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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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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치오는 1565년 교토에서 태어난 불교 승려로, 불수불시의(不受不施義)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했다. 1595년 호코지 대불 천승공양 참석을 거부하고 묘카쿠지를 떠났으며, 1599년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로 유배되었다. 23년간 유배 생활 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의 포교가 허용되었으나, 1630년 수포시파와의 대립 중 사망했다. 사후 신치 대론에서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유골까지 유배되었다. 저서로 『수호정의론』, 『금단방시론』, 『종의제법론』 등이 있다.

2. 생애

1565년 교토의 기모노 상인 쓰지 후지베의 아들로 태어나, 1574년부터 묘가쿠지(妙覚寺)의 닛덴(日典)을 스승으로 불법을 배웠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대한 출사 여부를 두고 수불시파(受不施派)와 대립했고, '불수불시'(不受不施)를 주장하며 묘카쿠지를 떠났다. 159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양회 참석 요청도 거절하고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에 유배되어 23년간 생활했다. 1623년 사면되었으나, 1630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 불수포시파(不受不施派)의 대립이 재연되는 와중에 입적하였다. 같은 해 에도 성에서 벌어진 대론(신치 대론) 결과,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고, 사망 후 그의 유골까지 유배되었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공양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을 통일한 자신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종교집단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는 사회 불안 요인으로 간주되었다.[1]

에도 막부로부터 금지된 불수불시파는 겉으로는 니치렌종이나 천태종, 선종을 믿는 척 가장하며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이들에 대한 탄압이 해제된 것은 1876년으로, 가쿠레키리시탄에 대한 금교령이 해제되고도 3년 뒤의 일이었다.[1]

2. 1. 초기 생애와 출가

1565년 7월 5일(에이로쿠 8년 6월 8일) 교토의 기모노 상인 쓰지 후지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4년(덴쇼 2년)부터 묘가쿠지(妙覚寺)의 닛덴(日典)을 스승으로 불법을 배웠다.[1]

2. 2. 불수불시 논쟁과 유배

1595년(분로쿠 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대한 출사 여부를 두고 혼만지(本満寺)의 닛추(日重) 등 수불시파(受不施派)와 대립했다. 니치오는 "불교도라 하여도 같은 니치렌종의 신도가 아니면, 상대가 설령 왕이라고 해도 그로부터는 시주나 공양을 받지도 설법을 베풀지도 않는다"는 불수불시의(不受不施義)를 주장하며 묘카쿠지를 떠나 단바 국 고이즈미에 은거했다.[1]

1599년(게이초 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양회 참석을 요청했으나, 니치오는 이에야스가 니치렌종 신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수불시'를 내세워 참석하지 않았다.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에 유배되어 23년간 그곳에서 생활했다.[1] 1623년(겐나 9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 전파가 허용되었다.

2. 3. 신치 대론과 죽음

1630년(간에이 7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 불수포시파(不受不施派)의 대립이 재연되었고, 이 와중에 닛코는 입적하였다. 같은 해 4월 양측은 에도 성에서 대론(신치 대론)을 벌였다. 그 결과 닛코는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금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다. 닛코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골까지 유배된 것으로 알려졌다.[1]

3. 사상과 영향

닛코는 불수불시(不受不施)의 원칙, 즉 니치렌종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는 공양이나 시주를 받지 않고, 그들에게 설법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1] 닛코는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이 원칙을 내세워 출사를 거부하고 묘카쿠지를 떠났다. 게이초 4년(1599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양회 참석 요청에도 같은 이유로 거절하여 쓰시마에 유배되었다.[1]

겐나 9년(1623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 전파가 허용되었으나, 간에이 7년(1630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의 대립이 재연되면서 닛코는 사망했다. 같은 해 에도 막부는 양측의 대론(신치 대론)을 열었으나, 닛코는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미 사망한 닛코의 유골까지 유배된 것으로 알려졌다.[1]

에도 막부는 닛코의 불수불시파를 사회 불안 요인으로 간주하고 탄압했다. 이는 종교 집단이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1] 불수불시파는 겉으로는 니치렌종, 천태종, 선종 등을 믿는 척하며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76년(메이지 9년) 가쿠레키리시탄에 대한 금교령이 해제되고 3년 뒤, 불수불시파에 대한 탄압도 해제되었다.[1]

4. 저서

守護正義論|수호정의론일본어, 禁断謗施論|금단방시론일본어, 宗義制法論|종의제법론일본어 등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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