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묘 황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묘 황후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아다가 이누카이노 미치요의 딸로, 쇼무 천황의 부인이자 고켄 천황의 어머니이다. 729년, 왕족 외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되었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도다이지, 고쿠분지 건립을 지원하고, 자선 사업에도 힘썼다. 그녀는 또한 뛰어난 서예 실력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쇼소인에는 그녀와 관련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고묘 황후는 긍정적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으며, 여러 전설과 관련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켄 천황 - 준닌 천황
쇼무 천황의 유언으로 고켄 천황에 의해 황태자가 되어 즉위했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실권이 있었고, 고켄 상황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어 유배 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천황으로 복권된 일본 제47대 천황이다. - 고켄 천황 -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은 757년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고 일으키려 한 모반 사건으로, 사전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받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황위 계승 문제와 사회 경제적 불만이 작용한 권력 투쟁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 쇼무 천황 - 고쿠분지
고쿠분지는 8세기 쇼무 천황의 칙령으로 각 구니에 세워진 사찰로, 승려를 위한 고쿠분사와 수녀를 위한 고쿠분니사로 나뉘어 운영되었으며 도다이지와 홋케지가 총본산 역할을 수행했고 현재 일본 각지에 관련 지명과 사적, 사원이 남아 있다. - 쇼무 천황 - 만간지 (가와니시시)
만간지는 일본 효고현 가와니시시에 위치한 사찰로, 쇼무 천황의 칙원으로 창건되어 겐지 일문, 고다이고 천황, 아시카가 쇼군가의 기원소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금당, 관음당, 석조 구중탑 등을 보유하고 있다. - 후지와라씨 - 가시마 신궁
가시마 신궁은 다케미카즈치노오오카미를 모시는 이바라키현 가시마시의 신궁으로, 고대부터 조정과 후지와라 씨의 숭배를 받았으며 가토리 신궁과 함께 군사적·교통상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고, 에도 시대 도쿠가와 쇼군가의 재건과 더불어 중요 문화재와 사적, 천연기념물, 요석, 미타라이케 등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 후지와라씨 - 고후쿠지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 가마타리가 창건한 나라의 불교 사찰로,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여러 문화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묘 황후 | |
---|---|
인물 정보 | |
이름 | 고묘 황후 |
원어 이름 | 일본어: 光明皇后 (こうみょうこうごう) |
로마자 표기 | Kōmyō Kōgō |
휘 | 아스카베히메 (安宿媛) |
이칭 | 고묘시, 도산뇨 (光明子、藤三娘) |
존호 | 천평응진인정황태후 (天平応真仁正皇太后) |
계명 | 사미만복 (沙弥万福) |
생애 | |
출생 | 701년 |
사망 | 760년 6월 7일 |
묘소 | 사호야마 동쪽 능 (佐保山東陵), 나라시 |
가족 관계 | |
가문 | 후지와라 씨 (출생) 일본 황실 (혼인) |
아버지 | 후지와라노 후히토 |
어머니 | 아가타이누카이노 타치바나노 미치요 |
배우자 | 쇼무 천황 |
자녀 | 고켄 천황 모토이 친왕 |
경력 | |
입궁 | 레이키 2년 (716년) |
황후 책봉 | 덴표 원년 (729년 8월 10일) |
황태후 책봉 | 덴표쇼호 원년 (749년 7월 2일) |
주요 활동 | |
관련 인물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자미령) |
주요 사찰 | 호케지 신야쿠시지 카이류오지 |
2. 생애
쇼무 천황이 황태자였을 때 혼인하여, 718년 아베 내친왕을 낳았다.[3] 724년 쇼무 천황 즉위 후 부인(夫人)이 되었고, 727년 아들 모토 왕(基王)을 낳았으나 이듬해 요절했다.[3] 이후 나가야 왕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사건(나가야 왕의 정변)이 발생했다. 729년 왕족 외 집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되었다.[4] 이는 후지와라 씨 자녀가 황후가 되는 선례가 되었다.
모토 왕 사후,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749년 황후궁직(皇后宮職)이 시비추다이(紫微中台)로 개칭,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756년 남편 쇼무 태상천황이 붕어하고, 2년 뒤 황태후가 되었다.
고묘 황후는 불교에 귀의하여 도다이지(東大寺), 고쿠분지(国分寺) 설립을 쇼무 천황에게 권유했다.[8] 비전원(悲田院), 시약원(施薬院)을 설치하여 자선 사업에도 힘썼다.[8] 쇼무 천황 사후 49재 때 유품을 도다이지에 기증했는데, 이를 보관하기 위해 쇼소인(正倉院)을 지었다. 고후쿠지(興福寺), 호코지(法華寺), 신야쿠시지(新薬師寺) 등도 짓거나 정비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의 《악의론》, 당나라 두정장 등의 문집 《두가입성잡서요략》을 직접 베껴 썼으며, 모두 쇼소인(正倉院)에 남아 전한다.[19]
760년 붕어하여 사호산동릉(佐保山東陵)에 묻혔다.
2. 1. 가계와 출생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아치가이누카이노 타치바나노 미치요의 딸로, 701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아스카베히메(安宿媛)였으며, 후지와라노 미야코 소생의 쇼무 천황과는 이복 남매간이다.[3]
아버지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지토 천황 시대에 발탁되어 후지와라쿄 건설과 다이호 율령 제정에 공을 세워 천황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딸 후지와라노 미야코를 몬무 천황에게 시집보내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확대했다.
어머니 아치가이누카이노 타치바나노 미치요는 중소 호족 출신이었으나, 진신의 난에서의 공적을 계기로 후궁에 들어가 지토 천황 시대에 지위를 굳혔다. 미치요는 몬무 천황의 유모 또는 양육 담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미야코가 몬무 천황에게 시집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치요의 협력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고묘 황후는 701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수도였던 후지와라쿄의 좌경 7조 1방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2001년에 발굴된 목간에 어머니 미치요가 하사품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고묘 황후 출생 축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휘(諱)인 아스카베히메(安宿媛)는 가와치국안숙군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치요의 본관지에 인접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후지와라노 후히토를 양육한 다나베노 후미토의 본관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고묘 황후는 자신의 서명에서 셋째 딸이라고 밝혔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둘째 딸, 여섯째 딸, 일곱째 딸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확실하지 않다. 여동생으로는 다치바나노 모로에에게 시집간 후지와라노 다비노가 있는데, 생모가 다르다는 설도 있다. 이복 형제로는 미야코 외에 후지와라 사형제, 후지와라노 초가시가 있고, 이부 형제로는 다치바나노 모로에, 모레노 여왕 등이 있다.
고묘 황후의 유년기 기록은 없지만, 어머니 미치요가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저택에서 동거했고, 후에 고묘 황후가 후히토의 저택에서 출산한 것으로 보아, 후히토의 저택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고묘 황후와 같은 해에 몬무 천황과 미야코 사이에서 쇼무 천황이 태어났다. 미야코는 우울증을 앓아 아들과 떨어져 양육되었고, 쇼무 천황은 외조부 후히토와 미치요에 의해 양육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실이라면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는 어린 시절을 후히토의 저택에서 함께 보낸 소꿉친구였을 것이다.
707년 몬무 천황이 붕어하고, 겐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이는 남편 구사카베 황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사망했기에, 천황의 어머니가 즉위하는 이례적인 황위 계승이었다. 겐메이 천황의 즉위에는 몬무 천황의 강한 의향과 후히토가 손자 쇼무 천황의 즉위를 위해 여성 천황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겐메이 천황 즉위 후 후히토는 우대신에 임명되었고, 미치요는 타치바나 성을 하사받았다.
710년 헤이조쿄 천도 후, 714년에 쇼무 천황이 황태자가 되었다. 715년에는 겐메이 천황의 딸 겐쇼 천황이 즉위했는데, 이 역시 쇼무 천황의 즉위를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2. 2. 쇼무 천황과의 혼인
쇼무 천황이 황태자였을 때 혼인하였고, 요로(養老) 2년(718년)에 딸 아베 내친왕(훗날의 고켄, 쇼토쿠 천황)을 낳았다.[3] 진키(神亀) 원년(724년) 남편이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부인(夫人)이 되었다. 진키 4년(727년)에는 아들 모토 왕(基王)을 낳았다.[3]그러나 진키 5년(728년) 황태자였던 모토 왕이 요절하고, 후사 문제로 나가야 왕(長屋王)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사건(나가야 왕의 정변)이 발생하여 조정이 어수선했다. 나가야 왕의 정변 이후, 덴표(天平) 원년(729년) 왕족 이외의 집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되었다.[4] 이후 후지와라 씨(藤原氏) 자녀가 황후가 되는 선례가 되었다.
모토 왕이 죽자, 외동딸인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2. 3. 황후 책봉과 정치적 영향력
쇼무 천황이 황태자였을 때 혼인하여, 718년에 딸 아베 내친왕을 낳았다. 724년 남편이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부인(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727년 아들 모토 왕(基王)이 태어났으나 이듬해 요절했다.[3]모토 왕 사후, 나가야 왕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사건(나가야 왕의 변)이 발생했다. 이후 729년 왕족 이외의 집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되었다.[4] 이는 후지와라 씨 자녀가 황후가 되는 선례가 되었다.
모토 왕의 죽음으로 유일한 딸인 아베 내친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749년 이후 황후궁직(皇后宮職)이 시비추다이(紫微中台)로 개칭되었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756년 남편 쇼무 태상천황이 붕어하고, 2년 뒤 황태후 칭호가 더해졌다.
고묘 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견해 | 내용 |
---|---|
전통적 견해 | 후지와라 씨의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설명하며, 고묘 황후를 후지와라 씨의 꼭두각시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
최근 연구 | 쇼무 천황 및 이전 여성 천황들의 정치력을 재검토하며, 고묘 황후의 정치적 관여와 역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
고묘 황후의 정치적 관여에 대한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 황위 계승: 후지와라 씨와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고묘 황후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정치 참여: 고묘 황후가 정치에 직접 관여했는지, 아니면 후지와라 씨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시비추다이(紫微中台): 황후궁직을 개칭한 시비추다이의 장관으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를 임명한 것이 고묘 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고묘 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학설은 다음과 같다.
- 후지와라 씨 꼭두각시 설: 고묘 황후가 후지와라 씨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 정치적 영향력 행사 설: 고묘 황후가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조정 내 세력 균형을 조절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 쇼무 천황과의 협력 설: 고묘 황후가 쇼무 천황과 협력하여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고, 후지와라 씨의 세력 확장을 견제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760년 붕어하여 사호산동릉(佐保山東陵)에 묻혔다.
2. 4. 불교 진흥과 자선 사업
고묘 황후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남편 쇼무 천황에게 도다이지(東大寺)와 고쿠분지(国分寺) 설립을 권유했다고 전해진다.[8]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비전원(悲田院)과 의료 시설인 시약원(施薬院)을 설치하여 자선 사업에도 힘썼다.[8] 쇼무 천황 사후 49재 때 유품을 도다이지에 기증했는데, 이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 바로 쇼소인(正倉院)이다. 이외에도 고후쿠지(興福寺), 호코지(法華寺), 신야쿠시지(新薬師寺) 등 많은 절을 짓거나 정비하였다.고묘 황후는 보살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754년에는 남편과 함께 보살계를 받았다.[8] 덴표 13년(741년) 국분사 건립 조칙이 내려지기 한 달 전, 후지와라노 후히토로부터 상속받은 식봉 5,000호를 반납하고 그 일부를 국분사에 시주하였다.[6]
2. 5. 서예
고묘 황후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황후가 직접 베낀 왕희지의 《악의론》과 당나라 두정장(杜正蔵) 등 삼형제의 문집 《두가입성잡서요략》(杜家立成雑書要略)이 모두 쇼소인(正倉院)에 남아 전한다.[19]왕희지의 《낙의론》을 임서한 명품으로, 본문은 43행이다. 안쪽 축에 황마지 한 장을 첨부하여 "덴표 16년 10월 3일 (744년11월 11일) '''후지 삼녀'''"라고 연기와 서명이 있어, 고묘 황후가 44세 때 쓴 글임을 알 수 있다. 서명 부분에 별지를 이었으며, 본문과 다소 서풍이 다르다는 점 등으로 인해 과거에는 황후 친필이 아니라는 설도 있었지만, 본문이나 《두가입성잡서요략》과의 상세한 비교 등을 통해 현재는 황후의 진필을 의심하는 의견은 거의 없다.[19] 료시는 두 장 반을 이었고, 세로 25cm, 길이 126.6cm이다. 백마지에 세로 0.6cm 간격으로 발과 같은 체눈이 늘어선 "세로 발 종이"라고 불리는 정교한 종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체눈은 종이 질이 얇아서 현재는 거기에 접힌 자국이 있다. 명대에 번각된 『낙의론』과 비교하면 탈자가 몇 군데 있으며, 반대로 2행 행말의 "위열시이서이"가 많다. 그러나 이 6글자가 없으면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20]
서예가 이시카와 큐요는 "필력은 웅건하지만, 문자 구성의 경시가 눈에 띈다.(중략) 의지의 화성"이라고 평하고 있다.[21]
《두가입성잡서요략》은 두정장이 편찬한 속성 편지의 모범 예문집이라는 의미로, 서간 왕복 2통을 1조로 하여 36조의 모범 예문이 기재되어 있다. 서사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필치로 보아 낙의론보다 후로 여겨진다. 세로 27.0cm로, 다양한 색 마지 19장을 합쳐 붙였지만, 한 장의 폭은 대략 37.3cm 정도이다. 낙의론이 임서인 것에 비해 두가립성은 자운이며, "특색 있는 자형과 자배열이 있으며,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며, 기품 있고 아름답다"고 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적선등가(積善藤家)"라는 주인이 찍혀 있다. 이 말은 주역에 유래하며, 덴지 천황이 병상에 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에게 보낸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 의미는 "대대로 선행이 쌓여 후지와라 가의 자손이 그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며, 고묘 황후가 후지와라 가 출신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2. 6. 만년과 죽음
덴표호지 4년(760년)에 사망하여, 사호산동릉(佐保山東陵)에 묻혔다.[3] 쇼무 천황이 사망하고 2년 뒤인 덴표호지 2년(758년)에 황태후가 되었다.고묘 황후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도다이지(東大寺), 고쿠분지(国分寺) 설립을 남편 쇼무 천황에게 권유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설인 비전원(悲田院)과 의료 시설인 시약원(施薬院)을 건립하여 자선 사업에도 힘썼다. 쇼무 천황 사후 49재 때 유품을 도다이지에 기증했는데, 이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바로 쇼소인(正倉院)이다.[4] 더불어 고후쿠지(興福寺), 호코지(法華寺), 신야쿠시지(新薬師寺) 등 많은 절을 짓거나 정비하였다.
덴표호지 2년(758년), 고묘 황후는 건강이 악화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에는 살생 금지, 자미중대 노예 해방 등 병의 쾌유를 기원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같은 해 8월 1일, 고켄 천황은 "고묘 황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양위했고, 오이 왕이 즉위하여 준닌 천황이 되었다. 즉위 선명에서는 "고묘 황후가 쇼무 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오이 왕을 즉위시킨다"고 말했다.
준닌 천황 즉위와 같은 날, 고켄 천황과 고묘 황후에게 존호가 헌상되었다. 생존 중에 당풍의 존호를 수여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묘 황후의 존호인 덴페이오신닌쇼황태후(天平応真仁正皇太后)는 "하늘(天)이 평안(平)해지고, 궁극의 진리(真)에 도달한 것에 응답(応)하여, 인(仁)과 정(正) 바른 덕을 갖춘 황태후"라는 의미이다. 이 존호는 길어서 "닌쇼황태후(仁正皇太后)"라는 약칭도 사용되었다.
덴표호지 3년(759년) 6월 16일에는 준닌 천황의 아버지 토네리 친왕에게 존호가 수여되었으며, 어머니는 다이부진(大夫人), 형제는 친왕·내친왕으로 대우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결정에는 양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켄 천황이 반대했지만, 고묘 황후의 권유로 실현되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쇼소인에서 쇼무 천황의 유애품 일부가 출고되었다. 이때 꺼내진 쿠사카베의 패도 흑작현패도는, 쿠사카베 황태자 사망 후 후지와라노 후히토를 통해 역대 천황에게 상속되어 온 쿠사카베 황태자 계통과 후지와라 씨의 관계를 상징하는 대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같은 해 여름 무렵부터 호케지 경내에서 아미타정토원의 건립이 시작된다. 아미타정토원 터는 후지와라노 미요시가 건립한 간무료쥬인(観無量寿院)을 개축한 것으로, 후지와라노 후히토 저택 시대의 연못을 들여온 가람으로, 정토식 정원의 효시가 되었다.
덴표호지 4년(760년) 봄 무렵부터 고묘 황후는 다시 건강이 악화된다. 같은 해 3월 13일에는 여러 나라의 신사에서 기도가 행해졌고, 더 나아가 윤4월 23일에 궁중에서 『대반야경』의 전독(転読), 같은 달 28일에 5대 사찰에 시입(施入), 5월 18일에는 6대 사찰에서 법회가 열렸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없었고 고묘 황후는 6월 7일에 사망한다. 향년 60세. 즉시 장례를 치를 장속사가 임명되었는데, 후나오 왕을 비롯한 25명이라는 많은 인원이었다. 능은 쇼무 천황의 옆에 조성되었다.
칠칠기(七七忌), 즉 7월 26일에는 헤이조쿄의 모든 사찰에서 재회가 열리는 동시에, 전국 승려와 비구니를 동원하여 『칭찬정토경』을 베껴 국분사에서 법회를 열게 했다. 12월 12일에는 미야코와 함께 고묘 황후의 기일이 국기로 정해졌다. 신하 출신자의 기일이 국기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후지와라 씨 출신자가 천황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1주기는 아미타정토원에서 거행되었고, 고묘 황후 사후에 165명을 동원하여 사경한 5330권의 『주기제일체경』이 공양되었다. 또한, 전국의 국분사에서는 장륙 아미타상 등이 건조되었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고후쿠지에 고묘 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원을 건립했다.
고묘 황후가 죽은 후, 후원자를 잃은 준닌 천황·후지와라노 나카마로와 고켄 천황과의 대립은 심화되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에서 준닌 천황의 폐위로 이어졌다.
3. 불교 신앙과 문화 사업
고묘 황후는 불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고후쿠지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었다.[6] 어머니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로 721년에 승려가 되었다.[6] 고묘 황후는 727년부터 아들의 무사 출산을 위해 경전을 베껴 쓰기 시작했으며, 도다이지와 연결된 서사 작업실을 운영하며 경전 필사 후원자로 활동했다.[7]
729년 고묘 황후가 황후로 세워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율령제에서는 천황의 딸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신하의 딸인 고묘 황후의 입후는 기존 원칙을 깨는 것이었다. 입후 선명에는 해명과 같은 문구가 있었고, 주변의 저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입후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황친 정치 재건과 후지와라 씨에 대항하기 위한 쇼무 천황의 의지였다는 설도 있다.
고묘 황후는 국분사 건립을 지지했고, 황후궁직에 설치된 시약원(약국)과 비전원(빈민 구호소) 같은 자선 단체를 후원했다.[8] 시약원과 비전원의 운영에는 황후의 직봉과 후히토로부터 상속한 봉호의 용이 사용되었다.[8] 730년에는 고후쿠지 오중탑 건립을 발원하여 직접 흙을 운반하며 공사에 참여했고, 731년에는 가이류지를 창건했다. 이러한 사원 건립과 복지 사업에는 후지와라 씨와 천황가의 재산이 함께 사용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3. 1. 불교 신앙
고묘 황후는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후쿠지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721년에 승려가 되었다. 그녀의 삼촌은 중국으로 유학을 간 승려였다.[6]고묘 황후의 신앙은 727년부터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데, 아들의 무사 출산을 기원하며 경전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8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경전을 베껴 쓰는 후원자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처음에는 가문에 속해 있다가 나중에는 도다이지와 연결된 다작의 서사 작업실을 운영했다.[7] 그녀는 모든 지방에 사찰과 비구니 사찰을 한 쌍으로 짓도록 하는 국분사 체제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약국 및 빈민 구호소와 같은 자선 단체도 후원했다.[8] 이러한 자선 활동은 자비와 보살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754년에는 남편과 함께 보살계를 받았다.
730년 4월 28일, 고묘 황후는 고후쿠지 오중탑 건립을 발원했는데, 건립 과정에서 직접 널빤지를 가지고 흙을 운반했다고 전해진다. 이 오중탑은 이미 완성되어 있던 쇼무 천황이 건립한 동금당과 함께 동원 불전원을 형성했다. 731년에는 고묘 황후에 의해 구미데라(현재의 가이류지)가 창건되었는데, 이 절의 이름은 황후궁의 북동쪽 구석에 위치한 것에서 유래했다.
733년, 고묘 황후는 어머니 산젠요가 사망하자 크게 슬퍼했고, 쇼무 천황은 그녀의 병 회복을 기원하는 대사를 내리기도 했다. 고묘 황후는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후쿠지 서금당을 건립하고, 다음 해에 성대한 1주기를 치렀다. 이 서금당에는 아수라상으로 유명한 팔부중과 십대 제자 등 건립 당시의 불상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고묘 황후는 산젠요의 사후부터 호류지에 자주 시주를 했다. 현재의 동원 가람은 고묘 황후를 중심으로 한 산젠요의 여성 친족에 의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고묘 황후 등이 산젠요로부터 태자 신앙을 계승했다고 여겨진다.
쇼무 천황 사후, 고묘 황후는 고켄 천황의 협력을 얻어 쇼무 천황의 유품을 동대사 등에 헌납했다. 이 헌납이 쇼소인 보물의 시작이다.[7]
3. 2. 사경 사업
고묘 황후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8세기에 경전을 베껴 쓰는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후원한 인물로, 처음에는 가문에 속해 있다가 나중에는 도다이지와 연결된 다작의 서사 작업실을 운영했다.[7]고묘 황후의 사경 사업은 사적인 사경소에서 시작되었으나, 황후궁직 사경소, 동원 일체경소, 복수사 사경소, 금광명시 사경소, 동대사 사경소로 변천 및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경소들은 황후궁직 계통 사경 기구라고 불리며, 그 기록은 쇼소인 사경소 문서로 현존한다.[6]
고묘 황후의 사경은 신귀 4년(727년)과 신귀 5년의 『대반야경』 사경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경은 고묘 황후(당시는 부인) 저택에 설치된 사적인 사경소에서 진행되었으며, 당시 귀족들의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에이하라 토시유키는 첫 번째 사경은 아들(기)의 출생을 기원한 것이고, 두 번째 사경은 기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사경한 경전이 『대반야경』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안산 기원이 아니라 고묘 황후의 출산이 국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7]
덴표 원년(729년)에 고묘 황후가 황후가 되자 사경소는 황후궁직에 통합되어 지속적으로 사경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덴표 5년부터 덴표쇼호 8년(756년)까지 진행된 일체경(모든 불교 경전)의 사경이 가장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 그 경전은 덴표 12년 5월 1일의 날짜에서 유래하여 『오월 하루 경』이라고 불린다.[7]
이 사경은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미치요의 추선 공양으로 발원되었으나, 덴표 8년부터는 귀국한 겐보가 가져온 목록에 따른 사경으로 방침이 전환되었다. 일체경의 사경은 여러 번 중단되었는데, 1차 중단은 아베의 태자 책봉과 관련, 2차는 『복수사 반야경』『기타이케 사경』의 사경, 3차는 동원 사일체경소에서 복수사 사경소로의 이행 기간으로 여겨진다. 4차 중단 후에는 겐보의 목록에 없는 장소・별생 등도 사경하게 되어, 경전 연구 자료 작성으로 목적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덴표 20년(748년)부터 약 2년간 중단이 있었는데, 야마시타 유미는 고켄 천황의 즉위를 앞두고 쇼무 천황이 『화엄경』을 사경한 것에 의한 중단이라고 추정한다. 덴표쇼호 2년(750년)에 재개된 『오월 하루 경』의 사경 사업은 도다이지 대불 개안회를 기한으로 설정, 같은 해 3년까지 완료되어 같은 해 5년에 도다이지 대불에 봉납되었다. 그 후에도 경전의 주석서(소)의 사경은 계속되어 같은 해 8년(756년)의 중단까지 총수는 약 6500권에 달했다. 약 20년에 걸친 『오월 하루 경』의 사경 사업은 당시의 사료에 "상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기타 사경을 의미하는 "간사""외사"와 구별된다.[7]
덴표쇼호 6년(764년)부터 덴표호지 4년(760년)까지, 『오월 하루 경』은 자미중대가 주체가 되어 감경(저본과는 다른 경전에 의해 교정하는 것)이 행해져, 일본 국내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인 신뢰성을 갖는 경전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얻었다. 『오월 하루 경』은 쇼소인 성어장에 약 750권, 민간에 약 250권이 현존하고 있다.[7]
덴표호지 4년(760년) 2월, 다시 일체경 3433권의 사경(『곤관 일체경』)이 명해졌다. 에이하라는 같은 해 정월에 사망한 후지와라노 기타후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묘 황후가 발원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고묘 황후가 사망하자 그날 바로 고묘 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칭찬정토경』 1800권의 사경이 명해졌고, 『곤관 일체경』의 사경은 760권으로 중단되었다. 고묘 황후의 1주기를 위해 일체경의 사경(『주기재 일체경』)이 계획되어, 다음 해 3월 5일까지 5330권의 서사가 완료되었다. 이때의 사경 사업은 경사 140명, 장황 10명, 교정 20명이 동원되는 전례 없는 규모로 이루어졌다.
3. 3. 주요 사찰 건립
고묘 황후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고후쿠지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730년, 고묘 황후는 고후쿠지 오중탑 건립을 발원했고, 직접 흙을 운반하며 공사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이 오중탑은 쇼무 천황이 건립한 동금당과 함께 동원 불전원을 이루었다.[8]731년에는 고묘 황후에 의해 구미데라(현재의 가이류지)가 창건되었다. 구미데라는 황후궁의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8]
745년, 쇼무 천황이 헤이조쿄로 돌아온 후, 황후궁은 호케지로 바뀌었고, 야마토국의 국분니사(國分尼寺)가 되었다. 호케지에는 고묘 황후가 만들었거나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지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8]
고묘 황후는 쇼무 천황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며 신야쿠시지를 건립했다. 신야쿠시지의 창건 시기는 745년 또는 747년으로 전해진다.[8]
또한 고묘 황후는 모든 지방에 사찰과 비구니 사찰을 한 쌍으로 짓도록 하는 국분사 체제의 주요 지지자였다.[8] 그 중심에는 도다이지가 있으며, 745년 고묘 황후는 쇼무 천황과 함께 도다이지 대불 조성에 참여하여 흙을 운반하며 기단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8]
4. 평가
고묘 황후는 신야쿠시지(나라), 호케지(나라), 고후쿠지(나라), 도다이지(나라) 등 여러 사찰 건립과 확충을 장려하여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9] 쇼소인에는 고묘 황후와 쇼무 천황 관련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녀의 시 4수가 만요슈 황실 칙찬집에 수록되어 있다.[9]
중세 시대 고묘 황후는 숭배 대상이었고,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보살이자 비구니 수호자로 여겨졌다.[9] 특히 관음보살 모습을 본뜬 불상이 있는 호케지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9] 나병 환자를 목욕시켰는데, 그 환자가 변장한 부처였다는 이야기,[10] 여러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 등은 그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보여준다.[10] 현대에도 이상적인 불교 여인 상징으로 남아 호케지에서 숭배받고 있다.[10]
그러나 긍정적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칸 시렌은 나병 환자를 목욕시킨 이야기가 아내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11]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여성으로서 도다이지에 들어가려다 문을 부수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12][13]
고묘 황후가 창건한 당시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8세기 정치사 연구는 후지와라 씨의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쇼무 천황 및 이전 여성 천황의 정치력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가운데 고묘 황후의 정치 관여와 평가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나가야 왕의 변은 후지와라 씨가 고묘 황후의 입후를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쇼무 천황에게도 동기가 있었다는 설과 후지와라 씨의 음모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설도 있다. 고켄 천황 입태자는 후지와라 씨와 고묘 황후의 의향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쇼무 천황의 의지였다는 설도 있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이후 쇼무 천황의 동국 행차와 교토 조영, 국분사 건립, 고카 사 대불 조영은 고묘 황후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자미중대 설치 이후 고묘 황후를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는 견해와, 고묘 황후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쇼무 천황의 의향이 반영되었다는 견해가 대립한다. 쇼소인 보물의 시작인 도다이 사 헌납은 고묘 황후의 의향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쇼무 천황의 의향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서 고묘 황후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대응 차이는, 고묘 황후는 덴무 천황 계통의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추구한 반면 나카마로는 후지와라 씨 중심의 귀족 정치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준닌 천황 즉위 후에도 고묘 황후가 "사실상의 태상천황"으로서 영향력을 가졌다는 견해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고묘 황후를 대신할 세력 기반을 만들기 위해 추진한 일이며 고묘 황후는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견해가 있다.
오사카부 남부에 위치한 고묘이케역은 고묘 황후의 이름을 딴 인공 호수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고묘 황후의 출생지인 이즈미국과의 연관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4. 1. 긍정적 평가
고묘 황후는 신야쿠시지(나라), 호케지(나라), 고후쿠지(나라), 도다이지(나라) 등 여러 사찰 건립과 확충에 힘써 불교 문화 발전과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9] 쇼소인에는 고묘 황후와 쇼무 천황 관련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녀가 지은 시 4수가 만요슈 황실 칙찬집에 수록되어 있어[9] 문학적 재능과 당대 문화 기여를 보여준다.중세 시대 고묘 황후는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보살이자 비구니 수호자로 여겨져 숭배 대상이 되었다.[9] 특히 관음보살 모습을 본뜬 불상이 있는 호케지에서 중요한 인물로 숭배되었다.[9] 고묘 황후가 나병 환자를 목욕시켰는데, 그 환자가 변장한 부처였다는 전설,[10] 여러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 산에서 수도하는 사람 소변을 마신 암사슴 자식이라는 이야기[10] 등은 그녀의 자비심과 신성함을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묘 황후는 현대에도 이상적인 불교 여인 상징으로 남아 호케지에서 숭배받고 있다.[10]
4. 2. 비판적 평가
고묘 황후에 대한 평가는 중세와 현대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세 시대에는 고묘 황후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보살이자 비구니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특히 관음보살의 모습을 본뜬 불상이 있는 호케지에서 중요한 인물로 숭배되었다.[9] 나병 환자를 목욕시킨 일화는 변장한 부처를 만난 이야기로 전해지며, 여러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도 있다.[10]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중세 및 근세 작가들은 고묘 황후를 비판했다. 고칸 시렌은 나병 환자를 목욕시킨 이야기가 아내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11]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여성이면서 도다이지에 들어가려다 문을 부수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12][13]
현대에 이르러 고묘 황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가 갈리고 있다. 후지와라 씨와 황위 계승을 중심으로 한 시대 배경 속에서 고묘 황후의 정치 관여와 평가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8세기 정치사 연구에서 후지와라 씨의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쇼무 천황과 이전 여성 천황의 정치력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고묘 황후의 정치 관여와 평가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가 갈리고 있다.
나가야 왕의 변은 후지와라 씨가 고묘 황후의 입후를 실현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쇼무 천황에게도 동기가 있었다는 설과 후지와라 씨의 음모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설도 있다.
고켄 천황의 입태자는 후지와라 씨와 고묘 황후의 의향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쇼무 천황의 의지였다는 설도 있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이후 쇼무 천황이 동국으로 행차하고 교토 조영을 명한 것은 고묘 황후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국분사 건립 역시 고묘 황후의 권유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고카 사 대불 조영 역시 고묘 황후의 권유로 시작되었으며, 아스카 황자의 급사에 대해서는 후지와라 씨나 고묘 황후에 의한 암살설도 제기된다.
자미중대 설치 이후 고묘 황후를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고묘 황후는 정치 운영 의도가 없었고 정책은 쇼무 천황의 의향이 반영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쇼소인 보물의 시작인 도다이 사 헌납은 고묘 황후의 의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쇼무 천황의 의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서 고묘 황후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대응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고묘 황후는 덴무 천황 계통의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추구한 반면 나카마로는 후지와라 씨 중심의 귀족 전권 정치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준닌 천황 즉위 후에도 고묘 황후가 "사실상의 태상천황"으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고묘 황후를 대신할 세력 기반을 만들기 위해 추진한 일이며 고묘 황후는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4. 3. 중도진보적 관점
고묘 황후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8세기 정치사는 주로 후지와라 씨의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설명되지만, 최근에는 쇼무 천황과 이전 여성 천황들의 정치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묘 황후의 정치 관여와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나가야 왕의 변은 후지와라 씨가 고묘 황후의 입후를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쇼무 천황 역시 혈통적 열등감 때문에 나가야 왕 제거에 동기가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또한, 후지와라 씨의 음모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덴표 21년(749년), 고묘 황후는 쇼무 천황과 함께 교기에게서 수계를 받았다. 같은 해 쇼무 천황은 아베 황녀(고켄 천황)에게 양위하면서, 고묘 황후를 자신과 다름없이 섬기라고 명했다. 고묘 황후는 고켄 천황에게 "구사카베 황통을 끊지 않기 위해 여성으로 즉위시킨다"고 밝혔다.
고켄 천황 즉위 후, 황후궁직은 자미중대로 개칭되었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장관인 자미령에 취임했다. 자미중대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태정관에 필적하는 권력을 행사하며 고켄 천황을 대신하여 국정을 집행했다.
이에 대해 고묘 황후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고켄 천황의 후견인 또는 쇼무 천황의 대행자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 고묘 황후는 정치 운영 의도가 없었고, 자미중대의 정책도 쇼무 천황 생전에는 그의 의향이 반영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덴표쇼호 8년(756년), 쇼무 천황이 붕어하자, 그의 유품은 동대사에 헌납되어 쇼소인 보물의 시초가 되었다. 이 헌납은 고묘 황후의 의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쇼무 천황의 의향도 반영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758년, 고묘 황후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켄 천황은 오이 왕(준닌 천황)에게 양위했다. 준닌 천황 즉위 후에도 고묘 황후는 "사실상의 태상천황"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고묘 황후는 준닌 천황의 즉위를 주도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준닌 천황은 쇼무 천황의 유지를 폐하고 입태자를 했으며, 즉위 후에는 고켄 천황과 대립했다. 이러한 준닌 천황의 황위 계승에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의도가 있었고, 고묘 황후도 준닌 천황을 지지했다는 의견이 많다. 고묘 황후가 황통 전환을 꾀하여 고켄 천황과 대립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묘 황후는 고켄 천황을 배려했고 모녀간의 대립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5. 전설과 관련 작품
고묘 황후와 쇼무 천황 관련 유물은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다. 만요슈에는 고묘 황후의 시 4수가 실려 있다. 고묘 황후는 신야쿠시지(나라), 호케지(나라), 고후쿠지(나라), 도다이지(나라) 등 여러 사찰의 건립과 확충을 장려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9][10]
고묘 황후를 주제로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작가/출연 | 비고 |
---|---|---|
키사키의 대불 | 오쿠야마 게이코 | 2012년, 주오코론신샤 |
진홍의 천공 | 하무로 오사무 | 슈에이샤, 2014년, 슈에이샤 문고, 2017년 |
사랑하는 여제 | 스오우 야나기 | 2024년, 주오코론신샤 |
빛의 회랑 | 기요하라 나츠 | (ISBN 978-4091950017) |
여제의 수기 | 사토나카 마치코 | |
덴지 천황과 텐무 천황 - 신설・일본서기- | 나카무라 마리코 | |
JNN 50주년 기념 역사 대하 스펙터클 『당초제사 1200년의 수수께끼 ~ 덴표를 질주한 남자와 여자들』 | 시마다 요코 | (TBS 2009년) |
『대불개안』 | 아사노 아츠코 | (NHK, 2010년) |
『고묘 황후』(1958년) | 스미 하나요 | |
『구슬의 기록』(1988·89년) | 칸나 미호, 아야 유우키 | 1988년 다카라즈카・도쿄 공연: 칸나 미호, 1988년 다카라즈카・도쿄 신인 공연·1989년 지방 공연: 아야 유우키 |
5. 1. 전설
중세 시대에 고묘 황후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보살이자 비구니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특히 관음보살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전해지는 불상이 있는 호케지(나라)에서 그녀는 중요한 인물이었다.[9] 한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나병 환자를 목욕시켰는데, 그 환자는 변장한 부처였다고 한다.[10] 또한 그녀는 여러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그 중 일부는 그녀가 산에서 수도하는 사람의 소변을 마신 암사슴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10] 그녀는 현대 시대에도 이상적인 불교 여인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호케지(나라)에서 숭배받고 있다.대부분의 이야기가 긍정적이었지만, 일부 중세 및 근세 작가들은 그녀를 비판했다. 고칸 시렌은 그녀가 나병 환자를 목욕시킨 이야기가 아내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11]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여성으로서 도다이지(나라)에 들어가려다 문을 부수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12][13]
오사카부 남부에 위치한 고묘이케역은 고묘 황후의 이름을 딴 인공 호수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고묘 황후의 출생지인 이즈미국과의 연관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잘 알려진 전설은 천인 목욕탕 전설이다. 『겐코 샤쿠쇼』에 기록된 전설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부처의 계시로 고묘 황후는 욕실을 짓고 천 명의 때를 밀 것을 원했다. 천 번째로 한센병 환자가 나타났지만 고묘 황후는 두려워하지 않고 씻어 주었고, 환자의 소원대로 고름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환자는 아촉불의 화신임을 밝히고 사라졌다. 그 자리에 고묘 황후는 아촉사를 건립했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가마쿠라 시대에는 닌쇼가 기타야마 십팔간문을 건립했으며, 태평양 전쟁 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신앙심이 깊었던 고묘 황후는 겐보를 사숙했다고 여겨지며, 일설에는 스미데라 건립이 겐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에는 여러 가지 속설이 생겨났다. 『고금 이야기집』에는 "고묘 황후가 겐보를 총애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겐페이 성쇠기』에서는 히로쓰구의 난의 원인을 고묘 황후와 겐보의 밀통으로 보고 있다. 또한 불교를 비판하는 히라타 아쓰타네는 『속신도대의』에 고묘 황후는 겐보의 아들 젠주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엔랴쿠 승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어린 고묘 황후가 시장에서 상인에게 척을 가르쳤는데, 모두 감탄하여 '만약 천자를 섬기고 좋은 풍습을 말하면 도량형이 천하에 유포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5. 2. 관련 작품
- 키사키의 대불|키사키노 다이부쓰일본어』 오쿠야마 게이코, 2012년, 주오코론신샤
- 진홍의 천공|시은쿠노 텡쿠일본어』 하무로 오사무, 슈에이샤, 2014년, 슈에이샤 문고, 2017년
- 사랑하는 여제|아이수루 조테일본어』 스오우 야나기, 2024년, 주오코론신샤
- 기요하라 나츠 『빛의 회랑』 (ISBN 978-4091950017)
- 사토나카 마치코 『여제의 수기』
- 나카무라 마리코 『덴지 천황과 텐무 천황 - 신설・일본서기-』
- JNN 50주년 기념 역사 대하 스펙터클 『당초제사 1200년의 수수께끼 ~ 덴표를 질주한 남자와 여자들』(TBS 2009년) 출연・시마다 요코
- 『대불개안』(NHK, 2010년) 출연・아사노 아츠코
- 『고묘 황후』(1958년) - 출연: 스미 하나요
- 『구슬의 기록』(1988·89년) - 출연: 칸나 미호 (1988년 다카라즈카・도쿄 공연), 아야 유우키 (1988년 다카라즈카・도쿄 신인 공연·1989년 지방 공연)
참조
[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2]
서적
Gukanshō
1979
[3]
서적
Imperial politics and symbolics in ancient Japan : the Tenmu dynasty, 650-800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
[4]
서적
Ritualized writing : Buddhist practice and scriptural cultures in ancient Japan
2017
[5]
서적
The Emergence of Japanese Kingship
https://books.google[...]
1997
[6]
서적
Engendering faith : women and Buddhism in premodern Japan
Center for Japanese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2002
[7]
서적
Ritualized writing : Buddhist practice and scriptural cultures in ancient Japan
2017
[8]
서적
Engendering faith : women and Buddhism in premodern Japan
Center for Japanese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2002
[9]
서적
Hokkeji and the reemergence of female monastic orders in premodern Jap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0
[10]
서적
The power of denial : Buddhism, purity, and gend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11]
서적
The power of denial : Buddhism, purity, and gend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12]
서적
Engendering faith : women and Buddhism in premodern Japan
Center for Japanese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2002
[13]
서적
The power of denial : Buddhism, purity, and gend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14]
간행물
光明皇后―奈良時代のキーパーソン―
清文堂出版
2016
[15]
간행물
別勅賜物木簡にみる大宝初年の王族
法蔵館
2024
[16]
간행물
首皇子の元服立太子について
雄山閣
2001
[17]
간행물
光明子と仲麻呂
八木書店
2019
[18]
문서
続日本紀 天平宝字4年閏4月28日条及び6月17日条
[19]
간행물
光明皇后御書楽毅論の疑いについて
講談社
1974
[20]
서적
書の古代史
新人物往来社
1987
[21]
서적
意志の化成 光明皇后「楽毅論」
名古屋大学出版会
20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