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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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엘 샤론(1928-2014)은 이스라엘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이스라엘의 주요 전쟁에 참전하여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며, 국방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82년 레바논 전쟁 중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을 받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정책을 펼쳐 논란을 일으켰다. 2001년 총리 취임 후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에 대응하여 방어막 작전을 개시하고 이스라엘 서안 장벽 건설을 주도했으며, 2004년에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일부에서 이스라엘군과 유대인 정착민들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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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샤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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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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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aʁiˈ(ʔ)el ʃaˈʁon |
출생 이름 | 아리엘 샤이네르만 |
출생일 | 1928년 2월 26일 |
출생지 | 크파르 말랄, 영국령 팔레스타인 |
사망일 | 2014년 1월 11일 |
사망지 | 라마트간, 이스라엘 |
정치 경력 | |
직책 | 제11대 이스라엘 총리 |
임기 시작 | 2001년 3월 7일 |
임기 종료 | 2006년 4월 14일 |
대통령 | 모셰 카차브 |
이전 총리 | 에후드 바라크 |
다음 총리 | 에후드 올메르트 |
부총리 | 에후드 올메르트 |
장관 직책 | |
장관 임기 시작 | 1977년 |
장관 임기 종료 | 1981년 |
장관 직책 | 농업 |
장관 임기 시작 | 1981년 |
장관 임기 종료 | 1983년 |
장관 직책 | 국방 |
장관 임기 시작 | 1984년 |
장관 임기 종료 | 1990년 |
장관 직책 | 산업통상 |
장관 임기 시작 | 1990년 |
장관 임기 종료 | 1992년 |
장관 직책 | 주택건설 |
장관 임기 시작 | 1996년 |
장관 임기 종료 | 1999년 |
장관 직책 | 국가 기반 시설 |
장관 임기 시작 | 1998년 |
장관 임기 종료 | 1999년 |
장관 직책 | 외무 |
장관 임기 시작 | 2001년 |
장관 임기 종료 | 2003년 |
장관 직책 | 이민흡수 |
장관 임기 시작 | 2002년 |
장관 임기 종료 | 2003년 |
장관 직책 | 산업통상 |
장관 임기 시작 | 2002년 |
장관 직책 | 외무 |
장관 임기 시작 | 2003년 |
장관 직책 | 통신 종교 |
개인 정보 | |
정당 | 자유 (1973–1974) 슐롬치온 (1977) 리쿠드 (1977–2005) 카디마 (2005~) |
배우자 | |
자녀 | 3명 |
학력 | 히브리 대학교 텔아비브 대학교 |
직업 |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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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정보 | |
소속 | 하가나 이스라엘 방위군 |
복무 기간 | 1948–1974년 |
계급 | 알루프 (소장) |
부대 | 낙하산병 여단 101부대 골라니 여단 |
지휘 | 남부 사령부 낙하산병 여단 101부대 골라니 여단 |
전투 | 1947-1949 팔레스타인 전쟁 보복 작전 수에즈 위기 6일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리엘 샤론은 1928년 2월 26일, 당시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의 텔아비브 근처 유대인 협동 농업 정착지(모샤브)인 크파르 말랄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אריאל שיינרמן|아리엘 샤이너만he이었으며, 후에 샤론으로 개명했다. 그의 부모는 벨라루스 지역에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14][15]
10세 때 청소년 운동 하노아르 하오베드 베할로메드에 가입했으며, 14세인 1942년에는 준군사 청소년 조직 가드나와 지하 준군사 조직 하가나에 합류하여 활동했다.[16] 이는 아랍의 공격으로부터 유대인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로니 여단 소속 보병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전쟁 후 1952년에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중동 문화를 공부하는 한편, 군 정보 장교로도 활동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아리엘 샤론은 1928년 2월 26일, 당시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에 속해 있던 텔아비브 근처의 유대인 협동 농업 정착지(모샤브)인 크파르 말랄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אריאל שיינרמן|아리엘 샤이너만he이었으며, 나중에 샤론으로 개명했다.
그의 부모는 벨라루스 출신 유대인 이민자였다. 아버지 슈무엘 샤이너만(1896~1956)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으로 농학을 전공했고, 어머니 베라 샤이너만(결혼 전 성 슈나이로프, 1900~1988)은 모길레프 출신으로 의학을 공부했다.[14] 샤론의 부모는 조지아의 트빌리시(당시 티플리스)에 있는 대학에서 만났다. 그의 가족은 열렬한 시오니스트였으며, 샤론은 어머니로부터 "아랍인을 믿지 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전해진다.
샤론의 부모는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공산 정부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22년 제3차 알리야 시기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15] 그들은 사회주의적이고 세속적인 공동체인 크파르 말랄에 정착했다.[16] 샤론 자신도 평생 세속주의자로 남았다.[17] 팔레스타인에서 어머니 베라는 '드보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부모는 마파이 지지자였지만, 공동체의 모든 결정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특히 1933년 하임 아를로소로프 암살 사건 이후, 노동 운동의 반-개정주의적 비난 캠페인 참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역 건강 기금 클리닉과 마을 회당에서 추방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8]
샤론은 히브리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성장했다.[19] 그에게는 누나 예후딧(디타)이 있었다. 10세 때 청소년 운동 하노아르 하오베드 베할로메드에 가입했으며, 십대 시절에는 모샤브의 무장 야간 순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2년, 14세의 나이에 샤론은 준군사 청소년 조직인 가드나에 가입했고,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전신인 지하 준군사 조직 하가나에 합류하여 1948년까지 활동했다.[16]
2. 2. 청소년기 활동
아리엘 샤론은 1928년 2월 26일, 당시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에 속해 있던 농촌 공동체 모샤브인 크파르 말랄에서 태어났다.[14] 그의 원래 이름은 아리엘 샤이네르만(אריאל שיינרמן)이었다. 그의 부모는 제3차 알리야 시기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 이민자였다.[15][16]
10세가 되던 해, 샤론은 청소년 운동인 하노아르 하오베드 베할로메드에 가입했다. 십대 시절부터는 자신이 살던 모샤브의 무장 야간 순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2년, 14세의 나이로 준군사 조직 성격의 청소년 대대인 가드나에 합류했으며, 이후 지하 준군사 조직이자 훗날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모체가 되는 하가나에 가입하여 활동했다.[16] 이는 당시 아랍의 공격으로부터 유대인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3. 군 경력
아리엘 샤론은 1942년 14세의 나이에 유대인 준군사 조직인 하가나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140]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에 참전하여 중상을 입었고,[141] 잠시 군을 떠나 학업에 정진하기도 했다.[143]
1953년 군에 복귀하여 특수부대인 101 부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을 맡아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소탕 작전에서 명성을 얻었다.[141][143] 이후 이 부대는 1956년 제202 공수여단으로 개편되었고 샤론은 계속 지휘관을 맡았다.[141] 같은 해 제2차 중동 전쟁에서는 미틀라 고개 전투를 지휘하며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단적인 작전 수행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 논란의 중심에 섰다.[141][143][35]
이후 영국 유학을 거쳐 여러 지휘관 및 참모직을 역임하며 승진을 거듭했고, 1967년 소장(알루프)으로 진급했다.[141] 제3차 중동 전쟁에서는 기갑사단장으로서 시나이 반도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38] 전쟁 후 남부 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어 소모전 시기 여러 작전을 지휘했다.[141][40]
뛰어난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군 수뇌부와 갈등을 겪어 참모총장 진급에는 실패했고,[141] 1972년 군에서 잠시 물러났다.[143]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으로 복귀하여 기갑사단을 이끌고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6][45] 이 공적으로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작전 과정에서의 명령 불복종과 독단적 행동은 군 상층부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143] 결국 전쟁 후 군복을 벗고 정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140]
샤론의 군 경력은 이스라엘의 주요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뛰어난 군인이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명령 불복종과 독단성, 때로는 무모함으로 평가받는 작전 수행 방식으로 인해 끊임없는 논란을 동반했으며, 특히 아랍 측에서는 그를 무자비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군 경력 요약'''
연도 | 주요 경력 및 사건 |
---|---|
1942 | 하가나 입대 |
1948 | 제1차 중동 전쟁 참전 (알렉산드로니 여단 중대장), 라트룬 전투에서 중상 |
1953 | 제101 특수 사령부 초대 사령관 임명, 페다인 소탕 작전 지휘 |
1956 | 제202 공수여단 사령관으로 제2차 중동 전쟁 참전, 미틀라 고개 전투 지휘 (논란 발생) |
1957 | 영국 캠벌리 참모학교 유학 |
1964 | 북부 사령부 사령관 임명 |
1966 | 육군 훈련부장 임명 |
1967 | 소장 진급,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제38 기갑사단 지휘 (아부아게일라 전투 승리), 남부 사령부 사령관 임명 |
1972 | 군 퇴역 |
1973 | 제4차 중동 전쟁 발발로 현역 복귀, 제143 예비역 기갑사단 지휘,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 성공 (전쟁 영웅 부상 및 군 상층부와 갈등 심화) |
1974 | 최종 전역 |
3. 1. 1948년 전쟁과 예루살렘 전투
1942년, 14세의 나이로 유대인 준군사 조직인 하가나에 입대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샤론이 속한 하가나 부대는 1947년 가을, 예루살렘 전투가 시작되면서 격렬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도로 방어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의 부대는 크파르 말랄 인근의 아랍군을 상대로 공격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30명 단위의 부대로 아랍 마을, 다리, 기지 등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아랍 마을과 기지 사이의 이동로를 매복 공격했다.샤론은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기술을 익혔고, 점차 이러한 작전에 필요한 체력과 인내력을 키웠다. 끊임없는 전투의 스트레스 속에서 우리는 서로 더욱 가까워졌고, 단순한 군사 부대가 아니라 거의 가족처럼 운영되기 시작했다. ... [우리는] 거의 매일 전투를 치렀다. 매복과 전투가 이어져 마치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20]
비르 아다스(Bir Adas)에서 이라크군을 상대로 한 야간 기습 작전에서의 공로로 알렉산드로니 여단의 소대장이 되었다.[16]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함께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샤론이 이끄는 소대는 칼키야(Kalkiya)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는 강인하고 공격적인 군인으로 평가받으며 전쟁 중 빠르게 진급했다.

그러나 제1차 라트룬 전투에서는 포위된 예루살렘 유대인 공동체를 구출하려다 실패하고, 요르단 아랍 군단의 공격으로 사타구니, 복부, 발에 중상을 입었다. 샤론은 이 "끔찍한 전투"에서 자신의 여단이 139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적었다.
한편, 요르단의 하비스 마잘리(Habis Majali) 원수는 샤론이 당시 요르단 제4대대에 포로로 잡혔던 6명의 이스라엘 군인 중 한 명이었으며, 자신이 그들을 마프락(Mafraq)의 수용소로 데려갔다가 나중에 석방했다고 주장했다.[21] 샤론은 이 주장을 부인했지만, 마잘리는 단호했다. 그는 "샤론은 불곰과 같다"며 "나는 그를 9일 동안 포로로 잡았고, 그의 상처를 치료한 후 그의 하찮음 때문에 석방했다"고 말했다. 몇몇 고위 요르단 장교들도 마잘리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22][23] 1994년 요르단과의 평화 조약 서명식에서 샤론이 마잘리와 연락하려 했지만, 마잘리는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했다.[24]
라트룬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한 후, 샤론은 순찰대 지휘를 재개했다. 1948년 12월 28일, 그의 소대는 이라크-엘-만시아(Iraq-El-Manshia)의 이집트 요새를 돌파하려 했다. 이 시기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그에게 히브리식 이름인 "샤론"을 주었다.[25]
1949년 9월, 샤론은 골라니 여단 정찰 부대의 중대장으로 승진했으며, 1950년에는 중부 사령부의 정보 장교가 되었다. 이후 잠시 군을 떠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역사와 중동 문화를 공부했다. 샤론의 군 경력은 이후 불복종, 공격성, 반항적인 면모로 특징지어졌지만, 동시에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26]
3. 2. 101 부대

1953년[141], 이스라엘 방위군에 복귀한 샤론은 ''101 부대''[141]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01 부대는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이스라엘 최초의 소규모 특수 부대로,[143] 주요 임무는 요르단 강 서안 지구(웨스트뱅크) 및 가자 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인 ''페다인''에 대한 보복 공격과 섬멸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143] 샤론은 이 부대를 이끌고 페다인 근거지를 공격하는 임무에서 성과를 거두며 군 내부에서 점차 명성을 얻었다.[143]
그러나 1955년, 101 부대 대원들이 사적인 보복으로 수 명의 베두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샤론은 지휘 책임 문제로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140]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01 부대의 군사적 성과는 인정받아, 1956년에는 이스라엘군 최초의 공수 부대인 제202 공수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샤론은 대령으로 진급하여 이 부대의 사령관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141]
3. 3. 1956년 수에즈 전쟁
1956년 10월 발발한 제2차 중동 전쟁(수에즈 전쟁)에서 샤론은 이스라엘 방위군 최초의 공수 부대인 제202 공수여단을 이끌었다.[141] 그의 부대는 이집트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 중부의 미틀라 고개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모셰 다얀은 전투력을 보존하고 불필요한 교전을 피하라고 지시했다.[141][143]그러나 샤론은 미틀라 고개의 군사적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상관의 거듭된 불허에도 불구하고[33] '정찰'을 명목으로 고개의 상태를 확인하겠다며 소규모 정찰대를 보냈다. 이 정찰대가 이집트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고립되자, 샤론은 이를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141][143] 일부 전 부하들은 훗날 샤론이 의도적으로 이집트군을 자극하여 전투를 유발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샤론의 부대는 먼저 테메드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고,[34] 10월 30일에는 나클라 근처에서 에이탄의 부대와 합류했다.[35] 다얀은 고개 너머로의 진격을 계획하지 않았으나, 샤론은 독단적으로 제벨 헤이탄의 이집트군 진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35] 그는 이집트 제4기갑사단 병력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대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0월 31일 오후, 샤론은 모르데차이 구르가 지휘하는 보병 중대와 일부 AMX-13 탱크 등을 헤이탄 협곡으로 투입했다. 이집트군은 강력한 방어 진지에서 대전차포,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고, 구르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한때 고립되기도 했다.[36] 샤론은 추가 병력을 투입했고, 밤사이 이스라엘군은 협곡 벽을 타고 올라가 결국 이집트군을 격퇴하고 고지를 점령했다.
이 미틀라 고개 전투에서 이집트군 260명과 이스라엘군 38명이 사망했다.[35] 결과적으로 고개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낸 샤론의 독단적인 행동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샤론은 다얀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141][143] IDF 내부에서는 그의 무단 공격으로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35]
하지만 제1차 중동 전쟁 당시부터 현장 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샤론의 명령 불복종은 결국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았다.[143] 오히려 그의 용맹함은 군 내부에서 평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건국의 아버지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143]
3. 4. 6일 전쟁, 소모전, 욤키푸르 전쟁
1964년 이츠하크 라빈이 참모총장이 되면서 샤론은 다시 빠르게 승진하여 보병학교 사령관 및 육군훈련부장을 거쳐 소장(알루프) 계급에 올랐다.=== 6일 전쟁 ===


1967년 6일 전쟁 당시 샤론은 시나이 반도 전선에서 기갑사단인 제38사단을 지휘했다.[16] 그는 쿠세이마-아부아게일라 요새 지역에서 보병, 전차, 공수부대(헬리콥터 투입)를 결합한 독자적이고 복잡한 공세 작전을 펼쳐 이집트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샤론의 아부아게일라 전투 승리와 공세 전략은 군사 전략가들로부터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작전 지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8] 미국 육군 교육 및 교리 사령부 연구원들은 그의 작전 계획이 다수의 소규모 부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집트 방어선의 특정 지점을 공격하여 각 부대가 서로 지원하지 못하고 고립되도록 만든 혁신적인 전술이었음을 확인했다.[38] 샤론 자신도 이 전투가 자신이 오랫동안 개발하고 가르쳐 온 근접전, 야간 전투, 기습 공수 작전 등의 요소들을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37] 이 승리로 샤론은 이스라엘 국민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39]
=== 소모전 ===
샤론은 6일 전쟁 이후 이어진 소모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9년 그는 이스라엘 방위군 남부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사령관으로서 1969년 7월 29일 이스라엘 수중파괴대가 수에즈 만 북쪽 끝의 그린 아일랜드 요새를 급습하여 파괴하는 불무스 6 작전을 지휘했고, 9월 9일에는 수에즈 만 서쪽 해안을 따라 대규모 기습 작전인 라비브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작전에서는 노획한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를 상륙정을 이용해 투입하여 10시간 동안 이집트군을 공격했다.[40]
남부 사령관 이후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하자 샤론은 은퇴를 고려했으나, 메나헴 멘델 슈네어손 랍비가 만류하여 군에 남기로 결정했다.[41] 그는 1973년 8월까지 군에 복무하다가 은퇴했으며, 곧이어 리쿠드 정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다.[42]
=== 욤키푸르 전쟁 ===


1973년 10월 6일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샤론은 예비역 기갑사단인 제143 예비역 기갑사단 지휘관으로 현역에 복귀했다.[43] 그는 전쟁 초기부터 수에즈 운하 도하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샤론은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가젤 작전을 감행했다.[16] 이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어 이집트 제2군의 보급선을 위협했고, 이후 아브라함 아단 사단이 카이로 근처까지 진격하여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45] 샤론의 수에즈 운하 도하는 욤키푸르 전쟁에서 시나이 전선의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인 행동으로 평가받으며, 그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16][45] 머리에 붕대를 감은 그의 사진은 이스라엘 군사력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샤론의 독단적인 행동과 명령 불복종은 군 상층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특히 당시 남부 사령관이었던 슈무엘 고넨과는 극심한 불화를 겪었으며, 고넨은 샤론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143] 군사 재판에서 샤론의 행동이 군사적으로 효과적이었다고 판결했지만[45], 그의 정치적 입장과 독단성은 계속해서 논란이 되었고, 결국 1974년 2월 군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4. 정계 입문
1973년 군에서 은퇴한 아리엘 샤론은 정계에 입문하여, 보수 정당 연합인 리쿠드 창당을 도왔다.[16][31][52] 같은 해 욤 키푸르 전쟁에서의 역할로 주목받은 후 크네셋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16] 1974년 곧 사임하였다.
1975년에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안보 문제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1977년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의 정당인 슐롬치온을 창당하여 크네셋에 재입성했고, 선거 직후 리쿠드와 합당하여 메나헴 베긴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1977년~1981년)으로 임명되었다.[140] 농업부 장관 시절 그는 점령지 내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적극 추진했다.
1981년에는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83년까지 재임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샤론은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1982년 레바논 전쟁)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작전 범위를 베이루트까지 확대한 점과, 특히 1982년 9월 베이루트 외곽 사브라 및 샤틸라 난민 캠프에서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국내외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140] 결국 1983년 2월, 이스라엘 정부 조사위원회(카한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다.[16]
국방부 장관 사임 후에도 샤론은 정계에 남아 무임소 장관, 무역산업부 장관, 주택건설부 장관 등 여러 내각 직책을 역임했으며, 1999년에는 리쿠드 당수로 선출되었다.[140]
4. 1. 초기 정치 경력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샤론은 현대 이스라엘 노동당의 전신인 마파이의 이념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자유당에 합류했으며, 1973년 7월에는 헤루트, 자유당 및 기타 독립 세력을 통합하여 우파 정당인 리쿠드를 창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6][31][52] 샤론은 같은 해 11월에 예정된 1973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리쿠드의 선거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선거운동 시작 직후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샤론은 예비역으로 소집되어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1973년 총선에서 크네셋 의원으로 당선되었다.[16] 하지만 국회 활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140] 1974년 의원직을 사임했다.1975년 6월부터 1976년 3월까지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의 안보 문제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1977년 이스라엘 총선을 앞두고 정계 복귀를 모색했다. 처음에는 리쿠드로 돌아가 메나헴 베긴에게 도전하려 했으나, 당내 기반 확보에 실패했다. 이후 이스라엘 노동당과 중도주의 정당인 변화를 위한 민주 운동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샤론은 독자 노선을 선택하여 자신의 정당인 슐롬치온을 창당했고, 1977년 선거에서 2석을 확보했다. 선거 직후, 샤론은 슐롬치온을 리쿠드에 합병시키는 조건으로 베긴 정부에 참여하여 이스라엘 농림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140]
농림부 장관으로서 샤론은 구시 에무님과 같은 정착촌 건설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정착민 운동의 주요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장관직을 이용하여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등 점령지에 이스라엘 정착촌 네트워크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해당 지역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144] 샤론은 또한 저렴한 주택 공급이라는 명목 하에 정부 예산을 투입하여 정착촌 인프라를 구축하고 행정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5년 내에 8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서안 지구 정착촌으로 이주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1983년까지 서안 지구의 정착민 수는 두 배로 증가했다.[144] 이후 1981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는 데 샤론이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베긴 총리는 그를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4. 2. 장관직 역임
1973년 정계에 입문한 샤론은 보수 정당 연합인 리쿠드 창당을 돕고 크네셋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74년 사임했다. 1975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고, 1977년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정당인 슐롬치온을 창당하여 크네셋 2석을 확보했다. 선거 직후 슐롬치온을 리쿠드와 합병하고 메나헴 베긴 정부에 합류했다.[140]=== 농업부 장관 (1977년 ~ 1981년) ===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베긴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샤론은 구시 에무님과 같은 정착촌 운동을 적극 지원하며 점령지 내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주도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며[144],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수는 두 배로 증가했다.[144] 샤론은 정착촌 건설을 위해 인프라와 행정 서비스 예산을 확보하고, 5년 내 8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정착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144]
=== 국방부 장관 (1981년 ~ 1983년) ===
1981년 선거에서 리쿠드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베긴 총리에 의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중 샤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양국 장성들은 군사 정보와 전술을 공유했으며, 이스라엘은 오페라 작전과 같은 민감한 정보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공유했다.[53] 샤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양국 관계 심화를 약속했다.[54][55] 이러한 협력은 공동 핵실험 의혹, 나미비아에서의 협력 등으로 이어져 당시 이스라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가 되었다.[56]
1982년 6월, 샤론은 레바논 침공 작전인 '갈릴리 평화 작전'(1982년 레바논 전쟁)을 주도했다. 침공의 명분은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고브 피격 사건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지속적인 테러 공격이었다.[57][58][59] 샤론의 목표는 레바논 내 PLO의 기반을 제거하고 베이루트까지 진격하여 PLO를 축출하며, 친이스라엘적인 마론파 파랑주당의 바시르 게마엘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것이었다.[140] 작전 초기에는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게마엘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등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게마엘이 취임 직전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140]
게마엘 암살 이후, 파랑주당 민병대는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이루트 외곽의 사브라 및 샤틸라 난민 캠프에서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 시아파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사망자 수는 출처에 따라 460명[65][61]에서 최대 3,500명[62]까지 추정된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캠프를 포위하고 출입을 통제하며 파랑주당 민병대에 물류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66] 이스라엘군이 학살을 방관했거나 심지어 협력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샤론은 이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으며 '베이루트의 도살자'라는 오명을 얻었다.[67][140]
1983년 2월, 이스라엘 정부 조사위원회(카한 위원회)는 샤론에게 학살에 대한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고, 결국 샤론은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다.[140] 이 사건은 국제 여론과 이스라엘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베긴 정권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140]
=== 국방부 장관 사임 후 ===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샤론은 정계에 남아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다.
- 무임소 장관 (1983년 ~ 1984년)
- 무역산업부 장관 (1984년 ~ 1990년)
- 주택건설부 장관 (1990년 ~ 1992년)
이 기간 동안 샤론은 당시 총리이자 리쿠드 당수였던 이츠하크 샤미르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 당권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79] 특히 1990년 2월 리쿠드 중앙위원회 연설 도중 샤미르의 마이크를 빼앗아 "테러를 일소하는 데 누가 찬성합니까?"라고 외친 사건은 샤미르 지도부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었다.[79]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1996년 ~ 1999년)에서는 국가기반시설부 장관(1996년 ~ 1998년)과 외무부 장관(1998년 ~ 1999년)을 지냈다. 외무부 장관 시절인 1999년, 샤론은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잔혹한 개입주의"라고 비판하며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 모두 폭력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80][81] 그는 세르비아인들이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을 구출했던 역사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을 지지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82]
1999년 9월, 샤론은 리쿠드 당수로 선출되었다.
4. 3. 1982년 레바논 전쟁과 사브라-샤틸라 학살
1981년 선거 후, 메나헴 베긴 총리는 리쿠드의 근소한 승리에 대한 샤론의 공헌을 인정하여 그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140]국방부 장관으로서 샤론은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주도했다. 이 침공은 공식적으로는 남부 레바논에 기반을 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북이스라엘 공격[140] 및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고브 암살 시도[57][58] (실제로는 아부 니달 조직 소행)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PLO의 과거 테러 공격들을 근거로 침공을 정당화했다.[59] 샤론의 목표는 레바논 내 PLO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고[60], 시리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며, 친이스라엘 정권을 레바논에 수립하는 것이었다.[140] 작전명은 '갈릴리 평화 작전'이었으나, 샤론은 작전 범위를 베이루트까지 확대하여 PLO 지도부를 레바논에서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140] 이스라엘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인 파랑주당 지도자 바시르 게마엘을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게마엘은 취임 직전 암살당했다.[140]
게마엘 암살 이후, 1982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이루트 외곽의 사브라 지역과 인접한 샤틸라 난민캠프에서 파랑주당 민병대에 의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60][140] 이스라엘군이 캠프를 포위하고 출입을 통제하는[66] 상황에서 벌어진 이 학살로, 주로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 시아파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61] 희생자 수는 적게는 460명(레바논 정부 공식 집계)[65][61]에서 많게는 3,500명[62]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700~800명,[65] 팔레스타인 측은 2,000명 이상으로 추산했다.[65] 이스라엘군은 파랑주당이 캠프 내 잔류한 PLO 전투원을 소탕하도록 허용했다고 주장했으나,[64] 사실상 학살을 방조하거나 최소한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40] 파랑주당 사령관 엘리 호베이카가 학살을 주도했다는 증언도 있다.[69]
이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샤론은 "베이루트의 도살자"라는 오명을 얻었다.[67]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격렬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정부는 카한 위원회라는 공식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1983년 2월, 위원회는 샤론이 학살의 위험성을 예견하고도 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아 "개인적인 책임"(간접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결과 샤론은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으며,[140] 라파엘 에이탄 참모총장 역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140] 이 사건은 메나헴 베긴 총리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켜 정권 붕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140]
4. 4. 정치적 침체와 회복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 베이루트의 이스라엘군 점령 지구에서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에 의한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국내외의 비판을 받았다.[60][61][62] 1983년 2월, 이스라엘 정부가 임명한 카한 위원회(Kahan Commission)가 샤론에게 학살에 대한 "개인적 책임"(personal responsibility)은 없으나 "간접적 책임"(indirect responsibility)이 있다고 결론 내리고 국방부 장관직 사임을 권고하자, 그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16] 이후 무임소 장관 등 다른 내각 직책들을 맡으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1999년 샤론은 리쿠드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40] 당시 총리였던 노동당의 에후드 바락은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중재 하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2000년 9월 28일, 샤론은 1,000명이 넘는 이스라엘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의 성전산(하람 알샤리프)을 방문했다.[144]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스러운 이곳의 지배권 문제는 당시 평화 협상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샤론은 방문 중 성전산이 영구히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144] 이는 팔레스타인 측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팔레스타인 측은 샤론이 의도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성지를 방문하여 긴장을 고조시키고 진행 중이던 평화 협상을 방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방문 다음 날, 성전산에서는 대규모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고무탄과 실탄을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하고 약 200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경찰관 14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제2차 인티파다(알 아크사 인티파다)가 시작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44] 국제 조사 위원회인 미첼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샤론의 방문이 알 악사 인티파다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고, 선동적인 효과는 예견되었어야 했다"고 평가하며, 이후 이스라엘 경찰이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대해 치명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 사태 악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87] 반면, 샤론 지지자들과 일부 이스라엘 측에서는 야세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미 인티파다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샤론의 방문을 폭력 사태 개시의 구실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4][85][86] 이스라엘 정부가 임명한 오르 위원회(Or Commission) 역시 이스라엘 경찰이 폭동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으며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비판했다.
5. 총리 재임
제2차 인티파다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면서, 2001년 총선에서 샤론은 바락을 누르고 총리로 선출되었다.[16] 2003년 1월 총선에서도 샤론이 이끄는 리쿠드가 크네셋에서 제1당 지위를 유지하면서 샤론은 총리직을 연임했다.
총리 재임 중 샤론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2004년, 그는 가자 지구 전체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의 4개 유대인 정착촌에서 이스라엘군과 정착민을 철수시키는 일방적 철수 계획을 발표하고 2005년 8월부터 9월까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결정은 국제 사회와 이스라엘 내부 온건파의 지지를 받았으나, 샤론 자신이 속한 리쿠드 당내 강경파와 정착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결국 이 철수 계획을 둘러싼 당내 갈등으로 인해 샤론은 2005년 11월 리쿠드를 탈당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함께 중도 성향의 신당 카디마(קדימה|카디마he, "전진"이라는 뜻)를 창당했다. 카디마는 창당 직후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차기 총선 승리가 유력시되었으나,[152][153] 2006년 1월 샤론이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면서 그의 정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부총리였던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권한대행과 카디마 당수직을 승계하여 2006년 3월 총선을 이끌었고, 선거 승리 후 정식 총리로 취임했다.[93]
5. 1. 총리 선출과 초기 정책

에후드 바라크 정부가 제2차 인티파다 발발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아 붕괴한 후, 샤론은 2001년 2월 6일 총선에서 바락을 62% 대 38%라는 큰 표차로 누르고 총리로 선출되었다.[16] 총리 취임 후 샤론은 노동당에 리쿠드와의 연립 정부 참여를 제안했다.[16]
총리 취임 후 샤론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강경책과 외교적 접근을 병행하는 정책을 펼쳤다. 2001년 9월, 샤론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안 지구에 국가를 세울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처음으로 언급했지만,[16] 동시에 팔레스타인 측의 인티파다에 대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대응했다. 2001년 봄에는 서안 지구의 약 40%에 해당하는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해당 지역을 분단하는 모든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주권 하에 두는 서안 지구 분할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144] 또한,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여러 차례 침공하여 통행금지령을 발령하고 자치 정부 건물과 인프라를 파괴했으며,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을 라말라의 의장궁에 사실상 감금 상태에 두었다. 이는 오슬로 협정의 과정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144]
9·11 테러 이후 조성된 국제적인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는 샤론 정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샤론은 이를 명분 삼아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2002년, 이스라엘 내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급증하자 샤론은 대규모 군사 작전인 방어막 작전을 개시하고,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따라 이스라엘 서안 장벽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군사적 대응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는데, 2004년 5월 텔아비브 대학교 자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80%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88]

2003년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압승하면서 샤론은 총리직을 유지했다. 이후 샤론은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가 제안한 로드맵 평화 계획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마무드 아바스 당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와 대화를 시작하며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헌신을 밝혔다.

외교적으로 샤론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친러시아 성향으로 알려진 샤론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친이스라엘 성향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며 이스라엘-러시아 관계를 증진시켰다.[89] 2003년 9월에는 이스라엘 총리로는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양국 간 협력 강화 의지를 보였다.[90]
반면, 프랑스와의 관계는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문제로 인해 잠시 경색되기도 했다. 2004년 7월, 샤론은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증가를 이유로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즉시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을 촉구했다. 이 발언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용납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고, 프랑스 유대인 대표 단체인 CRIF도 프랑스 사회의 극심한 반유대주의에 대한 샤론의 주장을 부인했다. 이로 인해 예정되었던 샤론의 프랑스 방문이 연기되기도 했으나, 방문 시 샤론과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 모두 이 문제를 뒤로 미루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5. 2. 일방적 철수 계획

2001년 9월, 샤론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 강 서안에 자신의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처음으로 언급했다.[16] 이는 이전까지 그가 보여온 강경 노선과는 다른 태도 변화로, 향후 정책 전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2003년 5월, 샤론은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가 공동으로 제시한 로드맵 평화 계획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당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였던 마무드 아바스와 대화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샤론은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샤론의 강경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부시 미국 행정부가 중동 문제에 점차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샤론은 정책 방향의 수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3년 12월 18일, 헤르즐리아에서 열린 연례 안보 컨퍼런스에서 샤론은 가자 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149][150]
이후 2004년 2월, 샤론은 이스라엘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자 지구 전체와 요르단 강 서안 일부 지역에서 이스라엘군 병력과 유대인 정착민들을 철수시키는 '일방적 철수 계획'(Disengagement Plan)을 구체적으로 발표했다.[151] 다만, 이 계획은 가자 지구의 해안선과 영공에 대한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계속 유지한다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 내 노동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으로부터 분쟁 해결과 최종적인 평화 협정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받으며 환영받았다. 오랜 분쟁에 지친 이스라엘 국내 여론과 샤론과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던 미국의 부시 대통령 역시 이 계획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51]
그러나 국가 안보, 군사적 필요성 및 종교적 신념 등을 이유로 샤론이 당수로 있던 리쿠드당 내부와 다른 우파 정치 세력들은 이 계획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특히 리쿠드 당원의 60% 이상이 철수 계획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등[151]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샤론은 이러한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높은 여론 지지율을 바탕으로, 리쿠드 내 온건파와 노동당 등 좌파 세력의 협력을 얻어 철수 계획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2004년 12월 1일에는 정부의 2005년 예산안 처리에 반대한 중도 세속주의 정당 신우이 소속 각료 5명을 전격 해임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후 2005년 1월, 샤론은 리쿠드, 노동당, 메이마드, 데겔 하토라 등 다양한 성향의 정당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계획 추진 동력을 확보했다.
마침내 2005년 8월 16일부터 30일까지, 샤론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가자 지구에 위치한 21개의 정착촌과 요르단 강 서안 북부 지역의 4개 정착촌에서 총 9,480명에 달하는 유대인 정착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철수 작전을 실행했다. 이 과정은 정착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충돌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극단적인 보수파 랍비들, 특히 요세프 다얀과 같은 인물들은 샤론에게 고대 유대교의 저주 의식인 풀사 데누라(Pulsa diNura)를 행하며 그의 죽음을 기원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정착민 철수가 완료된 후, 이스라엘군은 일부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제외한 정착촌 내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했으며, 2005년 9월 11일 가자 지구에서 공식적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키수핌에 위치한 국경 검문소를 폐쇄했다.
가자 지구 철수 결정은 리쿠드당 내부와 정착민 운동을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샀지만, 당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유권자의 80% 이상이 샤론의 철수 계획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91]
철수 이후 리쿠드당 내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2005년 9월 27일, 가자 지구 철수에 항의하며 내각에서 사퇴했던 샤론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 베냐민 네타냐후가 당 대표직에 도전했으나, 샤론은 52% 대 48%라는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하며 당수 자리를 지켰다.
결국 이러한 당내 갈등 속에서 2005년 11월, 샤론과 그의 철수 계획을 지지하는 그룹은 리쿠드를 탈당하여 카디마(קדימה|카디마he, 히브리어로 "전진"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새로운 중도 성향 정당을 창당했다.[152][153] 카디마는 창당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이스라엘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예고했고, 샤론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는 듯 보였다.
5. 3. 카디마 창당
2004년 샤론은 가자 지구와 4개의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정착지에서 이스라엘군과 유대인 정착민을 철수시키는 일방적인 분리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05년 8월 정착민 철수와 9월 이스라엘군의 최종 철수로 완료되었다. 이 과감한 정책 전환은 샤론이 속한 리쿠드 당내 우익 세력과 연립 정부를 구성한 다른 우익 정당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46] 국제 사회의 압력과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변화된 중동 정책 기조를 읽은 샤론의 결단이었지만, 이는 결국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다.[146]결국 2005년 11월 21일, 샤론은 리쿠드 당수직을 사임하고 당을 떠나 카디마( קדימה|카디마he, "전진"이라는 뜻)라는 새로운 중도 성향 정당을 창당했다. 이 신당에는 리쿠드 내 샤론 지지 세력 일부와 노동당 일부가 합류했다.[146] 카디마 창당 직후 발표된 11월 여론조사에서는 샤론이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직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게 나타났으며, 카디마는 단숨에 지지율 1위 정당으로 떠올랐다.[92][146] 샤론의 오랜 정치적 경쟁자인 베냐민 네타냐후는 2005년 12월 20일 리쿠드의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92] 샤론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는 듯 보였고, 일각에서는 이례적인 장기 집권까지 예상했다.[146]
그러나 2006년 1월, 샤론은 갑작스러운 뇌졸중(뇌출혈)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정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146] 그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이스라엘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각국 언론은 병원 앞에서 생중계를 하고 각국 정상들이 위로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146] 샤론의 뇌졸중은 그가 새로운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일방적인 철수를 통해 "이스라엘을 서안 지구 대부분에서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할 것으로 해석되던 시점에 발생했다.[6][7][8]
샤론의 공백으로 부총리였던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권한대행 및 카디마의 임시 당수를 맡아 2006년 3월 총선을 이끌었다. 선거 결과, 카디마는 크네셋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제1당이 되었고, 올메르트는 정식 총리로 취임하여 새로운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93]
6. 퇴임 후
2006년 1월 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160] 이에 따라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대행을 맡았으며, 샤론은 이후 대장 허혈성 질환으로 수술을 받았다. 건강 문제로 인해 같은 해 봄에 치러진 크네세트 총선거에 출마하지 못했고(출마 등록에 본인 서명이 필요했음),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후 샤론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 인간 상태로 8년간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154] 2012년 11월 19일, 그의 차남 길라드는 『예루살렘 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가자 지구에 대한 초토화를 주장하며, 미국의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예로 들어 논란을 일으켰다.[155][156]
샤론은 건강이 악화되어 2014년 1월 1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0][161][157][158][159]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1월 13일 예루살렘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네게브 사막에 있는 샤론 가문의 농장에서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유해는 그곳에 안장되었다.[162]
6. 1. 질병, 무능력, 죽음
샤론은 1980년대부터 비만이었으며, 만성 고혈압과 고콜레스테롤혈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키 170cm에 체중은 115kg에 달했다고 전해진다.[99] 그의 식욕과 비만은 이스라엘에서 유명했으며, 본인도 이를 유머 소재로 삼곤 했다.[100] 차에는 간식, 보드카, 캐비어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4] 2004년 10월에는 방탄조끼를 입지 않는 이유에 대해 "내 사이즈에 맞는 것이 없다"고 농담하기도 했다.[101] 그는 매일 시가와 고급 음식을 즐겼으며, 의사, 친구, 직원들의 건강한 식단 권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2]
2005년 12월 18일, 샤론은 경미한 허혈성 뇌졸중으로 입원했다. 입원 중 심장 결함이 발견되어 2006년 1월 5일 심장 카테터 검사가 예정되었으나, 샤론은 즉시 업무에 복귀했다.[103] 그러나 1월 4일, 심장 시술을 하루 앞두고 심각한 출혈성 뇌졸중을 일으켜 예루살렘의 하다사 의료 센터로 긴급 후송되었다. 7시간과 14시간에 걸친 두 차례의 수술로 뇌출혈은 멈췄지만, 샤론은 혼수상태에 빠졌다.[103] 이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샤론은 12월 입원 당시 뇌 아밀로이드 혈관병증(CAA) 진단을 받았으며, 이 질환과 항응고제 병용이 1월의 심각한 뇌졸중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04]
샤론이 쓰러진 직후 에후드 올메르트 부총리가 권한대행 총리가 되었으나, 샤론은 공식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했다. 2006년 3월 크네셋 선거에서 올메르트와 샤론이 창당한 카디마 당이 승리했다. 다음 달인 4월, 이스라엘 내각은 샤론이 영구적으로 직무 수행 불능 상태라고 선언했고, 올메르트는 4월 14일 임시 총리가 되었으며 5월 4일 정식 총리로 취임했다.
샤론은 이후 여러 차례 추가 수술을 받았다. 2006년 5월, 그는 셰바 의료 센터의 장기 요양 시설로 옮겨졌다. 같은 해 7월에는 패혈증 치료를 위해 잠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가 11월 6일 장기 요양 시설로 돌아왔다. 샤론은 사망할 때까지 셰바 의료 센터에 머물렀다.[105][106][107] 의학 전문가들은 그의 인지 능력이 뇌졸중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108][109][110] 그의 상태는 2013년 후반부터 악화되었고, 2014년 1월 1일에는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111][112]
8년간의 혼수상태 끝에 샤론은 2014년 1월 11일 오후 2시 현지 시각(12시 UTC)에 사망했다.[113][114][160][161] 샤론의 국장은 유대교 장례 절차에 따라 1월 13일에 거행되었다. 그의 시신은 1월 12일부터 공식 장례식 전까지 크네셋 광장에 안치되었으며, 장례식은 네게브 사막에 있는 그의 가족 농장에서 치러졌다. 샤론은 그의 아내 릴리 옆에 묻혔다.[115][116][117][162]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7. 비판 및 논란
2013년 10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어 논란이 되었다.
7. 1. 사브라-샤틸라 학살 책임
1982년, 베긴 내각의 국방장관이었던 샤론은 레바논 침공을 지휘했다.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에 입성하여 PLO의 아라파트 의장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동맹 관계였던 레바논 기독교 마론파 민병대가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론은 국방장관으로서 이 학살을 막지 못하고 사실상 방관했다는 비판과 책임 추궁을 받았으며, 결국 다음 해인 1983년 국방장관직에서 사임했다.7. 2.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정책
1990년 샤미르 정권 하에서 주택 건설 장관을 역임하며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구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을 위한 정착촌 건설에 힘썼으며, 그 결과 정착민 규모는 2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1999년 리쿠드 당수가 된 샤론은 2000년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방문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제2차 인티파다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1년 3월 총리로 취임한 샤론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더욱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의 적대감을 유도하여 이스라엘 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46] 팔레스타인 측의 인티파다가 격화되자 샤론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대응했다.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여러 차례 침공하여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자치정부 건물과 인프라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오슬로 협정을 통해 구축된 팔레스타인 자치 구조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144]
2001년 봄에는 서안지구 영토의 약 40%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해당 지역을 분할하는 모든 유대인 정착촌은 이스라엘 주권 하에 둔다는 내용의 서안지구 분할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144] 같은 해,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테러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라말라에 있는 그의 의장궁을 포위하고 사실상 감금 상태에 두었다. 이스라엘 측은 테러 지령 문서를 압수했다고 발표했으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를 부인했다.[144] 2013년 10월에는 샤론이 총리 재임 시절 아라파트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는 샤론 정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샤론은 이를 명분 삼아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2003년 총선에서 압승한 후에는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분리 장벽 건설을 본격화하여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물리적 분리를 시도했다. 같은 해 국회 외교·국방위원회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점령'이라고 언급하며 로드맵 평화안을 수용하기도 했다.
샤론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은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에 유리한 평화" 또는 "팔레스타인에게 불리한 분쟁 지속"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이 이스라엘 중도층에 확산되면서 샤론에 대한 지지율은 급증했다.[146] 상황 악화로 인해 이스라엘 내 평화 세력은 입지를 잃었고, 강력한 지도력을 내세운 샤론만이 위기를 타개할 인물로 부상했다.[147]
그러나 샤론의 강경책은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고, 점차 중동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부시 행정부의 압력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 변화 속에서 샤론은 2005년 가자 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을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그의 기존 노선과는 다른 비둘기파적인 조치로 평가받았으나, 리쿠드 당내 우익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우익 정당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샤론은 리쿠드를 탈당하고 노동당 일부 세력과 합류하여 중도 성향의 신당 카디마를 창당했다.[146]
7. 3. 부정부패 의혹
샤론은 말년에 여러 재정 스캔들, 특히 그리스 섬 사건과 1999년 선거 운동 자금 모금 과정의 부정 행위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그리스 섬 사건에서는 샤론이 외무장관 재직 당시 이스라엘 사업가인 데이비드 애플의 그리스 섬 개발 프로젝트를 돕는 대가로, 샤론의 아들 길라드에게 거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1999년 선거 자금 모금 스캔들에서는 선거 운동 자금 모금 과정에서의 부정 행위가 문제되었다. 샤론 본인은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불법 행위로도 기소되지 않았으나,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아들 옴리는 기소되어 2006년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샤론의 아들들(길라드와 옴리)은 2002년 말, 러시아 농장 개발에 대한 컨설팅 계약 명목으로 3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스라엘 언론 하아레츠에 따르면, 이 자금은 러시아 국영 기업 가즈프롬의 유럽 사업 활동에 관여한 오스트리아인 로버트 노비코브스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자금 이체에는 동유럽에서 농업 관련 수출업을 하는 게텍스(Getex)라는 회사가 연관되어 있었다. 게텍스는 이스라엘 베이테이누 당에 100만달러 보증을 제공한 유리멕스(Jurimex)와 같은 건물에 비엔나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98] 2005년 12월 10일, 이스라엘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 사업가 마틴 슐라프의 아파트를 급습하기도 했다.[94][95][96][97] 12월 17일, 경찰은 샤론의 아들들에게 지급된 300만달러가 뇌물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직후 샤론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94]
이러한 조사들과 관련된 이해충돌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샤론은 2005년 새로운 검찰총장 메나헴 마주즈의 임명 확인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8. 유산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샤론은 여전히 매우 극단적인 견해가 대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가로 여겨지지만, 팔레스타인인들과 많은 언론 및 정치적 출처에서는 샤론을 전쟁 범죄자로 비난한다.[126][127][128] 국제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는 사브라 샤틸라 학살과 기타 학대 행위에 대한 그의 역할에 대해 샤론이 형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29][130][131]
텔아비브 근처에 있는 환경 공원인 아리엘 샤론 공원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32][133]
네게브 사막에는 현재 IDF가 훈련 기지 도시인 캠프 아리엘 샤론을 건설하고 있다. 총 500억이스라엘 신 셰켈 규모의 프로젝트[134]인 이 기지 도시는 아리엘 샤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활성 건설 프로젝트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IDF 기지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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