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단결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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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단결연맹(TSU)은 2001년 이덩후이 전 중화민국 총통 지지자들에 의해 창당된 대만의 정당이다. 대만 공화국 건설과 탈중국화를 지지하며, 2000년 총통 선거 이후 국민당과 민주진보당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립되었다. 2001년 입법원 선거에서 9석을 얻으며 대만 독립 지지 정당으로 자리 잡았으나, 2008년 이후 의석 감소와 당세 약화를 겪었다. 2012년 입법원 선거에서 3석을 얻어 제3당으로 도약했으나, 이후 선거에서 다시 의석을 잃었다. 현재는 지방 의회에서만 의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반공주의, 친미, 친일을 기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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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단결연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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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대만 단결 연맹 |
원어 이름 | 臺灣團結聯盟 |
로마자 표기 | Táiwān Tuánjié Liánméng |
간체 | 台湾团结联盟 |
약칭 | 台聯 TSU |
창립일 | 2001년 8월 12일 |
해산 정당 | 중국 국민당(대만 민족주의 세력) |
본부 | 타이베이시, 타이완 |
당원 | 500명 이상 |
웹사이트 | www.taiwanlp.org.tw |
지도부 | |
주석 | 저우니안 |
이념 | |
주요 이념 | 경제 민족주의 우익 포퓰리즘 대만 독립 반중국 민족주의 |
역사적 이념 | 진보주의 좌익 포퓰리즘 |
정치적 위치 | |
현재 | 우익 |
역사적 | 좌익 중도좌파 ~ 극좌 성향의 분파 |
국내 연합 | |
소속 정당 | 범록연맹 |
의회 현황 | |
입법원 의석 | 0석 / 113석 |
시 시장 | 0석 / 6석 |
현/시 시장 | 0석 / 16석 |
시의원 | 3석 / 912석 |
향/시 시장 | 0석 / 204석 |
2. 역사
대만단결연맹은 2001년 8월 12일에 공식 창당되었으며, 당명과 당 로고는 그해 7월 25일에 발표되었다.[18] 창당 초기부터 대만 공화국 건설과 탈중국화 정책을 지지하며, 중화민국이라는 공식 명칭 포기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독립 노선을 추구했다.
이덩후이 전 총통은 당에 직접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당의 후보 지명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만단결연맹은 이덩후이의 인기를 통해 초기 지지율 확보를 기대했으나, 국민당에서 이덩후이가 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탈당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18]
2001년 입법원 선거에서 9석을 획득하며 대만 독립당을 대체하는 주요 대만 독립 지지 정당으로 부상했다. 대만단결연맹 의원들은 국기와 국가 변경 논의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2002년 지방 선거에서는 타이베이와 가오슝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2005년에는 당시 당 주석이었던 쉬신량(許信良)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으로 논란이 일었다. 쉬 주석은 이 참배가 군국주의 지지가 아니며, 대만의 안보를 위한 외교적 제스처라고 주장했지만, 대만 내 여론은 분열되었다.[19] 이 사건은 대만단결연맹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입법원 선거에서는 의석을 모두 잃는 참패를 겪었으나, 2012년 선거에서 3석을 회복하며 재기하는 듯했다. 그러나 2016년 선거에서 다시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당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2. 1. 창당 배경 (2001년)
2001년 여름, 이덩후이 전 총통의 지지자들이 대만단결연맹을 결성했다. 이는 2000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이 크게 패배한 이후의 일이었다. 국민당은 내부 혼란으로 인해 정권을 잃었고, 당시 국민당 주석이었던 이덩후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01년 3월 사임해야 했다.[18]국민당 강경파와 최근 국민당에서 제명된 손천의 지지자들은 이덩후이가 비밀리에 대만 독립을 지지하고, 민주진보당(DPP) 후보 천수이볜의 승리를 위해 국민당을 고의로 방해했다고 믿었다. 한편, 천수이볜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독립 지지 입장을 완화하여 민주진보당 내 강경 독립 지지자들을 소외시켰다.[18]
이러한 요인들이 쌓여 2001년 12월 입법원 선거를 몇 달 앞둔 7월, 이덩후이의 정책을 계승하고 민주진보당의 강경 독립 정치적 입장 포기로 인해 발생한 대만 정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만단결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전국 주요 입법 기관에서 친녹(팬그린) 다수당을 구성하여 천수이볜 정부가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했다.[18]
당명과 당 로고는 2001년 7월 25일에 발표되었고, 8월 12일에 공식적으로 창당되었다.[18] 초대 주석은 이덩후이 정권 시절 내정부(內政部, 행정부) 장관(내무장관) 출신이었던 황주문(黃主文)이 맡았다. 그는 ‘대만 우선’을 원칙으로 정국 안정, 경제 진흥, 민주 강화, 대만의 위대함을 기치로 내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관계를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공존’으로 인식하며, 이덩후이의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라는 주장을 계승했다.[22]
이덩후이는 (비록 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대만단결연맹은 그의 인기가 당 지지율 5% 달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대만단결연맹이 지명한 후보들이 모두 이덩후이의 사전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당내 영향력이 드러났다. 이덩후이의 행동이 국민당의 통일주의적 입장과 멀어지면서 결국 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초기에는 이덩후이의 제명으로 국민당에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나 이덩후이의 측근 중 아무도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당원들이 여전히 새로운 당의 기본 구성 요소가 되었으며, 대만단결연맹 후보의 절반이 국민당 출신이었다.[18]
2. 2. 초기 활동 (2001년 ~ 2004년)
현청행정구역 수장
행정구역 의회
마을 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