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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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은 757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나라마로는 743년 쇼무 천황의 병환을 틈타 기문왕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고켄 천황 즉위 후 나카마로가 권력을 잡자 다시 반란을 계획했다. 757년, 나라마로는 나카마로를 제거하고 황태자를 폐위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주동자들은 처형되고 연루된 많은 이들이 처벌받았다. 이 사건으로 나카마로는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했지만, 이후 나카마로 역시 몰락하며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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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켄 천황 - 준닌 천황
쇼무 천황의 유언으로 고켄 천황에 의해 황태자가 되어 즉위했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실권이 있었고, 고켄 상황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어 유배 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천황으로 복권된 일본 제47대 천황이다. - 고켄 천황 - 고묘 황후
고묘 황후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로, 신하의 딸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되어 후지와라 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쇼무 천황의 황후로서 고켄 천황을 낳고 불교 신앙심을 바탕으로 도다이지 건립을 후원하고 자선 시설을 운영하며 사회 복지에도 힘쓴 나라 시대의 황후이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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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의 난 (橘奈良麻呂の乱) |
다른 명칭 | 고닌의 변 (五胡乱) 고닌의 대역 (五胡大逆) |
발생 시기 | 덴표호지 4년 (天平宝字4年, 760년) 음력 7월 |
장소 | 일본 |
원인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 국가 정치 방향에 대한 이견 |
주요 참가자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 (橘奈良麻呂) 오토모노 야카모치 (大伴家持) 사에키노 이마에미시 (佐伯今毛人)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 (石上宅嗣) 후나노 왕 (船王) 황족, 귀족, 승려 등 |
결과 | 반란 계획 발각 및 주동자 체포 관련자 처형 및 유배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강화 |
배경 | |
시대적 배경 | 나라 시대 (奈良時代) |
정치적 상황 | 후지와라 씨 (藤原氏)의 권력 독점 심화 도쿄 천도 (平城京遷都) 이후 정치적 불안정 덴표 시대 (天平時代)의 사회 혼란 |
인물 배경 | 다치바나노 모로에 (橘諸兄)의 아들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의 몰락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藤原仲麻呂)의 권력 장악 |
주요 인물 |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 | 모반 계획의 주도자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몰락한 귀족 세력의 대표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 당시 권력의 핵심 인물 효겐의 난 (恵美押勝の乱)을 통해 권력 강화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 일파를 탄압 |
오토모노 야카모치 | 만요슈 (万葉集) 편찬자로 알려진 귀족 모반 계획에 가담했다가 처형 |
기타 관련 인물 | 사에키노 이마에미시: 모반 계획 가담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 모반 계획 가담 후나노 왕: 모반 계획 가담 |
전개 과정 | |
발단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 일파의 모반 계획 수립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 표출 |
계획 | 효겐의 난 (恵美押勝の乱)을 틈타 거병 계획 동궁의 폐위를 모의 효겐을 제거하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려 함 |
발각 | 모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 밀고자에 의해 계획이 누설됨 |
체포 및 심문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를 비롯한 관련자 체포 가혹한 심문 과정에서 모반 사실 자백 |
결과 및 영향 | |
처벌 | 다치바나노 나라 마로, 오토모노 야카모치 등 처형 관련자 유배 및 관직 박탈 |
정치적 영향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더욱 강화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심화 고닌 정권 (孝謙朝)의 안정화 |
역사적 평가 | 후지와라 씨 권력 강화의 계기 덴표 시대 정치적 혼란의 단면 만요슈 (万葉集)를 통해 오토모노 야카모치의 삶 재조명 |
관련 유물 및 유적 | |
유적지 | 사건 관련 유적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음 |
관련 유물 | 관련 유물은 전해지지 않음 |
참고 문헌 | |
서적 | 쇼쿠니혼기 (続日本紀) 만요슈 (万葉集)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藤原仲麻呂) 효겐의 난 (恵美押勝の乱) 오토모노 야카모치 (大伴家持) 쇼쿠니혼기 (続日本紀) |
2. 사건의 배경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아버지 다치바나노 모로에는 쇼무 천황 치세에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743년(덴표 15년), 쇼무 천황이 병으로 쓰러지자, 나라마로는 기문왕을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로 세워져 있었지만, 나라마로는 남성 황위 계승자를 원했다.
755년(덴표쇼호 7년), 모로에가 조정을 비방했다는 밀고가 있었으나, 쇼무 상황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756년 2월, 모로에는 사직했고, 5월에는 쇼무 상황이 붕어했다. 757년 1월, 모로에가 사망했다. 나라마로의 계획과 모로에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1][2][3][4]
2. 1. 정치적 갈등
749년(덴표쇼호 원년), 쇼무 천황이 양위하고 고켄 천황이 즉위하자, 고묘 황태후의 신임을 받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시비중대의 장관(시비령)에 임명되었다.[1] 나카마로는 고켄 천황에게서도 총애를 받아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한편, 다치바나노 모로에 부자는 고켄 천황 즉위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점차 세력이 쇠퇴했다.757년 3월, 도조 왕이 고켄 천황의 불만을 사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3] 4월, 고켄 천황은 여러 신하를 모아 다음 황태자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후지와라노 도요나리와 후지와라노 나가테는 시오야키 왕을, 후미야노 지누와 오토모노 고마로는 이케다 왕을 추천했다. 그러나 나카마로는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고 답했다. 고켄 천황은 닛타베 친왕의 아들인 도조 왕이 폐위되었으니, 도네리 친왕의 아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후네 왕과 이케다 왕은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고, 시오야키 왕은 쇼무 천황의 불만을 산 적이 있어 부적절하다고 하며, 오이 왕(준닌 천황)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선언했다. 사실 오이 왕은 나카마로가 뒤에서 후원하던 인물이었다.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계획했다.[5]
2. 2. 나라마로의 불만
749년(덴표 21년/덴표감보 원년/덴표쇼호 원년), 쇼무 천황이 양위하여 고켄 천황이 즉위하자, 천황의 어머니인 고묘 황태후에게 신임을 받던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시비중대의 장관(시비령)에 임명되었다. 나카마로는 고켄 천황에게서도 총애를 받아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1] 한편, 아베 내친왕의 황위 계승에 비판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다치바나노 모로에 부자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755년(덴표 쇼호 7년), 모로에의 측근 사미노 미야모리로부터, 모로에가 술자리에서 조정을 비방했다는 밀고가 있었다. 쇼무 상황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756년(덴표 쇼호 8년) 2월, 모로에는 이 사건을 부끄럽게 여겨 사직했다. 같은 해 5월 2일, 쇼무 상황이 붕어하고, 유언에 따라 도조 왕이 태자가 되었다.
757년(덴표 쇼호 9년) 1월, 은퇴했던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실의 속에 74세로 사망했다. 같은 해 3월, 도조 왕이 고켄 천황의 불만을 사 폐위되었다. 4월, 천황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다음 황태자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후지와라노 토요나리와 후지와라노 나가테는 시오야키 왕을, 후미야노 치누와 오토모노 코마로는 이케다 왕을 추천했다. 그러나 나카마로는 "신하의 일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군주입니다"라고 말하며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천황은 닛타베 친왕 또는 토네리 친왕의 아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언급하며, 닛타베 친왕의 아들인 도조 왕이 이미 황태자였으나 폐위되었으므로 토네리 친왕의 아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후네 왕과 이케다 왕은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고, 시오야키 왕은 쇼무 천황의 불만을 산 적이 있어 부적절하다고 하며, 오이 왕(준닌 천황)을 태자로 세울 것을 선언했다. 사실 오이 왕은 나카마로가 뒤에서 후원하던 인물이었다(『속일본기』 덴표 호지 원년 4월 신사 조항).
결국,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계획했다.[5]
3. 사건의 전개
758년(덴표호지 2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이 사건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나카마로는 오이 왕을 준닌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보(우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에미노 오시카츠라는 이름을 받았다. 760년(덴표호지 4년)에는 태사(태정대신)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켄 상황의 총애가 유게노 도쿄에게 옮겨가면서, 764년 (덴표호지 8년) 나카마로는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일족과 함께 멸망했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3. 1. 초기 모의 (743년 ~ 756년)
743년(덴표 15년), 쇼무 천황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기문왕을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황녀인 아베 내친왕(고켄 천황)이 이미 황태자로 정해져 있었지만, 나라마로는 "황위를 계승할 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남성 황위 계승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749년(덴표 21년/덴표 감보 원년/덴표 쇼호 원년), 고켄 천황이 즉위하면서 고묘 황후의 신임을 받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시비중대의 장관(시비령)에 임명되어 권력을 확장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라마로는 고켄 천황 즉위 다이조사이 때 다시 반역을 모의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755년(덴표 쇼호 7년),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측근이 모로에가 조정을 비방했다고 밀고했으나, 쇼무 상황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756년(덴표 쇼호 8년) 2월, 모로에는 사직했고, 같은 해 4월, 쇼무 상황 천황이 병환 중일 때 나라마로는 오토모노 코마로 등과 함께 다시 기문왕 옹립을 모의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5월, 쇼무 상황이 붕어하고 도조 왕이 태자가 되었으나, 이듬해(757년) 3월에 폐위되고 오이 왕(준닌 천황)이 즉위했다. 오이 왕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후원하던 인물이었다.
3. 2. 음모의 계획과 발각 (757년)
후지와라노노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757년 6월 28일(7월 18일) 야마베노 왕이 고켄 천황에게 나라마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카마로의 저택을 포위하려 하며, 오토모노 코마로도 이를 알고 있다고 밀고했다.[5] 6월 29일(7월 19일) 다이조칸인(다이조칸 청사) 정원에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코마로, 오노노 아즈마히토 등 20여 명이 모여 7월 2일(7월 22일) 거병을 맹세했다.[6]7월 2일(7월 22일)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는 모반을 멈추라는 조칙을 내렸으나, 같은 날 가미치노 히타츠가 오노노 아즈마히토에게 모반 가담 권유를 받았다고 나카마로에게 밀고했다. 나카마로는 즉시 고켄 천황에게 보고하고, 주에이후 병사를 동원해 도조 왕의 저택을 포위하고 오노노 아즈마히토 등을 체포하여 사에이시후 옥에 가두었다.[7]
3. 3. 체포와 심문
7월 4일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도조 왕, 기문왕, 오토모노 코마로 등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나가테 등의 심문을 받았다. 나라마로는 심문에서 도다이지 건립 등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정치가 무도하기 때문에 반란을 꾀했다고 진술했다.[8]이후 이들은 옥으로 옮겨져 나가테, 백제왕경복, 선왕의 감독 하에 곤장으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당했다. 도조 왕, 기문왕, 코마로 등은 같은 날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주모자인 나라마로도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4. 처벌
7월 4일 나라마로를 비롯하여, 도조 왕, 기문왕, 오토모노노 고마로, 타지히노 코시카이, 카모노 츠노타리 등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나라마로는 "도다이지 등을 조영하여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정치가 무도하기 때문에 반란을 꾀했다."고 털어놓았다.[8]이들은 곧 옥으로 옮겨져 곤장으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당했다. 도조 왕(마도히로 개명), 기문왕(쿠나타후레로 개명), 고마로, 타지히노 코시카이, 카모노 츠노타리(노로시로 개명)는 같은 날,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절명했다. 주모자인 나라마로 역시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쿠 왕은 사도 섬으로, 오토모노 고코이(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사위)는 도사국으로 유배되었다. 시오야키 왕은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어 불문에 부쳐졌다. 이 사건으로 443명에 달하는 관리들이 유죄, 사형, 몰관 등의 처벌을 받았다. 우대신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는 아들 오토나와와 함께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다자이 원외수로 좌천되었다.
4. 사건의 결과 및 영향
나카마로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을 진압한 후 정권을 장악했지만, 고켄 천황의 총애가 유게노 도쿄에게 옮겨가면서 몰락했다. 764년(덴표호지 8년) 나카마로는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일족과 함께 몰락했다(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7]
4. 1. 나카마로의 권력 강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을 진압하면서 나카마로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7] 758년(덴표호지 2년), 오이 왕이 준닌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나카마로는 태보(우대신)에 임명되고 에미노 오시카츠라는 이름을 받았다. 760년(덴표호지 4년)에는 태사(태정대신)에까지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섰다.[7]4. 2. 정치적 불안정 심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5] 757년 6월 28일, 야마베노 왕이 고켄 천황에게 나라마로가 군사를 일으켜 나카마로의 저택을 포위하려 한다는 밀고를 했다.[6] 다음날, 다이조칸(다이조칸의 청사) 정원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코마로 등 20여 명이 모여 7월 2일에 거병할 것을 맹세했다.[6]7월 2일,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는 모반을 멈추라는 조칙을 내렸지만, 그날 저녁 주에이후의 토네리로부터 밀고가 들어왔다. 나카마로는 즉시 병사를 움직여 오노노 아즈마히토 등을 체포했다. 7월 3일, 오노노 아즈마히토는 고문 끝에 나라마로 등이 나카마로를 제거하고 황태자를 폐위하려 했다고 자백했다.[7]
나카마로는 이 사건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758년에는 태보(우대신)에 임명되고, 760년에는 태사(태정대신)에 올랐다. 그러나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을 일으켜 패배하면서 몰락했다.
5. 사건 관련 인물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는 여러 인물이 연루되었다. 주요 가담자로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를 비롯해 도조 왕, 황문왕, 오토모노 코마로, 타지히노 코시카이, 카모노 츠노타리 등이 있다. 이들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제거를 모의하고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모반을 자백했다.[7] 이들은 모두 곤장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7]
시오야키 왕은 나라마로 등의 계획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7] 이 사건으로 유죄, 사형, 몰관 등의 처벌을 받은 관리들은 443명에 달한다.[9]
후지와라노 토요나리는 아들 오토나와와 함께 사건에 관련되어 다자이 원외수로 좌천되었고, 후지와라노 나가테도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8] 이들은 반(反)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파이면서 동시에 고켄 천황의 측근이었으며, 천황 폐립을 꾀한 나라마로 등에게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행한 사람들이었다.
5. 1. 주동 인물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5] 757년 6월 28일 (7월 18일), 야마베노 왕이 고켄 천황에게 "나라마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카마로의 저택을 포위하려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했다.[6] 다음날인 6월 29일 (7월 19일) 다이조칸 청사 정원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코마로, 오노노 아즈마히토, 키노 아야마로, 아스쿠 왕 등 20명 정도가 모여 7월 2일 (7월 22일) 초저녁에 거병할 것을 맹세했다.[6]7월 2일 (7월 22일) 저녁, 주에이후 소속 가미치노 히타츠가 오노노 아즈마히토에게 모반 가담 권유를 받았다고 나카마로에게 밀고했다. 나카마로는 즉시 고켄 천황에게 보고하고 병사를 움직여 오노노 아즈마히토 등을 체포했다.[6] 7월 3일 (7월 23일), 우다이신 후지와라노 토요나리 등이 오노노 아즈마히토를 신문했으나 아즈마히토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문 끝에 아즈마히토는 나카마로를 죽이고 황태자를 폐위시키며, 황후의 궁을 포위하여 역령과 옥새를 빼앗고, 우다이신 토요나리를 받들어 천하에 호령하고, 천황을 폐위시킨다는 모반 계획을 자백했다.[7]
7월 4일 (7월 24일) 나라마로를 비롯한 주요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나라마로는 심문에서 "도다이지 등을 조영하여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정치가 무도하기 때문에 반란을 꾀했다."고 진술했다.[7] 이후 옥으로 옮겨져 곤장으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당했고, 주모자인 나라마로는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7]
5. 2. 연루 인물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 연루된 주요 인물과 그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인물 | 역할 및 행적 |
---|---|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 난의 주모자. 도다이지 건립 등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정치가 혼란스러워 반란을 계획했다고 주장.[6] 곤장 고문으로 사망.[7] |
오토모노 코마로 | 나라마로의 계획에 동참.[6] 고문으로 사망.[7] |
오노노 아즈마히토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모반 가담을 권유받았다는 밀고를 당함. 처음에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고문 끝에 나라마로 등의 계획을 자백.[7] |
키노 아야마로 | 나라마로, 코마로 등과 함께 나카마로 제거를 모의.[7] |
아스쿠 왕 | 나라마로, 코마로 등과 함께 나카마로 제거를 모의.[7] |
도조 왕 | 나카마로 제거 계획에 연루되어 체포, 고문으로 사망.[7] |
황문왕 | 나카마로 제거 계획에 연루되어 체포, 고문으로 사망.[7] |
타지히노 코시카이 | 나라마로 측에 가담하여 체포, 고문으로 사망.[7] |
카모노 츠노타리 | 나라마로 측에 가담하여 체포, 고문으로 사망.[7] |
시오야키 왕 | 나라마로 등의 계획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어 처벌받지 않음.[7] |
야마베노 왕 | 고켄 천황에게 나라마로의 계획을 밀고.[6] |
가미치노 히타츠 | 오노노 아즈마히토에게 모반을 권유받았다고 나카마로에게 밀고. |
이 사건으로 유죄, 사형, 몰관 등의 처벌을 받은 관리들은 443명에 달한다.[9]
5. 2. 1. 후지와라 가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757년 6월 28일, 야마베노 왕이 고켄 천황에게 "나라마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카마로의 저택을 포위하려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했다.[6] 7월 2일,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는 여러 신하들에게 모반을 멈추라는 조칙을 내렸다. 코묘 황후는 후지와라, 다치바나 일족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척"이라며, 오토모·사에키 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역대 천황의 친위대로 섬겨왔던 자들"이라고 말했다. 특히 오토모씨는 코묘 황후의 친가의 외척이었다.그러나 같은 날 저녁, 가미치노 히타츠가 오노노 아즈마히토에게 모반을 권유받았다고 나카마로에게 밀고했다. 나카마로는 즉시 고켄 천황에게 보고하고, 오노노 아즈마히토 등을 체포했다. 7월 3일, 우다이신 후지와라노 토요나리 등이 오노노 아즈마히토를 신문했으나, 아즈마히토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문 끝에 아즈마히토 등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코마로, 아스쿠 왕, 키노 아야마로 등이 나카마로를 죽이고 황태자를 폐위시키려 했다고 자백했다.[7]
7월 4일, 나라마로 등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모반을 자백했다. 나라마로는 도다이지 등을 조영하여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나라마로를 포함한 주모자들은 곤장 고문으로 사망했다.[7]
후지와라노 토요나리는 아들 오토나와와 함께 사건에 관련되어 다자이 원외수로 좌천되었다. 후지와라노 나가테도 이후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8] 이들은 반(反) 나카마로 파이면서 동시에 고켄 천황의 측근이었으며, 천황 폐립을 꾀한 나라마로 등에게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행한 사람들이었다.
5. 2. 2. 다지히 가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후지와라노노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할 때, 다지히노 고시카이는 오토모노 고마로, 가모노 쓰노타리 등과 함께 나라마로 측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모반을 자백하였고, 곤장으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받다가 도소 왕, 황문왕, 오토모노 고마로 등과 함께 같은 날 절명했다.[7]5. 2. 3. 오토모 가문
오토모노 코마로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후지와라노노 나카마로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6] 7월 2일 (7월 22일)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가 모반을 멈추라는 조칙과 선명을 내렸지만, 같은 날 주에이후의 토네리인 가미치노 히타츠가 오노노 아즈마히토에게 모반 가담을 권유받았다는 밀고를 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7월 3일 (7월 23일) 오노노 아즈마히토가 고문을 받으면서 모반을 자백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코마로, 아스쿠 왕, 키노 아야마로 등이 나카마로의 저택을 습격하여 죽이고 황태자를 폐위시킨 뒤 황후궁을 포위하여 역령과 옥새를 빼앗고, 후지와라노 토요나리를 받들어 천하에 호령하고, 천황을 폐위시킨 뒤 시오야키 왕, 도조 왕, 아스쿠 왕, 키노 아야마로 중에서 천황을 추대한다는 것이었다.[7]
7월 4일 (7월 24일) 나라마로를 시작으로 도조 왕, 황문왕, 오토모노 코마로, 타지히노 코시카이, 카모노 츠노타리 등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모반을 자백하였다. 이후 옥으로 옮겨져 곤장으로 전신을 때리는 고문을 받았고, 코마로는 도조 왕(마도 왕으로 개명), 황문왕(쿠나타후레로 개명), 타지히노 코시카이, 카모노 츠노타리(노로시로 개명)와 함께 같은 날,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했다.[7]
5. 2. 4. 사에키 가문
757년 7월 2일(7월 22일),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는 여러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모반을 멈추고 조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고묘 황후는 "너희들 후지와라, 다치바나 일족은 나의 조카와 같은 친척이다. 고 다이조 덴노는 종종 너희들을 불러 '짐이 죽은 후에는 황후를 섬겨 도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오토모·사에키 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역대 천황의 친위대로 섬겨왔던 자들이다."라며 양 가문을 회유하였다.[6]5. 2. 5. 기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도다이지 등을 조영하여 백성들이 고통받고 정치가 무도하다는 이유로 반란을 꾀했다고 진술했다.[6] 그러나 이후 옥으로 옮겨져 곤장으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7] 나중에 나라마로의 손녀인 가치코가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기록에서 삭제되었다고 한다.[8]이 사건으로 인해 유죄, 사형, 몰관 등의 처벌을 받은 관리들은 443명에 달한다.[9]
참조
[1]
논문
越中守時代の大伴家持
1989
[2]
서적
橘諸兄
吉川弘文館
2019
[3]
논문
橘諸兄と奈良麻呂の変
おうふう
2013
[4]
문서
2021
[5]
논문
大伴古麻呂と奈良時代政治史の展開
2015
[6]
간행물
続日本紀
unknown
[7]
문서
2021
[8]
논문
仲麻呂政権と藤原永手・八束(真楯)・千尋(御楯)
1994
[9]
논문
奈良時代の内臣と藤原永手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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