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쓰나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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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쓰나무네는 1640년에 태어나 1658년 센다이 번의 3대 번주가 되었으나, 통치 경험 부족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1660년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그는 다테 다다무네의 아들이자 고사이 천황의 친척이었으며, 어린 시절 형들의 요절로 인해 가문의 적자가 되었다. 가택 연금 이후에는 예술에 전념하여 그림, 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은거 사건은 다테 소동의 발단이 되었으며, 분라쿠와 가부키 등 대중문화의 소재가 되었다. 쓰나무네는 171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예술적 업적과 정치적 실패는 권력자의 도덕성과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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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쓰나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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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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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테 쓰나무네 (伊達綱宗) |
출생 | 1640년 9월 23일 |
사망 | 1711년 7월 19일 |
사망 장소 | 에도, 일본 |
안장 장소 | 즈이호덴, 센다이 시, 미야기 현, 일본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ja (유아명) 쓰나무네 |
관직 | |
[[파일:Take ni Suzume.svg|20px]] 다이묘 | 제3대 센다이 번 번주 |
통치 시작 | 1658년 |
통치 종료 | 1660년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전임 | 다테 다다무네 |
후임 | 다테 쓰나무라 |
관위 | 종4위 하, 좌근위권소장, 무쓰 국, 미마사카 국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번 | 무쓰 국 센다이 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테 다다무네 |
어머니 | 카이히메 |
양어머니 | 고쇼인 |
배우자 | 정실: 없음 |
측실 | 미사와 하쓰코, 세이운인, 안주인, 요세이인, 쇼치인, 레이쇼인 등 |
자녀 | 다테 쓰나무라 다테 무라카즈 다테 무네치카 다테 무라나오 나쓰히메 류히메 미히메 센히메 지에히메 키라히메 나레히메 기쿠노조 무스히메 기치주로 유후히메 타케히메 |
양자 | 다테 무라카게, 안히메 |
기타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유아명 | 미노스케 |
계명 | 겐쇼인덴 유잔젠이다이코지 |
묘소 | 미야기 현 센다이 시의 젠노덴 |
2. 생애
다테 다다무네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카이히메이며, 고사이 천황의 어머니 쪽 고모에 해당하여 쓰나무네와 고사이 천황은 사촌 관계였다.[5] 유아명은 미노스케였다.[4]
아버지의 사망으로 18세에 다이묘가 되었으나, 경험이 부족했고, 술과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통치에 부적합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치노세키 번의 다이묘이자 그의 삼촌인 다테 무네카츠는 쓰나무네의 많은 가신들을 매수했고, 1660년, 이 가신들과 친척들은 쓰나무네가 산킨코타이로 수도를 방문하여 운하에 대한 부역 노동을 감독하는 동안 공공연한 음주와 방탕 혐의로 에도에서 가택 연금에 처해지도록 로주에게 호소했다.[1] 그는 센다이에서 당시 1세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 다테 쓰나무라로 교체되었고, 센다이 번의 실제 정부는 다테 무네카츠와 다른 삼촌 타무라 무네요시에게 후견인으로 넘겨졌다.[2] 이 사건은 다테 소동의 시작으로, 분라쿠와 가부키 등 대중 소설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전설은 다테 무네카츠가 쓰나무네를 요시와라의 사창가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기생 타카오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타카오는 로닌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어 쓰나무네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는 그녀의 몸무게만큼 금으로 계약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비양심적인 사창가 주인은 그녀의 소매에 추를 더해 165파운드 이상의 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타카오는 다테 저택으로 가는 대신 강에 몸을 던지려 했고, 격분한 쓰나무라는 그녀를 심장을 찔렀다. 이 이야기는 많은 분라쿠와 가부키 연극의 기초가 되었으며, 쓰나무라는 요시와라를 방문해 타카오에게 매료되었지만, 그녀는 1659년에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3]
쓰나무네가 가택 연금 상태로 있는 동안, 번은 다테 무네카츠와 타무라 무네요시의 부패한 통치 아래서 큰 고통을 겪었다. 10년 간의 폭력과 갈등 끝에 다테 가문의 분가 출신이자 쓰나무네의 가신인 아키 무네시게가 번의 부실한 관리에 대해 쇼군 관료들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아키와 다양한 번 관리들이 "로주" 회의와 타이로 사카이 타다키요 앞에 소환되어 증언했고, 아키와 무네카츠, 무네요시의 가신 간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았고, 무네카츠의 가신 하라다 무네스케의 증언은 특히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하라다는 더 이상의 증언이 나오기 전에 아키를 살해했고, 이후 경비병에게 살해당했다.
법원은 아키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린 다테 쓰나무라는 다이묘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의 삼촌 다테 무네카츠와 타무라 무네요시는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쓰나무네는 이후 50년 동안 에도의 오이 지역에 있는 가문 저택에서 느슨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며 예술에 전념했고, 가노 탄유에게 그림을 배우고, 서예, 와카, 마키에 칠기, 일본도를 단조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미야기 현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4] 그는 1711년 에도에서 사망했고, 그의 묘는 센다이의 즈이호덴에 있는 다테 가문 묘소에 있다. 그의 묘당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센다이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81년에 재건되었다. 그의 시신은 매우 잘 보존되어 부검을 실시할 수 있었고, 키가 158cm이고 혈액형이 A+이며 구강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 1. 어린 시절과 번주 즉위
다테 다다무네의 여섯째 아들로 1640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카이히메[4]이며, 고사이 천황의 어머니 쪽 고모에 해당하여 쓰나무네와 고사이 천황은 사촌 관계였다.[5] 유아명은 미노스케였다.[4]어머니 카이히메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 다다무네의 정실 후리히메의 양자가 되었다.[4] 쓰나무네는 여섯째 아들이었지만, 1645년 형 미쓰무네가 요절하면서 적자가 되었고, 아버지 다다무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4] 1654년 원복을 치르고,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쓰나무네'로 개명, 종4위하 미사카노카미에 임명되었다.[4]
1658년 아버지 다다무네가 사망하자,[1] 9월 에도 막부로부터 가독 상속을 허가받아 센다이 번의 3대 번주가 되었다.[4]
2. 2. 은거 사건 (다테 소동)
쓰나무네는 젊은 나이에 가독을 이어받았지만, 주색에 빠져 번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평판을 받았다. 숙부인 무쓰 이치노세키번주 다테 무네카쓰 (다테 마사무네의 열 번째 아들로, 다테 다다무네의 동생)의 정치 간섭과 가신단 내부의 대립 등 여러 요인이 겹쳐 번주로서 부적격하다고 여겨졌다.[1] 만지 3년(1660년) 7월 18일, 막부의 명령에 의해 '불경스러운 행위'를 이유로 21세에 은거하게 되었다. 이를 '''쓰나무네 은거 사건'''이라 한다. 가독은 쓰나무네의 2살 된 아들 가메치요(후의 다테 쓰나무라)가 이었다.[2]이 사건은 분라쿠와 가부키 등 대중 소설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계략을 꾸미는 다테 무네카쓰가 순진한 젊은 쓰나무네를 요시와라의 사창가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쓰나무네는 기생 타카오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카오는 이미 로닌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쓰나무네의 제안을 거절했다. 굴하지 않은 쓰나무네는 그녀의 몸무게만큼 금을 주고 계약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비양심적인 사창가 주인은 그녀의 소매에 추를 더하여 165파운드 이상의 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쓰나무네가 다테 저택으로 타카오를 데려오자 그녀는 그와 함께 가는 대신 강에 몸을 던지려 했다. 격분한 쓰나무라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강에서 끌어내어 심장을 찔렀다. 그의 삼촌과 다른 공모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방탕한 행동으로 관료들에게 비난하고 퇴임을 강요했다. 이 이야기는 많은 분라쿠와 가부키 연극의 기초가 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밝히려고 노력한 수많은 연구자들을 매료시켰다. 쓰나무라는 요시와라를 방문했고 타카오라는 기생에게 매료되었지만, 그녀는 1659년에 쓰나무라에 의해서가 아닌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3]
이케다 미쓰마사 (오카야마번주), 다치바나 타다시게 (지쿠고 야나가와번주), 교고쿠 타카쿠니 (단고 미야즈번주) 등 다테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는 다이묘와 다테 무네카쓰는 로주 사카이 타다키요에게 다테 가문의 가로들을 엄하게 꾸짖고 쓰나무네에게 의견을 제시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쓰나무네는 사카이의 강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7월 9일, 미쓰마사, 무네카쓰 등은 쓰나무네의 은거와 가메치요의 상속을 청원했고, 7월 18일 "불경스러운 행위가 상주께 도달했으므로, 칩거를 명한다"는 상의가 쓰나무네에게 전달되었다. 7월 19일에는 무네카쓰의 명령으로 쓰나무네 측근 4명이 성벌 (참살)되었다.
다테 가문의 정사 『지가 기록』에는 "사고가 있어 칩거"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주색에 빠져 가신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칩거의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4]
쓰나무네의 은거는 당시 막부의 권력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특히, 센다이 번과 조정의 연계를 우려한 막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2. 3. 은거 후의 삶
쓰나무네는 시나가와 저택에서 은거하며 예술에 몰두했다. 가노 탄유에게 그림을 배워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며, 서예, 와카, 마키에, 일본도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미야기 현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4] 특히 회화에 대한 평가는 전문 화가 못지않았다고 하며, 쓰나무네의 작품인 "견본 저색 영소녀・모란・부용도"와 "화조도 병풍"은 센다이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쇼토쿠 원년(1711년), 쓰나무네는 에도에서 72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센다이로 옮겨져 조부 마사무네와 부친 다다무네가 잠든 경가봉에 매장되었다. 묘소는 젠오덴이라 불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1981년부터 재건을 위한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쓰나무네는 키 155cm, 혈액형은 A형이며, 잇몸 암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부장품으로는 문방구가 많아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유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복원 모형은 즈이호덴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2. 4. 사망과 유산
쓰나무네는 1711년 에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센다이로 옮겨져 조부 다테 마사무네, 부친 다테 다다무네와 함께 경가봉에 묻혔다.[1] 그의 묘소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으나, 1981년에 재건되어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의 시신은 매우 잘 보존되어 부검을 실시할 수 있었는데, 키가 158cm이고 혈액형이 A+이며 구강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장품을 통해 그의 예술 애호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3. 가계
다테 쓰나무네는 다테 다다무네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측실인 카이히메이다.[4] 고사이 천황의 어머니와 카이히메(다테 쓰나무네의 어머니)가 고모 관계이므로, 쓰나무네와 고사이 천황은 사촌이 된다.[5] 아버지 다다무네의 정실인 후리히메의 양자가 되었다.[4]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다테 다다무네 | |
어머니 | 카이히메 | 측실, 도쿠쇼인, 구시게 다카유키의 차녀 |
양어머니 | 코쇼인 | 아버지 다다무네의 정실,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
정실 | 없음 | |
측실 | 미사와 하츠코 | 미사와 기요나가의 딸, 죠간인 |
측실 | 세이운인 | 후지, 히라타씨 |
측실 | 오하리노 카타 | 구로에 나리후사의 딸, 안쥬인 |
측실 | 요세이인 | |
측실 | 보도노 | 모씨 |
측실 | 오토메노 카타 | 오오히라씨, 쇼치인 |
측실 | 카요노 카타 | 이마이즈미 요시노부의 딸, 레이쇼인 |
자녀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장남 | 다테 쓰나무네 | 1659년 - 1719년 | 미사와 하츠코 소생, 센다이 번 4대 번주 |
차남 | 다테 무라카즈 | 1661년 - 1722년 | 미사와 하츠코 소생, 다테 무네카게의 양자, 미즈사와 다테가 5대 당주, 나카쓰야마번 번주 |
3남 | 다테 무네요시 | 1665년 - 1711년 | 미사와 하츠코 소생, 이시카와 무네히로의 양자, 다테 무네토시의 양자, 우와지마번 3대 번주 |
장녀 | 나츠히메 | 1665년 - 1714년 | 세이운인 소생, 다테 모토자네 정실, 다테 무라타카 정실 |
4남 | 다테 무라나오 | 1666년 - 1709년 | 세이운인 소생, 다테 무네토모의 양자, 도메 다테가 5대 당주 |
2녀 | 루이히메 | 1667년 - 1724년 | 오하리노 카타 소생, 다테 무라모토 정실 |
3녀 | 미히메 | 1671년 - 1753년 | 세이운인 소생, 나카무라 나리요시의 처 |
4녀 | 센히메 | 1672년 - 1674년 | 오하리노 카타 소생, 요절 |
5녀 | 치에히메 | 1675년 - 1724년 | 오하리노 카타 소생, 다치바나 사다아키의 처 |
6녀 | 키라히메 | 1680년 - 1756년 | 요세이인 소생, 다테 쓰나무네의 양녀, 혼다 야스노리 정실 |
7녀 | 나레히메 | 1682년 - 1683년 | 요세이인 소생, 요절 |
5남 | 다테 키쿠노죠 | 1684년 - 1685년 | 요세이인 소생, 요절 |
8녀 | 무스히메 | 1685년 - 1688년 | 요세이인 소생, 요절 |
6남 | 다테 키치쥬로 | 1687년 - 1688년 | 보도노 소생, 요절 |
9녀 | 유후히메 | 1698년 - 1700년 | 오토메노 카타 소생, 요절 |
10녀 | 타야히메 | 1704년 - 1706년 | 카요노 카타 소생, 요절 |
쓰나무네는 여러 측실에게서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혈통은 셋째 아들 다테 무네요시가 이은 우와지마 다테 가문으로 이어진다.
4. 대중문화 속의 쓰나무네
다테 소동과 다테 쓰나무네의 은거는 가부키, 분라쿠 등 대중문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였다. 여러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에서 쓰나무네 역을 연기했다.[3]
가장 인기 있는 전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계략을 꾸미는 다테 무네카츠는 순진한 젊은 쓰나무네를 요시와라의 사창가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쓰나무네는 기생 타카오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타카오는 이미 사창가에서의 시간이 만료되었을 때 로닌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쓰나무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쓰나무네는 타카오의 몸무게만큼의 금으로 그녀의 계약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비양심적인 사창가 주인은 그녀의 소매에 추를 더하여 165파운드 이상의 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쓰나무네가 타카오를 다테 저택으로 데려오자 그녀는 그와 함께 가는 대신 강에 몸을 던지려 했다. 격분한 쓰나무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강에서 끌어내어 심장을 찔렀다. 쓰나무네의 삼촌과 다른 공모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방탕한 행동으로 관료들에게 비난하고 퇴임을 강요했다. 이 이야기는 많은 분라쿠와 가부키 연극의 기초가 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밝히려고 노력한 수많은 연구자들을 매료시켰다. 쓰나무네는 요시와라를 방문했고 타카오라는 기생에게 매료되었지만, 그녀는 1659년에 쓰나무네에 의해서가 아닌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3]
5. 평가
쓰나무네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예술가로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번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1] 이러한 점은 에도 막부에 의해 21세의 젊은 나이에 강제로 은거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4]
쓰나무네 은거 사건 이후, 쓰나무네는 50년 동안 에도의 가문 저택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면서 예술에 전념했다.[3] 그는 가노 탄유에게 그림을 배우고, 서예, 와카, 마키에 칠기, 일본도 제작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3]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미야기 현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3]
쓰나무네의 사례는 권력자의 도덕성과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을 준다. 그의 예술적 업적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정치적 실패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참조
[1]
서적
Samurai Warlords
Blandford Press
1989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615–1867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3
[3]
서적
Yoshiwara: The Glittering World of the Japanese Courtes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4]
웹사이트
KOREMITE-東北学院大学博物館収蔵資料図録-Vol.1
https://www.tohoku-g[...]
東北学院大学博物館
2021-04-01
[5]
문서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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