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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 우지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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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와 우지오토는 이와무라 번의 4대 번주로, 1686년 니와 우지노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02년,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발생한 소동(니와 가문 소동)으로 인해 에치고 다카야나기 번으로 이봉되고 폐문 칩거되었다. 이후 사면되었지만, 에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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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 우지오토
기본 정보
씨명니와 우지오토
이명쇼노스케
시대에도 시대 중기
출생엔포 6년(1678년)
사망호에이 2년 윤4월 7일 (1705년5월 29일)
계명후쇼인덴 게쓰신료에이다이코지
묘소에도 아사쿠사 가이운지
관위종5위하, 엣추노카미→이키노카미→이즈미노카미
가문譜代 니와 씨 (잇시키 씨)
아버지니와 씨하루
어머니엔도 요고자에몬의 딸
형제자매우지미기, 우지오토, 요키(무라카미 마사쿠니의 실)
배우자정실: 이노우에 마사토모의 딸
자녀양자: 니와 시게우지
정치 경력
주군도쿠가와 쓰나요시
미노이와무라 번 번주→에치고다카야나기 번 번주
관직 계보
이전니와 우지아키
이후마쓰다이라 노리타다
직책이와무라 번 번주 (후다이 니와 가문)
대수5
임기1686년 ~ 1702년
관직 계보
이후니와 시게우지
직책다카야나기 번 번주 (후다이 니와 가문)
대수1
임기1702년 ~ 1705년

2. 니와 우지오토의 생애

니와 우지오토는 이와무라 번 2대 번주 니와 우지노부의 아들이자 3대 번주 니와 우지사다의 동생으로, 분가하여 하타모토가 된 니와 우지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86년(조쿄 3년) 3월, 니와 우지아키의 말기 양자로 들어가 윤3월 27일에 이와무라 번주가 되었다.[1]

1692년(겐로쿠 5년) 12월 18일, 종5위하에 서임되고 엣추노카미(越中守)에 임명되었다. 이후 1695년(겐로쿠 8년) 이키노카미(壱岐守), 1701년(겐로쿠 14년) 이즈미노카미(和泉守)로 개명했다. 1697년(겐로쿠 10년)에는 이노우에 마사토의 딸과 혼인했다.

1702년(겐로쿠 15년) 5월, 번 내에서 오이에 소동(니와가 소동)이 일어났다. 우지오토는 이 사건으로 영지 9천 석이 삭감되고, 에치고국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같은 해 12월 24일, 폐문 칩거는 용서받았지만, 쇼군 쓰나요시에게 배알은 허락되지 않았다. 1703년 4월 25일 사면되었으나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 에도에 머물렀다.

1705년(호에이 2년) 윤4월 7일, 에도에서 28세로 사망하였다. 아사쿠사의 가이운지에 매장되었으나, 절이 이전하여 현재는 스기나미구에 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니와 훈시가 말기 양자로 다카야나기 번주를 이었다.

2. 1. 가계와 출생

이와무라 번 2대 번주 니와 우지노부의 아들 (3대 번주 니와 우지사다의 동생)로 분가하여 하타모토가 된 니와 우지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 2. 이와무라 번주 상속

1686년(조쿄 3년) 3월, 이와무라 번의 4대 번주 니와 우지아키의 말기 양자가 되어, 같은 해 윤3월 27일에 가독을 상속받아 이와무라 번주가 되었다.[1]

2. 3. 관직 서임 및 개명

겐로쿠 5년(1692년) 12월 18일, 종5위하에 서임되고 엣추노카미(越中守)에 임명되었다. 겐로쿠 8년(1695년) 이키노카미(壱岐守)로, 겐로쿠 14년(1701년) 12월에는 이즈미노카미(和泉守)로 개명했다.

2. 4. 혼인

겐로쿠 10년 (1697년), 이노우에 마사토의 딸과 혼인했다.

2. 5. 에치고 다카야나기 번으로 이봉

겐로쿠 15년(1702년) 5월, 번 내에서 오이에 소동(니와가 소동)이 발발했다. 6월에 도당 30명이 처벌되었고, 우지오토는 정령 소홀을 이유로 폐문되었으며, 9천 석이 감해져 7월에 에치고국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이봉되어 폐문 칩거를 명령받았다. 이와무라성은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이 지켰지만, 나에키 번주 도야마 도모하루와 시나노 이이다 번주 호리 지카카타가 니와 씨로부터 넘겨받았다.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은 이와무라성의 니다자카에서 퇴출했다. 호리 지카카타는 곧바로 돌아갔지만, 도야마 도모하루는 남아 잔무를 처리하고 가신 미야지 모리자에몬과 약간의 부하 장졸에게 성대 유수를 명하고 돌아갔다. 이와무라성 아래에 있던 니와 씨의 보리사 묘센지를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옮겼다.

같은 해 12월 24일에 우지오토는 폐문 칩거를 용서받았지만, 쇼군 쓰나요시에 대한 배알은 허락되지 않았고, 1703년 4월 25일, 사면되었지만,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 에도에 머물렀다.

2. 6. 이와무라 성의 인도

겐로쿠 15년 (1702년) 5월, 번 내에서 오이에 소동(니와가 소동)이 발발했다. 6월에 도당 30명이 처벌되었고, 니와 우지오토는 정령 소홀을 이유로 폐문되었으며, 9천 석이 감해져 7월에 에치고국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이봉되어, 폐문 칩거를 명령받았다. 이와무라 성은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이 지켰지만, 나에키 번주 도야마 도모하루와 시나노 이이다 번주 호리 지카카타가 니와 씨로부터 성을 넘겨받았다.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은 이와무라 성의 니다자카에서 퇴출되었다. 호리 지카카타는 곧바로 돌아갔지만, 도야마 도모하루는 남아 잔무를 처리하고 가신 미야지 모리자에몬과 약간의 부하 장졸에게 성대 유수를 명하고 돌아갔다. 이와무라 성 아래에 있던 니와 씨의 보리사 묘센지를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옮겼다.

2. 7. 폐문 칩거와 사면

1702년 5월, 번 내에서 오이에 소동(니와가 소동)이 발발했다.[1] 6월에 도당 30명이 처벌되었고, 우지오토는 정령 소홀을 이유로 폐문되었으며, 9천 석이 감해져 7월에 에치고국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이봉되어 폐문 칩거를 명령받았다.[1] 이와무라성은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이 지켰지만, 나에키 번주 도야마 도모하루와 시나노 이이다 번주 호리 지카카타가 니와 씨로부터 넘겨받았다.[1] 니와 씨의 남은 무사들은 이와무라성의 니다자카에서 퇴출되었다.[1] 호리 지카카타는 곧바로 돌아갔지만, 도야마 도모하루는 남아 잔무를 처리하고 가신 미야지 모리자에몬과 약간의 부하 장졸에게 성대 유수를 명하고 돌아갔다.[1] 이와무라성 아래에 있던 니와 씨의 보리사 묘센지를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옮겼다.[1]

같은 해 12월 24일, 우지오토는 폐문 칩거를 용서받았지만, 쇼군 쓰나요시에 대한 배알은 허락되지 않았다.[1] 1703년 4월 25일, 사면되었으나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 에도에 머물렀다.[1]

2. 8. 사망과 가문의 계승

호에이 2년 (1705년) 윤4월 7일, 에도에서 28세로 사망하였다. 아사쿠사의 가이운지에 매장되었으나, 절이 이전하여 현재는 스기나미구에 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니와 훈시가 말기 양자로 다카야나기 번주를 이었다. 이후 훈시는 하리마 미쿠사 번으로 이봉되었고, 잇시키 니와 씨의 미쿠사 번은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

3. 니와 가문 소동 (도당 사건)

겐로쿠 15년(1702년) 5월, 이와무라 번에서 막부에 야마무라 세헤에의 전횡을 호소하면서 오이에 소동(니와 가문 소동)이 발발했다. 같은 해 6월, 막부는 평정소를 통해 세헤에, 번주 우지오, 그리고 번 관계자 30명을 소집하여 심리했다.

막부는 "가신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도당을 맺어 소동을 일으켰다"고 판단하여 야마무라 세헤에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오히려 충신이라고 칭찬했다. 반면, 세헤에를 제거하려 했던 가신 30명은 부당하게 도당을 맺은 죄로 처벌받았다. 소를 제기한 주동자 아사이 신에몬, 타코 헤이조, 니시오 지타유, 스가 킨자에몬은 참수되었고, 쓰마키 고자에몬은 미야케지마로 유배되었으며, 나머지 25명은 이와무라 번에서 추방되었다.[1]

우지오는 내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1만 9천 석에서 9천 석을 몰수당하고, 에치고 쿠비키 군의 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영지를 옮기는 처벌과 함께 칩거를 명받았다. 이와 동시에, 니와 가문의 분가로 에나 군 노이 촌과 후지무라에서 1천 석을 다스리던 하타모토 니와 우지야도 에치고 쿠비키 군 내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1]

나에기 번주 도야마 도모하루와 시나노 이이다 번주 호리 지카카타는 막부의 명에 따라 이와무라 성을 인수했다. 도야마 도모하루는 히가시노 촌에서 호리 지카카타 일행과 만나 폭우와 뇌우를 뚫고 이와무라 성에 도착하여 니와 가문 잔당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고 성을 인수했다. 니와 씨의 잔당은 이와무라 성의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퇴거했다.

호리 지카카타는 이이다 성으로 돌아갔고, 도야마 도모하루는 남아 잔무를 처리한 후 가신에게 성을 맡기고 나에기 성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부터 9월까지 이와무라 번령은 가사마쓰 진야의 미노 군다이가 관리했다.[3] 미노 군다이는 이와무라령 내에 촉장을 내고, 니와 이즈미노카미(니와 우지오)가 부과한 모든 법도를 지키도록 명했다.

이후, 전 이와무라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히사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노리노리가 이와무라 번의 제8대 번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9월 7일,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신들이 이와무라 성을 인수했다.

3. 1. 소동의 배경

겐로쿠 15년, 이와무라 번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번의 중신들인 니와 사부로에(700석), 스즈키 겐타자에몬(500석), 니와 카쿠자에몬(350석), 혼조 요헤에 등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번주 우지오는 니와 카쿠자에몬의 동생인 야마무라 세헤에(250석)를 등용하여 재정 개혁을 맡겼다. 야마무라 세헤에는 뛰어난 재능으로 부국책을 제시하여 우지오의 신임을 얻었다.[1]

야마무라 세헤에는 먼저 검약을 강조하며 번사들의 녹봉을 줄이는 감록제를 시행했다. 또한, 밭 전세, 임야 전세 등 새로운 세금을 만들고, 여러 직공들에게 운상(세금)을 부과했다. 연공이 면제되었던 야부(개간지) 벌채에 대한 대가를 돈으로 납부하게 하고, 떡쌀과 콩을 상납하게 하는 등 세금 징수를 강화했다. 짐차, 가구, 가옥, 다다미, 자재 열쇠 등에 운상을 매기는 등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고, 대량의 말(升)을 만들어 금 조달을 늘렸다.

이러한 정책으로 몇 년 만에 번의 재정이 회복되어 부채를 상환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지만, 가혹한 정치에 백성들은 증세에 시달렸고 야마무라 세헤에에 대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에나 군 다케오리 촌의 촌장인 다나카 코이치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1리에 걸친 긴 둑을 만들어 이와무라 번에 보조금을 신청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2]

겐로쿠 14년 12월, 다나카 코이치로는 이와무라 번의 가혹한 정치에 대해 막부에 직접 호소하였고, 겐로쿠 15년 11월에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2]

3. 2. 야마무라 세헤에의 개혁 정치

겐로쿠 시대 니와 가문의 소동은 도당(徒黨) 사건, 야마무라 씨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702년(겐로쿠 15년), 이와무라 번은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나, 니와 우지오는 야마무라 세헤에를 등용하여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야마무라 세헤에는 번 재정 회복을 위해 검약을 중시하고, 번사들의 녹봉을 줄이는 감록제를 시행했다.[1] 또한, 밭, 임야 등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만들고, 여러 직공들에게 운상을 부과하는 등 공조 증징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번 재정이 회복되었지만, 가혹한 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에나 군 다케오리 촌의 촌장 다나카 코이치로는 백성들을 위해 막부에 직소했다가 처형되기도 했다.[2]

이후 야마무라 세헤에의 전횡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가신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오이에 소동(니와 가문 소동)으로 이어졌다.

3. 2. 1. 가혹한 정치와 백성들의 고통

겐로쿠 15년(1702년), 이와무라 번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니와 우지오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마무라 세헤에를 등용하여 재정 개혁을 맡겼다. 야마무라 세헤에는 번사들의 녹봉을 줄이고, 새로운 세금을 잇달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었다.[1] 밭, 임야, 여러 직공, 짐차, 가구, 가옥, 다다미, 자재 열쇠 등 거의 모든 것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다. 에나 군 다케오리 촌의 촌장 다나카 코이치로는 백성들의 곤궁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겐로쿠 14년(1701년) 12월, 이와무라 번의 가혹한 정치에 대해 막부에 직접 호소(직소)하였고, 이로 인해 겐로쿠 15년(1702년) 11월에 처형되었다.[2]

3. 3. 가신들의 반발과 도당 결성

겐로쿠 15년(1702년), 이와무라 번의 재정 개혁을 맡은 야마무라 세헤에는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쳐 번의 재정을 회복시켰지만, 이로 인해 백성들과 번사들의 원망을 샀다.[1] 특히 중신인 쓰마키 고자에몬은 세헤에의 전횡을 비판하며 30명의 가신들과 함께 도당을 결성하여 세헤에를 제거하려 했다.

겐로쿠 14년(1701년) 12월, 다케오리 촌의 촌장인 다나카 코이치로는 이와무라 번의 가혹한 정치에 대해 막부에 직접 호소했지만, 겐로쿠 15년(1702년) 11월에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2]

번주 니와 우지오는 가신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세헤에에게 잠시 물러날 것을 권했고, 세헤에는 에도로 떠났다. 그러나 이와무라 번 내의 세헤에 반대파는 막부에 세헤에의 전횡을 호소하며 오이에 소동(니와 가문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 막부는 세헤에를 무죄로 판결하고, 오히려 충신으로 칭찬했다. 도당을 결성한 가신 30명은 처벌받았고, 우지오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카야나기 번으로 이봉되었다.

3. 4. 우지오토의 대응과 막부 개입

우지오토는 야마무라 세헤에 반대파가 세헤에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이에 대한 결정을 미루면서 분규가 커졌다.[1]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우지오는 야마무라 세헤에를 불러 가문이 소란스러우니 잠시 물러나 있으라고 권했다. 우지오는 세헤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문 전체가 너에게 죄를 묻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하여 사실상 해임하고, 새로운 세금 제도를 철폐했다.[1]

야마무라 세헤에는 주군의 뜻을 이해하고 에도로 갔지만, 이와무라 번 내의 반대파에 분개하여 막부에 소장을 제출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5월, 이와무라 번에서도 막부에 야마무라 세헤에의 전횡을 호소하는 오이에 소동(니와 가문 소동)이 일어났다.[1]

같은 해 6월, 막부는 평정소에 의뢰하여 세헤에와 번주 우지오, 번 관계자 30명을 소집하여 심리했다. 그 결과, "가신들이 그 일에 의탁하여 사욕을 채우고, 서로 도당을 맺어 일을 일으키려 한다"며 야마무라 세헤에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충신이며, 가신들이 부당하게 도당을 맺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했다.[1] 막부에 소를 제기한 아사이 신에몬, 타코 헤이조, 니시오 지타유, 스가 킨자에몬은 참수되었고, 쓰마키 고자에몬은 미야케지마로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나머지 25명은 이와무라 번에서 추방되었다.[1]

우지오는 정치를 잘못하여 내란을 수습하지 못한 죄로 1만 9천 석에서 9천 석을 몰수당하고, 에치고 쿠비키 군의 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으며, 폐문 칩거를 명받았다. 동시에 니와 가문의 분가로 에나 군 노이 촌과 후지무라에서 1천 석을 다스리던 하타모토 니와 우지야도 에치고 쿠비키 군 내로 영지를 옮겼다.[1]

3. 5. 소동의 결과

겐로쿠 15년(1702년) 6월, 막부는 평정소에 니와 우지오와 야마무라 세헤에를 포함한 관계자 30명을 소집하여 심리했다. 막부는 야마무라 세헤에를 충신으로 평가하고, 그에게 죄를 씌우려 도당을 결성한 가신들을 처벌했다.[2] 도당 주모자 4명은 참수, 쓰마키 고자에몬은 미야케지마로 유배되었으며, 나머지 25명은 이와무라 번에서 추방되었다.

니와 우지오는 내란 수습 실패 책임을 물어 영지 9천 석을 몰수당하고, 에치고 쿠비키 군 다카야나기 번 1만 석으로 이봉 및 칩거 처분을 받았다. 니와 가문 분가였던 니와 우지야도 에치고 쿠비키 군 내로 지행소를 옮겨, 니와 가문은 사실상 몰락했다.[3]

3. 5. 1. 이와무라 번의 이후 상황

니와 우지오가 에치고 다카야나기 번으로 이봉된 후, 나에기 번주 도야마 도모하루와 시나노 이이다 번주 호리 지카카타가 막부의 명에 따라 이와무라 성을 인수했다.[3] 도야마 도모하루는 히가시노 촌에서 호리 지카카타 일행과 합류한 후, 폭우와 뇌우 속에서 밤을 새워 이와무라 성에 도착하여 니와 가문의 잔당에게 퇴거 명령을 전달하고 성을 인수받았다. 니와 씨의 잔당은 이와무라 성의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퇴거했다.

호리 지카카타는 이이다 성으로 돌아갔고, 도야마 도모하루는 잔무를 처리한 후 가신에게 성대 유수를 명하고 나에기 성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부터 9월까지 이와무라 번령은 가사마쓰 진야의 미노 군다이가 맡았다.[3] 미노 군다이는 이와무라령 내에 촉장을 내고, 니와 이즈미노카미(니와 우지오)가 부과한 모든 법도를 지키도록 명했다.

그 후, 전 이와무라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히사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노리노리가 이와무라 번의 제8대 번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9월 7일,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신들이 이와무라 성을 인수했다.

참조

[1] 문서 尾張藩では寛文元年(1661年)9月から実施されていた
[2] 서적 恵那市史昔話
[3] 서적 恵那市史史料編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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