관련 발언: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보도 기관의 태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으로 뇌가 스펀지 상태가 되어 사고가 정지했다"고 발언하여[100], 피해자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고 사과했다. 이후 나카가와는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초당파 의원 연맹 회장에 취임하여 약해 야코프병 문제 해결에 힘썼다.[101]
  • 인권옹호법안 반대: 2002년 국회에 제출된 인권옹호법안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했다. 해당 법안을 "제2의 치안유지법"이라고 비판하며[105], 법안이 성립되면 자신이나 아베 신조, 아소 다로가 인권침해 명목으로 고소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6]
  • 중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 경제산업대신 시절, 친중파인 니카이 도시히로의 동아시아 포괄적 경제 연합 협정 구상에 대해 반대하며, "일본은 중국과 경제연합협정 체결을 위한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국은 일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동결했던 중국에 대한 엔화 차관 재개 결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4. 1. 음주 관련 논란

나카가와 쇼이치는 평소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정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면서 술버릇이 나쁘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금주나 절주를 선언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음주하는 습관은 경제산업대신 시절부터 그를 알던 관료들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116] 2009년 낙선에는 같은 해의 음주 보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117]

다음은 나카가와 쇼이치의 음주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 첫 각의 지각: 2004년 내각 개조 당시, 경제산업대신에서 이임 기자회견 후 술을 마셨다. 그런데 같은 직책에 다시 임명되자, 술에 취한 채로 첫 각의에 참석했다.[118]
  • 만취 상태로 후원회 인사: 2005년 여름, 홋카이도 혼베쓰정에서 열린 후원회 파티에 만취 상태로 나타나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로 인사를 했다. 지역 수장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했다.[118]
  • 궁중 만찬회 소동: 2008년 11월, 스페인후안 카를로스 1세 부부를 맞이한 천황 주최 궁중 만찬회에서 과음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궁내청 동궁대부에게 물 문제에 대해 황태자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끈질기게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격분하여 큰 소리를 질렀다. "궁내청 멍청이들"이라고 고함치며 중간에 자리를 떴다는 보도도 있었다.[116]
  • 연설 중 실수: 2009년 1월, 재무·금융 담당 대신으로서 중의원 본회의에서 재정 연설을 하던 중, "와중(渦中)"을 "우즈츄우(うずちゅう)"로, "개정(改正)"을 "개혁(改革)"으로, "삭감(削減)"을 "축감(縮減)"으로 읽는 등 실수를 하여, 재무성이 26곳의 수정을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총리인 아소 다로 역시 한자 읽기 실수로 화제가 된 상황이었기에, 이 사건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120] 나카가와는 전날 술을 마시면서 테니스를 쳐서 만성 요통을 악화시켰다고 한다.[121]
  • 총선 직전 금주 선언: 2009년 8월 총선을 앞두고 오비히로시에서 열린 총결집 대회에서, 정치 평론가 미야케 히사유키는 나카가와에게 금주 선언을 하라고 호통쳤다. 또한 아내에게 집에 있는 술을 모두 버리라고 제안하여, 나카가와는 지지자들 앞에서 금주 선언을 했다. 미야케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이 나카가와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가능성을 후회했다.[122]


2009년 2월, 나카가와는 G7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참석차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하여 기자회견에서 발음이 부정확하고 만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 큰 논란이 되었고, 결국 3일 후에 대신직을 사임했다.

4. 1. 1. '몽롱한 기자회견'

2009년 2월 14일, G7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회의 종료 후,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와 재무관 시노하라 나오유키와 함께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나카가와 쇼이치의 발언은 발음이 부정확했고, 하품을 하며 눈이 풀린 상태였다.[123] 더욱이 나카가와는 말실수를 하거나, 질문한 기자를 찾지 못하고 “어디야!”라고 소리치는 등, 공동선언 같은 것이 나왔다는 불명확한 발언을 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여 건강 문제나 음주 의혹이 제기되었다.[123] 매스미디어는 이 장면을 “과음 졸음 회견”[124] 등으로 보도했다.

귀국 후 나카가와는 “(문제가 된 회견 전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면, 마신 것이 아닙니다. 즐겼습니다.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라고 해명했다.[125] 또한, 음주 상태의 원인은 항히스타민제가 포함된 감기약[126]과 알코올을 함께 복용했거나 감기약을 과다 복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28] 회견 전, 나카가와는 G7 오찬을 중도에 나와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와인을 마셨는데, 1병을 6명이 나눠 마셨고, 그 자리에는 요미우리 신문 기자, 나카가와와 고등학교 동창인 재무성 국제국장 타마키 린타로, 재무관료 2명, 통역, 나카가와의 지인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가와우치 히로후미의 질문에 타마키가 증언했다.[129]

이 사태에 대해 자유민주당 간부들로부터도 비판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 TV 기자의 블로그에 실린 풍자적인 비판 기사를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하는 등[130] 나카가와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나카가와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예산안과 관련 법안의 중의원 통과를 기다린 후 장관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야당 5당은 나카가와에 대한 문책 결의안을 제출했고,[131] 여당인 자유민주당공명당에서도 신속한 사퇴를 요구했다.[132][133] 더 나아가 야당이 예산 심의 거부 자세를 보이자, 나카가와는 같은 날 장관직에서 사퇴했다.[134][135]

4. 1. 2. 바티칸 미술관에서의 논란

2009년 2월, 나카가와 쇼이치는 G7의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참석차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했다.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발음이 부정확하고 만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 언론의 맹비난을 받고 3일 후 사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몽롱 기자회견 참조)

기자회견 직후, 나카가와 등은 바티칸 미술관을 약 2시간 동안 관람했다. 이때 나카가와가 미술품을 만지고, 울타리를 넘어 경보를 울리게 했으며, 라오콘 상 받침대에 앉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대해 나카가와 사무소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경보가 울린 것은 사실"이라고 발표했다.[136] 반면 나카가와 본인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바티칸 측도) 경보기가 전혀 울리지 않았고, 나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있다"며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137] 나카가와와 함께 통역으로 동행했던 와다 마코토 신부는 나카가와와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보도에서처럼 비상식적인 행위를 본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와다에 따르면, 나카가와에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와다는 술을 싫어해서 냄새에 민감하다고 말했다), 나카가와의 말은 매우 명료했고, 나카가와가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전시품을 손으로 만진 적도 없었으며, 박물관 설명에 매우 열심히 귀 기울였고, 라오콘 상 주변에는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와다는 일본 언론에 대해 "나카가와의 행동에 비상식적인 점은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복해서 항의했지만 완전히 무시당했다"고 항의했다.[138]

이후 일본 정부의 답변서에서는 나카가와가 바티칸 박물관에서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경보가 울렸다고 밝히고 있지만, 박물관에 확인한 결과 "경보기는 울렸지만, 그 소리가 전관에 울릴 정도로 크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4. 2. 정치자금 문제

나카가와 쇼이치는 소비자금융 업계의 정치단체인 전국대부업정치연맹(全政連)으로부터 헌금을 받았으며[139], 입찰 관련 허위 보고로 행정처분을 받은 아키타현 건설회사 사장으로부터 개인헌금을 받는 등[140], 일부 부적절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업체나 업계 단체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

또한, 소고기 변조 사건으로 적발된 한난 그룹의 단체 및 기업으로부터 헌금을 받았는데[141], 나카가와가 농수상 경험이 있는 소위 농수족이었기 때문에 국회에서 관련 질의가 있었다[142]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조부나카가와 분조농업, 잡화상 겸 축산업자, 히로오정 의회 의원
조모세이야마가타현 출신
부친나카가와 이치로1925년 3월 - 1983년 1월정치가, 자유민주당 중의원 의원
모친나카가와 사다코일본국유철도 직원 셋째 딸, 삿포로시립고등여학교 졸업. 요미우리신문사 주최 “미스 재팬” 콘테스트 삿포로 예선에서 미스 삿포로에 이어 “럭키 세븐”의 일곱 명의 미녀 중 한 명으로 뽑혔다.
남동생
배우자나카가와 유코정치가, 자유민주당 중의원 의원
장녀나카가와 마리코후지TV 보도국 기자[147]
장남미쓰비시상사 2015년 입사[147]
숙부나카가와 요시오정치가, 전 참의원 의원
숙부나카가와 마사오잡화상, 정치가, 전 히로오정 의원
숙부나카가와 겐조창고업
사촌 형제나카가와 겐이치삿포로시 의회 의원, 나카가와 요시오의 장남
사촌 형제의 배우자싱가포르
사촌 형제의 장남
부친의 사촌나카가와 겐이치의사, 분조의 남동생과 세이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남, 삿포로시에서 "나카가와 위장병 클리닉" 개업[148]



6. 평가

나카가와 쇼이치는 홋카이도 제5구와 홋카이도 11구에서 총 8번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농림수산대신, 경제산업대신, 재무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 등을 역임했다.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조기에 구출하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 연맹 회장, 일본회의 고문 등을 지냈다. 2009년 56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는 중의원 의원과 각료를 역임했으며, 아내 나카가와 이쿠코는 쇼이치의 뒤를 이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200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사임 후,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소 다로 총리 실현을 위해 활동했다.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소를 지지하여 당선에 기여했고, 아소 내각에서 재무대신 겸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금융)에 취임했다.

2009년 G7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몽롱한 모습을 보여 비판을 받고 대신직을 사임했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으며, 이는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공언했다. 존경하는 정치인으로는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퍼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을 꼽았다.

취미는 물총, 축구, 꽃 기르기였으며, 특기는 테니스였다. 독서가로도 알려져 자신의 웹사이트에 독서 감상을 많이 적었다. 현대미술을 좋아했으며, 르네 마그리트, 에드워드 호퍼 등을 선호했다.[108]

2004년 정치인 연금 미납 문제에서 연금 보험료를 납입하지 않았던 것이 밝혀졌지만, 의원 연금에는 가입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보도 프로그램 『보도 2001』에 자주 출연했으며, 출연 시 시청률이 상승했다고 한다.[110]

친대만파로 알려져,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리덩후이와 친분이 있었다.

"무서운 얼굴", "가시 돋친 발언"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정책에 대한 비판은 하더라도 인물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도록 말의 품위를 소중히 여겼다.

같은 성씨를 가진 나카가와 히데나오와 자주 비교되었지만, 혈연 관계는 없다.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쇼이치와 정치 사상이 대조적이었으며, 친중파로 여겨졌다.

2006년 아베 신조 내각에서 나카가와 쇼이치는 정무조사회장,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간사장을 맡았다. 쇼이치의 정무조사회장 임명은 히데나오의 간사장 취임에 대한 견제였다는 말도 있었다.

나카가와 쇼이치는 우정반란파 복당 문제에 관해 나카가와 히데나오와 충돌하며 "마치 천안문 사건과 같다"고 평했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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