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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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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감은 단부 출신으로, 후조 멸망 후 자립하여 제나라를 건국했으나, 전연과의 갈등으로 멸망했다. 그는 동진에 귀순하려 했지만, 전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항복했다. 이후 모용준에게 용서받았지만, 결국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생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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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
기본 정보
작위명기공
봉작제나라
통치 기간350년–356년
출생알 수 없음
사망357년
성씨단(段)
이름감(龕)
묘호없음
시호없음
왕조단제
재위명350년–351년: 제왕(齊王)
351년–356년: 진북장군, 제공(鎭北將軍 齊公)
생애
활동 시기후조 말기, 동진 시기
주요 활동동진에 귀순
가족
자녀단암(段巖)
단선(段선)
단의(段誼)

2. 배경

단간은 단-선비족 출신으로, 요서에서 단란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단란은 단부 대인이었으며, 후조에 종속되면서도 령지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1] 단란이 죽자 단간이 그의 지위를 물려받았다.[1]

350년 후조가 내전으로 붕괴되자 단간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진류(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부근)를 점령했다.[1] 그는 황제와 조나라 수도 예를 강제로 장악한 석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청주 (현재의 산둥성 중부 및 동부)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새로운 수도인 광고에서 스스로를 제나라 왕으로 선포했다.[1]

영화 6년(350년) 1월, 후조의 무덕왕 이민(후의 염민)의 전횡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이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잇따랐다.[1] 이 혼란을 틈타 단감은 무리를 이끌고 진류로 옮겨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 6월, 부락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7월, 단감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광고에 할거하며 제왕을 자칭했다.[1]

영화 7년(351년) 1월, 단감은 건강에 사자를 파견하여 청주를 가지고 동진에 귀순할 것을 청했다.[1] 2월, 동진 조정에 의해 단감은 진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제공에 봉해졌다.[1]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은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 귀순했다.[1]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전연 군주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강하게 비난했으므로 모용준의 노여움을 샀다.[1] 11월, 모용준은 무군장군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하고 양무와 모용진을 수행하게 했다. 12월, 모용각은 군대를 나누어 경기병만 먼저 황하 북안에 도달하게 하고, 단감의 움직임을 보면서 신중하게 도하를 했다.[1] 단감의 동생 단계는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나 단감에게 모용각의 병법과 병사들의 높은 사기를 경계하며 성을 지키고 자신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가 막겠다고 했지만, 단감은 받아들이지 않고 단계를 참살했다.[1]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강을 건너자, 아직 광고에서 백 리가 조금 넘는 곳이었지만, 단감은 병사 3만을 이끌고 맞이했다.[1] 양군은 자수에서 격돌했지만, 단감은 대패하여 동생 단계가 붙잡히고, 원범과 벽려위 등이 토벌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1] 단감은 광고로 도망쳐 돌아가자, 모용각은 그대로 군대를 진격시켜 광고를 포위했다.[1]

2월, 모용각은 건물을 짓고 경작함과 동시에, 포위를 더욱 굳건히 하여 장기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1] 또한, 단감이 다스리는 여러 성에 항복을 촉구하여, 단감의 부하 서주 자사 왕등과 소두부의 선우 설운 등을 귀순시켰다.[1]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북중랑장·서주 자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전연군의 강세에 두려움을 느껴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1]

10월, 모용각이 양도를 끊었으므로, 광고성 안에서는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했다.[1] 궁지에 몰린 단감은 성에서 쳐들어갔지만, 모용각은 위리에서 이를 격파했다. 단감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모용각은 미리 병사를 나누어 여러 문에 배치해 놓았고, 흩어져 쳐부쉈다.[1] 단감 자신은 간신히 단기로 성안으로 도망쳐 돌아갔지만, 남겨진 병사는 전멸했다. 이로 인해 성 안의 사기는 격감했다.[1]

11월, 단감은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고, 면박하고 출두하자, 주독을 계로 보냈다.[1] 모용준은 주독을 오형에 처하고, 단감을 용서하여 복순장군에 임명하고, 제의 땅에 사는 선비와 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하게 했다.[1]

승평 원년(357년) 6월, 단감은 눈을 멀게 한 후 살해되었고, 그 부하 3천여 명은 생매장되었다.[1] 이로 인해 단부는 멸망했다.[1]

2. 1. 가계 및 초기 생애

아버지가 죽자 단감(段龕)이 지위를 계승했다. 후조에 종속되었던 아버지 단란은 단부 대인이었다.

영화 6년(350년) 1월, 후조의 무덕왕 이민(후의 염민)의 전횡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단감은 무리를 이끌고 진류로 옮겨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 6월, 부락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7월, 단감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광고에 할거하며 제왕을 자칭했다.

영화 7년(351년) 1월, 단감은 건강에 사자를 파견하여 청주를 가지고 동진에 귀순할 것을 청했다. 2월, 동진 조정에 의해 단감은 진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제공에 봉해졌다.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은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 귀순했다.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전연 군주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강하게 비난했으므로 모용준의 노여움을 샀다. 11월, 모용준은 무군장군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하고 양무와 모용진을 수행하게 했다. 12월, 모용각은 군대를 나누어 경기병만 먼저 황하 북안에 도달하게 하고, 단감의 움직임을 보면서 신중하게 도하를 했다. 단감의 동생 단계는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나 단감에게 모용각의 병법과 병사들의 높은 사기를 경계하며 성을 지키고 자신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가 적을 막겠다고 했으나, 단감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단계를 참살했다.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강을 건너자, 단감은 병사 3만을 이끌고 맞이했으나 자수에서 대패하여 동생 단계가 붙잡히고, 우장사 원범과 벽려위 등이 토벌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단감은 광고로 도망쳐 돌아갔고, 모용각은 그대로 군대를 진격시켜 광고를 포위했다.

2월, 모용각은 건물을 짓고 경작함과 동시에, 포위를 더욱 굳건히 하여 장기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 또한, 단감이 다스리는 여러 성에 항복을 촉구하여, 단감의 부하 서주 자사 왕등과 소두부의 선우 설운 등을 귀순시켰다.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북중랑장·서주 자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전연군의 강세에 두려움을 느껴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

10월, 모용각이 양도를 끊었으므로, 광고성 안에서는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단감은 성에서 쳐들어갔지만, 모용각은 위리에서 이를 격파했다. 단감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모용각은 미리 병사를 나누어 여러 문에 배치해 놓았고, 흩어져 쳐부쉈다. 단감 자신은 간신히 단기로 성안으로 도망쳐 돌아갔지만, 남겨진 병사는 전멸했다.

11월, 단감은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고, 면박하고 출두하자, 주독을 계로 보냈다. 모용준은 주독을 오형에 처하고, 단감을 용서하여 복순장군에 임명하고, 제의 땅에 사는 선비와 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하게 했다.

승평 원년(357년) 6월, 단감은 눈을 멀게 한 후 살해되었고, 그 부하 3천여 명은 생매장되었다.

2. 2. 후조 멸망과 자립

단간은 단-선비족 출신으로, 요서에서 단란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단란은 단부 대인이었으며, 후조에 종속되면서도 령지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1] 단란이 죽자 단간이 그의 지위를 물려받았다.[1]

350년 후조가 내전으로 붕괴되자 단간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진류(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부근)를 점령했다.[1] 그는 황제와 조나라 수도 예를 강제로 장악한 석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청주 (현재의 산둥성 중부 및 동부)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새로운 수도인 광고에서 스스로를 제나라 왕으로 선포했다.[1]

영화 6년(350년) 1월, 후조의 무덕왕 이민(후의 염민)의 전횡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이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잇따랐다.[1] 이 혼란을 틈타 단감은 무리를 이끌고 진류로 옮겨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 6월, 부락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7월, 단감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광고에 할거하며 제왕을 자칭했다.[1]

영화 7년(351년) 1월, 단감은 건강에 사자를 파견하여 청주를 가지고 동진에 귀순할 것을 청했다.[1] 2월, 동진 조정에 의해 단감은 진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제공에 봉해졌다.[1]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은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 귀순했다.[1]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전연 군주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강하게 비난했으므로 모용준의 노여움을 샀다.[1] 11월, 모용준은 무군장군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하고 양무와 모용진을 수행하게 했다. 12월, 모용각은 군대를 나누어 경기병만 먼저 황하 북안에 도달하게 하고, 단감의 움직임을 보면서 신중하게 도하를 했다.[1] 단감의 동생 단계는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나 단감에게 모용각의 병법과 병사들의 높은 사기를 경계하며 성을 지키고 자신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가 막겠다고 했지만, 단감은 받아들이지 않고 단계를 참살했다.[1]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강을 건너자, 아직 광고에서 백 리가 조금 넘는 곳이었지만, 단감은 병사 3만을 이끌고 맞이했다.[1] 양군은 자수에서 격돌했지만, 단감은 대패하여 동생 단계가 붙잡히고, 원범과 벽려위 등이 토벌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1] 단감은 광고로 도망쳐 돌아가자, 모용각은 그대로 군대를 진격시켜 광고를 포위했다.[1]

2월, 모용각은 건물을 짓고 경작함과 동시에, 포위를 더욱 굳건히 하여 장기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1] 또한, 단감이 다스리는 여러 성에 항복을 촉구하여, 단감의 부하 서주 자사 왕등과 소두부의 선우 설운 등을 귀순시켰다.[1]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북중랑장·서주 자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전연군의 강세에 두려움을 느껴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1]

10월, 모용각이 양도를 끊었으므로, 광고성 안에서는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했다.[1] 궁지에 몰린 단감은 성에서 쳐들어갔지만, 모용각은 위리에서 이를 격파했다. 단감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모용각은 미리 병사를 나누어 여러 문에 배치해 놓았고, 흩어져 쳐부쉈다.[1] 단감 자신은 간신히 단기로 성안으로 도망쳐 돌아갔지만, 남겨진 병사는 전멸했다. 이로 인해 성 안의 사기는 격감했다.[1]

11월, 단감은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고, 면박하고 출두하자, 주독을 계로 보냈다.[1] 모용준은 주독을 오형에 처하고, 단감을 용서하여 복순장군에 임명하고, 제의 땅에 사는 선비와 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하게 했다.[1]

승평 원년(357년) 6월, 단감은 눈을 멀게 한 후 살해되었고, 그 부하 3천여 명은 생매장되었다.[1] 이로 인해 단부는 멸망했다.[1]

3. 제나라 통치

영화 6년(350년) 1월, 후조의 무덕왕 이민(후의 염민)의 전횡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이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잇따랐다. 이 혼란을 틈타 단감은 무리를 이끌고 진류로 옮겨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 6월, 부락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7월, 단감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광고에 할거하며 제왕을 자칭했다.

영화 7년(351년) 1월, 단감은 건강에 사자를 파견하여 청주를 가지고 동진에 귀순할 것을 청했다. 2월, 동진 조정에 의해 단감은 진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제공에 봉해졌다.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은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 귀순했다.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전연 군주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강하게 비난했으므로 모용준의 노여움을 샀다. 11월, 모용준은 무군장군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하고 양무와 모용진을 수행하게 했다. 12월, 모용각은 군대를 나누어 경기병만 먼저 황하 북안에 도달하게 하고, 단감의 움직임을 보면서 신중하게 도하를 했다. 단감의 동생 단계는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나 단감에게 "모용각은 병법에 능하며, 더군다나 병사들의 사기가 높습니다. 만약 강을 건너게 하여 성 아래에 이르게 한다면, 두려워 항복하려 해도 늦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형은 성을 굳게 지키고, 이 단계가 정예병을 이끌고 강으로 나가 적을 막겠습니다. 다행히 승리한다면, 형은 대군을 이끌고 후속하여 반드시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기지 못하더라도, 신속히 항복한다면 천호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단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계가 완강하게 요구했기에, 단감은 노하여 단계를 참살했다.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강을 건너자, 아직 광고에서 백 리가 조금 넘는 곳이었지만, 단감은 병사 3만을 이끌고 맞이했다. 양군은 자수에서 격돌했지만, 단감은 대패하여 동생 단계가 붙잡히고, 우장사 원범과 벽려위 등이 토벌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단감은 광고로 도망쳐 돌아가자, 모용각은 그대로 군대를 진격시켜 광고를 포위했다.

2월, 모용각은 건물을 짓고 경작함과 동시에, 포위를 더욱 굳건히 하여 장기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 또한, 단감이 다스리는 여러 성에 항복을 촉구하여, 단감의 부하 서주 자사 왕등과 소두부의 선우 설운 등을 귀순시켰다.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북중랑장·서주 자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전연군의 강세에 두려움을 느껴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

10월, 모용각이 양도를 끊었으므로, 광고성 안에서는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단감은 성에서 쳐들어갔지만, 모용각은 위리에서 이를 격파했다. 단감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모용각은 미리 병사를 나누어 여러 문에 배치해 놓았고, 흩어져 쳐부쉈다. 단감 자신은 간신히 단기로 성안으로 도망쳐 돌아갔지만, 남겨진 병사는 전멸했다. 이로 인해 성 안의 사기는 격감했다.

11월, 단감은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고, 면박하고 출두하자, 주독을 계로 보냈다. 모용준은 주독을 오형에 처하고, 단감을 용서하여 복순장군에 임명하고, 제의 땅에 사는 선비와 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하게 했다.

승평 원년(357년) 6월, 단감은 눈을 멀게 한 후 살해되었고, 그 부하 3천여 명은 생매장되었다. 이로 인해 단부는 멸망했다.

3. 1. 동진과의 관계

영화 7년(351년) 1월, 단감은 건강에 사자를 파견하여 청주를 가지고 동진에 귀순할 것을 청했다. 2월, 동진 조정에 의해 단감은 진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제공에 봉해졌다.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은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 귀순했다.

영화 12년(356년)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북중랑장·서주 자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전연군의 강세에 두려움을 느껴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

3. 2. 전연과의 갈등

단기(段齊)는 동진전연 사이에 위치하여 351년 동진의 봉신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2] 354년 전연의 청주자사 주투(朱禿)가 황족 모용구(慕容鉤)를 살해하고 단기로 귀순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시작되었다.[2] 355년 단칸(段堪)은 전연의 군주 모용준에게 황제 즉위에 대해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모용준의 어머니가 단(段) 부족 출신임을 감안하여 사촌 간의 문체로 작성되었다.[2] 모욕감을 느낀 모용준은 모용각과 양무를 보내 단기를 공격하게 했다.[2]

영화 10년(354년) 7월, 전연의 청주 자사 주독이 낙릉군태수 모용구를 살해하고 단감에게 귀순했다.[2]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비난하여 모용준의 분노를 샀다.[2] 11월, 모용준은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했다.[2]

모용각이 접근하자 단칸의 동생 단비(段羆)는 황하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단칸은 광고(廣固)를 방어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단칸은 이를 거부하고 단비를 처형했다.[2]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황하를 건너자 단감은 3만 병력을 이끌고 요격했으나, 자수(漯水)에서 대패하고 단계가 포로로 잡혔다.[2] 단감은 광고로 도주했고, 모용각은 광고를 포위했다.

모용각은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항복을 권유하여 단감의 부하들을 귀순시켰다.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목제가 파견한 순선낭야에서 진군을 멈췄다. 10월, 광고성 내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 발생했고, 단감은 출격했으나 패배했다. 11월, 단감은 항복했고, 모용준은 단감을 용서하고 복순장군에 임명했다. 승평 원년(357년) 6월, 단감은 눈이 먼 후 살해되었고, 부하 3천여 명은 생매장되어 단부는 멸망했다.

4. 전연의 침공과 멸망

356년 12월 22일, 단간은 결국 전연에 항복하여 스스로를 묶고 주독을 체포하여 전연이 모용구를 살해한 죄를 물어 처벌하도록 했다.[3] 주독은 오형(五刑)에 처해졌고, 단간은 사면되어 순복장군(順服將軍)으로 임명되었다.[3] 단간의 이전 영토에서 온 약 3,000호의 선비족, 및 기타 부족 가구들이 전연의 수도인 계로 이주되었다.[3]

단간은 영화 11년(355년) 모용준에게 보낸 서신으로 인해 모용준의 분노를 사, 모용각의 토벌을 받게 되었다.[3]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이끄는 전연군과 자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동생 단계가 사로잡혔다.[3] 광고로 도망친 단간은 농성전을 펼쳤으나, 2월 모용각은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항복을 촉구하여 부하들을 귀순시켰다.[3] 8월, 동진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목제가 파견한 순선낭야에서 진군을 멈췄다.[3] 10월, 양도가 끊긴 광고성은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에 이르렀고, 단간은 성 밖으로 나가 싸웠으나 패배하고 간신히 성안으로 도망쳤다.[3]

11월, 단간은 항복하였고, 주독은 계로 보내져 오형에 처해졌다. 모용준은 단간을 용서하고 복순장군에 임명했으며, 선비족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시켰다.[3]

승평 원년(357년) 6월, 모용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단간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먼저 그의 눈에 독을 넣은 후, 그의 추종자 3,000명을 생매장했다.[3]

4. 1. 모용각의 침공

356년 초, 모용각이 이끄는 군대가 황하를 건너 단간을 공격했다. 단간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고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그의 동생 단흠은 포로로 잡혔고, 관리인 원범, 필려위 등은 살해되었다. 단간이 수도로 후퇴하면서 많은 병사들이 항복했고, 모용각은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단간이 광고를 지키는 동안, 모용각은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대비해 요새를 건설하고 토지를 경작했다. 항복하는 제나라 도시에 사면령을 내렸고, 서주 자사 왕등도 항복했다. 단간은 동진에 지원을 요청했고, 동진은 장군 순선을 보냈지만, 순선낭야군에서 진격을 멈췄다.

모용각은 인내심을 가지고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병사들은 산동 지역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받았다. 반면, 광고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식인 풍습이 발생했다. 단간은 남은 병력을 소집하여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연나라 군대에 패배했다. 모용각은 군대를 보내 도시 입구를 지키게 했고, 단간은 혼자 힘으로 도시로 돌아왔으며, 그의 병사들은 전멸했다. 광고 내부의 사기는 급락했고, 백성들은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영화 11년(355년) 10월, 단감은 전연 군주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비난하여 모용준의 노여움을 샀다. 11월, 모용준은 모용각에게 단감 토벌을 명했다. 12월, 모용각은 경기병만 먼저 황하 북안에 도달하게 하고, 단감의 움직임을 보면서 신중하게 도하했다. 단감의 동생 단계는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나 단감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자신이 정예병을 이끌고 강으로 나가 적을 막겠다고 주장했지만, 단감은 받아들이지 않고 단계를 참살했다.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강을 건너자 단감은 3만 병력을 이끌고 맞이했다. 양군은 자수에서 격돌했지만, 단감은 대패하여 동생 단계가 붙잡히고, 원범과 벽려위 등이 토벌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단감은 광고로 도망쳐 돌아가자, 모용각은 그대로 군대를 진격시켜 광고를 포위했다.

2월, 모용각은 건물을 짓고 경작함과 동시에, 포위를 더욱 굳건히 하여 장기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 또한, 단감이 다스리는 여러 성에 항복을 촉구하여, 단감의 부하 왕등과 소두부의 선우 설운 등을 귀순시켰다.

8월, 단감은 동진에 구원을 요청하자, 목제는 이에 응하여 순선을 구원에 파견했지만, 순선은 낭야에 이르러 진군을 멈췄다.

10월, 모용각이 양도를 끊었으므로, 광고성 안에서는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단감은 성에서 쳐들어갔지만, 모용각은 위리에서 이를 격파했다. 단감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모용각은 미리 병사를 나누어 여러 문에 배치해 놓았고, 흩어져 쳐부쉈다. 단감 자신은 간신히 단기로 성안으로 도망쳐 돌아갔지만, 남겨진 병사는 전멸했다.

11월, 단감은 항복을 결심하고, 면박하고 출두하자, 주독을 계로 보냈다.

4. 2. 광고 포위전

356년 초, 모용각이 이끄는 전연 군대가 황하를 건너자, 단간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고에서 나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그의 동생 단흠은 포로로 잡혔고, 관리 원범과 필려위 등은 살해되었다. 단간이 수도로 후퇴하면서 병사들 대다수가 항복했고, 모용각은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단간이 광고를 지키는 동안, 모용각은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위해 요새를 건설하고 토지를 경작했다. 항복하는 제나라 도시에 사면령을 내렸고, 서주 자사 왕등도 항복했다. 단간은 동진에 지원을 요청했고, 동진은 장군 순선을 보냈지만, 낭야군에서 진격을 멈췄다.

모용각은 인내심을 유지하며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산동 지역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받았다. 반면, 광고 주민들은 식량 공급이 끊겨 굶주림에 시달렸고, 식인 풍습이 발생했다. 단간은 남은 병력을 소집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고, 모용각은 군대를 보내 도시 입구를 지키게 했다. 단간은 간신히 도시로 돌아왔고, 병사들은 전멸했다. 광고 내부 사기는 급락했고, 백성들은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다.

4. 3. 최후

356년 12월 22일, 단간은 결국 연(燕)에 항복하여 스스로를 묶고 주도를 체포하여 연이 모용구(慕容?)를 살해한 죄를 물어 처벌하도록 했다.[3] 주도는 오형(五刑)에 처해졌고, 단간은 사면되어 순복장군(順服將軍)으로 임명되었다.[3] 단간의 이전 영토에서 온 약 3,000호의 선비족, 및 기타 부족 가구들이 연의 수도인 계로 이주되었다.[3]

단감은 영화 11년(355년) 모용준에게 보낸 서신으로 인해 모용준의 분노를 사, 모용각의 토벌을 받게 되었다.[3] 영화 12년(356년) 1월, 모용각이 이끄는 전연군과 자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동생 단계가 사로잡혔다.[3] 광고로 도망친 단간은 농성전을 펼쳤으나, 2월 모용각은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항복을 촉구하여 부하들을 귀순시켰다.[3] 8월, 동진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목제가 파견한 순선은 낭야에서 진군을 멈췄다.[3] 10월, 양도가 끊긴 광고성은 기아로 인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르렀고, 단간은 성 밖으로 나가 싸웠으나 패배하고 간신히 성안으로 도망쳤다.[3]

11월, 단간은 항복하였고, 주독은 계로 보내져 오형에 처해졌다. 모용준은 단간을 용서하고 복순장군에 임명했으며, 선비와 갈족 3천 호를 계로 이주시켰다.[3]

승평 원년(357년) 6월, 모용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단간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먼저 그의 눈에 독을 넣은 후, 그의 추종자 3,000명을 생매장했다.[3]

5. 평가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Chapter 98
[2] 서적 Zizhi Tongjian, Chapter 99
[3] 서적 Zizhi Tongjian, Chapter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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