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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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는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한 후 토바 천황의 중궁인 후지와라 쇼시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고 불린 인물이다. 1142년 쇼시의 출가에 따라 출가하였으며, 킨요 와카슈 이후의 칙찬집, 우타아와세, 가집 『타이켄몬인 호리카와슈』에도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미나모토 씨의 일원이었으며, 스토쿠 천황을 아들로 두었다. 그녀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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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겐추쿄노무스메 (顕仲卿女) |
직업 | 시인 |
생애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사망일 | 알 수 없음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후기 |
아버지 | 미나모토노 아키나카 (源顕仲) |
경력 | |
섬긴 인물 | 다이켄몬인 (후지와라노 타마코) |
직책 | 뇨보 (女房) |
작품 | |
스타일 | 와카 |
수록집 | 금엽 와카집 (金葉和歌集) 시키 와카집 (詞花和歌集) 센자이 와카집 (千載和歌集) 신고킨 와카집 (新古今和歌集) 신칙센 와카집 (新勅撰和歌集) 백인일수 (百人一首) |
2. 생애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는 미나모토 씨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대납언(영의정) 후지와라노 킨자네였다.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사이인에서 물러난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하여 로쿠조라고 불렸고, 이후 토바 천황의 중궁인 타이켄몬인 후지와라 쇼시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코지 원년(1142년), 쇼시가 출가하자 동료인 타이켄몬인 주나곤과 함께 출가했다. 적어도 한 번은 결혼했으나 남편과는 사별했다. 『킨요 와카슈』이후의 칙찬집, 우타아와세 등 외에도 가집 『타이켄몬인 호리카와슈』에도 작품을 남겼다.
2. 1. 출생과 가계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는 미나모토 씨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당시 다이나곤(영의정)이었던 후지와라노 킨자네였다.[1] 그녀는 도바 천황의 비였던 다이켄몬인(Taikenmon'in)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는 이름을 얻었다.[1] 그 이전에는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사이인을 물러난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하여 로쿠조라고 불렸다.[1]1142년에는 주인이었던 다이켄몬인 (후지와라 쇼시)이 출가하자, 동료인 타이켄몬인 주나곤과 함께 출가했다.[1] 적어도 한 번은 결혼했지만 남편과는 사별했다.[1]
2. 2. 궁중 생활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사이인에서 물러난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하여 '''로쿠조'''라고 불렸다. 후에 토바 천황의 중궁인 타이켄몬인 후지와라 쇼시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코지 원년(1142년), 주인인 쇼시의 출가에 따라 동료인 타이켄몬인 주나곤과 함께 출가했다. 적어도 한 번은 결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과는 사별했다.2. 3. 출가
1142年일본어년, 그녀는 자신이 세운 사찰인 호콩고인(Hōkongō-in)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이는 스토쿠 천황이 유배되었을 때, 그녀 또한 포함되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그녀는 도바 천황의 비였으며, 다이켄몬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미나모토 씨의 일원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킨자네는 당시 대납언(大納言, 영의정)이었다. 그녀는 "아키히토(Akihito)"로도 알려진 "스토쿠(Sutoku)"라는 아들 한 명을 두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인 "호리카와(Horikawa)"는 의례국의 수녀로 봉사했을 때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사이인을 물러난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하여 '''로쿠조'''라고 불렸다. 후에 토바 천황의 중궁인 타이켄몬인 후지와라 쇼시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코지 원년(1142년)에 주인인 쇼시의 출가에 따라 동료인 타이켄몬인 주나곤과 함께 출가했다. 적어도 한 번은 결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과는 사별했다. 『킨요 와카슈』이후의 칙찬집, 우타아와세 등 외에도 가집 『타이켄몬인 호리카와슈』에도 작품을 남겼다.
2. 4. 결혼과 사별
시라카와 상황의 황녀이자 사이인에서 물러난 니조 오미야 레이시 내친왕에게 출사하여 '''로쿠조'''라고 불렸다. 후에 토바 천황의 중궁인 타이켄몬인 후지와라 쇼시에게 출사하여 '''호리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코지 원년(1142년)에 주인인 쇼시가 출가하자, 동료인 타이켄몬인 주나곤과 함께 출가했다. 적어도 한 번은 결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과는 사별했다.3. 작품 활동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
長からむ心もしらず黒髪の|みだれてけさは物をこそ思へ|nagakaran kokoro mo shirazu kurokami no midarete kesa wa mono o koso omoe|얼마나 오랫동안 내 마음이 얽혀 있었는지 알 수 없네... 하지만 오늘 아침, 흐트러진 내 검은 머리카락은 미쳐있는 상태로 놓여 있고, 이제 나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네...일본어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는 칙찬집(勅撰集), 정수 가(定数歌)・가합(歌合), 그리고 사집(私家集)을 남겼다.
칙찬집(勅撰集)의 경우, 금엽화가집(金葉和歌集)에 6수, 사화화가집(詞花和歌集)에 2수, 천재화가집(千載和歌集)에 15수,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에 2수 등 여러 가집에 그녀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정수 가(定数歌)・가합(歌合)에서는 다이지(大治) 연간(1126년~1128년)에 열린 섭정좌대신충통가합(摂政左大臣忠通歌合), 서궁가합(西宮歌合), 남궁가합(南宮歌合), 주길가합(住吉歌合) 등과 구안(久安) 6년(1150년) 구안백수(久安百首)에 참여했다.
사집(私家集)으로는 『대현문원호리카와집(待賢門院堀河集)』(『호리카와집(堀河集)』)이 있으며, 보충을 포함하여 165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집은 소규모 자선가집에 구안백수(久安百首) 영가(詠歌)가 추가된 것이다.
3. 1. 칙찬집(勅撰集)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가 수 |
---|---|---|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 | ||
금엽화가집(金葉和歌集) | 전제원육조(前斎院六条) | 6 |
사화화가집(詞花和歌集)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 2 |
천재화가집(千載和歌集)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ほりかは)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待賢門院のほりかは) | 15 |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 2 |
신칙선화가집(新勅撰和歌集)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3 |
속후선화가집(続後撰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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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습유화가집(続拾遺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호리카와(堀河) | 4 |
신후선화가집(新後撰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옥엽화가집(玉葉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호리카와(堀川) | 5 |
속천재화가집(続千載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속후습유화가집(続後拾遺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풍아화가집(風雅和歌集) | ||
신천재화가집(新千載和歌集)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 1 |
신습유화가집(新拾遺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신후습유화가집(新後拾遺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신속고금화가집(新続古今和歌集) | 다이켄몬인 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3. 2. 정수 가(定数歌)・가합(歌合)
명칭 | 시기 | 작가명 표기 | 비고 |
---|---|---|
섭정좌대신충통가합 | 다이지(大治) 원년 8월 (1126년 8월 또는 9월[1]) | 호리카와(堀河), 호리카와(堀川) |
서궁가합 | 다이지 3년 8월 29일 (1128년 9월 25일) | 백경녀(伯卿女), 백녀(伯女) |
남궁가합 | 다이지 3년 9월 21일 (1128년 10월 16일) | 백녀(伯女) |
주길가합 | 다이지 3년 9월 28일 (1128년 10월 23일) | 백녀(伯女) |
구안백수 | 구안(久安) 6년 (1150년) | 대현문원(待賢門院) 호리카와(堀川) |
3. 3. 사집(私家集)
그녀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長からむ心もしらず黒髪のみだれてけさは物をこそ思へ|naga kara mu kokoro mo shirazu kurokami no midarete kesa wa mono o koso omoe|
"얼마나 오랫동안 내 마음이 얽혀 있었는지 알 수 없네... 하지만 오늘 아침, 흐트러진 내 검은 머리카락은 미쳐있는 상태로 놓여 있고,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네..."일본어
; 칙찬집(勅撰集)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가 수 |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가 수 |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가 수 | ||
---|---|---|---|---|---|---|---|---|---|---|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 | 금엽화가집(金葉和歌集) | 전제원육조(前斎院六条) | 6 | 사화화가집(詞花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 2 | ||||
천재화가집(千載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ほりかは) 대현문원노호리카와(待賢門院のほりかは) | 11 1 3 |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 2 | 신칙선화가집(新勅撰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2 | ||
속후선화가집(続後撰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7 | 속고금화가집(続古今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호리카와(堀川)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3 1 2 | 속습유화가집(続拾遺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호리카와(堀河) | 3 1 | ||
신후선화가집(新後撰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옥엽화가집(玉葉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호리카와(堀川) | 4 1 | 속천재화가집(続千載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
속후습유화가집(続後拾遺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2 | 풍아화가집(風雅和歌集) | 신천재화가집(新千載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川) | 1 | ||||
신습유화가집(新拾遺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신후습유화가집(新後拾遺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신속고금화가집(新続古今和歌集) | 대현문원호리카와(待賢門院堀河) | 1 |
; 정수 가(定数歌)・가합(歌合)
; 사집(私家集)
- 『대현문원호리카와집(待賢門院堀河集)』(『호리카와집(堀河集)』) 보충을 포함하여 165수
- * 처음에 있던 소규모 자선가집에, 구안백수(久安百首)를 위한 영가(詠歌)가 추가된 것이 원형.
4.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
그녀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
원문 | 長からむ心もしらず黒髪のみだれてけさは物をこそ思へ |
---|---|
독음 | nagakaran kokoro mo shirazu kurokami no midarete kesa wa mono o koso omoe일본어 |
해석 | "얼마나 오랫동안 내 마음이 얽혀 있었는지 알 수 없네... 하지만 오늘 아침, 흐트러진 내 검은 머리카락은 미쳐있는 상태로 놓여 있고,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네..." |
: 80번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일본어의 나카카라무 코코로모 시라스 쿠로카미노 미다레테 케사오 모노오 코소 오모에일본어라는 이 시는 『센자이 와카슈』 권 제13 연가 3에 수록되어 있다. 백인일수 굴지의 관능적인 연가로 알려져 있지만, 큐안 백수의 제목으로 읊어진 것이므로, 현실적인 연애 체험 그대로의 노래가 아니라,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쳐 나이가 들어 비구니가 된 작가가 기교적으로 그려낸 연애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다음날 아침의 노래이지만, 그 전 장면을 소재로 한 노래에도 "검은 머리카락", "흩날림"을 새벽의 이별과 결부시키는 착상이 보인다.
쿠로카미노 와카레오 오시미 키리키리스 마쿠라노 시타니 미다레 나쿠 카나일본어라는 시는 『다이켄몬인 호리카와슈』에 수록되어 있다.
5. 일화
- 정향(丁子) 머리의 향기가 드리우려나 다이켄몬인 호리카와
- 주인이었던 다이켄몬인이 세상을 떠난 후, 뇨보(女房, 궁녀)들은 다카쿠라 산조제(高倉三条第)에서 다음 해까지 상복을 입었다. 사이교가 "저 분은 어디로 가셨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것을 알 수 있다면 나도 따라갔을 텐데"라고 답했다.
- 주인이 없는 호킨곤인(法金剛院)을 방문하여, 쓰르라미 소리에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 쓰르라미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니 호리카와
- 스토쿠 천황의 행행(行幸) 때 호킨곤인이 가장 화려했던 때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 구름 위의 별인가 보이는 국화이기에 하늘에 지는 가을을 알겠네 다이켄몬인 호리카와
-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남편이 죽자 슬픔에 잠긴 어린아이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말할 수도 없이 슬픈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 아이는 아버지에게 맡겨 양육했다. 신기백 겐추(顯仲)에게 기르던 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보냈다.
: 자날의 소나무를 따라 늙은 나무의 천년을 벗 삼아 기원하리 다이켄몬인 호리카와
- 사이교(西行)에게 무시당하고 지나갔다고 화를 내보인 호리카와지만, 자신도 카스가 묘진(春日明神) 앞을 그냥 지나쳐버린 적이 있다.
6. 관련 작품
참조
[1]
문서
和暦
[2]
문서
당시엔 堀川와 堀河이 발음이 같아 구분하지 않았다. 다만 堀川는 전대, 堀河는 후대에 주로 사용한다.
[3]
서적
待賢門院堀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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