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쓰카사 다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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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쓰카사 다카코는 17세기 일본의 인물로,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정실 부인이다. 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며느리로 에도에 들어가 이듬해 이에미쓰와 혼인하여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 이에미쓰 사후 혼리인으로 개명하고 교토를 방문하기도 했다. 73세에 사망했으며, 묘소는 도쿄 덴즈우인에 있다. 다카코는 이에미쓰와의 불화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재평가되고 있다. 여러 드라마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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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노부코는 도쿠가와 마사코를 고미즈오 천황의 중궁으로 삼는 데 관여하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결혼하여 에도 성 오오쿠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쓰나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에도 막부의 미다이도코로 - 덴쇼인
덴쇼인은 에도 막부 말기, 쇼군의 부인으로서 도쿠가와 가문의 구제를 위해 헌신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양육 및 지원하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 - 참근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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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통치는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형태로, 중국 당나라 말기 절도사의 군사력 장악, 일본 에도 막부 초기 쇼군의 다이묘 통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헌병 경찰 통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 다카쓰카사가 - 다카쓰카사 노부코
다카쓰카사 노부코는 도쿠가와 마사코를 고미즈오 천황의 중궁으로 삼는 데 관여하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결혼하여 에도 성 오오쿠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쓰나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다카쓰카사가 - 다카쓰카사 가즈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셋째 딸인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1950년 평민과 결혼하여 황적을 이탈하고 이세 신궁의 사이슈를 지냈으며, 결혼 후 남편의 죽음과 자택 침입 등 불행을 겪었다.
다카쓰카사 다카코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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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카쓰카사 다카코 |
로마자 표기 | Takatsukasa Takako |
별칭 | 본리인 |
출생 | 간세이 3년 12월 15일 (1792년 1월 8일) |
사망 | 분세이 13년 윤3월 3일 (1830년 4월 25일) |
신분 | 뇨고 |
씨족 | 다카쓰카사 가문 |
아버지 | 다카쓰카사 마사히로 |
어머니 | 사네히토 친왕의 딸 |
남편 | 고카쿠 천황 |
자녀 | 제4황녀: 도시히토 내친왕 |
참고 | |
비고 | 준삼후 |
2. 생애
겐나 9년(1623년) 8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은퇴하고 장남 이에미쓰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기 위해 교토로 상경했을 때, 다카코는 에도로 가서 히데타다의 정실이자 이에미쓰의 생모인 스겐인의 조카가 되었다.[3] 그해 12월 도쿠가와 가문에 시집을 갔고, 간에이 원년(1624년)에는 축하 의식을 치르고 성의 중심 건물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4]
게이안 4년(1651년) 이에미쓰가 사망한 후에는 머리를 깎고 '''혼리인'''(本理院)으로 개명하였다. 간분 4년(1664년)에는 교토로 상경하여 고미즈노오 천황을 알현하였다. 엔포 2년(1674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의 고이시카와 덴즈우인에 있다.
일반적으로 다카코는 이에미쓰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부 생활도 거의 없었으며,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이혼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오쿠에서 추방되어 미다이도코로 칭호도 박탈당하고, 에도 성 내의 나카노마루에 새로운 저택을 받아 "나카노마루 님"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연금 생활을 하는 등, 이에미쓰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미움받고 냉대받았으며, 자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큐슈 대학의 후쿠다 치즈루 교수는 저서 『오오쿠를 만든 여자들』에서 다카코가 결혼 직후 정신 질환을 앓아 히데타다에 의해 교토로 돌려보내질 예정이었으나 결국 나카마루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현존하는 사료에는 다카코와 이에미쓰의 관계가 나빴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이에미쓰는 다카코의 남동생인 다카쓰카사 노부히라(마쓰다이라 노부히라)가 다카코를 의지하여 에도로 왔을 때 그를 환영하고 봉록을 주어 등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에미쓰가 사망할 때 다카코에게 금 5000 량의 유품을 주었는데, 이는 쇼군 정실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미쓰 사후 그녀의 생활을 보장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미쓰는 이에쓰나나 쓰나요시 등 자신의 아들과 다카코를 양자로 맺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카코가 사망했을 때 상을 입을 수 없었지만, 쇼군 이에쓰나는 이에미쓰 사후부터 다카코에게 어머니에 준하는 두터운 보호와 존경을 계속 보냈다.
중년의 다카코는 친정인 교토로 돌아오기도 했고, 이에미쓰의 셋째 아들인 쓰나시게의 혼례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기도 했다는 점을 볼 때, 남편에게 냉대받고 쓸쓸한 인생을 보냈다는 인상은 현재 많은 사료에 의해 바뀌고 있다.
역대 미다이도코로의 위계가 종2위 또는 종1위였던 것에 비해, 다카코는 평생 동안 관직이 없었다. 사후 89년이 지난 메이와 2년(1763년), 10대 쇼군 이에하루 시대에 종1위가 추서되었다.[2]
2. 1. 쇼군가와의 혼인
겐나(元和) 9년(1623년) 8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은퇴한 이후 장남 이에미쓰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선지를 받기 위해 교토로 상경하였다. 이때 다카코는 에도에 내려가 히데타다의 정실이자 이에미쓰의 생모인 스겐인의 조카가 되었다.[3]같은 해 12월 도쿠가와 가문으로 출가하여 간에이(寛永) 원년(1624년)에는 축언을 하고 성의 중심 건물로 들어갔다. 다음 해에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미다이도코로(御台所)가 되었다.[4]
2. 2. 이에미쓰와의 관계 및 말년
간분 4년(1664년), 교토로 상경하여 고미즈노오 천황을 알현하였다.[1] 게이안 4년(1651년), 이에미쓰 사후 출가하여 혼리인(本理院)으로 개명하였다.[1] 엔포 2년(1674년),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1]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의 고이시카와 덴즈우인에 있다.3. 에피소드 및 평가
이에미쓰와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혼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이혼 당한 뒤 별거 형식으로 미다이도코로의 정식 처소인 신코덴(新御殿)에서 쫓겨나 나카노마루(中の丸)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칭호 또한 미다이도코로에서 '나카노마루 사마(中の丸様)'로 바뀌었다. 이후에도 후키가미의 히로시바에 설치된 저택에서 연금 생활을 하는 등 이에미쓰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푸대접을 많이 받았다. 이에미쓰와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5]
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하지 않다. 가스가노 쓰보네와 이에미쓰의 생모 스겐인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에미쓰가 다카코를 스겐인의 사람으로 여겨 증오와 적대심을 품게 되었다는 설,[5] 궁정 귀족인 다카코와 이에미쓰 사이에서 후계자가 태어나면 교토 황실과 조정의 힘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한 가스가노 쓰보네가 부부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설, 혹은 이에미쓰가 남색을 즐겼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6]
이에미쓰가 사망할 때 유산으로 다카코에게 주어진 것은 불과 50JPY 가량의 돈과 단 몇 개의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7] 또한,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쓰나요시 등 이에미쓰의 아들들과의 양자 결연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미쓰 사후 다카코에게 어머니에 준하는 극진한 대우를 해주었던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다카코가 죽은 후 상복을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3. 1. 이에미쓰와의 불화설
전통적으로 이에미쓰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실질적인 부부 생활은 전무했으며, 이혼당한 후 연금 생활을 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5] 혼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이에미쓰에게 이혼당한 뒤 별거 형식으로 미다이도코로의 정식 처소인 신코덴(新御殿)에서 쫓겨나 나카노마루(中の丸)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 칭호 또한 미다이도코로에서 '나카노마루 사마(中の丸様)'로 바뀌었다.[7] 이에미쓰가 사망할 때 유산으로 다카코에게 주어진 것은 불과 50량 가량의 돈과 단 몇 개의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에쓰나, 쓰나요시 등 이에미쓰의 아들들과 양자 결연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이러한 불화설의 배경으로는 가스가노 쓰보네와 스겐인의 갈등,[5] 가스가노 쓰보네의 이간질, 이에미쓰의 남색 취향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6]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화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큐슈 대학 근세사 교수 후쿠다 치즈루는 저서 『오오쿠를 만든 여자들』에서 다카코가 결혼 직후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현존하는 사료에서 다카코와 이에미쓰의 나쁜 관계를 찾기 어렵고, 이에미쓰 사후 다카코가 받은 금 5000JPY의 유품, 다카코의 남동생 다카쓰카사 노부히라(鷹司信平)의 등용 등을 근거로 불화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미쓰 사후 이에쓰나는 다카코에게 어머니에 준하는 보호와 존경을 보냈다는 점도 불화설과 상반된다.
3. 2. 현대의 재평가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는 다카코가 결혼 초기에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설을 제기했다.[5] 이에미쓰 사후 다카코가 친정인 교토로 돌아가거나, 이에미쓰의 셋째 아들 쓰나시게의 혼례를 준비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4. 미디어에서의 등장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정실인 혼리인(다카쓰카사 다카코)은 일본 역사 드라마, 특히 '오오쿠' 시리즈에서 자주 다뤄지는 인물이다. 다음은 혼리인이 등장하는 영상 작품 목록이다.
연도 | 제목 | 배우 | 방송사 |
---|---|---|---|
1967년 | 도쿠가와의 부인들 | 이나노 와코 | TV 아사히 |
1968년 | 오오쿠 | 가토 하루코 | 후지 TV |
1974년 | 도쿠가와의 부인들 | 무네카타 나미 | 후지 TV |
1978년 | 야규 일족의 음모 | 우에키 에쓰코 | 간사이 TV |
1980년 | 도쿠가와의 여인들 (화려한 카스가노 쓰보네) | 요시모토 마유미 | 후지 TV |
1982년 | 야규 주베 아바레 여행 | 가미무라 교코 | TV 아사히 |
1985년 | 꽃의 마음 | 사쿠마 료코 | TBS |
2005년 | 오오쿠 ~제1장~ 스페셜 | 기무라 타에 | 후지 TV |
2006년 | 천하 소란 ~도쿠가와 삼대의 음모~ | 마쓰 도코 | TV 도쿄 |
2011년 | 고 ~공주들의 전국~ | 가사이 유키나 | NHK |
4. 1. 드라마
연도 | 제목 | 배우 | 방송사 |
---|---|---|---|
1980년 | 핫토리 한조 그림자의 군단 | 미우라 마유미 | 후지 TV |
1982년 | 그림자의 군단 III | 기시다 교코 | 후지 TV |
1983년 | 오오쿠 | 사카구치 료코 | 간사이 TV |
1987년 | 풍운 에도성 격류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 나카타 요시코 | TV 도쿄 |
1989년 | 카스가노 쓰보네 | 나카타 요시코 | NHK |
2000년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 나카에 유리 | NHK |
2004년 | 오오쿠 ~제1장~ | 기무라 타에 | 후지 TV |
참조
[1]
서적
『ビジュアル日本史ヒロイン1000人』
[2]
서적
Iemitsu ōoku nakanomaru no shōgai : kanō tan'yū to tsukushita tokugawa taihei no yo.
https://www.worldcat[...]
Koishikawayunitto
2013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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