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국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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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우익 정당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55석을 확보하며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으나,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탈당했다. 이후 당세가 약화되어 1950년 선거에서 14석으로 감소했으며, 1958년 선거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60년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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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국민회 |
로마자 표기 | Gungminhoe |
한자 표기 | 國民會 |
창립 | 1946년 |
창립자 | 이승만 |
해산 | 1960년 |
통합 정당 | 자유당 |
본부 |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
정치 | |
이념 | 보수주의 (대한민국) 반공주의 공화주의 |
정치 성향 | 우익 ~ 극우 |
기타 | |
관련 단체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2. 역사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약칭 국민회)를 결성했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가장 많은 후보자를 내어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하여 원내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은 개인 자격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하였다. 이후 독촉국민회는 제헌국회에서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당시 총재였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제헌국회에서 당선된 대부분의 의원이 탈당하고, 1대 국회에서 의원직을 유지한 국민회 소속 의원은 4명만 남게 되었다.
1950년 선거에서는 14석으로 의석이 감소하여, 민족자유당과 대한민국 국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951년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했다. 1954년 선거에서 3석을 차지했지만, 1958년 선거에서는 의회 의석을 잃었다. 국민회는 1960년 이승만의 대통령직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3]
2. 1. 창립 배경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을 신탁통치할 방침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반탁)이 한국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좌파 세력은 새해가 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며 신탁통치 찬성(찬탁)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좌우 양측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3]당시 우파 세력은 다음과 같은 주요 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명 | 결성 시기 및 주도 세력 |
---|---|
한국민주당 | 1945년 9월 결성.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비판적인 국내 보수계 유력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
한국독립당 | 1930년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으로, 김구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 결성. 초기에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 조직도 참여했으나, 좌파 세력은 후에 이탈했다. |
이에 맞서, 좌파 세력과 대결하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했다.[4]
2. 2. 창립 과정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반탁)이 한국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좌파 세력은 새해가 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입장(찬탁)을 보이며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3]당시 우파 세력은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 결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좌파 조직도 참여했으나, 이후 좌파 세력은 이탈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통합하여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했다.[4] 총재에는 이승만, 부총재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2. 3. 제헌 국회 참여와 분열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200석 중 55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4] 그러나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제헌 국회에 불참하였다.제헌 총선에서 독촉국민회는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은 개인 자격으로 출마했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국민회 소속 의원들의 대거 이탈로 당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회 출신 의원 중 12명(약 21%)은 민주국민당으로, 12명은 일민구락부로 당적을 옮겼다. 일민구락부에서 다시 대한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긴 의원도 많아, 일민구락부에는 국민회 출신 의원이 12명만 남게 되었다. 국민회 의원들이 가장 많이 당적을 옮긴 곳은 대한국민당으로, 총 25명(45%)의 의원이 이동하였다. 결국 1대 국회에서 의원직을 유지한 국민회 소속 의원은 4명이었다.
2. 4. 당세 약화와 해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석,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석을 얻는 데 그쳤다.[4][3] 1951년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국민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3]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원외 정당으로 전락했다. 정확한 해산 시점은 불분명하나, 1960년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3. 주요 정치 계파 및 관련 사안
국민회는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3]
제헌 총선에서 국민회는 정식 정당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탁 운동으로 얻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과 이승만의 후광을 바탕으로 가장 많은 후보자를 입후보시켜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했다.[4]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 협상파는 제헌 국회 총선에 불참하였다.
제헌 국회에서 국민회는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영향을 주었지만, 이후 대부분의 의원이 탈당하면서 1대 국회에서는 4명만 남게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국민당, 일민구락부, 대한국민당 등으로 당적을 옮겼다.[4]
3. 1. 이승만 계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세력은 국민회의 주류였다. 이들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대통령 중심제 정부 형태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또한,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좌익 세력과의 협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3]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가 제헌 국회 총선에 불참하면서, 이승만 계파는 제헌 국회에서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4]3. 2. 김구 계파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독립당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초기에는 부총재로 참여했으나, 이승만과의 노선 갈등으로 결별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에 반대했지만,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며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제헌 국회에 참여하지 않고, 이후 통일 독립 운동에 주력했다.[3][4]3. 3. 기타 계파
김규식 등 중도 우파 세력은 국민회에 참여했으나,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시도하였다.[3] 제헌 국회 이후, 국민회 소속 의원들은 민주국민당, 일민구락부, 대한국민당 등 다양한 정당으로 이적하며 분열하였다.[4]4. 주요 선거 결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 등에 참여했다. 1948년 대선에서는 이승만이 국민회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으며, 1948년 총선에서는 200석 중 55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다.[4] 이후 "국민회"로 개명되었으며, 1950년 총선에서는 14석으로 의석이 감소하여 3위를 차지했고,[4] 1954년 총선에서는 3석, 1958년 총선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했다. 지방 선거는 1952년과 1956년에 참여했다.
4. 1. 대통령 선거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국민회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선거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 결과 |
---|---|---|---|---|
1948년 | 이승만 | 180 | 92.3 | 당선 |
4. 2. 국회의원 선거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선거 | 대표 | 득표수 | % | 의석수 | +/- | 순위 | 상태 |
---|---|---|---|---|---|---|---|
1948년 | 이승만 | 1,755,543 | 25.87 | 55석 | - | 1위 | 여당 |
1950년 | 473,153 | 6.77 | 14석 | 신규 | 3위 | 야당 | |
1954년 | 192,109 | 2.56 | 3석 | 11 | 야당 | ||
1958년 | 50,568 | 0.59 | 0석 | 3 | 4위 | 원외 정당 |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석 중 55석을 확보하여 원내 제1당이 되었다.[4]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석으로 감소하여, 민족자유당과 대한민국 국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4]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석으로 감소하였다.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4. 3. 지방 선거
대한독립촉성국민회한국어는 1952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와 1956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에 참여하였다.실시년도 | 선거 | 시장 | 읍장 | 면장 | 도의원 | 시의원 | 읍의원 | 면의원 | |
---|---|---|---|---|---|---|---|---|---|
1952년 | 1952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 - | - | 32/306 (10.5%) | 29/378 (7.7%) | 29/1115 (2.6%) | 2437/16051 (15.2%) | ||
1956년 | 1956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 - | - | 1/30 (3.3%) | 6/544 (1.1%) | 6/437 (1.37%) | 17/416 (4.1%) | 28/990 (2.8%) | 161/16051 (1%) |
5. 평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약칭 국민회)는 1948년 총선에서 200석 중 55석을 차지하여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지만, 1950년 총선에서는 14석으로 의석이 크게 감소했다.[4]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 그리고 당시 정치 지형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국민회는 이승만이 귀국 직후 설립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모태로 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반대 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등 여러 정당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3] 그러나 김구 등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 선거를 주장하자 탈당했다.[4]
1954년 선거에서는 3석을 차지했고, 1958년 선거에서는 의회 의석을 잃었다.[3]
이승만은 1951년 자유당을 창당했지만, 국민회는 이승만 정권 내내 존속했다.[3] 국민회는 이승만 정권의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국민회는 한국의 초기 보수 정당으로서,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정치 지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승만과의 갈등, 그리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참조
[1]
서적
International Monitoring of Plebiscites, Referenda and National Elections: Self-Determination and Transition to Democracy
BRILL
2021
[2]
서적
한국정치연구 (Journal of Korean Politics) Vol. 5: 제 1공화국의 정당과 의회정치
https://s-space.snu.[...]
Seoul National University's Institute of Korean Political Studies
1996
[3]
서적
Political parties of Asia and the Pacific
Greenwood Press
1985
[4]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001
[5]
서적
한국정치연구 (Journal of Korean Politics) Vol. 5: 제 1공화국의 정당과 의회정치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996-01-01
[6]
웹인용
독촉 개칭코 신 국민 운동, 남북 통일에 전력
https://newslibrary.[...]
20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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