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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엘라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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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비드 엘라자르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출신으로, 1940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제1차 중동 전쟁, 제2차 중동 전쟁, 제3차 중동 전쟁에 참전하여 골란고원 점령에 기여했으며, 1972년 이스라엘 방위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참모총장 재임 기간 중 리비아 여객기 격추 사건,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등에 대응했으며,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76년 수영 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욤 키푸르 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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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엘라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비드 엘라자르 (다도)
다비드 엘라자르 (다도)
본명다비드 엘라자르
별칭다도, 빅 D
출생일1925년 8월 27일
출생지사라예보, 유고슬라비아
사망일1976년 4월 15일
사망지텔아비브 야포, 이스라엘
군사 경력
소속팔마흐
복무 기간1942년–1973년
최종 계급[[File:IDF rav aluf rotated.svg|38px]] 라브 알루프(참모총장; 최고 계급)
지휘작전국장
참모총장
참전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수에즈 위기
6일 전쟁
욤 키푸르 전쟁
주요 보직
역대 보직[[File:HarelBrigade.svg|20px]] 네게브 여단 여단장
[[File:7thArmoredBrigade.svg|20px]] 제7기갑여단 여단장
[[File:Idf armored corps flag.svg|20px]] 기갑총감
북부사령부 사령관
[[File:Flag of IDF Chief of Staff.svg|20px]] 참모총장
주요 참전[[File:Independence war ribbon.svg|50px]] 제1차 중동 전쟁
[[File:Sinai war ribbon.svg|50px]] 제2차 중동 전쟁
[[File:Six day war ribbon.svg|50px]] 제3차 중동 전쟁
북부사령부 사령관
[[File:Hatasharibon.svg|50px]] 소모전
참모차장
[[File:Yomkippurribon.svg|50px]] 제4차 중동 전쟁
참모총장
기타 정보
관련 활동퇴역

2. 생애 및 경력

다비드 엘라자르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세파르디 유대인 혈통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유스 알리야 프로그램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하여 키부츠 아인셰머에 정착했다. 그는 곧 팔마흐에 입대했고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예루살렘의 산 시몬 수도원 전투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전투에서 싸웠다. 군인으로서 계급을 거쳐 하렐 여단의 하포르짐 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22]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 1956년 제2차 중동 전쟁 이후 기갑군단으로 옮겼다. 1961년 군단장 하임 바르레프의 부관을 거쳐 기갑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1964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다가[2] 1969년까지 북부 사령부 사령관으로 지냈다.[3]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그는 당시 시리아의 일부였던 전략적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4] 이틀 만에 점령을 감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엘라자르는 총참모부의 최고 운영 책임자로 일했다. 1972년 1월 1일, 그는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25]

1972년 5월 8일 사베나 항공 572편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엘라자르는 항공기 돌입 작전을 지휘하고 특수부대 사예레트 마트칼 대원에게 직접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불과 3주 후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9월에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발생했다. 엘라자르는 보복으로 시리아 및 레바논 영내의 PLO 거점에 대한 폭격을 명령했다. 1973년 4월에는 베이루트 시내의 PLO 및 검은 9월 간부들에 대한 습격 작전을 승인했다.[20]

1973년 5월경부터 엘라자르는 이집트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모셰 다얀 국방 장관 등은 전쟁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10월 6일 새벽, 공격이 있을 것을 확신한 엘라자르는 예비역 총동원과 공군기에 의한 선제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제한적인 예비역 동원만이 허가되었다.[21] 그날 오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으로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엘라자르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던 몇 안 되는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전쟁 후 이스라엘군의 손실과 기습 예측 실패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고, 엘라자르는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

군을 떠난 엘라자르는 ZIM 통합 해운 사업 회사의 이사로 취임하는 등 실업가로 활동했지만, 1976년 수영 중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엘라자르의 유해는 예루살렘헤르츨 언덕 군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다비드 엘라자르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세파르디 유대인 혈통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유스 알리야 프로그램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하여 키부츠 아인셰머에 정착했다. 곧 팔마흐에 입대했고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예루살렘의 산 시몬 수도원 전투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전투에서 싸웠다. 군인으로서 계급을 거쳐 하렐 여단의 하포르짐 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22]

하렐 여단 구성원들에게 연설하는 다비드 엘라자르. 1948년. 왼쪽에 라파엘 에이탄이 서 있다.


1962년 다비드 벤구리온과 다른 장교들. 오른쪽에 다비드 엘라자르가 있다.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 1956년 제2차 중동 전쟁 이후 기갑군단으로 옮겼다. 1961년 군단장 하임 바르레프의 부관을 거쳐 기갑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1964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다가[2] 1969년까지 북부 사령부 사령관으로 지냈다.[3]

2. 2. 군 경력

다비드 엘라자르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세파르디 유대인 혈통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유스 알리야 프로그램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갔고 키부츠 에인 셰메르에 정착했다. 그는 곧 팔마흐에 입대했고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예루살렘의 산 시몬 수도원 전투를 포함하여 많은 중요한 전투에서 싸웠다. 군인으로서, 그는 계급을 뛰어넘었고, 마침내 하렐 여단의 하포르짐 대대의 지휘관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엘라자르는 군대에 남아 1956년 제2차 중동 전쟁 이후 기갑군단으로 옮겼다. 1961년에는 군단장 하임 바레브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기갑군단의 사령관을 맡았다. 1964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다가[2] 1969년까지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지냈다.[3]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그는 당시 시리아의 일부였던 전략적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4] 이틀 만에 점령을 감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엘라자르는 총참모부의 최고 운영 책임자로 일했다. 1972년 1월 1일, 그는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5]

2. 3. 제3차 중동 전쟁(6일 전쟁)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엘라자르는 당시 시리아의 일부였던 전략적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24], 이틀 만에 점령을 감독했다.

이 무렵부터 요르단강으로부터의 취수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War over Water (Jordan river)|물의 전쟁영어), 이것이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엘라자르는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골란 고원 및 요르단강 서안 지역 북부 제압을 지휘했다.[18]

3. 참모총장 재임

엘라자르는 참모총장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중 하나는 리비아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여객기는 이스라엘 영공에 진입하여 응답하지 않았고,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의심되었다. 엘라자르의 직접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공군시나이반도 상공에서 격추하여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했다. 후에 이 여객기는 항해 실수를 한 민간 항공기(리비아 아랍 항공 114편)로 밝혀졌다.[26][27]

1973년 5월 27일, 이스라엘 방위군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예비군을 소집했으나, 이는 훈련으로 밝혀져 비상사태는 해제되었다. 이 사건은 참모진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집트군이 그해 욤 키푸르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러한 이집트군의 빈번한 기동은 실제 공격 시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한 이스라엘의 안일함을 유도하기 위한 정교한 책략의 일부였음이 분명해졌다.[28]

1973년 9월 13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항공기를 격추하려던 시리아 전투기 13대를 격추했다.[29]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엘라자르는 전쟁 발발 직전,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예비군 전면 소집과 선제공격을 주장했지만, 모셰 다얀 국방부 장관 등은 전쟁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결국 제한적인 예비군 소집만이 이루어졌고, 이스라엘은 기습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은 침략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시나이반도에서의 반격은 실패하고, 공군과 지상군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엘라자르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는 "제3차 유대인 연방의 파괴"를 언급하며 동요하던 모셰 다얀 등 정치 지도부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북부 전선에서는 시리아 국경 너머로 진격했고, 남부 전선에서는 아리엘 샤론 장군의 지휘 아래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입하고, 헤르몬 산을 탈환하며,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는 대가를 치렀다.

전쟁 후, 이스라엘군의 높은 사상자 수와 기습을 예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엘라자르는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

3. 1. 임명 및 초기 활동

엘라자르는 1972년 1월 1일 이스라엘 방위군 제9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19] 임기 중 그가 내린 결정 중 하나는 이스라엘 영공으로 들어와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리비아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비행기는 엘라자르의 직접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공군시나이반도 상공에서 격추해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했다. 나중에 이 여객기는 항해 실수를 한 민간 항공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26][27]

엘라자르는 임기 첫 몇 달 동안 테러에 대처하는 데 집중했다. 1972년 5월 30일, 일본 적군은 이스라엘의 주요 교통 중심지인 로도 공항에서 공격을 가해 민간인 25명이 사망하고 71명이 부상당했다 (로도 공항 학살). 같은 해 9월 5일, 또 다른 단체가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공격하여 뮌헨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엘라자르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기지를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명령했다. 시리아 전투기 3대가 격추되었고, 수십 명의 펠라힌이 맹렬한 포격으로 사망했다. 1973년 4월 9일 밤에서 10일 밤에 걸쳐 진행된 청춘의 샘 작전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은 베이루트에서 여러 명의 주요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암살했다.[6][7]

1973년 5월 27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예비군을 소집했다. 이는 훈련일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비상사태는 해제되었다. 이 사건은 참모진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집트군이 그해 욤 키푸르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집트군이 수행한 이러한 빈번한 기동은 실제 공격이 이루어질 당시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한 이스라엘의 안일함을 유도하기 위한 정교한 책략의 일부였음이 분명해졌다.[10]

1973년 9월 13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항공기를 격추하려던 시리아 전투기 13대를 격추했다.[11]

3. 2. 리비아 여객기 격추 사건

엘라자르가 재임 기간 동안 내린 결정 중 하나는 이스라엘 영공으로 이탈해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리비아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비행기는 엘라자르의 직접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공군시나이반도 상공에서 격추해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했다. 나중에 이 여객기는 항해 실수를 저지른 민간 항공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26][27]

3. 3. 1973년 5월 위기

1973년 5월 27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예비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이는 훈련일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비상사태는 해제되었다. 이 사건은 참모진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그들이 이집트군이 그해 욤 키푸르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28] 그러나 전쟁 이후, 이집트군이 수행한 이러한 빈번한 기동이 실제 공격이 이루어질 당시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한 이스라엘의 안일함을 유도하기 위한 정교한 책략의 일부였음이 분명해졌다.[10]

3. 4. 욤 키푸르 전쟁 (제4차 중동 전쟁)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엘라자르는 전쟁 발발 직전,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예비군 전면 소집과 선제공격을 주장했지만, 모셰 다얀 국방부 장관 등은 전쟁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결국 제한적인 예비군 소집만이 이루어졌고, 이스라엘은 기습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은 침략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시나이반도에서의 반격은 실패하고, 공군과 지상군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엘라자르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는 "제3차 유대인 연방의 파괴"를 언급하며 동요하던 모셰 다얀 등 정치 지도부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북부 전선에서는 시리아 국경 너머로 진격했고, 남부 전선에서는 아리엘 샤론 장군의 지휘 아래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발발 전, 이스라엘 영공을 침범한 리비아 여객기를 격추하여 1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6][27] 이 사건은 항해 실수로 인한 오인 격추로 밝혀졌지만, 엘라자르의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전쟁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입하고, 헤르몬 산을 탈환하며,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는 대가를 치렀다.

3. 4. 1. 전쟁 발발 이전

1940년, 사라예보 출신의 엘라자르는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압박 속에서 Youth Aliyah영어 운동을 통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했다. 그는 사마리아의 키부츠 Ein Shemer영어에 정착했고, 곧 팔마흐에 입대했다.[17]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엘라자르는 팔마흐의 Harel Brigade|label=하렐 여단영어 소속으로 label=예루살렘 전투영어에 참전했다. 1948년 5월 중대장, 7월 대대장으로 승진하며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 1950년대 초반 여러 요직을 거쳤고, 이스라엘 탈과 함께 히브리 대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17]

제2차 중동 전쟁에서 Harel Brigade|label=네게브 여단영어 여단장으로 참전한 엘라자르는 가자 지구 제압 및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Armored Corps (Israel)|label=기갑과영어로 전속을 결심, 1957년 가자 지구 철수 후 약 8개월간 전환 훈련을 받고 1958년 3월 제7기갑여단 여단장이 되었다. 1959년 4월에는 Haim Bar-Lev영어 기갑 총감의 부총감으로, 1961년 6월에는 기갑 총감으로 임명되었다.[17]

1964년, 대령으로 진급한 엘라자르는 북부군 사령관이 되었다.[17] 당시 요르단강 취수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 긴장(War over Water (Jordan river)|label=물의 전쟁영어)은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엘라자르는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골란 고원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 북부 제압을 지휘했다.[18]

1972년 1월 1일, 엘라자르는 이스라엘 방위군 제9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19] 5월 8일 사베나 항공 572편 납치 사건 발생 시, 엘라자르는 항공기 돌입 작전을 지휘하고 특수부대 사예레트 마트칼 대원에게 직접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5월 30일 일본 적군 멤버에 의한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이 발생했고, 9월에는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엘라자르는 보복으로 시리아 및 레바논 영내의 PLO 거점에 대한 폭격을 명령했다(1972 Israeli air raid in Syria and Lebanon영어). 1973년 4월에는 베이루트 시내 PLO 및 Black September Organization|label=검은 9월영어 간부 습격 작전(1973 Israeli raid on Lebanon영어)을 승인했다.[20]

1973년 5월경부터 엘라자르는 이집트의 전쟁 준비를 강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모셰 다얀 국방 장관 등은 전쟁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10월 6일 새벽, 공격을 확신한 엘라자르는 예비역 총동원과 공군 선제 공격을 요청했지만, 다얀 등의 반대로 제한적 예비역 동원만 허가되었다.[21]

3. 4. 2. 전쟁 발발 및 초기 대응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그 지휘부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21]

침략군을 막기 위한 격렬한 전투와 시나이 반도에서의 실패한 반격, 그리고 이스라엘 공군과 지상군의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지만, 결국 침략은 저지되었다. 전쟁 초기 며칠 동안, 엘라자르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사건 전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이스라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이는 특히 "제3차 유대인 연방의 파괴"를 언급했던 모셰 다얀을 비롯한 정치 지도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동시에, 전쟁은 특히 남부 전선에서 군 수뇌부 간의 심각한 개인적 차이를 부각시켰다. 전투 중 한 시점에서 엘라자르는 남부 사령관 슈무엘 고넨 소장을 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로 교체해야 했다. 그는 또한 최근 IDF에서 은퇴한 레하밤 제에비와 아하론 야리브 장군을 특별 고문으로 초빙했다.

1973년 5월 27일, IDF는 비상사태를 발표했고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예비군들이 소집되었다. 비상사태는 이것이 단지 훈련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취소되었다. 이 사건은 이집트군이 그해 말 욤 키푸르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 했기 때문에 총참모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집트인들에 의해 수행된 이러한 빈번한 기동은 실제 공격이 발생했을 당시 이집트군 움직임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이스라엘인들에게 만족을 유도하기 위한 정교한 계략의 일부임이 분명해졌다.[28]

1973년 9월 13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항공기를 격추하려고 시도했던 시리아 전투기 13대를 격추했다.[29]

3. 4. 3. 전황 반전

엘라자르가 재임 기간 동안 내린 결정 중 하나는 이스라엘 영공으로 이탈해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리비아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비행기는 엘라자르의 직접 명령에 따라 시나이반도 상공에서 이스라엘 공군이 격추해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했다. 나중에야 이 여객기는 민간 항공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항공기는 항해 실수를 저질렀다.[26][27]

1973년 5월 27일, IDF는 비상사태를 발표했고 이집트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예비군들이 소집되었다. 비상사태는 이것이 단지 훈련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취소되었다. 이 사건은 이집트군이 그해 말 욤 키푸르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 했기 때문에 총참모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집트인들에 의해 수행된 이러한 빈번한 기동은 실제 공격이 발생했을 당시 이집트군 움직임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이스라엘인들에게 만족을 유도하기 위한 정교한 계략의 일부임이 분명해졌다.[28]

9월 13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항공기를 격추하려고 시도했던 시리아 전투기 13대를 격추했다.[29] 욤 키푸르 당일 오후 2시,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여러 면에서 이는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그 지휘부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침략군을 막기 위한 일련의 격렬한 전투, 시나이 반도에서의 실패한 반격, 그리고 이스라엘 공군과 지상군의 막대한 손실 이후, 마침내 침략은 저지되었다. 10월 11일, 북부 전선에서의 전투는 시리아 국경 너머로 밀려났고, 10월 16일, 이스라엘군은 아리엘 샤론 장군의 지휘 아래 수에즈 운하를 건넜다.

전투 초기 며칠 동안 엘라자르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사건의 전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이스라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이는 특히 "제3차 유대인 연방의 파괴"에 대해 언급했던 모셰 다얀을 비롯한 정치 지도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동시에, 전쟁은 특히 남부 전선에서 군 수뇌부 간의 심각한 개인적 차이를 부각시켰고, 이러한 차이점 중 일부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전투 중 한 시점에서 엘라자르는 남부 사령관인 슈무엘 고넨 소장(일명 "고로디쉬")을 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로 교체해야 했다. 그는 또한 최근 IDF에서 은퇴한 레하밤 제에비와 아하론 야리브 장군을 특별 고문으로 초빙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IDF는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입했다. 전쟁 시작 시 이스라엘로부터 빼앗겼던 헤르몬 산은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다시 들어왔다. 남부 전선에서, 이집트 제3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포위되었고, 이스라엘군은 아리엘 샤론 장군의 비전통적인 전술로 싸우며 수에즈 운하 서안 남쪽 지역을 점령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상자를 낸 대가를 치렀다. 이집트는 여전히 운하 동쪽의 일부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주요 도시 중 어느 곳도 점령되지 않았다. 수에즈는 포위되었지만, 수에즈 전투는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로, IDF 병사 80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당했으며, 40대의 탱크가 파괴되었다.[14]

3. 4. 4. 전쟁 결과

전쟁 초기 며칠 동안 엘라자르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사건 전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인 몇 안 되는 이스라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제3차 유대인 연방의 파괴"를 언급했던 모셰 다얀 등 정치 지도부와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동시에 전쟁은 특히 남부 전선에서 군 수뇌부 간 심각한 개인적 차이를 부각시켰고, 이 중 일부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13] 전투 중 엘라자르는 남부 사령관 슈무엘 고넨 소장("고로디쉬")을 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로 교체해야 했다. 그는 또한 최근 IDF에서 은퇴한 레하밤 제에비와 아하론 야리브 장군을 특별 고문으로 초빙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IDF는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입했다. 전쟁 시작 시 이스라엘로부터 빼앗겼던 헤르몬 산은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다시 들어왔다. 남부 전선에서 이집트 제3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포위되었고, 이스라엘군은 아리엘 샤론 장군의 비전통적인 전술로 싸우며 수에즈 운하 서안 남쪽 지역을 점령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상자를 낸 대가를 치렀다. 이집트는 여전히 운하 동쪽의 일부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주요 도시 중 어느 곳도 점령되지 않았다. 수에즈는 포위되었지만, 수에즈 전투는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로, IDF 병사 80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당했으며, 40대의 탱크가 파괴되었다.[14]

3. 5. 아그라나트 위원회와 사임

이스라엘의 높은 사상자 수와 전쟁 준비 부족은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1973년 11월 21일, 전쟁 직후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발족되어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조사했다. 위원회는 수개월 동안 140차례 회의를 열고 수십 명의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다. 1974년 4월 1일, 위원회는 중간 보고서를 발표하여 "엘라자르는 상황 평가 및 이스라엘 방위군의 준비 상태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진다"며 엘라자르와 군사 정보 참모 엘리 자이라의 해임을 권고했다.[15]

엘라자르는 즉시 정부에 사임을 제출하며, 보고서가 정치 지도부에 대한 제재를 제안하지 않은 점과 전쟁 중 자신의 행동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임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모든 전술적 세부 사항을 감독하는 것은 참모총장의 역할이 아니다. 1967년 북부 전선 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참모총장에게 일반적인 계획을 제출했고, 상세한 계획을 받지 못했다... 위원회가 내가 10월 5일에 예비군을 소집했어야 한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장관은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예비군 소집을 생각하거나 제안한 참모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15]

1976년 4월 15일, 엘라자르는 수영 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예루살렘헤르츨 언덕에 묻혔다.[15]

4. 사망

1976년 4월 15일, 다비드 엘라자르는 수영을 하다가 심근 경색으로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루살렘 헤르츨 언덕에 묻혔다.[17]

5. 유산 및 평가

다비드 엘라자르는 이스라엘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로 남아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그가 전쟁 준비 실패에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대중들은 이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여론은 엘라자르가 위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올바른 전략적 결정을 내린 매우 유능한 전쟁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16]

이스라엘군 연구부 책임자인 아비에제르 야아리 장군은 엘라자르가 전투 초기에 내린 두 가지 결정이 이스라엘의 전술적 승리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첫째는 요르단이 전쟁에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요르단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사단 예비 병력을 골란 고원 지역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병력은 시리아군의 진격을 막고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째는 현장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에즈 운하 동쪽 제방에 방어 진지를 구축한 이집트군이 동쪽으로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시나이에서 추가 반격을 연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시나이 전투가 이스라엘에 유리한 조건에서 벌어져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이집트군의 저항을 약화시켰고, IDF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전쟁 말 이집트 제3군 대부분을 동쪽 제방에 가두는 반격을 가능하게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David Elazar | Israeli General, Chief of Staff, Six-Day War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8-23
[2] 웹사이트 David "Dado" Elazar https://web.archive.[...] Palmach.org.il 2010-11-10
[3] 서적 American Presidents and Jerusalem Lexington Books 2017
[4] 서적 Defending the Holy Land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6
[5] 웹사이트 David Elazar, The IDF's 9th Chief of Staff https://web.archive.[...] IDF Official Website
[6] 뉴스 Don't 'poke the bear' in Syria https://www.jpost.co[...] The Jerusalem Post 2018-10-06
[7] 웹사이트 David Elazar https://www.jewishpa[...] 2023-12-01
[8] 웹사이트 David Elazar 1925-1976 ninth Chief of Staff of the Israel Defence Forces https://www.united-a[...] 2023-12-01
[9] 웹사이트 David Elazar https://www.idf.il/e[...] 2023-12-01
[10] 웹사이트 David Elazar - IDF Chiefs of Staff https://en.israelmin[...] 2023-12-01
[11] 웹사이트 David Elazar {{!}} Israeli General, Chief of Staff, Six-Day War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12-01
[12] 웹사이트 David Elazar https://www.jewishvi[...] Jewish Virtual Library
[13] 뉴스 Wars are won by preparation and not by courage alone http://www.jpost.com[...] The Jerusalem Post 2017-04-08
[14] 서적 The Yom Kippur War: The Epic Encounter That Transformed the Middle East Schocken 2005-10-04
[15] 웹사이트 David Elazar http://www.ynet.co.i[...] Ynet Encyclopedia 2010-11-10
[16] 뉴스 What Could Have Been if Israel Had Prepared Differently 43 Years Ago? https://www.jpost.co[...] The Jerusalem Post 2016-10-25
[17] 웹사이트 David "Dado" Elazar https://web.archive.[...] Palmach.org.il 2010-11-10
[18] 서적 Defending the Holy Land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6
[19] 웹사이트 David Elazar, The IDF's 9th Chief of Staff https://web.archive.[...] IDF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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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인용 David Elazar {{!}} Israeli General, Chief of Staff, Six-Day War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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