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무라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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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라카게는 와쿠야 다테가의 다테 무라모토의 차남으로, 미즈사와 다테가의 6대 당주이다. 1695년 미즈사와 다테가의 당주가 되었으며, 1706년 원복 후 무라카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57년간 당주로 재임하며 미즈사와 번을 통치하는 동안 미즈사와 성의 수리를 진행했으나, 교호 연간에 잦은 화재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다. 화재 대책의 일환으로 민간 소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1753년 사망했으며, 그의 적자인 다테 무라토시가 가독을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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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라카게 | |
---|---|
기본 정보 | |
씨명 | 와타리 씨、미즈사와 다테 씨 |
이름 | 다테 무라카게 |
다른 이름 | 기치노스케 (유명) 무라카게 로쿠로 데와 이즈미 |
생몰 | |
출생 | 겐로쿠 3년 10월 21일 ((1690년 11월 21일)) |
사망 | 호레키 3년 1월 27일 ((1753년 3월 1일)) |
묘소 | 이와테현오슈시 다이안지 |
가계 | |
부 | 다테 무라모토 |
모 | 다테 쓰나무네의 차녀, 루이히메 |
양부 | 다테 쓰나무네 다테 무라카즈 |
형제자매 | 다테 무라사다、무라카게、야스코 |
배우자 | 덴도 요리자네 양녀 고우코 씨 다카하시 씨 산노미야 씨 스미 오이카와 씨 |
자녀 | 다테 무라아키라 다테 무라토시 후시 카오루 치쿠 기와 |
관직 및 지위 | |
섬긴 주군 | 다테 쓰나무라 다테 요시무라 다테 무라무라 |
소속 번 | 무쓰 국센다이 번 |
관위 | 해당 없음 |
막부 | 해당 없음 |
기타 | |
시호 | 류운인덴코소류다이고지 |
2. 생애
겐로쿠 3년(1690년) 다테 무라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나, 겐로쿠 8년(1695년) 다테 무라토모의 양자가 되어 미즈사와 다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57년이라는 긴 재임 기간 동안 미즈사와 성 대규모 수리 등 여러 사업을 추진했지만, 잦은 화재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다. 교호 연간에는 세 차례의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복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센다이 번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다. 무라카게는 화재 대책으로 민간 소방대를 조직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레키 3년(1753년)에 사망하여 적자 무라토시가 가독을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겐로쿠 3년(1690년) 10월 21일, 와쿠야 다테가 4대 당주 다테 무라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기치노스케'''였다.겐로쿠 8년(1695년) 7월 7일, 미즈사와 다테 가문 5대 당주 다테 무라토가 신설된 지번인 나카츠야마 번 초대 번주로 취임하면서, 무라토모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무라토모의 조카인 기치노스케가 형식적으로 조부 쓰나무네의 양자가 된 후 무라토모의 양자가 되어 미즈사와 다테 가문 6대 당주가 되었다. 기치노스케는 어려서 숙부 와타리 모토아쓰가 후견인으로서 정무를 처리했다. 이때 무라토모가 가증받았던 지행 5500석이 본번으로 회수되어, 16135석이 미즈사와 다테 가문의 최종 지행고가 되었다.
2. 2. 당주 재임 기간
겐로쿠 19년(1706년) 9월, 원복하여 '''무라카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무라카게는 57년간 당주 자리에 있으면서 미즈사와 번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쇼토쿠 4년(1714년) 미즈사와 성의 대규모 수리를 진행했다. 그러나 미즈사와 성 아래에서는 교호 연간에만 세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했다. 교호 3년(1718년) 2월 30일, 교호 18년(1733년) 3월 18일, 교호 20년(1735년) 2월 22일에 발생하였고, 특히 교호 20년의 화재에서는 168호를 불태웠다. 이러한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미즈사와 성 아래의 부흥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센다이 본번 창고인 오오모지야로부터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어려운 영지 경영을 해야 했다. 빚 상환은 손자인 무라노리 대까지 이어졌다. 무라카게는 화재 대책으로 가신 사사키 사고헤에게 명하여 민간 소방대 "가엔구미"를 조직하게 했지만, 그 기념 행사가 히다카 불막이 축제의 기원이라고도 한다.2. 3. 잦은 화재와 재정난
교호 연간(1716년~1736년)에 미즈사와 성에서 세 차례 큰 화재가 발생했다. 교호 3년(1718년) 2월 30일, 교호 18년(1733년) 3월 18일, 교호 20년(1735년) 2월 22일에 발생했는데, 특히 교호 20년의 화재는 168호를 태웠다. 화재 복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센다이 본번 창고인 오오모지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야 했고, 이 때문에 영지 경영이 어려워졌다. 빚 상환은 손자인 무라노리 대까지 이어졌다. 무라카게는 화재 대책으로 가신 사사키 사고헤에게 명하여 민간 소방대 "가엔구미"를 조직하게 했으며, 이 조직의 기념 행사가 히다카 불막이 축제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2. 4. 화재 대책
무라카게는 화재 대책으로 가신 사사키 사고헤에게 명하여 민간 소방대 "가엔구미"(火猿組)를 조직하게 했다. 그 기념 행사가 히다카 불막이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한다.2. 5. 사망
호레키 3년(1753년) 1월 27일에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적자 무라토시가 가독을 상속했다.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다테 무라모토 | 1666년 ~ 1718년 |
어머니 | 루이히메 | 다테 쓰나무네의 차녀 |
양아버지 | 다테 쓰나무네 | 1640년 ~ 1711년 |
양아버지 | 다테 무라토 | 1661년 ~ 1722년 |
정실 | 덴도 요리자네 양녀 | 마쓰모토 노부요시의 딸 |
측실 | 고고 씨 | |
장녀 | 후시 | 다테 무라토의 부인 |
측실 | 다카하시 씨 | |
차녀 | 가오리 | 오우치 요시자네의 부인 |
측실 | 산노미야 씨 | |
3녀 | 지쿠 | 이즈미다 다네토키의 부인 |
측실 | 사사키 씨 | |
장남 | 다테 무라아키 | |
측실 | 스미 | 오바타 지헤이의 딸 |
차남 | 다테 무라토시 | 1731년 ~ 1756년 |
측실 | 오이카와 씨 | |
4녀 | 키와 | 다테 무라토미의 정실 |
┏다테 무라토
다테 쓰나무네━━┫
┗루이히메
┣━━━━━다테 무라카게
다테 무라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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